〈 169화 〉 외전) 몽중화 (3)
* * *
“갑자기 피아노는 왜요? 먹다 말고.”
“이거라도 안 하면 못 버틸 것 같으니까요.”
대뜸 자신에게 관심 있냐고 묻다니, 누가 보더라도 문제가 많은 발언이었다.
주책이란 생각도 들었고, 이래저래 부끄럽기도 하지 않은가.
그런 말을 하고도 멀쩡하게 시선을 주고 받기는 힘든 터라, 나름 가장 편한 곳이라 생각하는 피아노에 앉았을 뿐이었다.
피아노는 단순히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연주되는 그런 악기가 아니었다.
분위기를 바꾸고, 사람의 감정을 다르게 만든다. 오선지에 그려진 음표 몇 개가 주는 변화치고는 참 다양하지 않은가.
음악의 입장에서 사람 또한 악기의 일부일 수밖에 없었다. 악보라는 이름으로 주어진 이 예술이야 말로, 마법사들이 부리는 마법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테니.
백건, 흑건. 거기에 7가지의 음계로 나누어진 이 악기가 수억 개의 소리를 낸다는 것에 잠시 묘한 감상을 품는다.
그리고 지금 연주할 음악, 그러니까...
월광.
조금은 울적한 노래였다. 달빛을 고스란히 악보로 담아 표현한 것처럼 음울하고, 쓸쓸한 노래이지 않던가.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에 좋은 음악도 아니었고, 어쩌면 식사에 방해되는 음악일 수도 있었다.
허나 수현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운명처럼, 자신이 지금 이 연주를 해야한다는 묘한 강박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왜?’
그건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의문이었다. 단지 손가락이 움직였다.
악보 하나 놓이지 않은 그랜드 피아노의 첫 음이 그 월광의 첫 음이었을 뿐이었다.
검지가 백건에 닿은 그 순간부터, 이미 머릿속에선 달빛이 그려지고 있었다.
감정은 최대한 담아내지 않았다. 이 곡에 너무 몰입해서 연주하다보면,
그대로 이 분위기가 음울해지기 마련이었으니.
달빛은 차갑다.
그리고 서늘하며, 쓸쓸한 것이었다. 월광의 1악장은 그 모든 것들이 담긴 곡이었다.
달빛이 가진 성질, 인간이 달을 보며 느끼는 그 부정적이며 서정적인 감정들이 음표로 아로새겨진 곡인 것이다.
허나 그 어두움 사이에는 분명 밝음이 있었다.
하늘에 서린 달빛에 구름이 끼지만결국 그 빛이 밤하늘을 밝히는 것처럼.
수현의 연주는 마냥 어둡지 않았다. 페달이 밟았다 떼어지며 끊긴 소리가 더욱 강조된다.
잠시나마 가려졌던 빛을 형상화한 연주,식사를 하던 이들은 모두 그 연주에 홀려 연주자를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저 사람 이수현 아니야? 피아니스트.”
개중엔 수현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는 이름 모를 연주자를 보며 감탄하고, 누군가는 입을 벌린 채 감탄이란 감정마저 잊었다.
허나 우울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감정만이 실린, 오로지 기교만으로 살려낸 월광은 초승달처럼 식당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딴!
연주가 끝났을 때, 수현은 이마에 흘린 땀을 닦아내며 옅게 숨을 내뱉었다.
몰입하지 않았어도 나름 집중한 연주라, 나름 체력 소모가 심했던 탓이었다.
분위기는...방금의 말이 잊힐 정도는 충분한 것 같아서, 박수를 치는 사람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곤 다시 자리를 향해 돌아왔다.
아이린은 그런 수현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까의 연주를 들으며 경탄이란 감정마저 잊은 것이 아이린이었다.
손가락의 움직임만으로 그런 음악을 들려주다니, 재능이라기엔 너무도 끔찍할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던가.
질투, 시기. 그 이름들이 순식간에 잊힐 만큼 훌륭한 연주라, 작게 박수를 치며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갑자기 자랑하고 싶었나 봐요? 내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다”
“그냥 사과의 표시였을 뿐입니다. 아까 한 말은 실수였으니까요.”
“방금 한 말 어떤 거요? 나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그리곤 싱긋 웃는 아이린의 표정에 수현은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다 알면서도 저러는 것이리라.
애초에 그런 말을 또 입에 담을 바에야, 그냥 이 식사 자리를 파하는 게 낫지 않을까.
스쳐지나가는 인연이었다. 다시 연락할 것 같지도 않았고, 단지 크리스 교수의 소개로 이렇게 만나게 됐을 뿐이지 않은가.
“...모르겠습니다. 굳이 말해야 합니까?”
“그런 말 한 게 부끄러워서 피아노 연주한 거 아니었어요? 뭐, 평가하자면...잘 들었어요. 굉장히 인상 깊었네요. 조금 전문적으로 평가해줄까요?”
“그런 건 콩쿠르 심사위원들이나 비평가들의 기사로 충분합니다.”
진절머리 난다는 듯 고개를 젓는 수현을 본 아이린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기야,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유명한 사람이 아닌가.
기사로 본 것보다도 더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터였다.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이 사람은 어떨까,
문득 떠오른 궁금증에 아이린은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는 자기 핸드폰을 슥 내밀더니, 이윽고 전화 다이얼이 있는 화면을 보여주며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질문에 대해 대답하자면, 솔직히 관심 있어요. 전화 번호 좀 알려줄래요? 심심할 때 연락할 테니 차단하지 말고요.”
아이린의 눈에 보인 것은 레스토랑의 로고였다.
'세이렌’이라 적힌 로고 옆에 작게 그려진 호수와 숲, 어쩌면 그 말대로. 자신이 홀려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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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밥 잘 먹었어요, 다음엔 어디에서 만날까요?]
1이 사라진 문자를 가만히 보다가, 이윽고 천천히 핸드폰을 덮어 내려놓는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하고 전화번호를 교환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도대체 자신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외모?”
창문에 비친 얼굴은 늘 그랬듯이 말끔했다. 흠잡을 곳 하나 없는 외모였고, 나름...이 정도면 연예인이라 해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런 부분은 스스로도 늘 자랑이라 생각하는 부분이었지만, 그럼에도 아이린이 제게 의문을 가지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예전에 콩쿠르에서 본 적이 있었나.”
자신에게 예전 기억을 끊임없이 물어보는 것이 영 수상했다. 혹여 이전에 만나기라도 했던 걸까.
그런 거라면 조금 미안하지 않은가. 예전의 자신은 그저 연주에만 신경 썼을 뿐, 다른 것에는 그다지 관심을 쏟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만난 아이린 유리스라는 여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또 아니었다.
행운? 그렇게 평해도 충분하리라.
차가워 보였지만 실은 차갑지 않았고, 이래저래 여자가 익숙하지 않은 자신을 자연스럽게 대해주지 않았던가.
바이올리니스트라면 음악에 대해서 대화하기 부족하지 않은 상대였고.
띠링
그러다가 또 다시 울린 알람에 핸드폰을 켜자, 그 위로 쏟아지는 알람이 눈에 띄었다.
[저기요.]
[봤으면서 왜 대답을 안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는데요.]
[혹시 제가 별로였나요? 실수라도 한 게 있으면 알려주는 게 어때요?]
[...미안해요. 내가 조금 성급했던 것 같아요. 아까 장난친 거 아니고, 진심으로 관심 있었어요. 정말이에요.]
혼자 여러 감정의 변화를 겪었는지, 수없이 삭제되고 다시 온 문자 중 남은 것이란 단 4개뿐이었다.
잠깐 안 본 건데 이리 예민하게 반응할 줄이야. 문자를 보내려던 수현은 잠시 멈칫하곤 이내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 잠시 이어지던 연결음에 심호흡을 하다, 이윽고 들려온 목소리에 수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Hello?
“이제 와서 영어 하는 척 하는 겁니까? 아까 잘만 한국어 사용하시던 것 같은데.”
방금 그건 잊어줘요. 그냥...음, 제가 무시당하는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이게 다 당신 때문이잖아요.
“그래서, 전화하기 싫으십니까? 그런 거라면 그냥 전화 끊으셔도 괜찮은데.”
그거 알아요? 당신 정말 치사해요.
그런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것은 별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지금 이렇게 통화를 이어가는 건 생각보다도 더욱 즐거운 일이었고,
어느덧 집에 도착했을 때. 1시간이나 이어진 통화에 약간 놀라기도 했다.
“이제 집에 도착해서, 이만 끊어야겠네요.”
그럼 다음에 보는 게 좋겠네요. 어디서 볼까요?
“...글쎄요.”
다음이라. 어느 순간부터 다음에 만난다는 걸 내심 생각하고 있던 걸까.
이 놀라운 변화에 작게 눈살을 찌푸리다가, 이윽고 불이 켜져 있는 자신의 집을 바라본다.
집에서 나올 때만 하더라도 이런 인연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신기한 것이었다.
조용해진 핸드폰은 뜨거웠다. 방금까지 이어지던 대화의 열기가 고스란히 남겨져,
지금이라도 귀를 가져다 대면 그 차분한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 거릴 것만 같았다.
“홀렸나?”
문득 튀어나온 말에 적당한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어쩌면 그랬을지도 몰랐다.
처음 만난 사람, 자신을 잘 아는 듯 보이지만...태어나 난생 처음으로 마주하는 사람.
그런 사람과 나름 친해졌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오늘의 기억을 더듬어보다가, 그렇게 불이 켜진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늦게 왔네. 오늘 만난다는 사람하고 꽤 잘됐나 봐?”
머리에 수건을 두르곤, 입에 칫솔을 물고 있는 수진의 모습에 수현은 한숨을 내뱉었다.
똑같은 여자인데, 저렇게 차이가 나도 괜찮은 건지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그냥 혈육이라는 이름에 저절로 피어오르는 반발심이 아닐까.
“뭐, 괜찮았지.”
수현이 싱긋 웃자, 수진은 눈을 휘둥그레 뜨곤 수현의 옷깃을 붙잡았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도대체 어떻게 친해진 건지, 설마 벌써 사귀는 건 아니냐는 질문에수현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지금은 친구지. 아직까지는.”
아이린 유리스라는 여자라면, 친구 이후의 진도까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물론, 그게 순전히 자신만의 생각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멍하니 있는 수진을 뒤로한 수현은 옅게 미소지었다.
어느 때보다도 후련한 미소라, 참 오랜만에 그렇게 웃어보는 것 같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