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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64화 (164/181)

〈 164화 〉 가족 나들이 (1)

* * *

가을이 훌쩍 다가온 유리스엔 다른 지역보다도 일찍 추운 바람이 몰려오기 마련이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수확시기가 찾아와 평소보다 일이 적어져 한가하기도 했고, 평소 하지 못했던 것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시간이라 할 수 있었다.

하여 내친 김에 가볍게 야만족 토벌이나 하려 했건만, 순식간에 아이린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오게 된 에반이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갑작스러운 것이 아닙니까?”

“뭐, 상관없잖아요. 어차피 할 거 없던 거 아니에요?”

올해로 서른 살을 맞이한 아이린이 중얼거리자, 차마 그 말에 반박하지 못한 에반이 입술을 삐죽였다.

레비가 기사단에 들어오게 된지도 벌써 2년이 지난 뒤였다.

기사단 양성에도 손을 뗀 에반이 하는 것이란 고작해야 자기 단련이나 사소한 업무를 보는 것뿐이었으니,

그런 에반의 무료함을 눈치챈 아이린이 야심차게 준비한 것이 바로 이 소풍이라 할 수 있었다.

“가족 나들이 좋잖아요. 안 그래요?”

“좋긴 한데, 불청객이 있는 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조금 좋게 마음을 먹어봐요. 카일이 로벨리아를 장난으로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요.”

가족끼리, 라는 명분으로 오긴 했지만. 사실 이 소풍에는 손님이 하나 있었다.

이제는 황제가 된 카이셀의 가족들, 에반이 특히나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부분은 로벨리아 옆에서 딱 붙어 있는 카일이었다.

“우리 아들을 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은데, 나를 너무 닮은 게 샘이 나나?”

“뭐...폐하의 안 좋은 점을 닮은 것 같진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곤 있습니다. 그것마저 닮았더라면, 우리 로벨리아가 많이 슬퍼했을 테니까요.”

“황제한테 못하는 말이 없군.”

“저번 술내기에서 지지 않으셨습니까. 패자는 말이 없는 법입니다.”

맥주 한 잔 차이로 저버린 술내기, 그 기억을 떠올린 카이셀은 한숨을 푹 내쉬곤 머리를 긁적였다.

애초에 에반에게 황제로 대접을 받는 걸 기대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관계만 어색해질 테니까.

친우 사이에 신분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터라, 황궁이 아닌 곳에서 카이셀은 스스로 신분을 쉽게 내려놓았다.

“카일, 자꾸 붙지 마. 나 이거 하고 있잖아.”

“어차피 5분 뒤면 까먹고 붙을 건데, 그냥 익숙해지는 게 어때?”

“우리 사귀는 사이도 아니잖아. 저번에 당분간 친구 사이로 지내자고 했던 거 까먹었어?”

“음, 그건 모르겠고. 오늘 머리핀 예쁘네, 잘 어울려.”

“어...그, 그래? 그럼 다행인데.”

로벨리아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본 카일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꽤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었지만, 에반은 있는 힘껏 눈살을 찌푸렸다.

파르르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검이 있는 곳에 손을 올릴 따름이었다.

“에반, 자네가 멍청이라고는 생각하진 않지만. 내 앞에서 검을 잡으면 그 자체만으로도 역모죄가 성립이 되는 걸 알고는 있겠지.”

“로벨리아가 남자랑 저렇게 친하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얼굴도 붉히면서요.”

“그래, 그리고 그게 내 아들이지. 나는 내 아들이 참 자랑스러워.”

“...군권 포기하겠습니다. 북부 방위는 폐하가 알아서 하시죠.”

참으로 무엄한 친구 아닌가. 카이셀이 쓰게 웃자, 에반은 투덜거리며 로벨리아에게 두었던 시선을 거두었다.

지금이야 이렇게 불만스러워 하고 있지만, 에반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로벨리아가 카일을 단지 동생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쩌면 나중엔...정말 자신이 저 두 사람이 사귀는 것을 봐야 한다는 걸.

‘이런 기분이셨군요.’

장인 어른이 유독 심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하나 있는 딸이 결혼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서가 결혼한다고 생각해도 그랬지만, 에반은 자신을 쏙 빼닮은 로벨리아를 유독 아꼈다.

“딸이라서 유난 떠는 건가? 아서가 섭섭해 하겠는데.”

“아서는...살짝 아이린을 닮았습니다. 제가 신경을 쓰든 안 쓰든 별 상관을 안 하더군요. 레비라는 아이랑 잘 되어가는 것 같던데, 정작 아서는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터라.”

“공작을 쏙 빼닮았군, 저 표정부터가 닮았어.”

어느덧 노오랗게 물든 동산 위에 앉아있는 아서의 표정은 무감할 따름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옆에서 가만히 자고 있는 레비의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 넘기곤 살짝 미소지었다.

평소에는 잘 보여주지 않는 미소라, 아이린은 스칼렛과 함께 그 모습을 보며 옅게 웃었다.

모자가 참 똑같은 미소를 짓지 않는가. 그걸 빤히 바라보던 에반은 이내 어깨를 한 차례 으쓱였다.

분명 아이린보다는 자신과 많이 붙어있던 것 같은데, 어쩌다가 아이린을 닮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 나 잤어?”

“더 자도 괜찮아. 어차피 뭐라 하는 사람도 없잖아. 크리스 할아버지도 여기 없고.”

레비가 그 손길에 깨어나자, 조용히 손을 떼어낸 아서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아서의 입장에선 이런 레비가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여기 자연스럽게 껴서 따라온 것도 그렇고, 황제가 있음에도 이리 편히 자는 것도 그렇고.

처음 만났을 때는 이보다 조금 차가운 분위기였던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자신의 가족과 익숙해진 건지.

어쩌면 이제 레비도 가족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저번에 리제 수녀님 다녀가셨지?”

“아, 엄마? 응 편지도 줬고...근데 그건 갑자기 왜?”

“아니, 딱히 누나하고 할 얘기가 없어서.”

“...너무 솔직한 거 아냐? 나도 여기 있는 거 조금 부담스럽다고. 황제 폐하가 계시잖아.”

그래놓고 잘만 자지 않았던가. 아서의 눈이 가늘어지자, 헛기침을 한 차례 내뱉은 레비가 입술을 삐죽였다.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옆에 아서가 있으니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구태여 입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어쩌면 이제 곧 말할 수 있으리라.

유리스에 기사로 소속된 지 어언 2년이 훌쩍 넘어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자신도 이제 기사 훈련에 서서히 익숙해지고 있었고, 성인이 됨과 동시에 정식으로 기사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언제쯤 어른이 될까 싶다가도, 벌써 2년이 지난 것을 생각하면 또 그 시간마저 금세 흐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서, 넌 나중에 뭐 할 생각이야? 단장님처럼 기사가 될 생각이야?”

여기서 말하는 단장은 에반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니, 그 말에 고개를 주억거린 아서가 허리춤에 들린 검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 나는 아빠 같은 기사가 될 거야. 어쩌면 아직 마베트 같은 용이 세상에 남아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런 용을 찾아서, 내가 직접 잡는 거지.”

“흠, 혼자 잡긴 힘들지 않을까? 동료 하나 정도는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러자 아서가 의아하다는 듯 레비를 바라봐서, 그 시선에 살짝 놀란 레비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왜? 동료 필요 없어?”

“아니, 넌 당연히 같이 가는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마, 맞지. 당연히 같이 가는 거지. 아하하.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응, 그렇게 생각하고 말고.”

순간 레비의 얼굴이 붉어져서, 아서는 검을 허리춤에 끼워넣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이 무슨 말만 하면 저런 반응을 보이곤 해서, 가끔은 스스로 말을 조심할 때가 있었다.

어디가 아픈 건가 싶기도 하고, 얼굴이 붉어지는 병이 무엇인지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텅빈 동산은 유리스 근처에 있는 곳이었다. 북부인 탓에 추운 날씨를 자랑했지만,

가을이 막 찾아왔을 때 간다면 이렇게 단풍이 물든 곳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흩날리는 단풍을 볼 때면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 스칼렛과 함께 있던 아이린은 조용히 들고 있던 바구니를 꺼내들었다.

“음, 그건 뭐에요 공작님?”

“제가 만들어 온 거예요. 에반이 말렸는데, 에반 몰래 제가 챙겨왔거든요. 에반은 제가 요리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나 봐요. 제가 하고 싶다고 해도 말린다니까요. 정말, 그렇게 신경써주지 않아도 되는데.”

언뜻 보면 남편 자랑처럼 들렸으나, 스칼렛이 곰곰이 다시 짚어보자 정말 남편 자랑이 맞았다.

아이린이 샐쭉하게 웃자, 눈살을 찌푸린 스칼렛은 카이셀의 장점을 생각했다.

황태자였으니 돈이 많았고, 황궁에서 사는 동안 나름 편안하게 살지 않았던가.

...헌데 그건 아이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아이린은 공작이었고,

심지어 남편은 고룡을 제 손으로 직접 죽인 영웅이었다.

그래도 카이셀의 아내인 이상 질 수는 없어서, 팔짱을 낀 스칼렛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카이셀도 저번에 제가 다치니까 직접 상처를 치료해줬어요. 저는 황제가 되어서 그런 거 할 필요 없다고 말했는데, 기어코 직접 붕대를 감아주더라고요. 여기 손가락 보이세요?”

“...에반은 저를 구하려다가 한 번 죽은 적이 있죠. 그 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파요.”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떤 아이린이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누가봐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 슬픈 표정이었지만,

그것이 장난이란 것을 알아차린 스칼렛이 아이린을 흘겨본 채 작게 소리쳤다.

“공작님, 자꾸 반칙 쓰시면 어떡해요!”

“그냥 장난 좀 쳐봤어요. 심심하잖아요, 다들 따로따로 떨어져 있으니까.”

“그건...그렇죠.”

같은 장소에 있었지만, 막상 다들 돗자리를 따로 편 채 있다보니 단둘이 남겨진 아내들은 심심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이러려고 나온 게 아닌데, 명색이 가족 나들이가 아니던가.

제국에서 가장 높은 신분을 지닌 이들이 이러고 있다는 걸 알면 모두가 비웃지 않을까.

마침 카이셀과 너무 즐겁게 얘기하고 있는 에반이 마음에 들지도 않기도 해서, 아이린은 스칼렛을 힐끔 보곤 입을 열었다.

“혹시 여기 오면서 뭐 할 거라도 생각해본 거 있나요?”

“어...없긴 한데요. 저는 공작님이 전부 준비하실 줄 알았어요.”

“황비 전하,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 게 아니신지요. 같이 준비하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하하, 그...미안해요. 소풍 같은 것은 처음 가보거든요. 알잖아요, 우리 집 어땠는지.”

절멸과 함께 생활하면서 집안에만 있던 스칼렛은 애초에 밖으로 나갔던 적이 그리 많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멀리 가본 것이 황도에 찾아왔던 그 때가 아니던가.

그것을 떠올린 아이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런 스칼렛을 탓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만, 이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어떻게 할 필요는 있어보였다.

짝­!

아이린이 자리에서 일어서 박수를 크게 치자, 떨어져 있던 아이들과 남편들이 아이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이린은 그 시선을 잠시 느끼다가, 이윽고 조금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다들 모여봐요. 할 애기가 있으니까.”

모처럼 나온 가족 소풍을, 이렇게 시간만 떼우며 보낼 생각은 없었다.

보람차게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보람차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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