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화 〉 분홍 새싹이 피어날 나이 (4)
* * *
“아직도 더 할 생각인 것 같구나.”
바닥에 쓰러지지 않으려 칼로 땅을 짚은 레비의 모습에, 에반은 안쓰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레비가 시험을 통과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1분, 허나...그렇다기엔 버티기조차 힘들어 보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헉, 허억...아직 할 수 있어...요.”
애초에 기준 자체가 레비에게 많이 어려운 것이었다. 마스터도 아닌, 그랜드 마스터인 에반에게 닿으라니.
여기 있는 기사들조차 수없이 실패하고 다시 도전했던 것들이었다. 아직 어린 레비에게 너무 어려운 것을 요구했던 것일까.
허나 감탄하는 점이란, 아직까지도 포기하지 않는 레비의 태도였다.
사실 에반이 검으로 쳐내기보다는, 레비가 에반의 공격을 피하느라 체력을 소모했을 뿐이었다.
최대한 레비가 다치지 않도록 검을 휘둘렀지만, 스치기만 하더라도 다칠 수 있는 검을 피해내는 데엔 많은 체력이 필요했으니까.
그러고보니 레비라는 이 아이의 약점이 체력이라 했던가. 확실히 그것이 약점인 것처럼 보였지만, 에반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재능이 없는 것도 아닌데, 저리 근성을 지녔다면...아마 나중에 아서가 보고 배우기 괜찮을 테니까.
나이도 비슷하니, 어쩌면 친하게 지내다가 같이 마스터가 되는 게 아닐까. 막상 생각하니 나름 괜찮아보여서,
에반은 검으로 앞에 선을 그은 채 잠시 대련을 중지시켰다.
“심판, 여기에 내가 핸디캡을 부여해도 괜찮겠나?”
“핸디캡 말씀이십니까?”
“눈을 가리려고 한다. 검도 버리고. 어차피 남은 시간은 1분인데다가, 레비도 지친 듯 하니까.”
잠시 고민하던 심판은, 이윽고 괜찮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레비의 나이가 어린 것도 있었고,
그 정도는 일반 기사와 대련할 때도 종종 있곤 했으니까.
오히려 처음부터 핸디캡없이 버텼던 레비를 보는 시선에 호의가 뒤따랐다.
일부러 천천히 안대를 쓴 에반은 들고 있던 아스칼론을 다시 허리춤에 꽂아놓곤 레비가 있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 보이지는 않았지만, 애초에 시각은 이런 싸움에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봐줄 생각이기도 했으니, 에반은 팔짱을 낀 채 시작하라는 듯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후우.”
레비는 직감적으로 에반이 자신을 봐주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 것이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상대는 에반이었다.
부끄러움이나 화를 느낄 수 있을 만큼의 격차가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길게 숨을 내뱉고는, 에반의 다리를 향해 검을 겨눈 레비가 다시금 땅을 박찼다.
‘체력이 모자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못한 레비의 고질적인 문제점이었다. 아서와 대련할 때도 느꼈던 것이었지만, 체력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아서라면 3분도 거뜬하게 버텨낼 수 있지 않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레비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서가 만들어준 기회를 이대로 놓칠 수는 없지 않은가.
레비는 이미 자신의 마음을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었다.
아서를 처음 만났을 때면 몰라도,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이 단순히 호감이 아니라는 것을.
책임진다는 말이 어떻게 들렸을지도 모르는 그 표정이란,
아서가 둔감하단 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레비는 이 거리를 오랜 시간을 들여 좁히고 싶었다.
자신이 대뜸 고백했다가 아서가 당황하면, 그것만큼 부끄러운 일이 또 없을 테니까.
몇 년이 걸려도 좋았다. 다만, 지금 이 순간은 앞으로의 몇 년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었다.
아서의 아버지 되는 사람, 그리고 검성이라 불리는 사람.
그런 사람이 검을 들지도 않은데다, 눈마저 가리고 있다는 것에 레비는 용기를 얻었다.
땅을 박차고 튀어나간 순간 많은 것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자신이 여기서 다리를 공격한다한들,에반의 균형이 무너질까.
어쩌면 그것마저도 피할지 몰랐다. 자신과 아득하게 벌어진 격차였다. 눈을 감고도 공격을 피하는 것쯤은 가능하지 않겠는가.
기기긱!
에반의 감각은 이미 레비의 공격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맞아주고는 싶었지만, 그랬다간 동작이 부자연스러워지는 탓에 그럴 수도 없었다.
애초에 레비의 속도는 에반에게 거북이처럼 느껴졌으니,
레비가 에반을 타격하기 위해선 예상치 못한 한 수를 이용하는 것 외엔 존재하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돼.“
가빠져오는 호흡 속에서 생각한다.
여기서 에반을 찌를 수 있는 공격. 할 수 있는 것이라 해봐야 주먹구구식으로 배운 공격뿐인 터라,
스스로 할 수 있는 공격의 대부분이 읽힌 뒤였다. 몸 성하게 이기는 방법이란, 아마도 없다는 소리였다.
허나 몸을 던진다고 닿을 수 있을까. 스스로 선택한 일이기에 악으로 버티려 했지만, 그것마저도 힘든 상황이었다.
머릿속이 차분해지며 동시에 몸에 남았던 고통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팔이 떨리고, 검을 쥔 손은 부들거려 검을 쥐기조차 힘이 들었다.
“후우, 후.”
호흡은 이미 규칙을 잃은 채 불안하게 내뱉어졌고, 그런 탓에 몸의 균형 또한 무너진 뒤였다.
아마도 앞으로 두 합. 남은 시간이 단 20초라는 걸 깨달았을 때, 레비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해졌다.
스으으
15초. 레비는 할 수 있는 한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폐를 가득 채운 숨은 이 남은 시간을 불태우기 위한 불씨였다.
어떻게든, 자신이 여태껏 배운 모든 것을 쏟아낼 생각이었다. 카가각~ 허공에서 검이 부딪혔다.
에반이 단지 뿜어내기만 하는 마나에도 레비는 형편없이 밀려났다. 그로 인해 밀려나는 몸, 다시금 땅을 박찬 레비의 몸이 그대로 회전했다.
허리가 돌아감과 동시에 틀어진 관절이 힘을 더한다.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허벅지가, 호흡이 가득 찬 폐가, 조금도 힘을 흘리지 않기 위해 부드럽게 이어지는 동작이 마침내 에반의 마나를 뚫어냈다.
콰직!
허나 그럼에도 몸에 닿는 것은 무리인지라, 에반은 가볍게 레비의 검을 피해냈다.
10초, 시간을 계산한 레비가 다시금 검을 찔러 넣었다. 연계 동작도 없는 그 날카로운 일격에 한 기사가 감탄을 흘려냈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동작, 순수하게 스스로의 감각만으로 찔러 넣은 일격마저 에반은 쉽사리 피해냈다.
“7초 남았단다.”
그 여유에 레비의 머릿속은 조금 더 차분해졌다.
시야에 아주 잠깐 보인 것은,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아서의 모습.
모두가 앉아있는 와중에 홀로 일어난 모습에 힘을 얻는다.
가빠졌던 호흡이 다시금 편안해지고, 동시에 말라가던 마나가 다시금 불타오른다.
회광반조, 아마도 끝에 이르러 잠깐 타오르는 것에 불과할 터였다.
허나 남은 시간이 7초라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마나를 분배하여 사용하는 멍청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모든 마나를 불태워, 순간 레비의 몸에서 푸른 불꽃이 일었다.
화르륵 호흡과 함께 새어나오는 에반의 마나가 만들어낸 장막을 갈라내었다.
5초, 장막을 가름과 동시에 에반을 향한 검이 허공을 갈랐다.
허공을 가르고, 찢고, 베어내고. 의미없는 휘두름만이 반복되는 그 사이에 에반은 서서히 뒤로 물러날 뿐이었다.
3초.
레비는 조금씩 느껴지는 무언가에 눈을 가늘게 떴다.
지친 나머지 새하얗게 물들기 시작하는 머릿속에서 느껴지는 이 일말의 ‘감각’.
태어나 난생 처음 느껴보는 것이라 의구심이 들기도 했으나, 이 상황에서 이 감각을 한 번 믿어보기로 마음 먹었다.
쐐애액!
쏟아지는 검이 다시금 허공을 갈랐다. 그 순간 이미 1초도 채 남지 않은 터라, 에반은 안대를 벗으려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휘익 허나 소리가 끊기지 않아서, 에반은 허리를 통해 다시금 올라오는 검을 느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이 들기도 전에 이미 팔은 그 검을 막은 뒤였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닿는 것이 목적인 이 대련에서, 팔로 막은 순간 이미 닿았다고 볼 수도 있었으니까.
“...닿았다.”
그것을 깨달은 건 레비 또한 마찬가지라, 검을 막아낸 에반의 팔을 보곤 씨익 웃으며 중얼거렸다.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렸다. 툭, 손에서 미끄러진 검을 레비는 차마 줍지 못했다.
힘이 완전히 빠져버려서, 바닥에 쓰러지는 레비의 몸을 에반이 가볍게 받아들었다.
“이렇게 무리할 필요는 없었는데, 아무래도...내 잘못인 것 같구나.”
“그거, 허억. 말해주세요. 흐, 저 합격한 거죠?”
지친 나머지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그 와중에 그런 걸 묻는 레비의 모습에 에반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대련에서 진 에반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며 여유로워 보였고,
정작 승리한 레비는 당장이라도 기절할 듯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래, 합격이지. 유리스에 온 것을 환영한다.”
“흐으, 그나저나...저 수녀님한테 이거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이제 저 여기서 사는 거 아닌가요?”
“그건 그런데, 수녀라니?”
“저 사실 부모님이 없거든요...그래서 수녀님이 절 데려와서 살고 있었어요. 성당에서 사는데, 이제 기사 견습생이니까 여기에서 사는 거잖아요.”
수녀라, 에반은 레비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측은해 하는 것도 이 아이에게 무례가 될 수 있으리라.
하여 에반이 승낙하자, 레비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아서를 보곤 얼굴을 홱 돌렸다.
“레비! 진짜...! 넌! 모르겠다, 최고였어. 진짜로!”
아서는 레비가 이긴 것을 보곤 흥분에 젖어있었다. 자신도 하지 못했던 걸 레비가 해낼 줄이야.
마지막에 보여줬던 것은 정말 엄청난 공격이었다. 공격 도중에 궤도를 바꾸다니, 숙련된 기사조차 힘들어하는 기술이었다.
에반도 그것을 피하지 못해 막아냈으니, 에반 또한 그에 긍정하며 레비를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왜 내 쪽은 안 봐?”
“나, 나 지금 냄새 나는데.”
“뭐야, 원래 땀 흘리면 냄새 나는 게 당연하잖아. 아까 쓸린 곳 봐줄게. 여기 봐봐.”
“필요 없다니까!”
레비와 아서가 투닥거리는 모습에 에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걸 말려야할지, 아니면 응원해야할지. 어쨌든 레비를 받아들이기로 했으니, 이왕이면 아예 유리스로 데려올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성당과 수녀의 이름을 알아야 했으니, 에반이 묻자 레비가 아서를 보던 시선을 휙 돌리며 대답했다.
“절 키워주신 분은 리제라는 수녀님이세요. 제가 성당 문 앞에 있을 때부터 절 키워주셨던 분이에요.”“...리제?”
“네, 혹시 아시는 분이에요?”
“혹시 성당에 그 수녀가 들어온 게 언제인지 알고 있니?”
“아마...제가 태어나기 전에 오셨다고 들었어요. 특이한 점이라고 하면, 음...남자를 싫어하는 것 정도? 누가 생각나서 싫어한다 하더라구요. 제가 생각하기엔 아마 짝사랑이라도 하셨던 것 같아요.”
리제라는 이름, 그리고 특이한 점까지. 그 얘기를 듣던 에반의 표정은 점차 미묘해지다가, 이윽고 아이린이 있을 방향을 보곤 쓰게 웃었다.
우연인 것 치곤, 참으로 많이 꼬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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