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 분홍 새싹이 피어날 나이 (3)
* * *
기사들이 가득해야 할 연무장엔 단 두 사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유로운 쪽은 에반이었고, 긴장한 나머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있는 쪽은 레비였다.
유리스의 기사로 들이기 위해 필요한 절차, 지난번에 에반이 꺼냈던 제안을 승낙한 레비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둥근 형태의 연무장, 그 주변에 있는 의자에는 기사들이 빼곡하게 앉아있었다.
에반이 검을 직접 드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으니, 아마 그것을 보기 위해 온 기사들 또한 많으리라.
허나 이들이 진정으로 보려하는 것은 레비의 실력이었다. 에반의 아들인 아서가 추천하여 입단 시험을 보게 된 평민 여자 아이.
아서와 동갑인 나이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에반이 직접 레비를 살핀다는 말에 몇몇 기사들은 고개를 젓기도 했다.
유리스의 기사가 되기 위해서 보는 시험, 차별은 없어야 한다는 에반의 말대로 다른 기사들과 똑같은 시험이 치러졌어야 했으니까.
“너무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어쩔 수 없단다. 너도 알고 있지?”
“저는 괜찮아요. 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럼 다행이구나. 아서한테 아무 소리도 안 들을 수 있을 테니까.”
레비는 여전히 한쪽을 힐끔 살피고 있었다. 아마도 연무장 어딘가에 있을 아서를 찾는 것이리라.
그 모습에 에반은 잠시 쓰게 웃고는, 늘 쓰던 검인 아스칼론을 꺼내들었다.
조금 봐주면서 할 수도 있었고, 그럴 생각이었지만...아무리 그렇다 한들 실력이 일정 기준을 넘어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며칠 동안 지켜본 레비라는 아이는, 솔직히 말해 꽤 괜찮은 아이였으니까 말이다.
한편으론 이전에 만났던 누군가가 떠오르기도 했다. 리제...였던가.
허나 고아라고 했으니, 아마도 그 쪽과는 인연이 없는 것이 낫지 않을까.
잠시 레비의 모습을 바라보던 에반은 조용히 검을 들었다. 마나는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순수한 검술만을 사용하는 대련.
허나 그건 에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고, 레비는 얼마든지 마나를 사용할 수 있었다.
에반의 검인 아스칼론이 모습을 드러내자 몇몇 기사들은 박수를 치기도 했다. 늘 가지고 다녔지만,
손잡이만 보이던 터라 검신을 드러내는 것을 처음 본 기사들이 꽤 많았던 탓이었다.
고룡을 베었던 검, 시조 황제 알라르가 다루었으며...동시에 이제는 에반의 검이 된 그 검에 레비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긴장하지 말라는 아서의 말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검도 아니고 아스칼론이라니, 보기만 해도 온몸이 베이는 것만 같아서. 목검을 들고 있던 레비의 팔이 파르르 떨렸다.
“너무 긴장하지 마렴. 단순히 종자로 받아들일지 결정하는 시험이니, 그렇게 긴장할 필요까지는 없단다.”
조금 부드럽게 말해도 딱딱한 표정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 에반은 지켜보던 기사 하나를 불러내어 심판을 시킨 뒤 입을 열었다.
“레비가 유리스의 종자가 되기 위해 이루어지는 이 시험에서, 합격할 수 있는 방법이란 단 하나다. 내 검과 부딪혀 한 합을 버텨내던가, 아니면 3분이란 시간동안 내 공격을 피해내던가. 만약 이에 실패할시, 모든 자격을 잃고 정식으로 입단하는 것 외의 방법은 허가되지 않는다. 이 정도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지?”
“...네, 전부 이해했어요.”
조금 쉬운 방법이 있기야 했다. 그냥 에반이 그 재능을 알아봤다는 이유로 기사단에 편입시키면 됐으니까.
허나 그랬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터라, 그런 방법은 어지간해선 피하고 싶었다.
실력에 대한 논란이 일어날 수도 있고, 거기에 더해 레비가 정말 그저 그런 기사라면 더욱 파장이 컸다.
특히나 레비의 신분은 평민이었으니, 전원이 귀족인 이 기사단에 괜히 안 좋은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자신이 신경 써준다면 되겠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문제가 됐고.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은, 특히나 영웅이라 불린다는 건 여러모로 신경써야 할 것이 많은지라. 에반은 레비에 대해 많은 신경을 써줄 수가 없었다.
‘이왕이면 잘해줬으면 좋겠는데.’
에반이 슬쩍 시선을 돌리자 한 구석에 앉아 레비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아서의 모습이 보였다.
주먹을 불끈 쥐곤, 다른 기사가 무어라 하든 미동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이 꼭 엄청 집중한 것처럼만 보였다.
다른 것에 그렇게 집중하면 참 좋을 텐데. 두 사람이 무슨 사이인지는 아직 몰라도,
확실히 서로가 좋은 친구가 될 거라는 것은 사실인 듯 했다.
“시작해도 돼요.”
그 말에 심판을 맡은 기사가 깃발을 들자, 레비는 곧바로 땅을 밟곤 에반을 향해 움직였다.
레비가 노리는 것은 바로 이 대련이 시작된 직후였다. 사람이 가장 방심하는 순간,
깃발이 들리자마자 움직인다면 아마도 반응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일 테니까.
땅을 박차고 움직이기 시작한 레비의 몸에 마나가 둘러지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어쩌면 익스퍼트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만큼 빠른 마나 반응은, 레비가 타고난 재능의 일부였다.
단 한 번, 어차피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이 싸움에서 레비가 노릴 수 있는 유일한 승리의 수.
순식간에 튀어나가는 레비의 속도에 기사들이 놀라고, 아서가 주먹을 불끈 쥔 그 순간에
“똑똑하구나.”
카가각
에반은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레비의 검을 막아내었다. 조금의 힘조차 들이지 않았다는 듯, 에반의 발은 여전히 처음 그 자리 그대로 있었을 뿐이었다.
“이제 다음은 어떻게 할 생각이니?”
“...하.”
당연한 얘기였지만, 에반은 고작해야 이런 기습에 공격을 허용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서서히 평화로워지는 시대에 기사들이 간혹 잊곤 했지만,
에반은 애초에 생사를 넘나드는 곳에서 싸워왔던 기사였다. 이런 기습이야, 이미 질릴 만큼 겪어봤다는 소리였다.
레비의 표정이 어두워지고, 그에 따라 에반은 싱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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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 아빠가 레비라는 애하고 대련한다고 그랬어.”
“그렇구나.”
“그래서 아서는 아카데미에 안 왔고...나만 왔어.”
“그래서?”
“그래서, 가 아니라. 네가 나한테 물어봤잖아. 오늘은 왜 혼자 왔냐고. 그리고 이제 그만 떨어져,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잖아 바보야.”
등교할 때 만나는 게 아니었는데, 어느새 자연스럽게 옆에 달라붙은 카일을 본 로벨리아가 투덜거렸다.
마침 오늘 레비라는 아이의 시험이 있는 날이었는데, 아서가 없는 그 잠깐 사이에 이렇게 다가온단 말인가.
특유의 능청스런 미소를 짓는 카일의 모습에 로벨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신이 가라고 해도 갈 것 같지가 않았다. 애초에 은근히 고집이 세기도 했으니,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로벨리아는 카일의 옆구리를 툭 치며 입을 열었다.
“카일, 너 저번에 말한 거...정말이야?”
“뭐가?”
“아니, 네가 요즘에 변한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 한 거 말야.”
잠시 허공을 멍하니 보던 카일은, 그 말에 외마디 탄성을 내뱉곤 씨익 웃었다.
그걸 아직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혹시 까먹었으면 어쩌지 싶었건만.
이렇게 그 기억을 되살려주는 로벨리아를 본 카일이 미소지은 채 말을 이었다.
“아직 기억하고 있었구나? 내가 저번에 말했던 거."
“...몰라. 그냥 갑자기 확 변해서 무슨 일인가 했던 것뿐이야.”
“걱정한 거구나.”
“걱정 안 했거든!”
말은 그랬지만, 로벨리아는 자신이 카일의 변화에 내심 신경 쓰고 있던 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너무 매몰차게 무어라 한 게 아닐까, 그런 고민도 조금은 하고 있었으니까.
로벨리아가 고개를 휙 돌리자, 카일은 로벨리아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곤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도 4살쯤이었을까. 사실 어린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지만,
남들에 비해 조금 특이했던 자신에게 유일하게 다가와 줬던 게 바로 로벨리아였다.
아서도 자신의 친구이긴 했지만, 카일은 예전부터 남자를 그리 특별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것도 카이셀을 닮은 것일지도 모르리라.
“아빠한테 물어봤어. 어른스러운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거냐고.”
“그래서 그렇게 행동한 거야? 몇 달 동안?”
“나도 그동안 내가 이상하게 행동했다는 거 정도는 알겠더라고. 너도 내가 그렇게 하는 거 싫어했잖아.”
그건 또 아니라고 대답할 수는 없어 로벨리아가 입을 다물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카일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나도 나름 노력했어. 조금 잘 보이고 싶었거든.”
잘 보이고 싶다니, 아무리 그래도 당사자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는 게 아닌가.
로벨리아는 괜스레 얼굴이 화끈 거리는 것을 느꼈다. 부끄럼이 없는 건 알았지만,
카일의 태도는 요즘 들어 훨씬 저돌적이었다. 이번에도 고백을 받아주지 않으면 정말 뭐라도 할 것처럼...
사실, 카일의 변화는 꽤나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단순히 동생처럼 느껴졌던 카일에 대해 ‘조금 멋있을지도 모른다’라는 평가가 생기게 되었으니까.
물론 그것을 밖으로 티내진 않았지만, 이렇게 계속해서 다가오는 카일을 로벨리아는 차마 밀어낼 수가 없었다.
싫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또 아니었으니 말이다.
“...도대체 내 어디가 좋은데.”
“이쁘잖아.”
“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사람도 많은데...!”
또 대뜸 대답해버리는 게 카일이라, 화들짝 놀란 로벨리아가 카일의 입을 손으로 덮었다.
그 손에서 느껴지는 향은 라벤더향이었다. 카일이 처음 만났을 때 맡았던 그 향.
홀로 구석에 있던 제게 내밀었던 그 손에서 느껴졌던 것과 완전히 같은 그 달콤한 향에 피식 웃은 카일은, 조용히 그 손을 떼어내며 입을 열었다.
“네가 먼저 물어본 거잖아. 네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거냐고.”
“그래도 그렇게 바로 대답하면 안 되지, 머, 머뭇거리기라도 하던가. 그리고 묻는다고 바로 대답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우리 아빠는 그랬다던데.”
“그건 너희 아빠가 그런 거고! 우리 아빠는 어...음.”
생각해보면 에반도 아이린에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이었으니,
제대로 된 변명을 찾지 못한 로벨리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뭐라고 말은 해야겠는데,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저 새빨간 눈동자에 입이 꾹 다물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시선이 마주치고, 주변을 힐끔 둘러본 카일이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좋아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아했어, 로벨리아.”
그 11번째 고백에, 로벨리아는 결국 카일을 피해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허나 얼굴이 그렇게 빨개지는 것은 처음이라,
카일은 이번에도 좌절하지 않았다. 앞으로 10번 정도 더 하면 그때는 받아주지 않을까. 그렇게 낙관적으로 생각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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