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화 〉 분홍 새싹이 피어날 나이 (2)
* * *
“...나를 찾아온 이유를 알 것 같은데, 직접 대답해도 괜찮겠지?”
“무슨 일인지 대충 알고는 있나 봅니다. 태자 전하.”
평소보다 싸늘한 에반의 말투에 카이셀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아이들의 일을 자신보고 어쩌란 말인가. 하나뿐인 딸을 아끼는 에반의 마음이 이해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이건...팔불출이라 부르기 충분한 수준이었다.
고작 8살짜리 애들이 무얼 안다고 그러는 건지.
“이름으로 부른 지 몇 년이나 됐는데”
“태자 전하.”
“카일이 뭐라 했길래 나한테 따지는 건가. 어차피 애들 일인데...고백도 몇 번 할 수도 있는 거지. 어차피 자네도 나름 많이 받았잖아.”
“그렇긴 한데...아직 로벨리아는 어리잖습니까. 그리고 듣자하니, 태자 전하께서 아주 긴밀한 도움을 주셨다고요.”
“...카일이 입이 싼 건 이번에 처음 알았군. 그래, 내가 도와줬지. 어른스러운 게 뭐냐고 묻길래 기회삼아서 이것저것 알려준 것뿐이야. 예절 알려준 게 뭔 대수라고 나를 그런...그런 눈으로 바라보냔 말이야.”
그 말에 작게 헛기침을 내뱉은 에반은, 표정을 푼 채 다시 카이셀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딸의 이야기다 보니 여러모로 예민한 탓에, 상대가 황태자라는 것마저 까먹고 말았다. 친우가 아니었더라면 불경죄로 진즉에 잡혀갔으리라.
“문제가 생겨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문제라면, 뭐 북방에서 야만족이라도 준동했다는 거라도 얘기하러 왔나?”
“그건 문제가 아니죠. 야만족이야, 하루면 토벌할 수 있으니까요. 다만, 제 딸이 카일을 이전과는 달리 생각하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전과는 다르다. 그 말에 카이셀의 귀가 쫑긋하고 움직였다.
카일을 그저 동생처럼 여겼던 로벨리아의 마음이 변했다는 건...역시 하나를 가리키는 게 아니던가. 카일이 샐쭉하게 웃자, 눈살을 찌푸린 에반이 투덜거렸다.
“흐흠.”
“전 굉장히 심각합니다. 로벨리아가 카일을 조금 멋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단 말입니다.”
“날 닮았으니 당연한 일이지. 자네도 알지 않나.”
“저보다 못났지 않습니까.”
그 말에 차마 반박할 수가 없어서, 미간을 찡그린 카이셀이 혀를 한 차례 쯧 하고 찼다.
굳이 거기서 그런 얘기를 할 필요가 있던가. 허나 이런 말을 들어도,
카이셀은 그저 오랜만에 만나는 친우에 대한 반가움만이 느껴질 따름이었다.
처음에는 자식들의 이야기로 투덜거렸지만, 그것은 잠시에 불과했다. 어차피 에반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걸 핑계로 카이셀을 찾아왔을 뿐, 아이들의 일은 아이들끼리 해결하도록 두고 싶었다.
물론 로벨리아가 카일에 비하면 조금 더 아깝다는 생각을 버리지는 못했다.
자신이 기억하는 예전 여동생을 빼닮은 것이 로벨리아였으니, 아주 조금 더 애착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으리라.
“그래서, 요즘엔 뭐하고 지내나? 나는 가뜩이나 바쁜 탓에 스칼렛 얼굴 보기도 힘들어.”
“저도 이래저래 바쁩니다. 이번에 키우는 기사단만 완성이 되면, 슬슬 육성에는 손을 뗄 생각이니까요.”
“...그럼 또 적당한 사람을 하나 찾아야겠군. 그것도 나름 일인데, 나한테 너무 많은 걸 맡기는 게 아닌가?”
“아이린하고 요즘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했으니까요. 겉으로는 괜찮아보여도, 아마 저한테 섭섭해하고 있을 겁니다.”
곧 있으면 결혼기념일이라, 에반은 그에 대해 꽤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늘 선물 같은 것이 필요 없다하여 가벼운 것만 받았는데, 계속 그런 걸 주는 자신이 오히려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올해는 이래저래 챙겨주고 싶은데, 도대체 무얼 해주면 좋을지. 아이들도 신경 쓰는 것이 맞았지만, 여전히 에반에게 1순위는 아이린이었다.
8년 전, 아니. 아이린을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그것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나를 찾아온 건 그냥 친구를 만나러 온 건가?”
“아뇨, 로벨리아 일 때문에 욱해서 찾아온 거 맞습니다.”
카이셀이 어이없다는 듯 에반을 흘겨봤지만, 에반은 그저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아빠가 딸 때문에 찾아왔다는데, 그게 무엇이 이상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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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 전하한테 다녀온 거예요?”
에반이 다시 돌아왔을 때, 아이린은 집무실에서 혼자 서류를 살피고 있었다.
이제는 영지가 많이 안정되어 하는 업무 자체는 많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아이린은 공작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제국의 방패뿐만 아니라 검의 칭호 또한 받았으니. 이전보다도 할 일이 더욱 많아진 것이다.
“바쁘신 거면 가보겠습니다.”
“...내가 지금 바빠보여요?”
장난스레 웃는 에반의 얼굴을 본 아이린은 이내 한숨을 푹하고 내뱉었다.
이미 안정될 대로 안정된 영지인데다, 자신이 할 일이라 해봤자 올라오는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는 것이 전부였다.
공작이 된 이후 처음 5년이나 바빴지, 요즘엔 아이들과도 놀아줄 수 있을 만큼 한가로운 것이 아이린이었다.
그걸 에반도 모르진 않을 텐데, 아이린의 시선이 꽂힌 걸 깨달은 에반은 자연스럽게 아이린의 옆에 앉았다.
이전에 아이린이 제 방에 있을 때처럼, 그때와 똑같은 자세로 자신을 바라보는 에반의 모습에 아이린은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왜 그렇게 봐요?”
“그냥 봅니다. 이유가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연인이 되기 전이라면 어떻게든 핑계를 대며 대답을 피했겠지만, 이제는 떳떳한 사이였다.
어느덧 결혼한 지도 10년이 되어가니, 에반과 아이린의 관계에 이전처럼 풋풋함이 남아있진 않았다.
그것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는 것이라, 아이린은 에반을 보다 이내 침대에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는 팔을 활짝 벌려서, 그 가느다란 팔을 툭툭 치며 입을 열었다.
“안 누워요? 나 옆 자리 비었는데.”
“설마요.”
에반이 재빠르게 아이린의 옆에 자리를 잡자, 아이린은 그대로 에반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다.
처음으로 이렇게 팔베개를 해주었던 것이 언제였더라. 아마도 에반이 크게 다쳤던 그때가 아니었을까.
아이린은 에전의 기억을 떠올리곤 희미한 피소를 지었다. 그땐 이렇게 껴안지도 못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이런 것이 오히려 편해서. 아이린은 종종 에반을 이렇게 끌어안곤 했다.
풋풋함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엔 편안함이 생겨났다. 누구보다도, 이 세상 어떤 사람보다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란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에반과 아이린 모두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이대로 자버릴까요?”
“아이들이 곧 집에 올 시간인데요.”
“애들은 로페나한테 맡기고...나 졸린데요.”
“공작님 명령이면 따라야죠. 저는 고작해야 후작이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에반은 자연스럽게 아이린의 쇄골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렇게 있는 것도 이미 여러번이라, 이제는 나란히 누워있는 것보다도 이런 것이 편했다.
아이가 없을 때엔 이러다가 자연스럽게 밤일을 치르곤 했지만...아이들이 큰 뒤로는 그런 것을 하기에도 여러모로 불편할 따름이었다.
이전에 한번 아서에게 걸렸다가, 대답할 거리를 찾지 못해 제대로 혼난 적이 있었으니까.
아카데미에서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이란 걸 깨달은 아이린이 아쉬운 듯 입술을 삐죽였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숨 쉬면 간지러운데요.”
“간지러우시라고 하는 겁니다. 도대체 얼마만에 이렇게 있는 건지...요즘 저한테 너무 소홀하신 게 아닙니까.”
실상은 에반이 기사단을 키우느라 바쁜 거였지만, 에반의 투덜거림에 아이린은 부드럽게 그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 에반의 외관이었다. 어쩌면 처음 보았을 때도 더 어려보이는 게 아닐까.
허나 그것은 아이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에반과 함께 있어서인지, 남들에게 똑같이 오는 세월이 이 두 사람만을 피해가는 것처럼 보였다.
로페나가 이전보다 훨씬 성숙해진 반면, 에반과 아이린의 외관은 결혼을 막 했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이다.
늘어난 수명, 그것이 지금은 좋을지 몰라도. 한편으론 씁쓸하기도 했다. 자신들이 쭉 젊게 사는 동안,
늙어가는 사람들은 자신들보다 먼저 떠난다는 사실이 아니던가.
두 사람의 머릿속에 동시에 그런 생각이 떠올라서, 서로 아무 말 없이 껴안는 동안 잠시 침묵이 오갔다.
“오늘 저녁은 뭐 먹을까요?”
아이린이 그렇게 묻자, 에반은 자연스럽게 입을 열어 대답했다.
“글쎄요. 오랜만에 스테이크를 구워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말이죠.”
“나는 아스파라거스 좀 구워줘요. 저번에 그렇게 구워먹었더니 괜찮더라고요.”
“저는 요리사가 아닌데...”
“그래서, 싫어요? 그만 안아줄까요?”
그 협박 아닌 협박에 에반은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오히려 허리를 끌어안는 손의 힘은 점점 더해져 가고 있었다.
“...애들 올 시간입니다.”
“좀 이따가 나가요. 어차피 로페나가 데려올 거잖아요.”
그 말에 아이린이 아쉬운 듯 혀를 차자, 에반은 그대로 아이린을 끌어안은 채 침대를 한 바퀴 데구르르 굴렀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에 아이린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게 또 나쁘진 않아 피식 웃음을 흘렸다.
창문으로 보이는 것은 아직까지 높게 떠있는 태양.
이제는 저물어가는 여름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아직까지 가을이 오기엔 멀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일상이 언제까지고 이어질 수 있을까.
저마다 책임감을 느끼곤 멍하니 창문을 응시하다, 이윽고 시끄러워지는 복도에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 평범한 날의, 평범한 오후.
에반과 아이린은 행복했다. 늘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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