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 8살 (5)
* * *
“괜찮아?”
아서는 꽤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도대체 자신이 레비를 귀찮아한다는 소문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평소에 레비에 대한 얘기는 누나에게도 잘 하지 않았건만, 언제 또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단 말인가.
사교에 관심을 그리 두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그에 대해 신경을 쓸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어, 난...괜찮아.”
“안 괜찮잖아. 그런 말 듣고 괜찮은 사람이 어디 있어. 그냥 솔직하게 말해, 기분 나쁘다고.”
여전히 불편한 듯 보이는 레비의 표정에 아서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 말에 연연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여기서 자기가 괜찮다고 한들 그걸 믿어줄지가 의문이었다.
자신이나 레비를 편하게 대해지만, 레비가 정말 자신을 편하게 생각하는 지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었고.
이럴 때 아빠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생각한 아서는. 이윽고 에반의 얼굴을 떠올리곤 작게 혀를 찼다.
애초에 아빠였으면 웃는 거 몇 번으로 해결했으리라. 스스로 반칙 수준의 외모를 지니고 있었으니,
첫눈에 반하지 않은 엄마가 그저 대단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나도 나름 괜찮게 생겼는데.’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아서는 그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고 싶었다.
신분간의 격차로 벌어진 문제가,
그리고 아까 그 멍청이들이 내뱉은 말이 만들어낸 상처가 단번에 해결 될 리는 없었으니까.
“그거 알아?”
“뭘...?”
“우리 아빠도 고아야. 정확히는 나중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거지만.”
별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그 이야기를 꺼낸 아서를 레비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런 얘기를 왜 한단 말인가. 게다가 자기 할아버지가 없다는 얘기를 너무 쉽게 꺼내서,
멍청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레비의 표정에 아서는 피식 웃었다.
“내가 아빠처럼 말을 잘하진 못해서 이렇게 밖에 못 말하는데...그런 거 신경 안 쓴단 소리야. 평민이면 뭐 어때, 내가 공작 아들인데.”
“...네가 공작 아들인 게 뭐.”
“책임진다는 소리잖아. 그런 소리 못 듣게.”
순간 열이 확 번져서, 펑 소리가 레비의 귓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 흑백으로 보였던 정원의 일부가 제 색을 되찾는 듯한 그 풍경 속에서, 아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유리스로 와. 기사로 만들어줄 테니까.”
“어, 어...”
조금은 벌겋게 물든 얼굴이었지만, 아서는 그게 기사로 만들어주는 것에 기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뭐, 아빠처럼 누군가에게 말하기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풀렸다면 그걸로 다행이지 않은가.
아서가 웃자, 레비는 그 미소를 피해 고개를 휙 돌렸다. 어쩐지 눈이 마주치기가 힘들어서, 푹 숙여진 고개가 땅으로 향했다.
로벨리아는 그런 두 사람을 아무말 없이 바라보다가, 이윽고 한심한 듯 아서를 흘겨보았다.
자기가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는 바보라니. 저런 동생을 둔 자신이, 어쩐지 조금 불쌍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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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레비는 별관으로 갈 거야. 누나는?”
“교실로 가야지. 수업 들어야 하니까. 진짜 별관으로 갈 거야? 너 그러다가 퇴학 당하면 어쩌려고.”
“아빠는 아카데미 같은 거 안 다니고 잘만 기사 했잖아. 나도 그렇게 해야지. 레비랑 가서 대련도 마저 해야 하니까.”
그 말에 레비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자,
로벨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러다가 엄마나 로페나 씨에게 걸리면 어쩌려고 그러는 건지.
만약 걸려서 혼나게 되더라도 도와주지 않아야 겠다고 결심한 로벨리아는, 이윽고 깔끔하게 뒤돌아선 채 손만 가볍게 흔들어주었다.
뭐, 어차피 이제는 카일도 얌전히 잘 있지 않던가. 비록 요즘 들어 확 얌전해진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덕분에 로벨리아의 아카데미 생활은 훨씬 편해졌다.
카일이 변한지도 어느덧 세달 째, 이제는 확실히 ‘변했다’라고 말할 수 있었으니,
평소처럼 반에 들어선 로벨리아의 시선은 당연하게도 카일에게 향했다.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는 모습이 익숙해질 줄이야.
예전엔 공부를 하라고 해도 안 하던 카일이 공부를 하고 있는 게, 이제는 반의 학생들에게는 익숙한 모습이 되었다.
“로벨리아, 아서랑 있었어? 안 보이던데.”
“응, 아서랑 있었어.”
“근데 말이야. 아서는 좋아하는 애 없어? 늘 교실에 안 오니까 아는 게 하나도 없네.”
라헬이 묻자, 로벨리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이미 사실상 떠난 배라는 걸 얘는 알고 있을까.
아서는 그런 쪽으로 꽤나 무감각한 편이었으니, 어쩌면 나중에 한참 자라서도 그럴 지도 몰랐다.
“아마 힘들 걸.”
“...역시 그렇겠지.”
김빠진 듯 어깨를 축 늘어트린 라헬이었지만,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흐르자 다시 괜찮아진 듯 어깨를 으쓱였다.
로벨리아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것에 연연하여 우울해지면,
괜히 자기 입장만 난처해지지 않겠는가. 그 레비라는 사람한테 무어라 하기도 곤란하고.
“다음 시간 과목이 뭐더라?”
“아마 체육일 걸. 근데 난 다리 아프다고 말한 다음에 쉴 거야. 너는?”
“난 움직여야지. 난 체육 좋아해.”
그 말에 라헬은 질린 듯 혀를 베 내밀었다.
기사가 되고 싶다는 아서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로벨리아였지만,
사실 로벨리아도 아서 만큼이나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다.
수업을 듣는 아서라고 하면 딱 맞지 않을까. 검을 다뤄도 어지간한 기사만큼 다룰 줄 알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목검을 들고 옷을 갈아입은 로벨리아가 운동장으로 향할 때쯤, 복도를 걷던 카일과 로벨리아는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에 카일이 시선을 거두자, 로벨리아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쫓아볼 따름이었다.
이전과는 달리 그저 차가운 시선이 익숙하지가 않아서, 꼭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저리 달라진 건지. 이유라도 속 시원하게 말해준다면 괜찮을 텐데...허나 그걸 또 묻기엔 민망하지 않은가.
“로벨리아, 안 가?”
그 뒤로도 잠시 카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로벨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운동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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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란 게 뭔지 알려주지.
카일은 몇 달 전 카이셀이 했던 말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로벨리아에게 했던 10번의 고백이 모두 실패로 끝나고 했던 고민들, 과연 자신의 문제는 무엇인가.
외모? 카일이 가장 자신있는 부분이 외모였다. 비록 아빠의 친구인 에반이라는 사람만큼은 아니었지만,
아서와 비교했을 때 그래도 자신이 아주 미세하게 더 낫지 않을까.
검술이야 늘 자신 있었고, 행동, 그외 미적인 감각까지 어디 하나 빠지지 않을 만큼 자신은 완벽했다.
그리고 카이셀은 그 점을 지적했다. 늘 겸손해야 하는 것이 어른이란 말에 카일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겸손이라는 말과 거리가 멀었던, 벼가 익으면 숙이는 것이 아니라 수확해야 한다는 것이라 생각했던 카일은 그때부터 행동거지를 천천히 고쳐나가기 시작했다.
들어오는 선생님을 놀리기 바빴던 수업 시간엔 카이셀의 말을 따라 진지하게 공부를 했고,
매 수업 때 들었던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놀아야 하는 쉬는 시간에 복습을 진행했다.
당연히 로벨리아와 마주칠 시간이 확연히 줄어들었지만, 카일은 그 어느 때보다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황태손 전하, 어른이 되세요.
검술 훈련에 박차를 더하고, 듣지 않았던 교양 수업을 졸지 않고 듣는 것에 기어코 성공했을 때.
카일은 서서히 자신을 보는 시선을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로벨리아가...나를 보고 있어.’
자신이 로벨리아를 바라보는 것보다, 로벨리아가 자신을 쳐다보는 횟수가 더 많아졌다는 것에 카일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정말 아빠가 말한 대로 행동하니까 변화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더 말도 잘 듣고, 어느새 평소 카일에게 붙었던 골칫덩어리라는 별명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이제는, 슬슬 자신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줄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도에서 로벨리아와 눈이 마주쳤을 때, 카일은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무시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직 무언가를 보여주기엔 일렀으니까.
체육 시간에 하는 것은 늘상 그랬지만 검술 대련이 반복되곤 했다.
남자들 사이에서 상위권의 실력을 가지고 있던 카일은 조용히 숨을 내뱉었다.
이제까지 숨기고 있던 실력을 제대로 보여준다면, 아마도 그건 지금이었을 테니까.
시선을 돌려 로벨리아의 위치를 확인한 카일이 옆 자리 남자애에게 말을 걸어 자리를 바꾸었다.
그쪽이 로벨리아에게 훨씬 더 잘 보이지 않을까.
그리고 시작된 대련에서, 카일은 이전과는 달리 압도적인 실력을 보이며 차례차례 상대를 쓰러트려 나갔다.
애초에 재미가 없다는 이유로 숨기던 실력이었으니, 카일이 진지하게 검을 휘두르자 순식간에 쓰러지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하나둘, 이전에 한 번 패했던 상대마저 단 한 합에 카일이 쓰러트리자.
체육을 담당했던 교수는 조금도 지친 기색이라곤 없는 카일을 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스, 승자는 카일 프레이아 디 에반젤리움!”
카일에게 쏟아지는 것은 무수한 시선과 박수였으나,
카일은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어느 한 방향을 향해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그 시선의 끝에 있는 건 로벨리아. 로벨리아가 그것을 깨닫곤 어깨를 움찔 떨자,
카일은 로벨리아가 도망치기 전에 재빨리 다가가 시선을 마주쳤다.
그렇게 한참동안 정적이 흘렀을 때, 카일은 어색하게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그리고는 얼굴을 붉히더니, 이윽고 몸을 베베 꼬면서 수줍게 입을 열었다.
“그, 나...이번엔 조금 어른스러웠지?”
“...뭐?”
아까의 그 늠름한 모습과는 완전 다른 모습에 얼떨떨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던 로벨리아는 이내 무언가를 깨닫곤 눈을 질끈 감았다.
어른스럽냐고 갑자기 묻는 이유가...설마.
“너, 내가 저번에 말했던 그것 때문에, 여태 그렇게 행동한 거야?”
“역시 로벨리아는 알아주는구나! 맞아!”
해맑게 웃는 카일의 얼굴을 본 로벨리아는 그대로 이마를 탁, 내리쳤다.
설마 했지만, 정말로 그런 걸 줄이야. 도대체 이 바보 멍청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눈앞이 깜깜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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