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화 〉 8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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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과 아이린은 아이의 교육에 대해 꽤나 각별한 신경을 쏟았다. 공부를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기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공작가의 자제들이 글씨 하나 못쓴다는 소문이 돌도록 둘 수는 없는 터라, 이곳저곳을 알아보던 두 사람은 결국 아이들을 황립 아카데미에 입학시키기로 결정했다.
에반이 이전에 했던 일들 때문에 입학비 또한 면제였고, 황제가 만든 아카데미였기에 교육 수준 또한 높은 편이었다.
사립 아카데미에 비해 커리큘럼 또한 너무 빡빡하지 않았으니, 고심 끝에 입학하게 된 아서와 로벨리아는 나름 친구들을 잘 사귀는 편이었다.
애초에 모나지 않은 성격이지 않던가. 에반은 아카데미에서 잘 적응하는 두 아이를 보며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로벨리아야 애초에 성격이 괜찮았으니 문제없었지만,
무뚝뚝한 편인 아서도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잘 지내 나름 시험에서 좋은 성적도 받아오고 있었다.
“학교 가기 싫어.”
허나 잘 다니는 것과 별개로, 학교에 다니는 걸 좋아하는 아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것은 로벨리아 또한 마찬가지라, 아직 졸음기가 사라지지 않은 눈을 비비는 로벨리아의 표정은 뾰루퉁할 따름이었다.
차라리 오늘이 쉬는 날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필이면 자신에게 고백한 날이 월요일인 건 또 뭐란 말인가.
“나도 그래.”
아서가 그리 대답하자, 로벨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아카데미를 바라보았다.
교실에 들어가면 또 친구들에게 뭐라고 말해주어야 할지.
이제는 손가락으로 세어도 꽉 찰 만큼 고백을 받았으니, 뒷수습을 하는 것마저 지겹게 느껴졌다.
어렸을 때 알고 지내온 사이라 망정이지, 만약 모르는 사람이 그랬더라면...아마 아빠에게 말해서 해결하지 않았을까.
로벨리아의 표정이 어둡다는 것을 알아차린 아서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카일의 일이 신경 쓰이는 것이리라.
허나 이제 와서 고백을 그만하라고 말하는 것도 우습고, 게다가 카일이 그렇게 하는 건 장난도 아니었다.
분명 진심으로 좋아서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닐까. 평소 에반과 자주 붙어있던 아서는 황태자의 얘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황태자를 닮은 것이라면, 분명히 진심으로 하는 것이리라. 허나 그렇다고 두 사람 사이에 간섭하기에도 애매했다.
누나가 곤란해하는 걸 보는 게 은근 재밌기도 했지만, 카일이 진심인데 자신이 무어라 말리겠는가.
다만 사이가 깨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으니, 아서는 가방을 로벨리아에게 휙 하고 던지며 입을 열었다.
“나 기사 견습생들 있는 쪽으로 갈 거야. 내 가방 좀 걸어놔줘.”
“또? 너 그러다가 로페나 씨한테 걸리면 어쩌려고.”
로페나 라는 이름에 아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엄마나 아빠도 잘 혼내지 않는 두 사람을 유일하게 혼내는 사람이라 하면 로페나였으니,
잠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아서가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됐어. 어차피 내가 이렇게 수업 째는 거 모를 걸.”
“저번에도 그러다가 걸렸으면서.”
“그때는 내가 안일했지. 이번에는 달라, 그리고 공부 같은 건 못해도 돼. 내 꿈은 기사라니까.”
로페나 씨에게 잡혀 엉덩이를 맞은 게 엊그제 같은데, 반성의 기미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는 아서를 본 로벨리아는 작게 혀를 찼다.
자신이 이런다고 말을 들을 녀석도 아니고,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서는 싱긋 웃으며 기사 견습생들이 모여있는 별관을 향해 사라졌다.
“...나는 어떡하냐고.”
교실에 들어가면 한 번 난장판이 벌어질 확률이 컸다. 카일의 성격상, 고백에 실패한 다음날에 얌전히 있던 적이 없었으니까.
이번엔 또 무슨 이벤트를 준비했을지, 걱정으로 푸르죽죽해진 얼굴을 한 로벨리아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후우.”
잠시 심호흡을 하고, 그렇게 천천히 교실 문을 열었을 때.
앞에 나타날 무언가를 대비해 눈을 질끈 감은 로벨리아 앞에 나타난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조용한 교실, 그리고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학생들이 있었을 뿐.
“아, 로벨리아 왔어?”
팔에 덥썩 달라붙는 것은 친구인 라헬이었다. 로벨리아가 무슨 일이냐고 눈짓하자, 라헬은 헤헤 웃으며 의자가 있는 쪽으로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 봐봐. 이상한 거 하나 보이지?”
“...카일이, 가만히 있는데.”
책상에 얌전히 앉아 있는 사람은 카일이었다.
황실 특유의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를 지닌, 황실의 핏줄을 타고났음을 여실히 알리고 있는 소년.
평소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진중한 표정을 한 채 앉아있는 카일은,
앞에 교과서를 펼친 채 무언가를 끊임없이 적어내려가고 있었다.
“나 쟤 공부하는 거 처음 봐. 혹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나도 잘 모르겠어. 어디 아픈가?”
학생들은 모두 홀린듯이 카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태자의 어릴적 모습을 쏙 빼닮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던 녀석이 얌전해지다니,
혹여 황태자가 직접 훈계라도 하는 게 아닐까. 허나 그럼에도 안심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일 뿐이었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또 원래의 모습으로 변할 거라고, 다들 은연중에 그리 확신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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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일 걔 머리 이상해졌다면서.”
한달이란 시간이 흘렀을 때, 학생들은 모두 카일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수업시간의 태도 또한 성실해지고, 로벨리아에게 며칠 마다 한 번씩 고백하는 것도 완전히 사라졌다.
로벨리아 스스로 ‘고백 안 하나?’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 학생들은 모두 카일이 무언가 새롭게 결심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몰라, 황태자 아저씨한테 혼났나?”
“잘 됐잖아? 너도 고백 너무 많이 받는 거 안 좋아했고.”
“누나라고 해, 내가 너보다 일찍 태어났다는 걸 항상 가슴속에 새겨두고 있으라고.”
“...누나는 무슨, 기껏해야 몇분 일찍 태어났으면서.”
잠시 하품을 내뱉은 아서는 익숙한 듯 로벨리아를 향해 가방을 던졌다.
카일이 얌전해졌다면 더 이상 지켜볼 이유도 없고, 아마 조금 훈련에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
로벨리아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아서는 손을 흐느적거리며 흔들곤 늘상 그랬듯이 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이, 왔냐.”
“할아버진 또 여기 어쩐 일이래요. 설마 로페나 누나한테 말하려고요?”
“그럴 리가. 나는 네가 기사하겠다는 거 찬성이야.”
아서가 별관에 나타나자, 가장 먼저 나타나 반겨주는 것은 크리스였다.
기사들을 종종 가르치기 위해 오긴 했지만, 요즘 들어 자주 오는 건 아마 자신 때문일까.
아서가 싱긋 웃자, 따라 웃은 크리스가 그 우악스러운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죽이려고요?”
“쓰다듬으려고 한 건데.”
“할아버지 손 너무 커요. 나 이제 8살이란 거 까먹지 좀 마세요.”
그러자 또 크리스의 표정이 어두워져서, 아서는 허리춤에 걸린 목검을 든 채 크리스에게 살짝 내밀었다.
여기에 왔다면, 할 일이라 해봐야 하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 건방진 모습을 본 크리스는 씨익 웃었다.
이전처럼 온화한 웃음보다는, 역시 이런 사악한 미소가 그에게 조금 더 어울리는 것처럼 보였다.
따아악!
한 손으로 가볍게 쥔 검이었지만, 아서의 몸은 아직 그것을 견뎌내기에 완전히 성장하지 않았다.
애초에 지도 대련인 만큼, 크리스는 아서를 제압하기 보다는 조금 올바른 방향을 알려줄 뿐이었다.
검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해야하는지, 무슨 마음으로 검을 잡아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목표로 기사를 추구해야하는지.
아이린을 닮은 아서였지만, 막상 이렇게 가르치다보니 에반의 어렸을 때가 생각나 괜스레 웃음이 새어나왔다.
에반도 이렇게 어렸을 때가 있었는데, 도대체 언제 그렇게 커서 애 아빠가 된 건지.
“그래서, 카일은 요즘 어떠냐?”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알아서 잘 하겠지.”
“누나 걱정된다면서 쉬는 시간마다 교실로 간 녀석 뭘 몰라. 아주 속일 사람을 속여라.”
“내, 내가 언제 그랬는데요...!”
그건 또 언제 알아차렸는지, 순간 아서의 움직임이 흐트러졌다는 걸 알아차린 크리스는 목검을 가볍게 돌려 아서의 균형을 무너트렸다.
아직 어린 탓인지, 감정에 쉽게 움직임이 격해지곤 했으니까. 오금을 걷어차고,
넘어지는 아서의 팔을 붙잡은 크리스가 멍하니 입을 벌린 아서의 입에 사탕 하나를 툭 집어넣었다.
‘아직 한참 멀었어.’
뭐, 아직 8살이었으니까. 에반 만큼은 아니더라도, 마스터가 되기엔 충분한 재능이었다.
“...아빠는 제 나이 때 어땠어요?”
자리에 풀썩 주저앉은 아서의 말에 크리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의 에반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꼭 감정이 없는 인형과도 같아서, 자신이 휘두르는 검술은 일주일이면 에반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허나 그것을 꼭 말해줄 필요가 있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살짝 웃은 크리스가 입을 열었다.
“네 아빠는 어렸을 때부터 범상치가 않았지. 애초에 그랜드 마스터란 경지에 괜히 올라갔을 거라 생각하는 게냐?”
“그럴 리가요. 그냥 궁금해서 한 말이에요. 나는 이런데...아빠는 그냥 어땠을까 하고요.”
“너무 네 아빠와 스스로를 비교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시대가 다르지 않느냐. 에반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너도 잘 알고 있고.”
“뭐...그렇죠.”
절멸에게 세뇌당해 꼭두각시처럼 살다가, 나중에 세뇌를 풀고 직접 절멸과 고룡을 처치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어렸을 때부터 질리도록 들어온 이야기 중 하나였다.
지금은 평화로운 시대였다. 절멸 같은 대규모 반동 세력도 없을 뿐더러, 가장 큰 위험이라 해봐야 북부 야만족의 준동이었으니까.
허나 북부 야만족이라 한들, 감히 제국을 노릴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제국이 가진 전쟁 억지력, 그 한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당분간의 평화를 구가할 수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아빠 때문에 남진(??)은 100년간 못하지.’
동화책으로 나올 만큼 유명한 이야기를 지닌 사람을 부모로 두었기에, 당연하지만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빠인 에반이 해냈던 이야기, 홀로 본드래곤을 잡고 더 나아가 고룡까지 토벌했다는. 보통 사람이라면 이룩할 수 없는 그 영웅담.
그런 것에 어쩌면 좌절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서는 오히려 그런 얘기에 기뻐했다.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을 테니까. 아니, 설령 그렇게 될 수 없더라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오도독
대련에서 부러진 목검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입 안의 사탕을 깨물곤 크리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대련에서 무언가를 해볼 생각은 없었고, 이제부터 체력을 조금 키워볼 생각이었으니까.
그렇게 한 곳에 있던 아령을 집어든 아서는 이내 한 쪽을 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도 없던 한 구석에서 혼자 검을 휘두르는 아이. 아마도 자신과 또래처럼 보여 유심히 바라봤지만,
자신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저 여자애는 누구에요?”
푸른색의 머리카락을 지닌 여자 아이, 이 별관에 온 뒤로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기에 묻자 크리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입술을 떼었다.
“며칠 전부터 여기 와서 훈련 받고 있는 아이야. 이름은 레비. 아카데미 학생은 아니고, 평민이라 기사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음, 나랑 동갑이죠?”
“아니, 너보다 한 살 많아. 너랑 대련하면...도움이 될 거다. 꽤 실력이 있거든.”
실력이 있다는 말에 아서는 여자 아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항상 크리스와 대련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상대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으니.
자리에서 일어난 아서는 목검을 쥔 채 여자 아이를 향해 다가갔다. 자신보다 한살 많다고 했던가.
“...뭐야?”
아서가 다가오자, 그 인기척을 느낀 레비가 아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이미 익히 알고 있던 터라, 레비는 아서가 입을 열 때까지 조용히 응시했다.
“누나...라고 해야 하나? 누나 한테도 누나라고는 잘 안 하는데. 아무튼,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할 말이라고 하면?”
자신을 응시하는 그 파란 눈동자가 꼭 엄마인 아이린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이렇게 묘한 감정이 드는 것은.
자신이 키가 조금 더 작다는 걸 드러내지 않기 위해 까치발을 살짝 든 아서는, 이윽고 목검을 두 손으로 쥔 채 입을 열었다.
“한 판 붙죠.”
꽤 비슷한 색을 지닌 푸른 눈동자가 허공에서 맞닿자, 레비는 이내 피식 웃으며 검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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