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 8살 (2)
* * *
“...로벨리아가 고백을 받았다고요.”
머리를 한데로 묶은 아이린이 수저를 든 채 말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달려오기에 무슨 얘기를 하려나 했는데, 난데없이 고백이라니.
아이들끼리 고백도 좀 할 수 있고 그런 게 아닌가. 지금 사귄다고 결혼까지 가는 것도 아니고. 아이린의 반응이 의외로 차가운 걸 깨달은 에반은 쓰게 웃었다.
“아이린, 카일이 로벨리아한테 고백했다니까?”
“에반도 나한테 고백했잖아요.”
“동화책에선 엄마가 고백했다고 나왔는데!”
“그거 전부 거짓말이라고 엄마가 몇 번을 말했니. 이 반지도 아빠한테 받은 거야.”
아서의 말에 아이린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여주었다.
다이아몬드로 만든 반지는 반지 함에 있었으니, 평소에 항상 차고 다니는 반지는 에반이 고백할 때 주었던 에메랄드 반지였다.
그리고 뭐, 카일 정도면 괜찮지 않은가. 아이린은 오히려 이 상황이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에반을 닮아서 여럿 남자를 홀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카일이 로벨리아를 꽉 잡아주는 게 나을 테니까.
“저 지금 진지한데.”
“조용히 하고, 아서 검이나 좀 가르쳐주세요. 일주일 뒤에 아카데미에서 검술 시험인 거 몰라요?”
“...저 삐칠 겁니다.”
“무슨 애에요? 에반, 그러지 말고 여기 와서 로제 좀 잠시 안고 있어요. 나 서류 좀 봐야 하니까.”
에반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그 말을 거절하지 못했다.
사실 크게 일을 벌이기에도 애매한 일이었으니,어린 아이들이 사귄다고 한들 누가 무어라 하겠는가.
로제를 안아든 에반은 능숙하게 등을 두드려주었다. 방금 이유식을 먹었다고 했던가,
이윽고 로제가 트림을 내뱉자 로벨리아를 바라본 에반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카일이 뭐라고 고백했길래 아서가 때린 거야?”
“...음. 그냥 평범했어요. 카일 치고는.”
로벨리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갔다. 7살치고 꽤 화려한 고백이었지만, 카일은 원래 그런 아이였다.
남들보다 조금 과장되게 행동하고, 자신이 황태자의 아들이라는 것을 좋은 의미로 잘 이용하는 편인 아이.
제 또래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권위를 버렸지만, 아무래도 황태자의 아들에게 정말 친해지고 싶어 다가가는 적은 편이었다.
그나마 아주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낸 아서와 로벨리아가 전부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카일이 로벨리아에게 고백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소꿉친구에게 고백하는 것은 꽤 흔한 일이지 않은가. 물론, 에반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허나 아는 것과 괜찮게 생각하는 건 완전히 다른 영역이었다.
자신의 딸이 벌써 남자친구가 생긴다니, 마음 같아서는 24시간 지켜보고 싶어도...
그랬다간 주책이란 소리를 들을까 한숨만 푹푹 내쉴 따름이었다.
“이번에는 꽃 하나 주면서 고백했어요. 주변에 양초 같은 거 막 깔아놓고.”
“카일 치곤 평범하게 했구나.”
“그렇죠, 카일치고는. 내가 화려하게 하는 거 싫어하는 거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랬을 거예요.”
“그래서, 거절은 잘 했니?”
에반의 말에 로벨리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고, 에반의 눈치를 살피며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거절은 아직 안했는데. 그, 나중에 대답하겠다고 했어요. 그래도 괜찮...죠?”
“설마, 카일을 좋아하기라도 하는 건 아니지?”
“싫고 좋고가 아니라, 단번에 거절해버리면 나중에 얼굴 보기가 조금 그렇잖아요.”
로벨리아는 뺨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어렸을 때부터 본 사이기도 했고, 단칼에 거절하면 앞으로 계속 보기 힘들지 않겠는가.
하여 단번에 거절하진 않았다. 다만, 카일이 조금 어른스럽게 행동하면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했을 뿐.
“어른스럽게 행동한다는 건?”
“그냥 해본 말이에요. 어차피 나도 카일은 그냥 동생 같단 말이에요. 아마 카일도 그냥 장난 삼아 한 말이지 않을까요?”
“개가?”
단순히 장난이라 치부하기엔 많이 진지한 모습이었지만, 로벨리아는 그것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전부 잊을 일 아닌가? 아서는 조금 회의적인 입장이었지만, 시무룩한 에반의 표정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만약 카일이 진심 같았다고 계속 말하면...아무래도 아빠의 고민이 많아질 것 같았으니까.
“아마 금방 해결될 거예요.”
“그렇겠지?”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어차피 애들 일인데, 아이들이 해결하게 놔둬야죠.”
아이린까지 그리 말하자, 에반은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더 참견했다간 로벨리아가 싫어할지도 몰랐으니까. 제 딸에게 미움 받는 건, 인생에서 단 한 번으로 충분했다.
생일 선물을 잘못 줬을 때 로벨리아가 보냈던 그 차가운 눈빛.
아직까지도 꿈에 나오는 그 눈빛에 에반은 어깨를 움찔 떨었다.
도대체 장인 어른은 이 감정을 어떻게 견뎌왔던 건지.
아무래도 나중에 한 번 연락을 해봐야 겠다고 생각하며, 에반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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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웠다더니, 머리에 혹만 하나 생긴 게 전부잖아.”
“저도 팔을 휘둘렀단 말이에요. 맞추진 못했지만.”
“에반 씨에게 들었어. 카일, 또 로벨리아한테 고백했다면서. 벌써 이번이 몇 번째니?”
카이셀은 제 아들을 보며 미묘한 심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에반의 자식들과 친하게 지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하필이면 에반의 딸에게 고백을 할 줄이야.
에반이 유독 제 자식들에게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단 것은 카이셀 또한 잘 아는 사실이었다.
로벨리아가 결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푸념했던가.
딸이 없는 카이셀은 이해하기 힘든 감정이었지만, 술을 마실 때면 제 자식 자랑을 늘어놓는 에반이 그저 조금 특이한 편이라 생각할 따름이었다.
뭐, 간혹 제 자식에게 남다른 애정을 품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고 카이셀이 카일에게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 있는 자식인 만큼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테오라드를 붙여 검술을 가리키고, 궁정 마법사들을 데려와 마법에 대해 배우게 하기도 했다.
다만, 카일이 하고 싶은 것 위주로 하게 놔둘 뿐이었다.
검을 배우고 싶다면 스승을 붙여주긴 했으나, 그것을 카일이 싫어한다면 카이셀은 기꺼이 그만두도록 하였다.
어차피 황제가 되기 위해선 거쳐야 할 과정들이었으니, 어릴 때만큼은 자유롭게 두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이번이 몇 번째지?”
“열 번째요.”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고 했지. 아마 다음에는 성공할 거다.”
카이셀의 말에 카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스칼렛이 그것을 어이없다는 듯 흘겨보긴 했지만, 카일은 제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음...나는 그러니까, 잘 모르겠어. 네가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면 몰라도, 너는 그냥 동생 같단 말이야.
“어른스러운 모습이 뭘까요?”
카일은 로벨리아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진지하게 생각했다. 어른스러운 모습이란 무엇일까.
로벨리아의 아빠처럼 멋진 기사가 되는 게 어른스러운 걸까?
카일이 묻자, 피식 웃은 카이셀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카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글쎄, 사람마다 다 기준이 달라서. 어른이라는 게 무어라 콕 찝어 말하긴 힘들지. 근데, 갑자기 그런 생각을 왜 하는 거지?”
“로벨리아가 어른스러운 남자가 좋대요.”
하, 카일의 말에 스칼렛은 순간 들고 있던 접시를 놓칠 뻔 했다.
갑자기 그런 기특한 생각을 왜 하나 했더니, 역시 여자 때문이었나.
어쩜 저렇게 제 아빠를 닮은 건지, 생긴 것도 카이셀을 그대로 옮겨 담은 것 같은데.
심지어는 여성 편력마저 제 아빠를 닮을 것 같아 스칼렛은 덜컥 겁이 났다.
처음 연애할 때만 하더라도 얼마나 고생했던가.
카이셀이 한 눈을 팔지는 않았지만, 과거에 있던 여인들이 매달리는 것이 문제였다.
카일이 그런 것을 반복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스칼렛이 카일을 걱정스레 바라봤지만. 카이셀은 큭큭 거리며 웃더니 카일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역시 넌 나를 닮았어. 어떻게 이렇게 닮았지? 스칼렛을 닮은 건 하나도 보이지가 않아.”
“제 성격은 엄마를 닮았는걸요.”
“그건 그렇지. 네가 내 성격도 닮았으면 지금쯤 여자친구 셋은 있었을 걸.”
“지금 그게 자랑이라고 하는 말이에요?”
“...나처럼 살지 말라고 하는 일종의 훈계였어. 반면교사 같은 거지.”
스칼렛의 눈치를 살핀 카이셀이 이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카이셀의 화려한 전적은...스칼렛 앞에서 절대 꺼낼 수 없는 과거였다.
결혼하기 전까지 얼마나 고생을 치뤘던가. 잠시 이마를 쓸어내린 카이셀은, 이윽고 카일을 가만히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아마도, 자신이 아는 카일이라면 저 마음을 포기할 것 같진 않았다.
아마 에반에게 아직까지 아무런 불평도 없는 걸 보아 그저 장난으로 넘기고 있는 게 아닐까.
로벨리아라면 카이셀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딸이 생긴다면 로벨리아 같은 딸이 있었다면 하는 상상을 종종 했으니까.
만약 카일과 로벨리아가 교제를 시작한다면...꽤 보기 좋은 한 쌍일 거란 생각이 들어서. 살짝 웃은 카이셀이 카일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어른스러운 게 뭔지, 아빠가 알려줄까?”
“...진짜요?”
“그럼, 내가 괜히 네 엄마를 만난 게 아니야. 고백도 어른스럽게 해서, 이렇게 결혼까지 한 거였으니까.”
“어른스럽긴 무슨.”
카이셀이 자신에게 고백했을 때를 떠올린 스칼렛은 헛웃음을 흘렸다.
고백도 제대로 못해서, 자신하고 동시에 고백하지 않았던가.
긴장한 나머지 창백해진 얼굴이란, 누가 보더라도 태어나 처음으로 고백하는 남자 같았다.
도대체 다른 여자들과는 어떻게 사귄 건지.
허나 카이셀은 그런 스칼렛의 헛웃음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카일이 공부를 하지 않아 이래저래 고민이 많지 않았던가.
진정한 어른, 그것을 구실로 카일을 교육시킬 생각을 하자 절로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만 같았다.
“내가 진짜 어른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그 사악한 미소에, 순수한 카일은 두 눈을 반짝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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