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화 〉 결혼식 (6)
* * *
아마도, 지금 이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으리라. 크리스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에반, 저 멀리서 아이들을 품에 안은 채 손을 흔드는 로페나,
그리고 저 정원의 끝에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을 아가씨.
자기가 에반의 주례를 서는 것이 맞나? 그런 의문이 들면서도, 크리스는 차마 그런 말을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에반이 제게 이런 것을 부탁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 점에 크리스는 약간의 위안을 얻었다.
어둡게 물든 하늘이 밤하늘처럼 보였다.
마법으로 어두워진 이 하늘 아래 빛을 발하는 것은 오직 새초롬하게 타오르는 촛불 이었으니,
중앙의 그 자그마한 불빛을 보던 크리스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머릿속으로 기억하던 주례사는 깔끔하게 잊은 채, 조금은 후련한 표정이었다.
“저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정확히는,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행운이란 것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설령 그 첫 만남이 불길하더라도, 어떤 순간에는 골칫덩어리가 되어 불편한 마음을 품게 되더라도.
결국 그 행운이란 이름의 귀결은 아름답게 끝나곤 했다.
에반과 눈을 마주친 크리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눈동자에 생기 하나 없던 녀석이 이젠 결혼식의 주인이 되었다.
목숨을 구했고, 이렇게 딸까지 얻어서...나름 괜찮게 살고 있지 않던가.
크리스는 지금 이렇게 된 이유의 대부분을 에반과 처음 만났던 날이라 믿었다.
아직까지도 기억 한 구석에 선명하게 남아버린, 어쩌면 별 것 아닌 것이라 여겼을 수도 있었을 그 날. 아마도, 그 날 또한 가을이었다.
“오늘의 주인공이 될 두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저는 지금 이 자리에 멀쩡히 있지도 못했겠지요. 그저 불명예스럽게 은퇴했을, 이름조차 기억되지 못한 흔한 기사에 불과했을 뿐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아마 로페나도 만나지 못했으리라. 어깨를 으쓱인 크리스가 다시금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말 재주가 없는지라,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요지는 그런 겁니다. 오늘 이 결혼식의 주인공들을 만난 것은 제게 행운이었고, 그렇기에 행복하게 살아왔다는 소리죠.”
마법으로 어둡게 물든 하늘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렇게 개식사를 천천히 마무리 짓는다.
어쩐지 눈이 시큰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 괜히 감성에 젖는 것일지 몰라도,
크리스는 괜스레 여기에 서있다는 사실조차 뭉클하게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제가 바라는 건 두 사람도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 지금도 행복해보이지만, 조금 더...저 같은 사람이 생각하는 행복이란 단어보다도 더욱 행복하게 말이죠. 그리고 그 시작이, 바로 오늘 이 결혼식이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화륵
선단의 앞에 있는 커다란 촛대에 불꽃이 치솟았다.
에반의 마나처럼 새하얀 색을 띤 불꽃이 일렁이자, 이윽고 마법사들의 손길에 의해 어두웠던 하늘에 새하얀 달 하나가 떠올랐다
. 그리고 그 옆으로 물감처럼 번지는 별을 보곤, 에반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신랑, 입장하겠습니다.”
짝짝
커져가는 박수 소리에 에반은 얼굴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을 향해 박수를 치는 사람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다가, 긴장한 자신을 보고 장난스레 웃는 카이셀의 모습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자신의 이름을 연호 하는 사람들, 장난 섞인 목소리로 불리는 이름에 어깨를 움찔 거리면서도. 그런 것들이 싫지는 않아 입꼬리가 씰룩일 따름이었다.
가끔 ‘에반 그는 신이야!’ 같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지금 기분에는 그런 것마저 웃어 넘겨줄 수 있었다.
여전히 자신을 치켜세우는 말에 면역이 없었다.
영웅 같은 칭호도 그래서 거절한 것이었고, 사실 후작이라는 작위 또한 그다지 마음에 쏙 들지는 않았으니까.
기사라는 신분이 가장 편했건만,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부르는 자신의 이름을 듣던 에반이 허탈하게 웃으며 앞을 바라봤다.
“뭐 하는 건가, 빨리 안 오고.”
아이린을 처음 만난 날이 생각나는 것도 같았다.
침대에 앉아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던 그때, 방문을 열고 들어온 크리스가 자신에게 뭐 하는 거냐고 물어보지 않았던가.
어렸을 적의 기억을 되살리며, 조금 뻣뻣한 자세로 걷기 시작한 에반의 몸이 마침내 크리스의 앞에 다다랐다.
“긴장했냐.”
“조금...많이 긴장하긴 했습니다.”
“어차피 금방 끝날 거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결혼식 다음이 아니더냐.”
둘이서만 들을 수 없는 실없는 대화가 끝나자, 에반의 주변에서 커다란 나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사들이 저마다 커다란 나팔을 하나씩 든 채 박자에 맞춰 불자,
황궁에서 온 군악대가 오와 열을 맞춘 채 양 옆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빠빠빠빠빠밤!
축가를 해줄 사람은 따로 있건만, 도대체 저들은 무어란 말인가.
에반이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자, 크리스는 에반에게 슬쩍 머리를 내밀어 속삭였다.
“조용하면 이상하니까, 네가 입장할 때 음악을 깔아주겠다며 직접 왔다더군. 그냥 무시해라, 네가 멍하니 있으면 어떡하냔 말이다.”
“...알겠습니다.”
후우, 조용히 무거운 숨을 내뱉은 에반이 등을 돌려 앉아있는 내빈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시선을 하나씩 마주치며, 이어 허리를 숙여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다시금 쏟아지는 박수에 어색하게 웃기를 잠시, 이어 에반과 모든 사람의 시선은 정원의 끝을 향했다.
신랑이 입장하고, 이제 그 뒤를 이어서 들어와야 하는 사람이라면 한 사람 뿐이었으니까.
차마 가슴이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아서, 에반은 가슴을 꾹 누른 채 앞을 조용히 응시했다.
심장의 박동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저 문이 열리고, 그 다음에 들어올 아이린의 모습이란 에반의 상상력으로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입장 전에 얼굴을 봤다면 모를까, 자신 또한 결혼식이 시작된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 아니던가.
그렇게 엉겁과도 같았던 시간이 흘렀을 때, 크리스가 그 고요한 정원에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부, 입장.”
순간 저 멀리서 모습을 드러낸 순백의 여인이란, 그 공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말을 잃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팔 소리도, 이 공간을 가득 메우던 박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공작의 손을 가볍게 쥔 채 앞을 향해 걷는 아이린 유리스라는 여인의 모습은,
이 순간 엘프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이나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꽃이 색을 잃었다. 별이, 달이 빛을 잃어 마치 한 사람에게 그 모든 것이 집중된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아마도 이전에 이 정원에서 이것과 비슷한 장면을 보았던 기억이 있었지 않던가.
작게 입을 벌린 에반의 모습에 아이린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새하얀 머리카락, 그 뒤에 이어지는 새하얀 면사포, 새하얀 장갑과 드레스.
순백에서 무엇 하나 벗어나는 것이 없는 모습이었건만. 새하얗게 빛나는 그 사이에서도 푸른 눈동자만큼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아이린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쯤, 에반은 제게 향하는 한 시선을 느꼈다.
아이린의 옆에서 그 손끝을 가볍게 잡고 있는 노인, 공작의 시선이 제게 닿았음을 깨달은 에반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예전과는 달리 많이 유순해진 눈빛이었다.
처음 아이린이 임신했다는 걸 알려주었을 때만 하더라도 얼마나 눈빛이 무서웠던지.
허나 시간이 흐르고, 이제는 장인어른이란 호칭에 꽤 익숙해진 그였기에 에반에게 작게 웃어줄 뿐이었다.
흩날리는 꽃잎을 헤친 아이린이 에반의 앞에 서자, 공작이 물러나는 것을 확인 에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래서 미리 오지 말라고 하셨던 거군요.”
“에반이 참기 힘들어할까봐, 그렇게 말해두길 잘 했죠?”
그 나른한 목소리에 또 다시 웃음이 새어나온다. 확실히, 아마 신부대기실에서 이 모습을 봤더라면 여러모로 참기 힘들었으리라.
지금 이 상황에서도 이성과 본능이 충돌하는 경험을 하고 있었으니, 눈을 지그시 감은 에반이 이내 옅게 미소 지으며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예쁘십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에반도 잘 생겼네요. 항상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조금 익숙해지실 필요가 있으실 겁니다. 오늘이 지나면, 매일 봐야 하는 얼굴일 테니까요.”
“그거 좋네요.”
크리스가 서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 아이린은, 이윽고 에반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항상 바라던 거였으니까.”
#
늘 보던 얼굴이었다. 자고 일어나서도, 자기 전에도, 밥을 먹으면서도 보던 얼굴이었는데.
오늘 따라 왜 이렇게 서로의 얼굴이 낯설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마치 처음 마음을 자각했을 때가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처음 연심을 깨닫곤, 눈이 마주칠 때마다 가슴에서 피어오르는 열기에 뺨을 매만지던 그때의 기억.
고작해야 1년 전이었을 뿐인데, 꽤 오랜만에 느끼는 이 설렘에 에반과 아이린은 붉게 달아오른 뺨을 숨기려 고개를 살짝 숙였다.
허나 그럼에도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반지에 박힌 다이아몬드가 서로의 모습을 비추듯, 그 보석과도 같은 눈동자는 시간이 흐름에도 서로의 눈을 담고 있었다.
처음 만난 이후로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 눈동자였으니,
흘러 지나가버린 시간을 떠올린 두 사람은 짜기라도 한 듯 어깨를 으쓱인 채 손에 들린 부케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이린은 그 부케에 묘한 감상을 느꼈다.
자신이 이걸 직접 들고 있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이렇게 에반의 앞에서 이런 걸 들고 있게 될 줄이야.
언젠가 들게 된다면, 누군가 던진 것을 받아드는 것이 전부일 거라 생각했건만.
드레스를 입고 들어올 때만 하더라도 실감이 되지 않았던 결혼식이, 이제야 조금 체감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럼, 신부와 신랑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축가를 준비해주신 분이 계십니다.”
축가라는 말을 들은 아이린은 조용히 사람들이 있을 하객석을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키는 사람이란 한 사람 뿐이었으니,
제국의 황태자인 카이셀이 일어남에 사람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이 상황에 눈을 동그랗게 뜨기 시작했다.
나팔을 불던 군악대마저 불던 악기를 떨어트리고, 심지어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난 채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오직 이 자리에서 에반과 아이린만 알고 있던 그 사실에 모두가 경악하자,
스칼렛에게 옆구리를 쿡쿡 찔리던 카이셀이 헛기침을 내뱉곤 입을 열었다.
“음, 내가 하겠다고 한 건데. 설마 싫나?”
누가 그 말에 토를 달 수 있을까. 그렇게 축가를 부르기 위해 카이셀이 텅빈 정원 한 구석에 서자,
사람들은 모두 눈을 부릅 뜬 채 그 모습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상황에서 진심으로 웃을 수 있는 사람이란, 역시나 에반과 아이린 뿐이었다.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카이셀의 노래 실력을 떠올리면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