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 결혼식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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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보니 어느덧 자연스럽게 찾아온 아침, 이상하리만치 가벼운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본다.
언제 일어난 건지 사라진 아이린, 그리고 가지런히 개진 침대에 자그맣게 써져있는 작은 쪽지에 적혀있는 글씨 ‘조금 이따가 봐요’.
조금 이따, 라는 말에 피식 웃는다.
지금부터 몇 시간이 더 흐르면 결혼식일 테니, 식장에서나 만나자는 그 말에 조용히 얼굴을 쓸어내린다.
왜 일까, 이토록 긴장이 되는 이유는. 다른 날과 크게 다를 것도 없을 텐데, 자꾸만 떨리는 가슴을 천천히 쓸어내린 에반이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부산스러워야 할 복도가 조용했다. 마치 오로지 자신만이 이 복도를 걸었으면 하는 것처럼.
에반은 복도를 걸으며 주변을 살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정원엔 이미 몇 사람들이 하얀 좌석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정원에 갔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오히려 더 아름다워진 것 같은 정원의 한 가운데에는 장미 넝쿨로 장식된 하얀 터널이 있었다.
오늘을 위해 장식된 여러 가지들을 천천히 보면서,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사람이 보일 때까지, 익숙한 얼굴이 보일 때까지 걷던 에반은 저 멀리서 보이는 얼굴에 작게 미소 지었다.
“주인공이 이렇게 늦게 일어나면 어떡하나. 그러게 일찍 잤어야지.”
“...글쎄요. 다들 너무 일찍 준비하는 거 아닙니까? 결혼식이라 해봤자 몇 시간이나 남았는데요.”
“네가 손님을 받아야 할 거 아니냐. 결혼식 처음 해봐?”
“네.”
그럼 처음이지, 결혼을 두 번이나 할 만큼 살아본 적도 없었다.
에반의 대답에 멋쩍은 표정을 지은 크리스는 헛기침을 내뱉곤 미묘한 표정으로 에반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서, 그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이 모습이 괜스레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그 말라 비틀어졌던 몸은 탄탄해졌고, 생기 없던 두 눈엔 이제 남들보다도 더 생기가 가득했다.
성격은 훨씬 괜찮아졌고, 웃기도 많이 웃었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던 그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무얼 그리 빤히 쳐다보십니까?”
“벌써 10년인가. 내가 너를 처음 만난 게.”
“정확히는 11년이죠. 10살 때 뵈었으니까요.”
“그 때는 내 말에 토 다는 건 꿈도 꾸지 못했는데, 참 많이도 컸군.”
애초에 그 때는 정신이 꽤나 없지 않았던가. 편지 때문에 걸린 세뇌도 그렇고, 여러모로 정신 상태가 위험했으니까.
토 달 시간엔 정신을 침식하는 세뇌에 저항하기 바빴고, 그것이 한계에 달했을 때는 결국 자결까지 생각했으니.
하지만 이제는 오직 에반 혼자만이 아는 이야기였다.
그마저도 이제 생각 속에 남아버린 이야기. 에반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자신이 그랬었냐는 듯, 능청을 떠는 모습에 크리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이제는 상관없는 얘기지. 네가 애 둘 가진 아빠가 되고, 설마 모시던 아가씨와 결혼할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냐.”
“그렇죠. 저도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치도 못했으니까요.”
처음 호위 기사가 되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었더라. 에반은 아직 모든 기억을 되찾기 전을 떠올렸다.
에반 프리드가 된 것을 빙의로 여겼던 시절, 소설 속에서 불쌍하게 죽었던 아이린을 어떻게든 살려보자는 게 처음 목적이 아니었던가.
살렸다. 허나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연심을 품게 되었고, 연인이 되었고, 이제는 부부가 되기까지 몇 시간이 채 남았을 뿐이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차마 알 수가 없어서, 뺨을 살살 쓸어내린 에반이 천천히 크리스를 바라봤다.
“어째 더 늙으신 것 같습니다.”
“...결혼식 하는 날에 맞고 싶은 거냐.”
“농담입니다. 건강 챙기시죠. 운동도 조금 자주 하시고, 오래오래 사셔야 할 것 아닙니까. 아서랑 로벨리아가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전부 봐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도 챙길 생각이다.”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창밖을 바라보던 크리스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묘한 감상이 들어서,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라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가 없었다.
나이가 먹을수록 무거워지는 몸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언제까지 젊을 때처럼 움직일 수 있을까.
마나를 다루기에 남들보다 오래 살긴 했지만, 그럼에도 언젠가는 죽는 것이 사람이었다.
이미 노인이라 불리기에 충분했으니, 언젠가는...상념에 빠진 크리스의 어깨에 에반의 손이 올라갔다.
“무얼 그리 생각하십니까.”
“네가 몰라도 되는 생각.”
꽈악, 크리스의 대답에 에반은 그 넓은 어깨를 세게 움켜쥐었다.
순간 비명이 나올 만큼이나 강렬한 통증에 크리스가 소리를 지르자, 한참 동안 큭큭 대며 웃던 에반이 입을 열었다.
“나쁜 생각 하지 마시죠. 그런 생각을 하기엔, 오늘은 좋은 날이지 않습니까.”
“내가 무슨 생각을 한 줄 알고?”
“그냥, 오늘은 하지 않아도 될 생각.”
에반은 가만히 크리스의 옆에 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무얼 그리 보고 있던 건지 잠시 쳐다보다가, 이윽고 조금은 풀린 크리스의 표정을 보곤 작게 웃었다.
언젠가는 하게 될 생각이었다. 에반도, 크리스도. 결국엔 시간이 흐르면 늙어가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그게 꼭 지금일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네가 곧 죽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셨습니까.”
“근데 어떻게, 잘 살아서 여기까지 왔구나. 아무도 안 죽고, 아무도 다치지 않고. 이렇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지만...그래도 잘 왔어.”
나이가 먹어서 주책이 심해진 건지, 예전 같았으면 느끼지도 않았을 이 괜한 감성에 크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축하한다는 한 마디 하는 것이 왜 이리 어려운 걸까.
근질거리는 입술을 잠시 달싹이다가, 이윽고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인 크리스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결혼 축하한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서로를 마주 보는 그 시선 속에서 잠시 서로를 응시하다가, 고맙다는 살짝 고개를 숙이는 에반을 본 크리스가 침음을 삼켰다.
역시 이런 말을 하면 낯이 간지럽지 않은가. 일일이 축하하다고 말할 만큼 먼 사이도 아니었고,
몇 년이나 보았지만. 크리스는 이렇게 무언가를 축하한다는 게 영 부끄럽게만 느껴졌다.
한참의 정적이 흐르고, 자리를 뜨려던 크리스는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조금 이따 뵙죠. 식장 맨 앞에서.”
“...어휴.”
에반은 크리스를 보며 샐쭉하게 웃었다. 크리스 또한 그 미소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으니, 이윽고 하얗게 샌 머리카락을 움켜쥔 크리스가 푹 한숨을 내뱉곤 에반을 흘겨보았다.
“하필이면 왜 나한테 주례를 시켜서.”
“크리스 경 말고는 맡길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주례를 맡길 사람을 진즉에 찾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믿고 맡길 사람이란 크리스 한 사람 뿐이었다.
연장자 중에서 유일하게 친한 사람이기도 했고, 공작은 아무래도 신부의 아버지 역할이었으니까.
잠시 뒤에 보자는 그 말이 왜 이리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건지. 크리스는 쓰린 속을 어루만지며 식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주례사가 뭐였는지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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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셀, 나 떨려요.”
“나도 마찬가지야. 결혼식장은 처음 온단 말이다.”
“카이셀이 떨면 어떡해요. 저도 이런 곳엔 처음 와본단 말이에요.”
스칼렛의 말에 카이셀은 차마 무어라 할 수가 없었다.
일부러 기사들을 대동하지 않고 단 둘이서 오긴 했지만, 막상 여기까지 오니 괜히 긴장이 되는 게 아닌가.
종종 자신을 알아보는 기사들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카이셀은 손을 휘휘 저으며 모른 척 하라 지시했다.
오늘 온 것은 순전히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하객으로 온 것이니, 구태여 관심을 끌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 결혼식의 주인공은 에반과 아이린, 카이셀과 스칼렛은 평소 잘 입지 않았던 수수한 옷을 입은 채 주변을 서성였다.
신랑에게 먼저 가야 할지, 아니면 신부에게 먼저 가야할지.
답이 정해지지 않은 그 주제에 대해 말다툼을 벌이던 두 사람은 결국 3분간의 치열한 가위바위보를 끝으로 신랑에게 먼저 찾아가기로 결정했다.
“원래 이런 건 소가주에게 먼저 가봐야 하는 건데. 나는 황태자란 말이다.”
“그래도 에반 씨에게 고맙다고 인사는 해야죠. 저는 에반 씨 아니었으면 지금 여기 없었잖아요.”
그래도 자기가 한 게 없는 건 아닌데. 잠시 카이셀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스칼렛은 카이셀의 팔을 껴안으며 배시시 웃었다.
“그렇다고 카이셀에게 고맙지 않은 게 아니에요. 저한테는 카이셀이 언제나 첫 번째 잖아요. 알죠? 에반 씨는 그냥 고마운 것뿐이라고요.”
“그럼 나는.”
“...아니, 뭐. 그걸 꼭 말로 해야 해요?”
“나는 직접 듣지 못하면 안 믿는 편이라.”
그 말에 입술을 삐죽이던 스칼렛은, 주위를 슬쩍 둘러보더니 이내 카이셀의 곁에 붙어 조용히 속삭였다.
“...좋아하잖아요. 그걸로 만족 못 해요?”
이런 걸 꼭 말로 해야 하는 건지, 그 말에 한껏 어깨가 올라간 카이셀의 모습을 본 스칼렛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베베 꼬았다.
살짝 달아오른 뺨이 뜨거웠다. 열이 번져 오르는 얼굴을 손부채로 식히던 스칼렛은, 이윽고 한 방에서 나오는 사람을 보곤 카이셀의 어깨를 쿡 찔렀다.
“카이셀, 저 분이 에반 씨 아니에요?”
그 말에 고개를 돌리자, 카이셀은 신랑 대기실에서 나와 옷 매무새를 만지작거리는 에반을 볼 수 있었다.
평소에는 자주 보지 못했던 깔끔한 옷차림에 스칼렛이 놀라는 걸 보곤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오랜만에 보는 에반에게 손을 흔든 카이셀이 입을 열었다.
“옷은 다 입은 것 같은데.”
“아, 전하.”
에반 또한 카이셀을 보곤 반갑게 웃었다. 지난 번 황궁에서 보고 처음 보는 것이었으니,
이렇게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걸 보자 괜스레 묘한 감상이 피어올랐다.
원래 소설 속에서도 두 사람은 연인이었는데, 이렇게 많은 것이 달라졌음에도 다시 만나는 건...그야말로 운명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원래도 그랬지만, 참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 에반은 편하게 웃을 수 있었다.
아이린이 준비를 하기 전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 무얼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두 사람이 찾아온 덕에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두 분께서 같이 계시는 건 처음 보는 것 같군요."
"제가 더 인사 드리고 싶었는데, 이제 찾아와서 죄송해요."
스칼렛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이야. 여러모로 묘한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원작 여주인 스칼렛을 죽이려고도 생각했고, 아이린을 위해서 그녀를 사전에 응징하려던 적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서로 웃으며 결혼식에 보게 되다니.
도대체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 걸까.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두 분도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연인 사이라 하셨죠?"
에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카이셀은, 잠시 머뭇거리며 에반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이번 결혼식에 찾아와 하고 싶은 말은 다른 것이 하나 있지 않던가.
에반과 아이린의 이번 일과도 관련이 있기도 한 그 고민이란.
그렇게 한참동안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카이셀의 시선에 에반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옆에 있던 스칼렛이 카이셀의 어깨를 찰싹 내려치며 에반을 바라보았다.
"음, 그러니까 조언을 조금 얻어보려고 온 거기도 해요. 물론 결혼 축하드리는 건 당연한 거고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조언이라면..."
자신들이 생각하고도 조금 어이가 없었는지, 서로 시선을 마주하던 스칼렛이 이내 호흡을 고르며 조심스레 입술을 달싹였다.
"...저희도 결혼하려고 하거든요. 이번 겨울에요."
그 갑작스런 결혼 발표에, 에반은 한참동안 멍하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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