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 결혼식 (3)
* * *
로벨리아는 아이 치고 매우 영특한 아이였다.
이게 생후 고작 2달 된 아이인지 의심이 가기도 했지만, 에반과 아이린은 그저 아이들이 똑똑한 것이라 믿었다.
자기 엄마와 아빠를 알아보는 것이 신기하긴 해도, 어쩌면 아이를 낳은 부모의 주책일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사람을 가리는 모습이란, 영특한 아기라고 한들 조금 특이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나이든 남자를 왜 싫어한단 말인가?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괴롭힘을 한 남자라곤 한 사람도 없었는데 말이다.
에반이나 로페나라면 몰라도, 크리스를 보며 울먹이는 로벨리아의 모습에 에반이 천천히 그 부드러운 뺨을 쓸어내렸다.
“로벨리아가 똑똑한 아이인데, 이상하게도 나이든 남자를 싫어하더군요. 왜 그런지는 몰라도, 아마도 크리스 경은 로벨리아를 못 안을 것 같습니다.”
잠이 깨 눈을 반짝이는 로벨리아를 껴안은 에반은, 자신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크리스 경을 향해 씨익 웃었다.
자기 아빠 품이라는 걸 아는 건지, 에반에게 달라붙은 로벨리아가 에반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아이 특유의 그 달콤한 체향에 웃는 그 얼굴에,이윽고 아이의 손이 코에 착 달라붙었다.
“아이가 널 너무 좋아하는 것 같구나.”
“근데 기사님 외모에 누가 안 좋아할까 싶기도 하고요.”
로페나의 말에 크리스는 눈살을 작게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도 나름 할아버지 같은 존재가 아니던가.
물론 진짜 할아버지는 따로 있었지만, 크리스는 로벨리아에게 꽤 섭섭해하고 있었다.
그런 크리스가 불쌍해보였던 건지, 에반의 품에 한참 안겨있던 로벨리아가 팔을 뻗어 에반의 뺨을 두드렸다.
“응, 아!”
“...아무래도, 크리스 경한테 가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요.”
크리스를 향해 손을 마구 뻗는 로벨리아의 모습에 에반이 말하자, 크리스는 눈시울을 붉히며 로벨리아를 천천히 안아 들었다.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손을 차갑게 쳐내는 냉담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마치 천사처럼 품에 안기는 그 모습에 크리스는 입술을 삼키며 그윽한 눈빛으로 로벨리아를 바라보았다.
“오, 로벨리아.”
“부우”
“그래, 내가 너희 아빠보다 좋지?”
그건 아니라는 듯, 크리스의 콧수염을 세게 잡아 당기는 걸 본 로페나가 큭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고작 2개월 짜리 아이가 저렇게 말을 다 알아듣는 것 같다니, 어쩐지 신기한 마음에 로페나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런 걸 보면, 왠지 저도 아이가 낳고 싶어지네요.”
“안 돼!”
크리스의 고함에 어깨를 움찔 떤 로페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냥 가지고 싶다고 하는 것도 안 되나, 자꾸 저렇게 안 된다고 하면 그냥 확 결혼해 버릴까.하는 생각도 했지만,
자신은 아가씨처럼 아이를 낳을 자신이 없었다. 그런 게 무섭기도 하고, 마음에 차는 남자를 만날 것 같지도 않았고.
그냥 가끔 아빠랑 지내다 공작저에서 쭉 살면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곰곰이 하던 로페나는 이윽고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쭙
입에 있던 공갈 젖꼭지를 빼낸, 그리고는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푸른빛의 눈동자.
그제야 아서가 깨어났다는 걸 알아차린 로페나가 조심스럽게 아서를 들어 안았다.
“무슨 생각하세요 도련님?”
“빠.”
이마에 얹어진 손에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나와서, 로페나는 아서를 안아든 채 다시 에반에게 향했다.
“아이들이 착한 것 같아요. 어떻게 한 번을 안 우네요. 자다 깨면 보통 시끄럽게 울만도 한데.”
“글쎄, 아서는 평소에 잘 우는 편인데...왜 안 울지?”
로벨리아면 모를까, 아서는 보통의 아이처럼 잘 우는 편이었다.
영특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로벨리아가 천재라 했을 때 아서는 그저 영특한 아이였을 뿐이니까.
물론 둘다 똑같이 사랑했지만, 에반은 아서에게 마음이 조금 더 주는 편이었다.
자신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의 이름을 물려받은 아이. 지금도 시체를 찾지 못해,
덩그러니 묘비 하나만 남아있을 제 아버지를 떠올린 에반이 로페나에게 아서를 받아 안았다.
아이린을 닮은 하얀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란, 에반이 아서에게 마음을 조금 더 주기 충분한 이유였다.
딸이었으면 어땠을까...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이미 아들로 태어난 아이에게 그랬다간 섭섭해 할 테니.
그래도 자신의 모습을 쏙 빼닮은 듯한 딸이 있음에 에반은 행복해할 따름이었다.
“잠이 안 와?”
물론 그 말에 제대로 된 대답이 올 리가 없었지만, 아서는 대답 대신에 자기 발로 에반의 뺨을 쿡 찔렀다.
그것이 귀여워서, 에반은 아서의 배에 얼굴을 묻은 채 한참동안 배방구를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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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언제 일어나서 맞이해준 거예요?”
“아까, 새벽에 두 사람이 와서 제가 나갔습니다. 아가씨는 주무셨으니까요.”
“에반이 너무 거칠게 했으니까 그렇죠. 그리고 어제는 조금 피곤해서...아무튼, 수고했어요. 여태까지 잠도 안 자고 있었던 거죠?”
“잠은 조금 이따 자도 괜찮습니다. 이제 식이 내일이지 않습니까.”
아이린이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에반의 뺨을 쓸어내렸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조금 생긴 것 같기도, 피부가 조금 거칠어진 것 같기도 해서 자꾸만 한숨이 새어나왔다.
사실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아이린의 눈에는 에반이 잠을 자지 못해 곧 쓰러질 송장처럼만 보였다.
“좀 자야 되는 거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크리스 경이랑 로페나도 왔고, 아이들이랑 같이 있으면 그리 피곤하지도 않으니까.”
“그럼 오늘은 조금 일찍 자요, 내가 팔베개 해줄 테니까.”
“좋습니다.”
팔베개란 단어에 괜스레 또 옛 기억이 떠오른다.
처음 팔베개를 해주었을 때라면, 아마도 에반과 처음 같이 잠들었을 때였을까.
아마도 에반이 크게 다쳐서 요양하고 있었을 때,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해져서.
작게 헛기침을 내뱉은 아이린이 에반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 살폈다.
분명 같은 시간을 보냈는데, 왜 더 젊어진 것만 같이 느껴지는 걸까.
피부는 조금 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자그마한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애초에 흠잡을 곳이 없던 외모였으나, 이상하게 마베트와 싸운 뒤로 더 잘생겨진 것 같다고 아이린은 생각했다.
“에반, 혹시 나 몰래 뭐 발라요?”
“얼굴에 바르는 거라곤 비누 말고는 없는데요.”
“그런데...됐네요. 도대체 왜 그렇게 잘 생겼어요?”
갑자기 그런 말이라니, 그 말을 듣자 괜히 열이 피어오르는 것만 같아 에반이 고개를 휙 돌렸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아이린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에반은 부끄럽기만 했다. 자신은 정작 예쁘다고 많이 해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아이린은 서슴없이 잘생겼다고 하곤 했으니까.
“그, 아이린도...예쁩니다.”
“그래요? 그렇구나?”
아이린의 기분은 평소보다 괜찮았다. 어제의 잠자리가 만족스러운 것도 그랬고, 아침에 일어난 에반이 요리도 손수 차려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로페나와 크리스까지 더해져서, 평소보다 기분이 좋은 아이린의 모습에 에반은 곤란함을 느끼고 있었다.
남들이 다 보는데도 착 달라붙어 있는 터라, 좋으면서도 자꾸만 씰룩이는 입꼬리를 조절할 뿐이었다.
아무도 없는 곳이면 모를까, 사용인들이 돌아다니는 복도에서 마저 입을 맞출 수는 없지 않겠는가.
“우와, 아직도 그러시는구나.”
로페나의 목소리에 에반의 얼굴은 대번에 밝아졌다. 혹여 로페나를 본 아이린이 그 쪽으로 가지 않을까 싶었지만,
로페나는 그냥 신기하다는 듯 살짝 본 뒤 아이린에게 인사만 한 뒤 다시금 크리스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에반은,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아이린을 똑같이 끌어안았다.
“내가 이러는 게 싫어요?”
“아뇨, 싫다기 보다는. 보는 사람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뭐 어때요. 이제 내일이면 모든 사람들이 다 이런 걸 볼 텐데요.”
그 말에 에반은 조용히 미소지었다. 내일이면 이제 결혼식,
분명 결혼을 처음 생각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언제 이렇게 시간이 빨리 흘러버린 걸까.
늘 시간이 다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시간이 흘렀음을 깨달았으니,
아마도 이번 결혼식 또한 눈 깜짝할 사이 흘러갈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1년, 어느덧 사귀게 된지 1년이 되어간다는 사실이 어쩐지 꿈처럼 느껴졌다.
“저는 솔직히, 결혼식까지 가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아이린이 제 고백을 받아주실 지도 몰랐으니까요.”
“왜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러니까...제가 처음 아가씨를 좋아하게 됐을 때는. 아이린이 아니라 아가씨라 불렀고, 저한테 꽤나 차갑게 대하셨으니까요.”
“그때는 그랬죠. 그런데 그거 알아요?”
예전의 기억을 떠올린 아이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확실히, 몇 년 전의 자신은 에반에게 그리 살갑게 굴지 않았다.
아가씨라는 호칭에도 무어라 할 때가 있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야말로 기겁할만한 것이 자신의 행동이었다.
“에반이 생각하는 것보다, 난 에반 훨씬 예전부터 좋아하고 있었어요.”
그 때가 언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이린은 아마도 에반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무언가를 느꼈노라 직감했다.
세상의 색이 다채롭게 변하는 순간, 처음으로 그 진한 녹색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늘 차갑기만 했던 가슴에 열이 피어오르던 순간이란.
에반을 만난 이후 눈이 마주친 매 순간 그랬으니까.
“...저는 뭐, 아이린을 직접 만나기 전부터 좋아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에반이 태어날 때부터 좋아했어요.”
“저는 아이린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좋아했습니다.”
이 끝없는 고백에 한참을 웃다가도, 에반은 처음에 내뱉었던 말이 정말 사실이라 덧붙이진 않았다.
‘장미 가시의 그대’라는 책에서 아이린을 본 순간, 그 때부터 아이린 유리스라는 한 사람에게 묘한 이끌림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장미를 얻기 위해 가시에 한참 찔렸던 자신은, 이제야 겨우 장미 속에 품어진 그대를 만날 수 있었다.
자신의 환상 속에서 본 소설의 제목이 그런 것이었으니,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이 사실 지금의 이 순간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리라.
비로소 장미를 만났고, 이제야 겨우 결혼으로 맺어진다.
에반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앞으로 하루, 내일이면 치뤄지는 결혼식이 무척이나 기다려질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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