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 결혼식 (2)
* * *
지쳐 잠든 아이린을 뒤로 하고, 에반은 휘청거리는 몸을 겨우 일으켜 벽에 몸을 기대었다.
아이린이 평소에 피곤해했으니 망정이지, 만약 멀쩡했다면 잠든 건 자신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분명 체력이 늘었는데, 왜 이렇게 잠자리만 가지면 지치는 것일까.
에반은 작게 눈살을 찌푸리다가, 이윽고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천천히 가운을 걸쳤다.
화장실, 거울을 앞에 둔 에반은 퀭한 눈을 띤 자신의 모습을 살피다 이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입가에 묻은 하얀 액체, 아마도 아이린의 것이리라.
밤에 했던 것을 떠올린 에반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마치 아이처럼...순간 엄마의 품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으니 나름 괜찮은 경험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불평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결국 아이린은 자신의 아내였으니 말이다.
다시 잘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에반은 아이린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새벽에 온 전서구에 크리스 경이 거의 다 왔다고 적혀있었으니, 아마도 곧 있으면 도착하지 않을까.
로페나와 함께 온다고 한 걸 떠올린 에반은 서늘한 새벽 공기를 느끼며 복도를 걸었다.
지나가던 시녀가 에반을 보곤 다급히 다가왔지만, 에반은 손을 휘휘 저으며 물러가게 했다.
자신이 시녀에게 도움 받는 것은 여전히 적응하기 힘든 일이었다.
현대인이었고, 애초에 호위 기사였으니 사소한 것들은 전부 자신이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한참을 걸어 정문에 향하자, 아직까지 깨있던 제렌의 모습이 보였다.
“이런, 후작님이 아니십니까.”
“아직도 일어나있던 겁니까.”
제렌이 허리를 숙이자, 에반은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후작이 되며 불편한 점이란, 이전까지 편하게 대했던 사람과 조금 관계가 어색해진다는 것이었다.
후작과 기사,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그 격차란 이전까지 편한 관계라 한들 금세 불편해지기 마련이었다.
이전처럼 말하고 싶었지만, 아이린은 에반의 위상이 떨어진다며 반말을 듣는 것을 철저히 금했다.
아무리 편하게 말한다고 해도 경어를 사용하게 할 것,
그렇게 하지 않으면 화낼 거란 말에 에반은 결국 이 후작이란 위치에 익숙해지려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처음 보았을 때만 하더라도 많이 혼란스러워 보이셨는데, 이젠 결혼이라니. 세월이 너무 빠른 것 같습니다.”
“...그랬습니까.”
그 말에 옛 기억을 떠올린다. 이젠 희미해져 잘 기억도 나지 않는 기억.
자신이 제렌을 처음 만났을 때는, 아마도 아이린에게 아무런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주변인들에 대해 혐오감을 품었을 때였다.
암살자들을 만나고 돌아왔을 때, 이 공작저들의 사람이 보여준 것이란 무관심에 가까웠으니까.
허나 이제는 모두 달라졌다. 자신과 아이린의 연애를 누구보다 기대하고,
축복하는 것이 이들이었으니 어찌 이전처럼 혼란스러워하겠는가.
잠시 저 너머를 바라보던 에반은, 이윽고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위험한 것도 없으니, 조금 여유로워졌을 뿐입니다.”
“어찌 제게 경어를 쓰십니까. 편하게 하셔도 좋습니다.”
“제가 편하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나중에는 말을 놓을 테니, 지금은 그냥 두시죠.”
에반의 태도에 제렌이 끙, 하고 말을 삼키자. 에반은 그런 제렌을 슬쩍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크리스 경은 어디쯤이랍니까?”
“아마 곧 모습이 보일 겁니다. 아까 신호를 받았을 때 외곽이었으니, 지금쯤이면 당도하겠죠.”
에반이 눈을 가늘게 뜨니 과연 저 멀리서 마차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크리스가 처음 유리스를 떠날 때 타고 갔던 그 마차, 에반이 선물해줬던 새하얀 말이 저 멀리서 다그닥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쿵! 달리던 마차의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이윽고 거기서 뛰어내린 크리스가 땅에 가볍게 착지했다.
오랜만에 보는 공작저라 그런지, 저 멀리서 보이는 에반의 모습을 발견한 크리스가 뛰어내린 것이었다.
“하하!”
“아빠,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요!”
로페나가 소리쳐도 아랑곳하지 않은 크리스는, 공작저 입구로 터벅터벅 걸으며 손을 휘저었다.
그 모습을 보던 에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앞을 향해 걸었다.
오랜만에 만나 조금은 얌전해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째 나이가 늘어날수록 활발해지는 건 어째서일까.
“로페나가 놀라겠습니다. 아직도 그러시는 겁니까?”
“우리 후작님을 뵈어야 하는데 어찌 마차를 타고 가겠습니까. 이 노부를 봐주시지요.”
“놀리지 말고, 말씀 편하게 하시죠. 솔직히 아직 존대를 받는 것에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주지.”
순식간에 달라지는 태도에 헛웃음을 짓다가도, 원래 이런 사람임을 떠올리곤 끌어안는다.
아직까지 조금도 줄지 않은 태도에 안심하다가, 허리에 불어난 살을 보곤 에반은 눈살을 작게 찌푸렸다.
“요즘엔 검도 소홀히 잡으시는 겁니까. 로페나가 걱정하겠습니다.”
“낚시에 푹 빠져서, 몇 시간 동안 호수에만 있어서 그런 거지. 이런 건 며칠 움직이면 다 빠진단 말이다.”
“...그러십니까.”
몸 관리를 조금 신경써주면 좋을 텐데, 그나마 로페나가 같이 있다는 생각에 안심한 에반이 이어 멈춰선 마차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아, 기사님! 저 왔어요.”
“거긴 좀 어때, 살만 해?”
“습해요...바로 옆이 호숫가라 그런지 여름이 되면 미칠 것 같단 말이에요. 이사 가고 싶은데, 아빠가 도무지 이사갈 생각을 안 해요. 퇴직금도 많이 받았으면서 왜 그러는 건지.”
아빠라 부르는 걸 직접 들으니 묘한 감상을 받게 된다.
이전에 다과회에서 몰래 빠져나와 들었던 로페나의 과거란, 부모 없이 태어나 거리를 떠돌던 빈민의 이야기였으니까.
예전부터 두 사람이 잘 어울리긴 했지만, 이제는 부녀 사이가 되다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와서, 로페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에반이 입을 열었다.
“다행이다. 잘 지내는 것 같아서.”
“저번에 제가 자리를 비워서 죄송해요. 제가 아가씨 도와드렸어야 했는데, 너무 멀어서 시일을 맞출 수가 없더라구요.”
“괜찮아. 거리가 너무 멀잖아.”
오랜만에 이런 얼굴을 보니 정말 결혼식이 다가온 게 실감이 나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미안해하는 로페나를 달래주다가, 로페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크리스의 시선을 발견한 에반이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로페나를 보십니까?”
“아니, 너희들이 결혼식을 한다니까. 로페나도 언젠가는 남자를 만날 거란 생각이 들어서.”
“로페나도 언젠가는 하겠죠. 찾아가겠습니다.”
“...남자를 데리고 오면.”
조금은 진지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린 크리스가 입을 열었다.
“못된 녀석이면 내 손에 죽는 거다. 착한 녀석들은 가면을 쓰고 다가왔을 확률이 높으니 철저한 검증을 거쳐야하겠지. 잘생긴 녀석들은 기생 오래비 같으니 죽을 거고, 못생긴 녀석들은 주제를 모르니 죽어야 할 거다.”
“그럼 로페나는 누구를 만나야 하는 겁니까?”
“안 만나는 게 제일 좋은 선택이겠지.”
로페나는 내 눈치를 힐끔 보더니, 이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입양으로 정말 자신의 딸이 되자 애착이 생긴 걸까.
꼭 장인 어른을 보는 것만 같다는 생각에 에반이 입을 열자, 눈을 크게 뜬 크리스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공작님 같다는 건 좀.”
“...그런가?”
로페나마저 그렇게 말해서, 에반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하기야, 자신이 생각해도 조금 너무한 말이었으니까.
크리스는 이내 표정을 고치며 헛기침을 내뱉다가, 보이지 않는 한 사람을 떠올리곤 에반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가씨는 어디 계신 거냐?”
“침대에서 자고 있어요.”
“왜 침대에서 혼자 음, 그렇구만.”
로페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크리스는 이어 씨익 웃더니 에반을 끌어안아 장하다는 듯 등을 두드렸다.
“드디어 해낸 거냐. 항상 지고 혼자 질질 짜던 놈이 많이 컸구나.”
“...안 울었습니다. 항상 지지도 않았고요.”
“거짓말 하기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첫날밤에 처참하게”
“처참하게 진 적 없습니다!”
자기가 소리치고도 꽤나 민망해서, 주변을 슬쩍 둘러본 에반이 크리스를 떼어내며 입을 열었다.
“들어오시죠. 일단 내일 아침에 다시 얘기하는 걸로 하고요.”
“어쨌든, 결혼 축하한다. 너희들이 드디어 결혼할 줄이야. 아이들 건강하게 태어난 것도 그렇고.”
“아이 한 번 보시렵니까? 엄청 이쁩니다. 저랑 아이린을 닮았으니까요.”
에반이 웃자, 고개를 끄덕인 크리스와 로페나가 에반을 따라 공작저로 향했다.
그나저나 아이라, 크리스는 괜스레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만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생기 하나 없던 녀석이 이제는 제 아가씨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다니.
“요즘 좀 살만하더냐?”
“항상 요즘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기왕이면 저 죽을 때까지, 아니 아이들 손주가 죽을 때까지요.”
욕심일 수도 있겠지만, 에반은 지금의 삶이 무척이나 행복했다.
40여년에 가까운 삶에서 어쩌면 유일하게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게 지금이 아닐까.
물론 아이린을 만난 이후로도 행복했지만, 그때는 절멸이 있었으니까.
침대에서 곤히 누워있던 아이들을 발견한 에반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말랑말랑한 뺨에 손가락이 닿아 푹 들어가고, 그럼에도 잠에서 깨지 않는 모습에 흐뭇하게 웃는다.
“로벨리아는 저를 닮았습니다. 머리카락 색도 그렇고...뭔가 조금 영특한 것 같더군요.”
자기 뺨을 만지는 손길을 느꼈는지, 눈을 가늘게 뜬 로벨리아가 에반의 손에 볼을 비볐다.
엄마보다 에반을 더 좋아하는 두 아이였지만, 로벨리아는 특히나 에반을 더 좋아했다.
아서라면 몰라도 로벨리아라면 확실히 아빠라는 이름을 먼저 불러주지 않을까.
로페나는 하으으, 하면서 뺨을 붉히고는 아이의 말랑말랑한 배를 쓰다듬었다.
살짝 차가운 손이 닿았음에도 놀라지 않은 로벨리아는 로페나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어머, 어떡해요. 너무 귀여워.”
“어디, 나도 한 번 만져보자.”
크리스가 손을 내밀자, 갑자기 표정을 확 굳힌 로벨리아가 크리스의 손을 탁 하고 쳐냈다.
처음에는 우연인줄 알았지만, 연신 손을 쳐낸 로벨리아는 크리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아주 싫어하는 사람처럼.
그 표정에 크리스가 멍하니 입을 벌리자, 에반은 쿡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로벨리아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로벨리아가 꺄르르 웃으니, 크리스의 표정은 점차 딱딱하게 굳을 따름이었다.
"풉."
로페나의 비웃음은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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