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 1부 완) 동화처럼 (完)
* * *
작게 솟아오른 바위 위에 앉은 아이린이 호숫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름 특유의 습하고 더운 바람을 맞아 살짝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문득 떠오르는 기억 속에 고개를 푹 숙인 채 눈을 지그시 감을 따름이었다.
“옛날 생각나네요.”
이곳에 올 때마다 말하는 거였지만, 아이린은 이 장소가 그 어떤 곳보다도 마음에 들었다.
비록 에반에게 받았던 목걸이는 부서졌지만, 툭. 그 이후에 다시 선물 받은 목걸이를 손에 쥔 아이린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이렇게 눈을 감고 있어도 느껴지는 에반의 존재란, 그 어떤 것보다도 커다란 안도감을 심어주었다.
어디에 있어도, 자신이 무얼 하고 있더라도 옆에 에반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이린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를 얻었다. 조심스레 손을 뻗자 그 자리엔 에반의 손이 있었다.
자그마한 바위 위에서 어떻게든 같이 앉은 두 사람은, 손에서 전해지는 체온을 느끼며 멍하니 호수를 바라보았다.
물결이 친다. 흙에서 떨어진 돌멩이가 물 위로 떨어져 일으킨 파문이 번져나가,
에반과 아이린이 있는 호수의 외곽까지 전해져왔다. 이게 뭐라고 그렇게 눈길을 끄는 건지,
한참동안 호숫가를 바라보던 에반은 그제야 이 곳이 조금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세이렌이란, 인간이 가장 염원하는 것을 보여주는 장소.
올 때마다 달라지지 않는 것이 그런 것이었건만, 어찌하여 아직도 세이렌의 모습이 변하지 않는단 말인가.
허나 아주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비로소 그 이유를 깨달은 에반이 헛웃음을 흘렸다.
염원이라, 결국 사람이 품는 염원은 행복해지기 위해 품는 생각에 불과했다.
지금이 행복하다면, 인생 그 어떤 순간보다도 가장 행복하다면. 염원은 곧 현재가 되지 않겠는가.
“전 행복한 사람인가 봅니다.”
아이린은 그 말에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세이렌의 모습이 변하지 않는 이유를 그녀 또한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부푼 배가 조금 무겁긴 했지만,이 순간 아이린은 누구보다도 행복했다.
“내가 에반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글쎄요. 확실한 건, 저는 평범하게 살지 못했겠죠.”
아무리 용혈이 있다한들, 결국 절멸과 붙어 살다보면 언젠가 제국을 향해 검을 들었을 터였다.
그리고 그런 삶이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생각하는 평범과는 꽤나 거리가 멀었다.
지금이 그렇다고 평범한 삶이라 할 수는 없겠다만, 그래도 아이린을 만나지 못한다는 건.
가정하고 싶지도 않은 생각이었다. 잠시 허공을 바라보던 에반이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생각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건.”
“그런가요.”
“뭐, 결국엔 이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처음에 어떻게 만났든, 서로 싫어했든, 좋아했든. 지금 이렇게 같이 있으면 그걸로 된 게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죠.”
제 손가락에 닿은 차가운 감촉에 아이린이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언젠가 에반이 선물했던 반지가 눈에 띄었다. 에반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 자신의 눈동자를 닮은 사파이어가 있는 반지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란. 이전에 에반에 제게 했던 청혼이었다.
...자신이 먼저 하려고 했는데, 선수 쳐서 청혼하다니 괘씸하지 않은가.
마음 같아서는 정색하면서 무어라 할까 싶었지만, 그랬다간 에반의 마음이 상할까 그러지도 못했다.
자기가 청혼하고 싶었는데, 그 준비를 하려고 직접 다이아몬드까지 공수해서 반지까지 몇 달 동안 준비했는데.
어떻게 전쟁에 나가기 직전 그 상황에서 청혼을 하는 건지.
“에반, 있잖아요. 나 할 말이 있어요.”
아이린은 품속에 있는 반지함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이걸 주면서 청혼하면, 에반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전에 청혼을 듣긴 했지만, 막상 자신이 직접 하려 하니 떨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에반이 자신에게 말했을 때는 꽤나 덤덤하게 말했던 것 같은데...혹여 자신이 유별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아이린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힘겹게 숨을 들이쉬며, 천천히 심호흡을 내뱉은 아이린이 다시금 에반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 초록색의 눈동자를 똑똑히 마주하면서,
한 글자 한 글자 틀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하실 말씀이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기, 기다려 봐요. 할 테니까.”
턱밑까지 차오른 말이 차마 내뱉어지지가 않아서, 아이린은 가슴을 움켜쥔 채 주먹을 꾹 쥐었다.
그냥 쉽지 않은가. 결혼 하자고, 우리 평생 같이 살자고 얘기하면 되는 건데...그게 참 쉽지가 않아서.
아이린은 입만 뻐끔거리며 에반을 빤히 바라볼 따름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하늘에 떠있던 달이 서서히 움직이고, 자정이 넘었다는 종이 울리고, 별빛이 서서히 흐려지는 그 시간까지 아이린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리고, 에반은 계속해서 기다렸다.
아이린이 내뱉을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 말이 언젠가 자신이 했던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이린 스스로 그 말을 할 때까지 쭉 기다릴 생각이었다.
“......”
“꼭 오늘이 아니어도 됩니다. 언제나, 준비가 되셨다면 저는 들을 준비가 돼있으니까요.”
굳이 그 말을 듣지 않더라도 좋았다. 이제 와 그녀의 곁을 떠날 생각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이미 붉은 실은 이어졌다. 세상에 처음 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다는 붉은 실은,
이미 풀 수 없을 만큼의 매듭이 지어져 끊을 수조차 없게 되지 않았던가.
에반이 옅게 웃자, 아이린은 잠시 고개를 푹 숙이곤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 점이 좋아요.”
해가 떠오르기 전에, 아이린은 여명이 점차 피어나는 하늘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해가 뜬 뒤에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어둠에 묻혀 붉어진 얼굴을 들키기 전에 말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손에 쥐어진 반지함을 조금 더 세게 쥔 아이린은, 다시금 에반과 시선을 마주했다.
“에반이 아니면, 이런 점을 또 이해해줄 사람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아요.”
5년 전의 자신을 직접 마주한다면, 그 누가 이해하고 보듬어주려 할 수 있을까.
많은 기사를 만났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허나 에반처럼,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해주려 했던 사람은 여태껏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만약 에반이 자신의 세계에서 사라진다면...아이린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말했죠, 나는 에반이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사람은 아니라고. 요즘 들어 노력하고 있어요. 요리 연습도 조금 하고 있고, 아이를 어떻게 키우면 좋을지도 많이 찾아보고 있어요. 아이를 나보다 더 사랑해도, 어떻게든 받아들이려 하고 있어요.”
“아이린.”
“에반이 생각하던 것보다 더 못난 사람일 수도 있어요. 이기적이고, 질투도 많이 하고. 그런데도...나는 에반이 아니면 안 돼요.”
딸깍.
열린 반지함에선 자그마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가 들어있었다.
수수한 디자인이었지만, 영원토록 조금도 변하지 않는 마법이 세공된 다이아몬드는 희미한 별빛을 머금은 채 반짝이고 있었다.
이 세상에 오로지 한 곳에서만 나온다는 다이아몬드,
평생의 시간이 흘러도 부서지지 않고, 그 어떠한 물질에도 흠집 하나 나지않는다는.
여러 빛을 머금어 가끔은 푸른빛을, 가끔은 초록빛을 내는 그 반지를 바라본 아이린이 입을 열었다.
“결혼해요, 우리.”
우리, 라는 단어가 왜 이렇게 부끄러운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평소라면 서슴없이 내뱉을 단어였지만, 막상 이런 상황이 되자 괜스레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조금씩 드러나는 여명, 이제는 서로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는 그 상황에서.
에반은 붉게 물든 아이린의 얼굴을 보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결혼하죠.”
의외로 대답이 빠르게 나와서, 당황한 아이린이 고개를 들어 에반을 빼꼼 바라보았다.
늘 보는 얼굴이었지만, 호수에서 반사된 빛을 받은 에반은 평소보다도 더욱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아이린 또한 마찬가지라, 아이린이 내민 반지를 받아든 에반이 작게 덧붙였다.
“우리.”
화악, 하고 번지는 열기에 아이린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면서, 갈 곳을 잃은 손을 허공에 허우적거리던 아이린의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
평소라면 균형을 잡았겠지만, 임신으로 무거워진 몸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린이 뒤로 넘어지려는 찰나.
에반의 손이 아이린의 허리를 휘감았다.
“아직도 이러시는데, 제가 어디 가서야 되겠습니까.”
“아, 아니...이건.”
갑작스레 가까워진 거리에 아이린이 에반의 가슴팍을 손으로 밀어내자,
살짝 눈살을 찌푸린 에반이 얼굴을 더욱 들이 내밀었다.
코가 닿을 만큼, 그리고 이마가 살짝 맞닿자 샐쭉하게 웃으며 아이린의 꾹 감긴 눈을 바라보았다.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여기까지.”
서서히 떠오르는 햇빛이 두 사람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별빛은 사라지고, 어렴풋이 보이는 흰 구름이 하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은 붉은, 그리고 푸른빛을 내는 하늘. 언제까지고 별이 뜨는 밤에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별과 달의 이야기는 끝났다. 이제는 새벽으로, 다시금 여명이 피어오르는 아침으로 나아갈 시간.
가늘게 눈을 뜬 아이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자, 에반은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그거 아십니까? 우리 이야기가 실린 동화책 나온 것 말입니다.”
동화책이라는 말을 들은 아이린의 표정이 조금 더 붉어졌다.
수도에서 그런 동화책이 나왔다는 것을 듣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들을 때마다 부끄러운 이야기였다.
고작해봐야 연인 간의 이야기를 왜 동화책으로 내보낸단 말인가.
자신과 에반이 죽은 뒤면 모를까, 당사자들이 멀쩡히 살아있는데도 그런 것을 출판했다는 얘기에 아이린은 항의를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하지만 결국, 자신과 에반의 이야기라서. 언젠가는 로벨리아와 아서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라도 차마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국 동화이지 않은가. 어린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나오는 책인 만큼, 그 결말은 언제나 같은 말로 끝나기 마련이었다.
“부끄러워 보이십니다.”
“에, 에반 때문이잖아요. 이렇게 딱 붙어선, 나 배 때문에 불편해요. 에반도 편하게 끌어안지 못하잖아요.”
“저는 괜찮습니다. 어차피 둘 밖에 없는데,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엘프도 이 근처에 사는 거 몰라요? 엘프들이 보면 어쩌려고”
“그래서 더 좋은 건데.”
훅, 순간 다가온 에반의 입술을 아이린은 미처 피하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얽힌 혀, 언제나 그렇듯 에반에게 다시금 리드당한 아이린의 어깨가 잠시 움찔거렸다가,
이윽고 천천히 에반의 허리를 감싸며 등을 꼭 끌어안을 따름이었다.
입술이 떨어지고, 잠시 멍하니 있던 아이린이 눈을 가늘게 뜨곤 에반을 흘겨보았다.
“내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 뒤에 올 대답이 어떤 건지 알면서,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대화의 반복을 아이린은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자신을 노려보는 척 하면서도 옅게 서린 그 기대감에,
에반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내뱉을 때면 보이는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면서.
“그래서, 싫으십니까?”
조금 더 가까워지는 간격, 밀쳐내는 듯 하면서도 결국 밀쳐내지 못한 아이린은.
이윽고 씰룩이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한 채 웃음을 터트렸다.
“애들이 보면 우리를 뭐라고 생각할지 겁나요.”
“나중에 결국 다 알게 될 텐데, 무엇하러 벌써 부터 두려워하십니까.”
“그런데, 언제까지 나한테 존댓말 할 생각이에요?”
조금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에반이 자신에게 말을 놓지 않는 게 꼭 거리를 두는 것만 같지 않은가.
이제는 자신의 호위 기사도 아니고, 어엿한 한 명의 귀족인데.
존댓말이 편하다고는 하지만, 에반에게 반말을 듣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잠시 고개를 슬쩍 돌린 아이린은, 에반의 눈치를 힐끔 살피며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 우리 부부잖아요...”
아무 죄도 없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살짝 꼬면서,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그렇게 다시 입을 연다.
“...여보.”
그 말에 에반의 몸이 흠칫 굳는다.
익숙함에 젖어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느끼지 못했던 그 간질임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
저도 모르게 홀린 듯 아이린의 입술을 탐할 뿐이었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순간이 영원히 이어졌으면 한다고, 그러면서도. 이제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궁금하다고.
미래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에반은 수도에서 한 번 보았던 동화책의 결말을 떠올리곤 조용히 속으로 미소 지었다.
동화란 전부 같지 않은가. 몽환적인 이야기, 그리고 중간에 끼어있는 고난과 역경.
물론 그 내용 자체의 상세함은 다르나, 결국 하나로 귀결될 따름이었다.
해피 엔딩.
결국엔 그렇게 끝날 이야기였다. 이 앞에 어떤 일이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다.
어쩌면 슬픈 일이 있을지도 몰랐고, 언젠가는 의견이 맞지 않아 싸울지도 몰랐다.
하지만 또 웃고, 울고, 다시 서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나아갈 테니까.
그렇기에, 아무런 걱정 없이 이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수 있는 것이리라.
이야기의 끝을 장식하는 것은 어쩌면 허무한 문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문장보다도 만족스러운 글귀가 또 있을까. 초라했지만, 결국엔 아름답게 끝맺을 우리의 이야기처럼.
동화처럼.
그렇게 오래오래...행복하게 살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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