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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38화 (138/181)

〈 138화 〉 1부 완) 동화처럼 (1)

* * *

에반이 누군가를 만나겠다며 떠난 뒤.

카이셀은 자신의 침대 위에 앉아 있는 한 여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창백한 얼굴, 뺨에 묻은 붉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떼어준 카이셀이 옅게 미소 지었다.

살아있다. 심장이 뛰고 있다. 마베트가 죽었지만...그 말대로 스칼렛이 살아난 것이다.

하지만 아직 눈을 뜨지는 못해서, 자신의 막사에 옮긴 뒤 상태를 지켜볼 뿐이었다.

만약 마베트의 기운을 그대로 품고 있으면 어찌되나 걱정도 했으나,

아제스트가 말하길 스칼렛은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원래 가지고 있던 마나마저 잃었다는 말에 살짝 언짢긴 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렇게 살아난 것만으로도 천운이었다. 카이셀은 진심으로 하늘에 감사했다.

“그런데...”

스칼렛이 일어나면, 자신은 그녀에게 무어라 말해야 하는 걸까.

제국의 황태자로써 그녀를 추궁해야만 하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입장을 배려해준다고 한들 결국 마베트가 빙의했던 절멸의 앞잡이.

심지어 자신에게 접근했으니, 만약 누군가가 역모라 몰면 그녀는 꼼짝없이 죽어야만 했다.

물론, 그런 일은 자신이 어떻게든 막을 생각이었다.

그녀가 결백하다는 게 정확히 드러나지 않았어도, 카이셀은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자신이 황도에서 만났던 스칼렛을 믿었다. 그게 틀렸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카이셀 스스로 스칼렛을 믿어 주리라 마음먹었다.

허나 문제가 있다면, 스칼렛에게 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벌써 몇 시간 째, 한참 동안 누워있는 스칼렛을 바라보던 카이셀이 눈가를 문질렀다.

몸은 좀 어떻냐고? 아니, 그건 좀 너무 진부한 말이 아닌가.

미리 준비해둔 핫초코가 식은 지 오래였다. 따듯한 차와 함께 안부를 묻는다면...

그렇게 한참 고민하던 카이셀은, 이윽고 침대에서 느껴진 기척에 화들짝 놀라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으음...”

“스, 스칼렛. 일어 난 건가? 일어났으면 대답 좀 해봐. 스칼렛?”

“...카이셀?”

“일어났구나. 의무병! 아니, 의사! 아제스트! 빨리 이리로 와!”

눈을 비비며 깨어나는 스칼렛을 본 카이셀의 손이 덜덜 떨렸다.

동공은 흔들리고, 심지어 말 마저 더듬으려는 것을 애써 참아낼 따름이었다.

고작해야 여인 하나가 일어난 것뿐인데, 왜 이렇게 안심이 되는 건지.

카이셀은 씰룩이는 입꼬리를 손으로 가린 채 아제스트에게 검진 받는 스칼렛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정말로 다행이라고,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할 그 한 마디를 마음 깊숙이 삼켜낸 카이셀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

아제스트와 의사들이 빠져나간 막사, 단둘이 남게 된 것을 카이셀은 눈알을 데구르르 굴리며 스칼렛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몸은 괜찮아보였다. 지친 기색이 보이긴 했으나,

그건 마베트에게 정신을 빼앗긴 탓에 피로를 느끼는 것뿐이었으니까.

간지럽지도 않은 목덜미를 긁적이며,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던 카이셀의 눈이 마침내 스칼렛에게 닿았다.

따듯한 레몬티를 홀짝이던 스칼렛은, 카이셀과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전하...라고 부르는 게 맞겠죠. 이제 저는 그래야 하는 사람이니까요.”

전하, 그 호칭에 카이셀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물론 절멸과 관련이 있으니 그렇게 부르는 게 맞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딱딱한 호칭이 아니던가. 잠시 허공에 손을 뻗은 채 멍하니 입을 벌리던 카이셀은, 스칼렛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다. 그게 더 편하니까.”

“제가 어떻게 그래요. 저 제가 한 거 다 기억하고 있어요. 제가 전하의 몸을...네, 그렇게 상처입힌 것도 전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대뜸 소리치긴 했으나, 갈비뼈에서 느껴진 아릿한 통증에 카이셀은 혀를 살짝 깨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더럽게 아팠다. 아직 상처는 다 낫지 않았고, 브레스를 직격한 고통은 아직도 남아있었으니까.

그런데 그걸 어찌 당사자 앞에서 아프다고 하겠는가.

혀를 씹어서 아프고, 대뜸 소리친 탓에 민망하고. 순식간에 붉어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카이셀이 고개를 푹 숙이자,

스칼렛은 그 모습을 보며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안 아프세요?”

“간지러운 수준이었지. 전혀 아프지 않았어.”

“진짜요? 정말?”

“...다 알면서 그리 묻지 마라. 아팠다.”

푸흐흐. 원래 같았으면 기분이 나빴을지도 몰랐지만,

스칼렛이 웃자 어쩐지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아 카이셀은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스칼렛이니까. 담요를 덮은 채 앉아있는 스칼렛의 모습은 여전히 피곤해보였다.

퀭한 눈가, 뺨까지 내려온 다크 서클은 누가 보더라도 그녀가 피곤하다는 걸 알지 않을까.

“좀 더 자도 괜찮은데.”

카이셀의 말에 스칼렛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붕붕 저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은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구하러 와줘서 고맙다고, 다치게 해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고 얘기하고 싶었는데.

괜스레 열이 달아오르는 탓에 차마 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쿵쿵 뛰는 심장에 귀끝이 마치 불에 타는 것만 같았다.

왜 그러는 건지는 몰라도, 스칼렛은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카이셀이 그 원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전하가 여기 계신­”

“카이셀이라 부르라고 했는데.”

“카이셀이 여기 계셔서­”

“말도 편하게 해도 좋아. 환자니까, 존댓말은 조금 불편하잖아.”

“카이셀, 도대체 아픈 거랑 존댓말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카이셀 스스로도 그 둘의 상관관계는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냥 스칼렛이 자신에게 존댓말을 하는 것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에는 잘 들었지만, 지금은...그냥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말로 그냥이었다.

가슴 한 구석에서 자꾸만 꿈틀거리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카이셀은 아직 알지 못했다.

여전히 반말은 안 하는 건가. 그 점이 조금 섭섭하긴 했지만 카이셀은 더 이상 무어라 하지 않았다.

그런데...말을 편하게 하라고 한 게 조금 싫은 건 아닐까?

스칼렛의 눈치를 살피던 카이셀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말을 편하게 하라고는 했는데, 이제 무어라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럴 거면 에반에게 조언이라도 들어두는 건데.

허나 후회해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는 터라, 생각을 끝마친 카이셀이 입을 열었다.

“...너에게 뭐라 말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이번 토벌전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저는 괜찮아요...전부 저희 가문의 잘못이잖아요.”

“아니, 그런 게 아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스칼렛의 앞에서 꺼내고 싶지 않았다.

비록 그들이 절멸이라지만, 스칼렛의 가족들을 죽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스칼렛이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그 얘기를 꺼낸다, 라.

카이셀은 바보가 아니었기에, 테라제인에 대한 얘기는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너와 조금 더 깊게 대화를 나누고 싶을 뿐이야. 그냥, 황도에서 있을 때처럼...그렇게 말이지.”

“...카이셀은, 제가 싫지 않아요?”

“내가, 너를 왜 싫어하나?”

입술을 삐죽인 카이셀이 툴툴거렸다. 도대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자신은 그리 옹졸한 사람이 아니었다.

남들처럼 아직까지도 스칼렛이 절멸과 관계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그녀의 사정을 어느정도 알고 있지 않던가. 오히려 이 싸움에서 가장 힘들었을 사람은 그녀였다.

그녀가 마베트에게 정신을 완전히 빼앗겼다면, 마베트는 제 본신의 힘을 온전히 사용해 이 주변을 완전히 초토화 시키지 않았을까.

“네 탓이 아니다. 마베트의 잘못일 뿐이지. 어릴 때부터 세뇌당한 것을 네 잘못이라 한다면, 그 사람들은 내가 무어라 할 터다.”

“그래도­”

“네가 잘못한 건 딱 하나야.”

카이셀은 스칼렛을 가만히 응시했다.

살짝 젖은 붉은 색의 머리카락, 창백한 피부, 이런 일을 겪었음에도 변하지 않은 그 멍청하리만치 순수한 천성.

카이셀은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그동안 만났던 그 어떠한 여인보다도, 스칼렛이 가장 옆에 남아 있어주었으면 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깨닫기엔 너무 미숙했고, 결국 그 감정을 다른 이름으로 치환시킨 카이셀이 작게 중얼거렸다.

“...내 허락도 없이 떠난 것.”

그 이름은 소유욕이었다. 조금 미묘한 이름이었지만,

카이셀은 언제까지나 스칼렛을 제 옆에 두고 싶었다. 도구처럼 다루고 싶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전에 하던 것처럼 거리를 함께 걷고, 도서관에서 책을 펼쳐 놓은 채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가끔은 단 것을 먹으면서도 눈살을 찌푸리는 것도, 스칼렛이 먹지 못하는 매운 음식을 일부러 골라 반응을 살피는 것도 나름 즐거웠다.

“조금 더 신중하게 행동했어야 했다. 내게 먼저 말을 하고, 네 사정을 내게 설명해주고. 하다못해 떠나고 싶지 않았다고...솔직하게 말해주었으면 어디가 덧난단 말이냐.”

“......카이셀.”

“솔직히, 서운했다. 네가 아무 말 없이 황도에서 떠났을 때. 내게 편지 한 장 정도는 남기고 갔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스칼렛이 황도를 이미 떠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 카이셀은 하루 온종일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던 연회장을 배회하고, 아무도 없는 텅 빈 거리를 홀로 걸었다.

함께 먹었던 것을 시켜 먹어도 달지 않았고, 매운 것을 먹어도 짜증만 날 따름이었다.

미안하다는 듯, 귀를 축 늘어트린 스칼렛의 모습을 본 카이셀의 입꼬리가 잘게 떨렸다.

자신이 스칼렛에게 이런 말을 해도 괜찮은 지에 대해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시간이 없을 테니까.

“이번엔 봐줄 생각이다.”

“네?”

동그랗게 뜨인 스칼렛의 눈을 본 카이셀이 시선을 돌렸다.

세상 모든 것이 저기에 비추어 반사될 것만 같은 맑음이라, 도무지 함부로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자신과 완전히 정반대의 성향,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카이셀이 입을 연 것은 아주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앞으로는, 내 허락 없이 떠나지 마라.”

메마른 입술을 딱 붙인 카이셀의 시선이 스칼렛과 마주했다.

만약 스칼렛이 그게 무슨 소리냐며, 싫다고 하면 자신은 무어라 해야 할까.

그냥 장난이었다고 하고 넘어가야 할까. 사실 가장 겁이 나는 것은 그녀가 정색하는 것이었다.

황도에서의 일이 그저 자신에게 장난이었을 뿐이라며, 더 좋은 남자를 만나러 찾아간다고 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지금이라도 그냥 솔직하게 말해?’

그냥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게 무슨 마음인지는 몰라도 네가 없으면 안 될 것 같다고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나을까.

불안함에 카이셀의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스칼렛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카이셀을 빤히 바라볼 따름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평생 같았고, 영원처럼 느껴졌다.

툭,

이마에서 흐른 식은 땀이 바닥에서 떨어졌을 때, 스칼렛의 얼굴이 화악 붉어지며 동시에 들고 있던 찻잔을 침대 위에 떨어트렸다.

“우와앗!”

“스칼렛? 아, 이게 아니지.”

다급히 손수건을 꺼내어 스칼렛에게 건네자, 스칼렛은 손을 덜덜 떨며 카이셀의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주춤거리며 물기를 닦아내곤, 카이셀의 눈치를 힐끔 살피며 눈알을 데구르르 굴렸다.

“그으...카이셀.”

“마, 말해. 듣고 있으니까.”

“방금 저한테 한 말이...그러니까, 카이셀 옆에 계속 있으라는 거죠? 떠나지 말고?”

“그으렇게 되나? 나는 잘...모르겠는데. 그게, 네가 싫다는 건 아니고. 그냥...그래, 내 옆에 있으라는 소리가 맞아.”

확 달아오른 열에 당황하던 카이셀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렇게 된 이상 한 번 부딪히자는 심정으로, 눈을 부릅 뜬 채 스칼렛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렇게 정적이 흐르고, 영원할 것만 같던 침묵이 깨졌을 때. 스칼렛은 손가락을 쿡쿡 부딪치며 입술을 달싹였다.

“저는 좋은데요...카이셀 정말 괜찮아요?”

“뭐라고?”

“아니, 저는 카이셀이 싫다고 하면 갈 생각이에요. 정말로요.”

“내가 왜 싫다고 해, 미쳤나? 그러니까 네 말은, 좋다는 건가? 내 옆에 있을 거란 말이지?”

“...넵.”

부웅­

순간 하늘을 향해 뛰어오른 카이셀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를 지르려는 것을 꾹 참은 카이셀의 팔이 바들바들 떨렸다.

아마도 인생에서 업적을 기리자면 바로 이 순간이 아닐까, 하며 기뻐하던 카이셀은.

그런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스칼렛의 시선을 느끼곤 얼굴을 붉혔다.

“큼, 그러니까. 이건.”

헛기침을 내뱉으며, 어색한 몸짓으로 막사의 입구까지 재빨리 다가간 카이셀이 막사의 문을 붙잡고 입을 열었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아주 조심스럽게.

“...잘 쉬어라. 나중에 또 올 테니까.”

“넵...”

카이셀이 사라지고, 잠시 이어지던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스칼렛은 제 뺨을 양손으로 감싼 채 몸을 붕붕 흔들었다.

“어, 어떡해. 나 고백 받은 건가?”

자기 옆에 있으라는 소리는 분명 고백일 테니, 머릿속에 꽃밭이 가득 피어난 스칼렛의 입꼬리가 헤벌레 벌어졌다.

물론 카이셀에게 그 말은 고백이 아니었고, 단순히 조금 더 같이 있고 싶다는 표현의 하나였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침대에 누워 발을 동동 구르는, 아무것도 모르는 스칼렛의 얼굴을 행복해보였다. 무척이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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