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 결전 (6)
* * *
아버지, 에반에겐 꽤나 어색한 말이었다.
피아니스트로 살 때도, 그리고 어린 시절에도 아버지란 존재는 매우 껄끄럽게만 느껴졌으니까.
그 단어를 듣자마자 떠오르는 기억이란 손이 전부 까져 피가 날 때까지 검을 휘두르던 것과, 사흘 동안 잠도 못 자고 콩쿠르 준비를 해야만 했던 것.
그래서일까, 거의 30년 만에 만나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본 에반의 눈동자엔 조금의 반가움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만나자고 한 말에 응답했을 뿐, 이미 아버지라는 존재에게 느낄 감정은 그리 많지 않은 게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마치 거울을 보는 것만 같은 그 눈동자를 본 순간 감정이 요동쳤다는 것만큼은 차마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라는 건지, 괜스레 이끌린 혈육의 정이 자신을 이 자리에 속박하는 것만 같아서.
에반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맞은 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서, 왜 부른 겁니까.”
“아버지가 자식을 부르는데 무슨 이유가 있겠느냐.”
“자신이 아버지에 걸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럴 리가.”
아서 프리드, 제 아버지의 이름을 곱씹은 에반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까와는 달리 말하는 것도,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달랐다.
보랏빛으로 물들인 눈동자는 초록색으로 돌아온지 오래였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 에반은 예전에 자신이 읽었던 편지를 떠올렸다.
설마 자신만 그 용언이 담긴 편지를 읽었겠는가.
프리드라는 가문의 일원은 자신만큼은 아니더라도 모두 용혈을 지니고 있었다.
“세뇌엔...풀리신 겁니까.”
그 질문에 아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머릿속에서 속삭이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자신의 자식에게 칼을 꼽으라는, 그 끔찍한 생각 또한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미래는 변하지 않을 터였다. 자신이 절멸이었을 때 행한 것이,
이제와 변하지 않을 테니까. 에반처럼 15살에 세뇌당해, 에반을 낳고 심지어 지금까지도 절멸에게 세뇌당한 채 살아왔다.
설령 원해서 한 것이 아니라 한들, 이 업보를 어찌 그냥 벗을 수 있을까.
“이제야 머리가 좀 맑구나.”
“......”
“한 번도 너와 이렇게 대화해본 적이 없었지. 생각보다...나를 닮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다.”
“아버지처럼 살지는 않을 겁니다.”
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서릿발과 같은 말투에 아서는 쓰게 웃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리라, 에반이 어렸을 때. 자신이 아들에게 한 일이란 차마 아버지로써 할 수 없는 것들이었으니까.
똑같이 아버지에게 상처입었음에도, 결국 세뇌당해 아들에게 같은 일을 반복했다.
용서 받을 수 없다. 그것이 현실이라, 아서는 비릿한 맛이 느껴지는 입가를 슥 닦으며 입을 열었다.
“...연인이 생겼다고 들었다. 내가 며느리라 부를 자격은 없지만, 그래도 축하한다.”
“뭐...네.”
한없이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에반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해야 머리를 긁적이는 것뿐이었다.
차라리 자신을 매도하고 질책했다면 모를까. 이렇게 한 없이 저자세로 나오면 자신 또한 무어라 하기 그렇지 않은가.
애초에 뭐라 욕할 생각은 없었지만, 아직 마음 한 구석에 남은 증오심은 제 아버지를 차마 부드럽게 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잠시간의 정적,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한 채 한참 동안 흐르는 시간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건 에반이었다.
“결혼 할 겁니다.”
“...결혼이라. 그래, 너도 그럴 나이가 되긴 했지.”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그렇게 살 겁니다. 성도 아마 바뀔 거예요. 이제 저는 에반 프리드가 아니라, 에반 유리스로 살아가겠죠.”
“그런가.”
“아버지처럼 아이에게 많은 것을 바랄 생각 없습니다. 그냥, 하고 싶은 거 하게 살면서. 먹고 싶은 거 먹게 하고, 놀고 싶을 때 놀 게 하고.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게 할 겁니다. 그게...아버지일 테니까요.”
“그렇겠지.”
선선히 웃으며, 자신의 말 하나하나에 고개를 끄덕이는 아서의 모습을 본 에반은 괜스레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왜 화 한 번 내지를 않는단 말인가. 자식이 아버지에게 대놓고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자신이 태어난 곳을 부정하며 아버지를 욕하고 있는데.
그저 허허로이 웃고만 있는 그 모습에 괜스레 화가 치솟았다.
어쩌면 그저 어린 시절의 기억에 대해 이제 와 화가 난 것일지도 몰랐다.
어린 아이와도 같은 감정이었으나, 에반은 괜스레 느껴진 감정에 퉁명스레 목소리를 내뱉었다.
“...화도 안 납니까? 아버지처럼 살기 싫다고, 당신 같은 사람이 되지 않을 거라 말하고 있는데. 제가 유리스로 성을 바꾸면, 더 이상 프리드는 없습니다. 절멸과 협력했으니, 아마 전부 죽겠죠. 아버지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왜 화가 나겠니, 예전에 내가 했던 생각과 똑같을 뿐인데.”
싱긋 웃은 아서는, 이윽고 탁자에 놓인 차가운 물을 마시며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저 물이 있었을까. 에반이 의아해했으나, 물을 삼킨 아서가 에반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실패했다. 너처럼 세뇌를 극복하지 못하고, 단지 마베트의 꼭두각시로 살아갔을 뿐이지. 그건 이미 200년 전부터 반복된 이야기였다. 다만...그게 너에게 이르러 끊겼음이 그나마 다행이구나.”
“실패했다는 건...아버지도.”
“그래, 나도 너처럼 편지 한 통을 받았지. 너에겐 내 이름이 적혀있었겠지만, 내겐 너의 할아버지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걸 연 순간, 내가 그동안 다짐했던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무너져내렸다.”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지 않을 거란 각오, 제국에 한 몸을 바칠 거란 다짐.
마을에서 만나 처음으로 연심을 품었던 여인에 대한 마음.
그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사라져, 그 날부터 자신은 마베트의 꼭두각시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은 기억, 그것들을 떠올린 아서는 조용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편지를 받았던 그 날도. 이렇게 별이 반짝이던 밤이었다.
괜스레 감성에 젖었다가, 이윽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에반의 시선에 아서는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와 염치없는 말이지만, 나는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네가 말한 것처럼 아들하고 같이 나가서 말을 타보고도 싶었고, 검을 직접 가르치며 손수 실력을 키워주고도 싶었지. 좋은 아버지가 뭔지는 몰라도...어릴 적의 나는 그런 꿈을 품곤 했다.”
다시는 이룰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꿈이었지만. 에반의 시선이 아서에게 향했다.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는 그의 눈빛은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정말로 그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일까. 하지만...그렇다고 한들 변하는 것은 없었다.
이미 어린 시절 입은 상처가 그 몇 마디에 옅어질 리가 없지 않은가.
전부 지난 일이 되어버렸을 뿐이었다.
이제 와 서로를 증오하고 헐뜯더라도 아무런 이득도, 손해도 없다는 걸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그저 아이가 칭얼거리는 것처럼, 과거에 연연하고 있다는 티만 내는 것처럼 보일 뿐.
에반은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이제 다시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아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볼 따름이었다.
주름진 얼굴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늙어만 보였다.
젊은 시절의 그는 에반에게 그 어떤 것보다도 무서운 존재였다.
귀신보다 아버지가 나타났다는 것에 놀라던 시절이었으니,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게만 느껴졌다. 초라해보였다.
축 늘어진 어깨가, 훨씬 깊게 패인 주름이. 더 이상 재기할 수 없는 한 남자란, 그 어떤 존재보다도 초라해보였다.
“나처럼 살지 마렴. 이게 너에게 말하는...내 마지막 소원이다.”
“......”
“이제 내가 어떻게 될 지는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어서 잡아 가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전부 다했다.”
얇은 손목을 내미는 아서를 에반은 조용히 응시했다.
손목을 잡아 제국군이 주둔한 곳으로 데려가면,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을 터였다.
아마도 단두대에 목이 놓여, 아이린이 죽었던 것처럼 목이 잘려 죽으리라.
자신의 손으로, 제 아비를 잡아넣는 것의 의미를 그는 알고나 있는 걸까.
이미 2번의 삶을 겪어 아버지란 존재는 제게 꽤나 희미해진지 오래였다.
두 명의 아버지, 비록 두 사람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어도. 품는 증오는 반절로 나뉘었다는 소리였으니까.
에반은 아서의 손목을 붙잡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아이가 곧 태어납니다. 아마도 여름이 끝날 무렵에 쌍둥이가 태어날 것 같습니다. 딸 하나, 아들 하나.”
“......”
“딸은 로벨리아고, 아들은...아이린은 모르지만 아마도 아서라 할 것 같습니다. 태어나면, 아버지처럼 자식을 대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행복하게 살 겁니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애써 무시한 에반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매일 새벽에 깨워 검을 잡으라 하지도 않을 거고, 손바닥이 찢어져 피가 흥건해질 때까지 검을 휘두르라 하지도 않을 거고, 무거운 바위를 들고 어깨가 빠질 때까지 버티라 하지도 않을 겁니다. 매일 아침엔 비싼 재료로 만든 밥을 차려줄 거고, 아이들을 가르칠 가정교사도 데려오겠죠.”
“...그래.”
“가끔은 아이들하고 늦잠도 잘 거고, 가정교사 몰래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놀기도 할 거고. 아이린에게 들켜서 혼도 날 거고. 말을 듣지 않을 때면 어쩔 수 없이 혼도 내겠지만, 크게 다그치지 않을 겁니다. 피아노 연주도 들려줄 거고, 아이린과 함께 합주도 할 겁니다. 그리고...그렇게.”
턱밑까지 차오른 말을 내뱉으려던 에반이 고개를 푹 숙였다.
목이 따끔거렸다.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자신이 겪은 모든 과거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언젠가 아버지라는 사람을 다시 만나면 할 얘기를 생각해두고 있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그 중 하나도 말할 수가 없어서. 입을 작게 벌린 에반이 조용히 읊조렸다.
“...행복하게 살 겁니다.”
“다행이구나.”
아서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어째서 아들의 이름이 아서인지도,
왜 구태여 자신에게 이런 말을 내뱉는지도 묻지 않았다.
다만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에반이 하는 말이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어렸을 때의 너는 키가 참 작았지.”
세뇌되었던 시절, 에반의 어렸을 때 모습을 어렴풋이 떠올린 아서가 입술을 달싹였다.
에반에게는 듣기 싫은 기억일지는 몰라도. 아서에게 그 기억이란 아프면서도 소중한 기억들이었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 그리고 추억할 수도 없을 기억.
키가 작아 검 하나도 끙끙거리며 주워들었던 아들의 모습을 기억한 아서가 조용히 웃었다.
“훌륭하게 자랐구나.”
에반의 시선은 더 이상 아서에게 향하지 않았다.
소파에서 일어난 에반은 아서에게 등을 돌린 채, 아무것도 없는 공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가보겠습니다. 여기에 너무 오래 있어도 의심 받을 테니.”
“나는 데려가지 않는 거니?”
“...가보겠습니다.”
에반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이 뺨에 닿았다.
분명 메말라 있어야 할 바람이었건만, 습기를 담은 바람에 에반의 눈가가 축축하게 젖었다.
어쩌면, 자신에게만 이 습기가 느껴질지도 모르리라. 괜한 감정이었다.
이제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누군가 본다면 전혀 이해하지 못할 감정.
평생 아버지라 생각하지 않았던 존재와 만나 나눈 대화란, 에반의 무언가를 자극했다.
고개를 숙인다. 하늘에서 내린 눈이 목에 닿아 한기를 퍼트리기도 잠시,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는 에반의 어깨에 눈이 천천히 쌓이기 시작했다.
조금씩 희미해지는 기억, 허나 그 기억 속에서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정(?)이란.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어색한 감정이었다.
“죽지 마십시오.”
이 목소리가 닿을지는 모르겠으나, 에반은 한 차례 중얼거린 뒤 다시 앞을 향해 걸었다.
그가 죽기엔 저지른 죄가 너무 많아서, 그 죄책감에 평생 고통 받기를 받았다.
제국군의 손에 죽는 것은 너무도 편한 죽음이 아니던가.
애증이라, 에반은 아무 말 없이 걸었다. 눈이 밟히고, 낙엽이 밟혀 바스라지고, 그렇게 또 한참을 걷는다.
삭막한 나무 사이를 지나, 아버지를 만났던 공터에서 벗어나던 에반이 걸음을 멈춰 섰다.
푸욱
바람에 묻혀 희미하게나마 들려온 이 소리는 무엇일까.
알 것도 같았지만, 에반은 그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 이상 생각해봐야 좋을 것도 없을 테니까. 아까보다 조금 더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뺨에 닿았다. 외롭고, 쓸쓸한.
저무는 낙엽마저 슬퍼 보이는 계절이었다.
무너진 테라제인의 성을 한참 바라보던 에반은, 이윽고 다시 등을 돌린 채 앞을 향해 나아갔다.
새하얗게 쌓인 눈은 천천히 성을 덮고 있었다. 이 눈이 언제쯤이면 다 녹을까.
이제야 1월의 첫날이었으니, 아마도 다 녹을 때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별이 내리는 것만 같은 눈 사이, 하늘을 향해 돌리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눈이 시릴 만큼이나 반짝이는 별빛이었다.
계절이 무색하게, 봄이나 여름과도 같이 반짝이는 겨울.
허나 가슴 한 구석에 느껴지는 한기만큼은 아마도 진실이리라.
겨울이었다.
춥고, 싸늘한. 그렇기에 더욱 잊을 수 없는.
그런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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