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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36화 (136/181)

〈 136화 〉 결전 (5)

* * *

에반은 피범벅이 된 입꼬리를 억지로나마 끌어 당겼다.

피가 새어나오는 폐는 숨을 들이쉴 때마다 욱신거렸지만, 참으로 만족스러운 고통이란 생각이 들었다.

죽였나...? 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방금 그 일격으로 에반은 마스터 너머의 길에 발걸음을 들였다.

반드시 죽였을 터였다. 자신이 죽이고자 마음 먹었으니, 설령 죽지 않았다 한들 얼마 안가 죽을 모습이었다.

마베트는.

“크으...에반, 프리드...”

마베트는 아직 죽지 않았다. 다만 오직 머리만이 그나마 온전하게 남은 몸뚱이를 끌어안은 채,

조금이나마 쉴 수 있는 숨을 몰아쉬고 있을 따름이었다. 드래곤 하트는 완전히 뭉개졌다.

사실상 반으로 쪼개진 몸이었으나, 드래곤 특유의 생명력이 아니었다면 이미 죽을 목숨이었다.

보랏빛의 눈동자는 이미 그 빛을 잃었다. 마베트는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에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자신은 곧 죽겠지만, 저 기사는 결국 살아남으리라. 비통했다.

천 년이란 시간동안 준비해온 모든 것이 이렇게 무너졌음을. 마베트는 끝까지 인간을 인정할 수 없었다.

서로를 증오하고, 남들이 잘되는 것을 질투하여 어떻게든 무너트리려 하는 족속들을 무슨 이유로 이토록 살리려 한단 말인가.

빠드득, 얼마 남지 않은 이빨이 갈리다 이내 부서져 땅에 흩뿌려졌다.

잇몸에서 질질 새어나오는 피에 비릿한 맛을 느끼던 마베트는, 이윽고 에반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즐겁겠군, 나를 죽여서 모든 것을 지켰으니까 말이야.”

“글쎄.”

에반은 조용히 주변을 둘러봤다. 이긴 것 자체에 대해서는 기뻤지만,

과연 그 감정을 밖으로 표출해도 좋은 것일까. 너무 많은 이들이 죽었다.

에반의 시선에 한 엘프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같이 싸우던 엘프의 장로,

팔 한짝을 잃은 채 바닥에 널부러진 아니스의 시신을 본 에반이 이내 쓰게 웃었다.

“너무 많이 죽었어.”

트롤도, 드워프도, 기사도, 엘프도. 그 중에 아는 얼굴이 몇 없다는 것은 그나마 위안이 되었지만,

그런 것치곤 너무도 많은 이가 죽었다. 처음 출발했을 때 1만에 가까운 병력의 절반이 사라졌으니,

이 승리에 온전히 기뻐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피에 젖은 손이 덜덜 떨렸다.

그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린 에반은, 이윽고 한숨을 푹 내쉬며 마베트를 바라보았다.

죽여야 하는데...아무래도 당장 일어나기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검으로 쓰러지는 것을 겨우 막으며. 에반이 마베트를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내 탓이야.”

그 말에 마베트의 눈이 부릅 뜨였다. 아래에 있는 생명체들을 죽인 것은 자신이었다.

그런데...왜 스스로를 탓한단 말인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생각을 거듭했으나,

마베트는 결국 에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기뻐해도 모자라지 않은 상황이었다.

천 년이나 이어지던 계획이 마침내 그 결실을 맺었으나, 한 사람의 기사가 그 모든 것을 막아냈다.

스스로를 칭송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베트는 에반 프리드라는 기사를 인정하고 있었다.

알라르와 프리드마저 해내지 못했던 것을 스스로 해냈다.

봉인이 아닌, 죽음이라는 영원한 안식 속에 자신을 밀어 넣지 않았는가. 에반은 마베트의 시선을 느끼곤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가 조금 더 빨리 널 죽였으면, 저렇게 많이 죽지는 않았겠지.”

“...전부 너보다 비루한 인간들이다. 가치라곤 조금도 찾을 수 없는데, 어찌하여 너 정도 되는 인간이 저들을 불쌍히 여긴단 말인가?”

“내가 저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게 아니야. 내가 무슨 자격으로 불쌍하게 생각할까.”

살짝 솟아오른 바위에 걸터앉은 에반이 천천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붉은 달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끝나버린 개기월식, 별빛이 찬연히 반짝이는 하늘은 늘 보던 밤하늘과 완전히 닮아있었다.

“그냥...아쉬운 거지.”

자신이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없었다는 것쯤은 에반도 알고 있었다.

자신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마베트가 나타나기도 전에 테라제인을 처 부쉈을 테니,

그저 이미 벌어진 현실을 안타까워할 따름이었다. 만약 저기 쓰러져 있는 사람들 중 자신이 있었다면, 아이린이 느꼈을 감정을 상상하면서.

저기 쓰러진 시체 중 누군가에겐 가족이 있을 거고,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을 터였다.

모셔야할 부모님이 있었어야 할 수도 있고, 어쩌면 홀로 어린 자식을 키우고 있을 지도 몰랐다.

허나 이미 눈을 감아버린 이들에게 그 다음은 존재하지 않았다.

차갑게 식어버린 몸에, 더 이상 심장이 박동할 일은 없다는 소리였다.

“너는 이해 못 하겠지. 기대도 안 해.”

마베트는 그런 존재였다. 애초에 자신 이외의 것들을 하찮게 여기는 존재.

아마 절멸이란 조직도 자신의 뜻을 이룬 뒤에는 헌신짝처럼 버렸으리라.

그렇기에 에반은 마베트의 죽음을 동정하지 않았다. 빌테인이 죽었을 때,

아델이 죽었을 때, 에반은 그들의 죽음을 약간이나마 동정했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품고 그리 행동했는지 그들 자신에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저 눈, 흐려졌으나 여전히 보라색의 윤곽을 보이는 마베트의 눈동자는 여전히 마주치기만 해도 기분이 나쁠 따름이었다.

“나는...곧 죽는다. 너는 이제 제국의 영웅이 되겠지. 모두에게 칭송을 받으며, 어쩌면 너를 황제로 내세우려는 이들도 있을 터다. 행복하겠군. 그렇지 않나?”

“그런 건 조금 그런데.”

그런 삶, 나쁘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모두에게 칭송받으며,

제국 어디를 가든 모두 자신을 영웅이라 치켜세우리라.

하지만 그런 인기를 얻은 것은 이미 피아니스트일 때도 충분히 느껴보지 않았던가.

그리고 애초에 인기를 얻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이유를 살피면 제 짝을 찾기 위해서가 많았다.

자신에게 구애하는 여자나 남자가 늘어날 테니, 괜히 영웅호색이라는 말이 있을까.

“난 그런 거 관심 없어.”

그냥 한적한 곳에 가서 낚시나 좀 하고, 가끔은 태어난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이 에반의 꿈이었다.

커다란 나무가 있는 언덕, 그 나무 옆에 집을 짓고 앞에 있는 정원에 놓인 벤치에 앉아 주변의 풍경에 녹아드는 것.

그런 삶이야말로 진정 즐거운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여자야 뭐, 이전에도 많이 구애 받았던 것도 있고. 지금은 제게 아이린이 있었다.

다른 이에게 관심을 가질 생각도, 만나볼 생각도 없었다.

“특이하군.”

“너만 할까.”

단지 하찮다는 이유로, 서로를 증오하는 인간들이 역겹다는 이유로 모든 사람을 죽이려 했던 마베트보다는...

그래도 자신이 조금 평범하지 않을까. 명예,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욕심도 없고, 남은 것은 그저 조용히 쉬고 싶을 뿐이었다.

“생각은 여전히 그대로겠지?”

“변하지 않는다. 너를 인정할 뿐, 여전히 인간은 내게 벌레 같은 존재일 뿐이다. 엘프도, 드워프도, 트롤도, 노움도. 결국 모두가 같잖은 존재들이지.”

“그래...그렇게 생각한다니 조금 낫네.”

누군가를 죽이는 것은 결코 좋은 경험이 아니었다.

다만, 그것이 죽어 마땅한 존재라면 조금이나마 낫지 않을까.

마베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에반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스칼렛 테라제인은 살아있다. 아직도 내 정신에 간섭하며 몸부림치고 있지.”

“...살릴 수 있는 건가?”

“내가 죽은 뒤에 천천히 내 영혼이 빠져나갈 터다. 그걸 마나로 붙잡고 있다면, 아마도 스칼렛의 육체를 되살릴 수 있겠지.”

마나라면...에반은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운용할 수 있는 마나가 거의 없었다.

그나마 몸을 움직이기 위해 사용할 마나뿐, 스칼렛의 몸을 재생할 마나가 과연 충분할지조차 의문이었다.

그렇게 고민하기도 잠시, 에반은 제 어깨에 누군가가 손을 올리는 감각에 고개를 돌렸다.

“...스칼렛, 정말로 살릴 수 있나?”

조금 퀭한 얼굴을 한 카이셀이 물었다. 마베트는 난데없이 나타난 카이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분명 살릴 수 있다. 내 영혼이 흩어진 뒤 육체만 잡아주면 될 테니까. 네가 하겠나?”

“괜찮겠습니까?”

“아무렴, 죽기밖에 더하겠나. 내가 할 거다. 에반 네가 한다고 해도...내가 할 거다.”

“제가 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마나도 부족하니까요.”

카이셀은 그 대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이윽고 에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피로 흥건한 에반의 몸을 바라보면서, 이윽고 조용히 얼굴을 쓸어내리며 에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네 덕이야. 전부.”

“과찬이십니다. 그냥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니까요.”

“그 해야 할 일을 해내는 사람은 극히 일부지. 뭐, 일단 이런저런 것들은 나중에 황궁에서 하고. 이제...슬슬 끝내야 하지 않겠나.”

에반은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마베트를 죽여야만 했다.

이 모든 일들의 시작점이자, 그 일들의 결말을 이제는 써야만 했다. 아스칼론의 검신은 백색을 띄고 있었다.

에반이 피어올린 약간의 마나를 머금은 채, 오로지 마베트를 향해 강렬한 적의를 내뿜고 있었다.

기기긱­

목에 남은 마지막 비늘을 잘라낸 에반이 마베트를 바라보았다.

흐리멍텅한 눈은 초점이 보이지 않았으나, 분명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거란 직감이 들었다.

잠시 목에 칼을 겨눈 채 가만히 있던 에반은, 마베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라도 있으면 해도 괜찮은데.”

“...할 말이라.”

마베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목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죽음의 기운을 온 몸으로 받아내면서,

자신의 삶을 천천히 살폈다. 태어났을 때부터 품어온 타 종족에 대한 증오,

알라르와 프리드가 만들어낸 군세와 싸웠고, 봉인 당해 천 년이 흘러 이 시대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것을 끝장내고 부정하리라 생각했건만, 결국 꼴사납게 땅에 쓰러져 그토록 무시하던 인간에게 죽을 운명에 놓여졌다.

후회라. 마베트는 평생 자신은 아무런 후회를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죽으면 죽었지, 죽을 때가 되어도 그저 태연하게 죽을 거라 생각했다.

허나 이렇게 되고 보니 떠오르는 것이란, 예전에 품었던 자그마한 알이라서. 마베트는 쓰게 웃은 채 입술을 달싹였다.

“한 끝 차이였다. 내가 조금 일찍 부활했더라면 여기 쓰러져 있는 건 너였겠지. 그게 원통할 뿐이다."

“...너 답다.”

추해지고 싶지 않았다. 추한 생각을 품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오직 자신 뿐이어야 했기에,

마베트는 씨익 웃은 채 눈을 부릅떴다. 하늘을 수놓는 것은 평생동안 보고 자랐던 어둠.

그 사이에 비치는 것은 평생 동안 부정하려 했던 찬연한 별빛들.

그 아름다운 광경이 제게 의미하는 것은, 분명 자신이 이 일생동안 추구 했던 것을 실패했다는 것이리라.

한 때 자신이 낳았던 자그마한 알, 제 탐욕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삼켰던 알.

콰드드득­!

목을 파고드는 그 어둠과도 같은 죽음 속에서, 마베트는 태어나 처음으로 후회했다.

어쩌면 정말 하찮았던 것은 자신이 아닐까. 허나 바뀌는 것은 어떠한 것도 없었기에,

마베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둠에서 태어났던 고룡이, 다시금 어둠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

“......”

마베트는 죽었다. 마베트의 앞에 앉아 마나를 끌어올리는 카이셀의 모습을 확인한 에반은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모든 것이 끝났지만, 아직 자신이 봐야 할 사람은 한 사람 더 남아있었으니까.

자신을 부르는 이 미약한 마나, 어색하지만. 동시에 그 어떤 마나보다도 익숙한 마나를 향해 에반은 발걸음을 옮겼다.

“에반, 어디 가나?”

카심 백작의 말에 잠시 멈춰선 에반은, 이내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금방 끝날 거예요.”

“...도대체­ 아니, 됐다. 해가 뜨기 전에는 돌아와라, 그때엔 다시 황도로 출발해야 하니까.”

“네, 그럴게요.”

바람이 불었다. 부서진 땅에서 흘러내린 용암이 굳어 새까만 가루가 흩날렸다.

타버린 나무, 무너진 숲에서 이따금 낙엽이 바스러져 날아왔지만,

에반의 시선은 그보다 더 먼 곳을 향해 있었다. 자신이 공략했던 테라제인 영지의 한 쪽. 거기서 만났던 한 사람.

완전히 무너져 내린 성은 더 이상 안쪽이라는 표현을 쓸 수 없었다.

널브러진 가구들, 그 가구 중 소파 하나에 앉아있는 남성을 발견한 에반은.

그 자리에서 발걸음을 멈춘 채 조용히 그 남성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넓지만 초라했고, 익숙하지만 어색한, 반가우면서도 증오스러운 그 등은.

오로지 제 인생에서 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던가.

“왔구나, 에반.”

등을 돌린 남자의 눈동자가 에반과 완벽히 똑같은 초록빛을 내뿜었다.

순간 울컥하는 감정을 억누르면서, 조용히 에반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부르는 호칭을 내뱉으면서.

“...아버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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