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 결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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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껏 많은 적들과 싸워봤고, 목숨도 걸어봤다.
심지어는 죽어본 적도 있었으니, 이 세상에 현존하는 기사들 중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해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 분명하다고 에반은 생각했다.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호흡한다.
가슴 속에서 일렁이는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런 불필요한 감정 때문에 검을 조금이라도 늦게 휘두른다면.
아마도 자신은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할 것이 확실했다. 차분히 생각한다.
승산, 충분히 있었다. 황태자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피해를 입혔다.
비늘 수십 개를 녹였고, 용의 이성을 잃게 만들었다. 거기에 브레스를 쏘아대며 막대한 마나를 소모하게 한 것까지.
하지만 그럼에도 상대는 고룡이었다. 알라르마저 봉인 시키는 것에 그쳤던 고룡.
자신이 봉인이 아닌 완벽한 죽음을 선사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아니. 에반은 그 대답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부정할 수 있었다.
마스터의 경지로는 되지 않는다. 그 위. 빌테인이 언젠가 언급했던, 마스터 바로 위의 경지.
화르륵, 불꽃이 솟구친다. 심장으로부터 피어난 마나의 불꽃은 어느덧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별빛을 잃어버린 밤하늘, 밤그림자를 걷어내며 피어난 불꽃이란 이미 하나의 여명이었으니.
천 년 만에 마주하는 그 새하얀 불꽃을 본 마베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프리드, 그 녀석의 피를 물려받은 건가.”
프리드와 싸웠던 마베트이기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 불꽃에서 피어오르는 기이한 힘, 온 몸이 따끔거리는 것만 같은 감각은 분명 그 용이 지닌 정화의 불꽃이었으니까.
닿기만 하더라도 모든 마력이 타들어가는 이 불꽃. 손가락이 잘린 상처, 원래라면 재생되었어야 했다.
허나 재생이 되지 않는다는 건, 이 자그마한 인간 기사가 이미 프리드의 용혈을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리라.
마베트는 조용히 침음을 삼켰다. 싸워서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나,
지금 맞붙으면 다시금 힘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해질 터였다.
이기더라도압도적으로 이겨야 했다. 모든 힘을 끌어쓰는 것.
허나.
‘...불가능해.’
아직 정신이 ‘완전히’ 합쳐지지 않았다.
스칼렛 테라제인의 영혼은 아직까지 마베트의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직 제 영혼을 꽉 붙잡은 채, 자신의 몸을 되찾으려 애쓰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완벽하게 제 본신의 힘을 끌어낼 수 없다. 마베트는 이를 악문 채 에반을 바라보았다.
빈틈, 보이지 않는다. 아까 싸웠던 카이셀이라는 이름의 황태자와는 차원이 달랐다.
같은 마스터이지만, 정갈한 기운에는 도무지 어둠이 파고들 틈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뚫어야 할까, 어떻게 공략해야 할까. 원래의 힘을 되찾은 처음이었다면 모를까.
카이셀과의 전투는 마베트에게 꽤나 많은 힘의 소모를 불러일으켰다.
고오오 하늘에 모인 그림자가 회오리치며 폭풍을 일으켰다.
산이 부서지고, 동시에 땅에 있던 파편들이 쪼개져 하늘을 향해 떠올랐다.
재앙, 어쩌면 스스로를 재앙이자 절멸이라 칭하는 마베트의 말은 오만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날갯질을 할 때마다 산이 무너져 내렸다. 하늘이 찢어져, 그 틈새로 새어나오던 별빛이 어둠에 가려졌다.
몸이 저릿할 만큼의 마력. 그 폭풍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내고 있던 에반이 아스칼론을 힘주어 쥐었다.
마베트가 자신을 쉽게 노리지 못하는 이유, 에반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마베트의 상처가 얕은 상처는 절대 아니지 않은가. 그것을 회복하기 위한 시간,
이 테라제인에서 벗어나 그 ‘다음’을 실행시키기 위한 힘을 비축하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아마도 그 시간을 벌기 위해 단 번에 자신을 끝내려 들겠지만, 에반은 그렇게 마베트를 쉽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정확히는, 이 자리에서 마베트를 죽이고자 했다.
촤라락, 하늘에 뻗어진 백색의 불꽃이 날카로운 검의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닿기만 하더라도 불타오르는 백염의 검. 각기 무구의 형태를 띤 마력이 어둠과 부딪히더니,
이윽고 폭풍처럼 쏟아져 마베트의 비늘을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콰가가가각! 종잇장처럼 찢기는 비늘에 마베트의 눈이 커졌다.
카이셀의 검과는 완벽하게 다른 위력. 에반은 제 심장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감각을 다시금 느끼며 발걸음을 내딛었다.
빛의 정령, 아마도 길게 사용했다간 죽겠지만...지금은 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만 했다.
시간을 끄는 것이 아닌, 저 마베트를 죽일 사람은 지금 자신밖에 없었으니까.
지금 사용할 수 있는 수. 에반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을 시작했다.
순수한 검으로 싸우기엔, 마베트는 너무나 강력한 적이었다. 빛의 정령,
이미 심장에서 힘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용혈, 금빛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했다. 아스칼론, 용을 봉인시켰던 검.
에반은 아스칼론에서 묘한 감각을 느꼈다. 마치 제 힘을 온전히 쓰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
검을 휘두를수록, 묘하게 둔해지는 감각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허공을 가르는 검에서 동작과 소리가 동화된다. 느려지는 속도.
어째서? 적은 절멸 그 자체라 불리는 마베트였다. 콰아아앙!
한 순간 압도하는 것처럼 보여도, 점차 조급해지는 것은 에반이었다.
브레스가 한 번 솟구칠 때마다 산이 사라졌다.
무너지는 것이 아닌,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소멸했다.
저걸 직격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용을 상대해본 적은 꽤 있었지만, 에반은 마베트의 날개를 자르는 것은 불가하다고 여겼다.
어떻게든 공중에서 타격을 주어야 한다. 에반의 등에서 솟구쳐 나온 백색의 날개가 깃털을 흩뿌렸다.
영역, 에반의 영역은 극심한 마나를 소모했다.
만약 사용한다면 모든 기회가 갖춰졌을 때 사용해야만 했다.
마지막 한 순간, 마베트를 확실하게 끝낼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
카드득, 마베트의 이빨이 에반의 갑옷을 부쉈다.
발톱이 망토를 찢어발기고, 맞지도 않은 브레스의 열기가 머리카락의 첨단을 불태웠다.
용혈이 담긴 백염의 불꽃이 빛을 발했다. 브레스를 검으로 가르며,
빛의 정령으로 만들어진 길이 에반의 눈에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용에게 다가가는 경로, 허공에 그려진 길을 밟는 에반의 뒤로 빛의 날개가 뒤따랐다.
마베트의 보랏빛 눈동자는 황혼이었다. 모든 삶이 죽어가고, 모든 희망이 썩어 문드러지는 그 황혼이 에반을 응시했다.
에반은 그 두려움을 털어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피가 흐르는 입을 닦아내지도 않은 채, 그대로 마베트의 눈이 있는 곳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꽈지지직! 백염과 마베트의 흑염이 부딪혀 굉음을 내뿜었다.
정화의 성질이 어둠을 몰아냈으나, 어둠은 그 백색의 불꽃에도 계속해서 새로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사라지지 않는 어둠, 에반의 몸속에서 꿈틀거리던 빛의 정령이 에반의 검에 새하얀 검신을 덧대었다.
마베트의 발톱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에반의 몸을 후려쳤다.
콰아아앙!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힘이 몸을 덮쳤으나,
마스터에 오른 에반은 애써 그 고통을 참아냈다. 마법이었다면 어떻게 막아냈겠지만,
순수한 물리력은 백염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그대로 에반의 몸에 피해를 주었다.
쿨럭, 입에서 새어나오는 피는 거뭇했다.
싸운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건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저 용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
‘용언.’
에반의 몸이 있던 바닥에서 천천히 글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마법진에 새겨지는 룬 문자처럼, 빙글빙글 회전하며 떠오르는 글자가 금색의 빛을 발했다.
용언, 사용자의 의지를 담아 세상에 그 기적을 실현하는 것. 부풀어 오른 근육이 다시 활기를 품었다.
팽창한 혈관이 조금 더 나은 세상에 에반을 데려다 주었다. 가속하는 속도,
가속하는 검. 에반의 눈에 보이는 검로는 더 이상 에반이 검을 휘두르는 속도를 뛰어넘지 못했다.
“그건, 네가 다룰만한 것이 아니다.”
마베트의 눈살이 한껏 찌푸려졌다. 오직 용만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
그것을 어찌하여 일개 인간이 다룬단 말인가. 에반은 그 말에 작게 웃었다.
자신이 다룰 수 없다는 걸 어찌 그가 판단한단 말인가.
이미 사용도 해봤고, 지금도. 용언은 제 몸속에 완벽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콰앙! 땅을 박차고 튀어나간 에반의 몸이 마베트의 목으로 향했다.
일순간.
마베트는 삶의 끝을 마주했다. 콰지지직! 번뜩이는 섬광과 함께 에반의 몸이 산에 박혔다.
쿨럭이며 피를 토해낸 에반이 멋쩍게 웃으며 마베트를 바라보았다.
닿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쉽게도 고작 스치는 것이 전부였다.
만약 자신이 조금 더 빨랐다면 마베트를 죽일 수 있지 않았을까.
“이, 이...무슨!”
마베트의 목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재생되지 않는 상처는 분명 백염이 그 부위에 닿았음을 의미했고,
한순간이나마 당황한 마베트의 음성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자신이, 고작 인간 따위에게 베였단 말인가. 알라르와 싸운 이후로 단 한 번도 다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저 인간이. 알라르가 입혔던 그 상처를 다시금 떠올리게 만들었다.
“네까짓게, 이 몸에 상처를 입힌단 말이냐! 너를 저주하겠다, 네 사지를 찢어 사방에 흩뿌리고, 네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네 눈알 앞에서 찢어 발길 것이”
“...좆까.”
빠드드득
아스칼론을 땅에 박은 채 몸을 일으킨 에반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건든다, 라. 자신이 어찌 그런 것을 그냥 둘 거라 생각하는 것일까.
자신이 여기서 죽더라도 그렇게 두지는 않는다. 귀신이 되어서라도 막아설 터였다.
허나, 사랑하는 사람을 건드린다는 말을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었다.
고작해야 용인 주제에, 고작해야 고룡이라 불리는 존재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아이린을 건드린다고 지껄인단 말인가.
평생 입에 욕설을 담아본 적이 없어 어색하긴 했지만,에반은 처음으로 고룡에게 욕을 내뱉었다.
조금 후련하기도, 피어오르는 화가 조금 커지는 느낌이기도 했지만. 하나 확실한 것이 있다면.
“너는 오늘 여기서 죽어.”
콰직, 부서진 아스칼론의 검신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에반은 당황하지 않았다. 일부러 부러트린 것이었으니까.
아스칼론은 아직 제 힘을 온전히 되찾지 못한 상태였다.
그 힘을 되찾는 방법, 용언으로 강화된 에반의 몸에서 금색의 불꽃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훨씬 정순한 기운을 뿜는 그 불꽃은, 천 년 전 프리드가 뿜어내던 불꽃보다도 더욱 순수한 불꽃이었다.
태초의 불, 인간이 처음으로 불이라는 것을 다루기 이전부터 존재하던, 순수의 정점.
불꽃을 머금은 아스칼론에서 새로운 검신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콰드드득,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던 순백의 검신이 사라지고, 조금 더 첨예하고 날카로운 금빛의 검신이 불꽃처럼 일렁였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다.”
마베트의 등골을 타고 흘러내린 것은 오싹함이었다.
아스칼론의 검신이 완전히 드러나는 동안 시간이 있었지만.
감히 공격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지켜보는 것뿐,
마베트가 다시금 이성을 되찾았을 때. 에반은 이미 완벽하게 제 모습을 되찾은 아스칼론을 든 채 마베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찢어진 망토, 부서진 순백의 갑옷, 타오르는 황금색의 마나,
거기에 천 년 전 그 모습을 그대로 지닌 아스칼론까지.
자신과 싸웠던 알라르와 프리드를 합친 것만 같은 그 모습이란,
마베트에게 새로운 악몽을 선사하기에 충분한 존재였다.
작아진 동공에 어둠이 솟구쳤다. 붉은 달마저 가릴 만큼 거대한 어둠의 폭풍,
땅 아래 존재하던 모든 구울들이 찢어지고 부셔져, 마베트가 펼치는 마법의 희생양이 된 채 허공에 흩날렸다.
“고작 인간일 뿐이다! 벌레만도 못한 버러지같은 녀석들, 그저 내 숨결에 쓸려갈 녀석들이 왜 이렇게 반항을 한단 말이냐! 나는 절멸이다! 종말이고, 멸절이다! 고작해야 인간에게 죽을 성 싶으냐, 알라르마저 나를 죽이지는 못했다! 네가, 네가 나를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에반 프리드!”
죽일 수 있을까. 에반은 상념을 지웠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생각이 아니었다.
죽일 수 있냐는 저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 그걸 생각하는 순간 이 감각이 한 순간에 깨져버릴 테니까.
스으으 호흡이 폐를 통해 스며든다. 몸 구석구석 퍼진 숨에서 마나가 흐르고,
동시에 팽창한 근육이 폭발적인 힘을 담는다. 콰드드득, 에반이 밟고 있던 땅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산은 더 이상 에반이 밟을 수 있을 만큼 단단하지 않았다. 무너지는 산, 그 아래로 떨어지던 에반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영역.
마스터에 오르면서 에반은 자신의 영역을 깨달았다.
남들처럼 항시 유지할 수는 없었다. 단 한 번의 휘두름만으로도 극심한 마나를 소모했으니까.
이전에 하탄 토벌전에서 펼쳤던 것을 영역이라 생각했으나,
시간이 흘러 그것이 진정한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검이란, 이미 에반은 스스로 검과 동화된 지 오래였다. 검이 아닌 스스로를 휘두른다.
카이셀은 하늘에 커다란 상처를 입혔다. 그보다 높은 경지에 다다른 자신은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스스로 이미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화르륵 에반의 몸에서 타오르던 금색의 불꽃이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젠 불꽃이 아닌, 하나의 빛이 되어 주변에 흐를 뿐이었다.
밤이었던 하늘에 다시금 태양이 떠오른다. 순수하게 마나로 이루어진 태양,
어둠이 사라져 환한 여명이 비추는 하늘에 에반이 조용히 검을 들어올렸다.
영역. 마스터만이 할 수 있는 지고의 기술.
오로지 마스터 한 사람만이 다룰 수 있으며, 개개인에 따라 그 위력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기술.
허공에 그려지는 하나의 선이 하늘에 닿는다.
태양을 가르고, 더욱 나아가 빛을 가른다.
새하얗게 피어오르던 구름이 깨끗하게 갈라져 흩어졌을 때.
마베트는 비로소 이것이 에반의 영역임을 알 수 있었다.
검을 쥔 기사, 유저라면 마나를 비로소 느낄 수 있고.
익스퍼트라면 마나를 스스로 다루어 검에 덧댈 수 있으며.
마스터는 세상을 제 색으로 물들일 수 있었으니.
새하얗게 물든 세상은 오로지 하나의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백야(白?).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만이 가진, 에반의 영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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