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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30화 (130/181)

〈 130화 〉 붉은 달 (4)

* * *

저벅­ 어두운 복도를 걸어가는 발걸음엔 조금의 힘조차 실리지 않았다.

텅빈 동공, 한때는 반짝였으나, 이제는 그 빛을 보두 잃어버린 눈동자는 저 멀리 그림자를 쫓을 따름이었다.

왜 자신이 여기에 있는지, 이제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가면을 쓴 사람들을 따라 걷는 여인의 시선이 새까맣게 물든 하늘에 닿았다.

구름이 달을 가렸으나, 그 구름 사이에 비치는 빛은 붉었다.

개기 월식이 일어날 때까지 앞으로 하루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여인은 제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그것이 오늘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우웅­

“흐윽...!”

귀를 할퀴는 것만 같은 이명에 머리를 감싼다. 사라지지 않는 소리,

누군가가 제 머릿속에서 말을 속삭이는 감각이란. 평범한 사람이란 도무지 버틸 수 없는 감각이었다.

엄마는? 아빠는? 보는 사람마다 아름답다고 칭찬을 늘어놓았던 붉은 머리카락이 잔뜩 흐트러져 바닥에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왜, 왜 이렇게 된 걸까. 귀에 들려오는 이명이 속삭인다. 누군지도 모를 여인의 목소리.

난생 처음 듣는 목소리였으나, 한없이 익숙하게만 들려오는 그 목소리는 우연이 아닌 것만 같았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야? 아무리 물어봐도 대답을 돌아오지 않았다. 등을 밀쳐내는 우악스러운 손길에 자세가 휘청거리며 무너진다.

철푸덕, 바닥에 쓰러져도 들려오는 것은 한심하다는 듯 혀 차는 소리뿐.

스칼렛이라 불리던 여인은 자리에서 흐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퀭한 눈 아래로 거뭇한 화장이 흘러내린다. 자신이 무얼 잘못했기에 이런 일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른 적이 없었다. 그저 황도에서, 카이셀과 조금 친하게 지냈을 뿐이었다.

오히려 황태자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 더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

응원해줄 때는 언제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그녀에게 주어진 것이라곤 이전까지 누리던 모든 것을 박탈해버리는 참담한 현실이었다.

“도대체...도대체...”

파들거리며 떨리는 이빨이 입술에 부딪힌다.

말라붙은 입술이 가볍게 찢어지고, 입에서 흘러내린 피가 턱을 적심에도 아무도 그녀에게 다가가는 사람이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기사들이 있었으나,

그들의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소름끼칠 만큼이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무감(無?)이었다.

“나한테 왜 그러는 거예요...나는 하라는 대로 다 했잖아요. 엄마 어딨어요? 우리 아빠는 어디에­”

“닥치시오. 이제 곧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용히 따라오기만 하면 모두가 편해지지 않소?”

“그 편해진다는 게 도대체 뭔데요. 나 알고 있어요.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거잖아요. 아저씨 나 알고 있지 않아요? 나 스칼렛이에요. 파비안 아저씨, 나 알잖아요...!”

“몰라, 당신 같은 사람.”

익숙한 얼굴이었다. 익숙한 목소리였고, 분명 영지를 떠나 황도에 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웃으며 인사해주던 기사였다.

허나 이제는 달랐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호의란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인정할 수 없는 차가움에 몸을 떨던 스칼렛은, 이윽고 뒷걸음질 치며 벽에 몸을 기대었다.

이건 전부 꿈이라며, 다시금 깰 수 없는 꿈에서 벗어나려 몸부림 친다.

온몸을 손톱으로 할퀴며, 그렇게 피가 흘러 옷을 적실 때까지 흐느꼈다.

허나 변하지 않는 것이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라,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기사들을 본 스칼렛은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2주, 모든 것이 변한 것을 받아들이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 아닐까.

모든 것이 손에 들어왔다고 생각한 그 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려가는 이 절망감이란.

텅빈 동공에 비치는 것은 스칼렛과 소름돋을 만큼이나 똑닮은 여인이었다.

머리에 둥그렇게 휜 뿔을 가진, 붉은 색의 꼬리를 지닌 여인이 스칼렛을 마주보고 있었다.

길쭉한 혀가 제 뺨을 한 차례 스쳐지나가며, 이윽고 샐쭉하게 웃은 여인이 스칼렛의 앞에 앉아 입을 열었다.

“그러니 내 말하지 않았느냐. 아해(??)야. 어리석구나, 어리석어.”

“......”

“전부 포기하면 모든 것이 편해진다. 내 친히 너를 위하여 모든 것을 멸절(?)시켜준다 하지 않았더냐.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너의 몸을 내게 넘기면...”

“싫어요...그런 거.”

스칼렛은 앞에 있는 여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였다.

몸을 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는 몰랐으나, 앞의 여인이 결코 선하지 않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여인, 허나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눈동자가 아니던가.

그건 황혼이었다. 이미 어둠으로 물들어버린 잿빛의 하늘처럼,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빛이었다.

절멸이라는 조직이 그저 사람들의 착각 속에서 나쁘다고 여겨지는 것으로만 여겼다.

허나 황도에서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이란, 그것이 전부 틀렸다는 사실이었다.

카이셀이 아니었다면 이런 것을 알 수 있었을까.

자신이 어릴 때부터 보고, 듣고, 배웠던 그 모든 것들이 사실 틀렸다는 것을 알았을 때.

엄마가, 아빠가, 그리고 자신을 어릴 때부터 보필해오던 집사 모두가 사실은 그 절멸의 일부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스칼렛은 그야말로 절벽 아래에 홀로 떨어지는 것과 같은 절망감을 느꼈다.

외로웠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할 때 잡아준 것이 카이셀이었다.

모든 사람이 제게 등을 돌리더라도 그 만큼은 제게 손을 내밀어주리라.

스칼렛이 단호히 고개를 젓자, 한참동안 스칼렛을 바라보던 여인의 형체가 점차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웃던 얼굴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흉측한 비늘이 뒤덮은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그 표정에 스칼렛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붉은 달이 뜨더라도 자신은 죽지 않을 터였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이 지옥에서 빠져나갈 거라고. 휘청거리는 다리를 겨우 일으킨 스칼렛이 다시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새까만 구름, 예정보다도 하루 일찍 떠오른 붉은 달이 휘영청 빛을 밝히는 어둠 속을 가르며.

“네가 이런다고 해서 내가 너를 집어삼키지 못할 거라 생각하느냐?”

여인은 여전히 스칼렛의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때로는 스칼렛의 모습으로, 때로는 부모님의 모습으로, 때로는 눈을 마주치기조차 두려운 용의 모습으로.

하지만 스칼렛이 가장 마음 아팠던 건, 그 존재가 카이셀의 모습으로 말을 걸어왔던 때였다.

“스칼렛, 나는 네가...모든 것을 놓고 행복해졌으면 한다.”

“...아니에요.”

“모든 것이 끝나면 황도로 오면 되지 않겠나. 그저 잠시 빌릴 뿐이니, 모든 것이 끝난 뒤에는 모두가 행복할 거다. 너도, 그리고 나도. 모두에게 좋은 일이지.”

“아니야.”

귓속으로 파고들어오는 목소리에 스칼렛이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똑같은 목소리였다. 늘 듣던 목소리, 자신이 말을 걸면 유난히 부드러워지는 음성이 귓가에 속삭여졌다.

듣기 싫어서 귀를 틀어막아도 그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스칼렛의 정신을 점점 흐트러지게 만들고 있었다.

한 걸음, 저 멀리서 보이는 수많은 횃불들은 모두 스칼렛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걸음, 스칼렛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것은 언젠가 부모님에게 들었던 제단이라는 것이었다.

붉은 달이 뜨는 그 날에, 모든 것들이 시작되는 것이 그 위라고.

어찌하여 그때는 알지 못했을까. 저 제단 위에 올라가는 것이 자신이라는 걸.

저 제단 위에 올라갔을 때, 모든 것이 시작되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이 끝난다는 걸 왜 알지 못했을까.

“하루...남았어. 카이셀이 올 거야. 나는­”

“이런, 어리석구나. 어찌 하루가 남았다고 착각하는 걸까.”

검은 색의 비늘로 온몸이 뒤덮인 용이 입을 열었다.

보랏빛의 눈을 번뜩이며, 목을 휘감는 혀의 축축한 촉감을 느낀 스칼렛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어째서일까, 아까보다 이 촉감이 더욱 생생해진 이유는. 잠시나마 흐릿해졌던 형체는 완전히 생생하게 드러나 있었다.

언젠가 책에서 보았던 검은 용. 눈을 제외한 모든 것이 까맣고 거친 비늘로 뒤덮인 용이 킬킬 대며 웃어댔다.

“천년이란 시간동안 준비한 것이 바로 오늘일진데, 내가 인간들에게 쉬이 당해줄 거라 생각한 건가? 아아, 가엾구나. 안타깝게도, 붉은 달이 뜨는 것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다. 너희들이 마법으로 파악했다고 여긴 그 모든 것이 결국 착각에 불과하다는 소리란 말이다.”

사람의 살점이 묻은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나자, 스칼렛은 뒷걸음질 치며 벽으로 기댔다.

아니, 기대려했으나. 그 옆에 서있던 사람들이 다시 스칼렛의 등을 떠밀어 용의 앞으로 서게 만들었다.

용은 더 이상 허상 속의 존재가 아니었다. 붉은 달이 그 빛을 비추는 지금, 용은 현실이 되어 세상에 강림한 뒤였다.

새까만 날개가 하늘의 빛을 뒤덮었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비늘이란 밤하늘의 별빛과도 같았다.

산을 부수는 용력(?力), 하늘을 뒤덮는 날개. 용이 웃자, 스칼렛의 뒤에 서있던 이들이 하나같이 무릎을 꿇으며 몸을 떨었다.

고룡, 고대의 존재가 마침내 세상에 강림하였으니. 만족스럽게 웃은 마베트는 그 커다란 손아귀로 스칼렛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오, 불쌍해라. 아가야. 아직도 환상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구나.”

고룡이 스칼렛에게 보여주는 것은 미래였다.

스칼렛의 손으로 카이셀의 심장을 꿰뚫어, 스스로를 흠뻑 적신 피에서 그녀는 미친듯이 웃고 있었다.

“아, 아니야. 내가 그럴 리가 없어.”

“물론 네가 그런 게 아니지.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콰직, 스칼렛의 팔을 가볍게 부러트린 마베트가 조소했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스칼렛의 배를 손가락으로 꿰뚫은 마베트의 입꼬리가 당겨졌다.

죽이지는 않는다. 어차피 이 몸을 사용해야 온전히 본신의 힘을 낼 수 있었으니, 그저 충격을 줄 뿐이었다.

정신적으로 무너트리고, 종래엔 몸을 완전히 빼앗아 얻는 것.

“참 질긴 아이로고.”

스칼렛의 몸속으로 들어가던 마베트는 피식 웃으며 아직 의식을 잃지 않은 그 붉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스칼렛은 흐릿한 의식 속에서 제 뱃속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마베트를 보았다.

그 미래처럼 되어서는 안 되는데...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이 의식을 어떻게든 놓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것뿐이었으나,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에 스칼렛의 입에서 토혈이 쏟아져 나왔다.

‘카이셀...나는­’

괴물이 되고 싶지 않아. 허나 고작 평범한 여인에 불과한 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귀에 들려오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거슬렸다...허나 그런 감상을 느낄 뿐,

허공을 스쳐지나간 팔은 다시 힘없이 떨어질 뿐이라.

한 때나마 작게 빛을 내던 눈동자가 텅 비어 몸이 땅을 향해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정적이 찾아온다. 제단 위에서 쓰러진 스칼렛을 바라보던 이들이 웅성거리기도 잠시,

꿈틀거리던 스칼렛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피가 다시금 몸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마치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 것처럼,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처럼.

기이하리만치 괴이한 자세로 일어난 스칼렛이 눈을 떴을 때, 이미 그 동공은 보랏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아.”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음성이었다. 허나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이나 싸늘하다는 점이었다.

단순히 목소리만으로 바람이 얼어붙는다. 겨울바람보다도 차가운 그 혹한에, 얇은 로브를 걸친 이들의 입술이 새파랗게 질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구나. 천 년, 농담으로도 우습게보지 못할 시간이었어.”

스칼렛은 웃었다. 아니, 마베트는 웃었다.

스칼렛의 몸을 지녔으나 이미 그 정신은 마베트에게 온전히 잠식되었으니,

잠시 제 몸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던 손아귀에 검은 비늘이 맺히기 시작했다.

꾸드득­ 꾸득­ 뒤틀린 몸에서 어색할 만큼 거대한 뼈가 튀어나왔다.

비틀린 관절이 넓혀지고, 등에서 돋아난 검은 날개가 다시금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나기 시작했다.

쿠웅!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던 용. 스스로를 절멸이라 칭하고,

천 년 전 알라르와 격돌해 봉인당했던 고룡. 인간 여럿을 찢어발길 수 있을 만큼이나 거대한 발이 제단을 밟아 부쉈다.

옆에 있는 산을 무너트리며, 아주 살짝 움직인 날갯짓이 불러일으킨 바람이 나무들을 휩쓸어 쓰러트렸다.

“내가...여기 왔다. 알라르. 그런데 너는 여기에 없구나. 참으로 얄궂은 운명이야.”

영지 전체를 뒤덮는 거대한 크기에 사람들이 놀라기도 잠시,

자신을 이 인세(人世)에 부른 인간들을 굽어 살핀 마베트가 이빨을 드러내며 씨익 웃어 보였다.

어찌 기특하지 않은가. 이 천 년이란 시간 동안, 자신이 저들을 죽일 거란 것도 모른 채 충직하게 따라준 이 어리석은 족속들이.

“아서 프리드. 나의 가장 충직한 종이여.”

"여, 영광입니다."

가장 앞에 서있던 이의 이름을 떠올린 마베트는, 이윽고 고개를 하늘을 향해 치켜들며 입을 열었다.

달을 가리던 구름이 그 기세에 꿰뚫려 흩어진다.

구름 한점 없이 오로지 어둠 만을 드러낸 하늘이 맑게 개었다. 그리고 그 하늘에 보이는 것, 단 하나의 붉은 달.

붉은 빛을 머금은 보랏빛의 눈동자가 반짝이고, 마베트의 커다란 입이 천천히 열렸다.

“적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전해라.”

멸망, 그리고 만물의 종결자. 스스로를 절멸이라 칭해도 어색하지 않을 존재가 날개를 펼쳐 하늘을 향해 도약했다.

“종말이 찾아왔다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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