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 붉은 달 (3)
* * *
펄럭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하나 있었다.
여러 감정이 뒤섞여, 어깨에 쌓인 부담감에 한숨마저 내쉬는 한 청년.
검은색으로 물들어진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헝클어트리다가, 이윽고 시선을 돌려 저 너머의 언덕을 바라본다.
총력전, 병사들을 제외한 기사 5천.
카심 백작과 제라드가 만들어낸 대(?) 절멸 무구를 장착한 기사들이 하나같이 백색의 갑옷을 반짝이며 도열해 있는 모습이란.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해도 느껴지는 기세에 카이셀은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서 피어오르는 것이란 의문이었다. 과연 자신이 성공적으로 작전을 이끌 수 있을까.
부월을 처음 받았을 때만 하더라도 자신감이 넘쳤지만, 자신이 직접 지휘해 성공을 거둔 전투라 해봤자...단 한 번이 아니던가.
그것도 결국 에반 프리드의 증원군이 없었다면 모두 전멸했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전투였다.
생각을 거듭한다. 최악의 수를 계산하면, 고룡 마베트를 상대해야만 했다.
그걸 과연 기사 5천으로 할 수 있을까.
“무얼 그리 깊게 생각하십니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카이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렸을 때 보았던 젊은 기사는 이제 머리가 점차 새하얗게 물들고 있는 노기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마스터가 되어 수명 자체는 늘어났지만, 이제는 쉬고 싶다고 했던가.
카이셀은 빈 자리가 싫었다. 자신이 황제가 되는 날이 찾아올 그 때에도 테오라드가 기사단에 머물렀으면 좋겠지만, 그걸 과연 그가 수락해줄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쓰게 웃으며 다시 깃발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바람이 분다. 서서히 어두워지는 하늘엔 태양과 달 모두가 떠있어,
양분된 하늘에 남은 것은 점차 회색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뿐이었다.
“그냥, 조금 긴장이 되는 것 같아서.”
“당연하지 않습니까. 대규모 병력을 몇 번이나 이끌어 보셨다고, 태자 전하는 신이 아닙니다.”
“...뭐, 가끔은. 내가 천재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말이야. 이런 기분을 느끼니까 괜히 허탈해지는 것 같아.”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비범했으니까. 어떤 분야든 특출 났고, 무슨 일이든 잘 해냈다.
제국의 유일한 적통으로 많은 기대를 받았음에도 부담 없이 모든 것을 해냈다.
아무도 의구심을 품지 않는다. 허나, 이제는 스스로에게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자신은 정말 황태자라는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인가?
억에 다다르는 사람들을 책임지고 다스리는 황제란 자리에 올라도 괜찮은 사람이란 말인가?
용을 만났을 때, 카이셀은 그것과 대적할 생각을 감히 품을 수조차 없었다.
에반이 본 드래곤을 토벌했다는 알고 있음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어떻게 살아남을지 궁리하는 것뿐이었다.
어떻게 거기서 맞선다는 발상을 떠올린단 말인가?
삐끗하면 목숨이 달아나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그것과 홀로 싸워 토벌을 성공시킨단 말인가.
그리고 시간이 흘러, 카이셀은 스스로가 비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남들보다 잘하는 무언가가 있을 뿐, 황태자라는 자리에서 남들과는 차원이 다른 지원을 얻어 달성한 성과였을 뿐,
자신은 그리 비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운이 좋았다. 그걸 깨닫자힘이 빠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이룬 모든 게 내 힘이 아니라, 그저 도움을 받았기에 이루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무슨 생각이 들 것 같나?”
“글쎄요.”
“허탈하지. 힘이 하나도 나지 않아. 무거운 책임을 받들며 순간이나마 자신감을 찾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과연 내게 자격이 있나 스스로 묻게 되지. 어떤가, 그대가 보기에 나는...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죠. 자격은 남에게 물어서 찾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말입니다.”
잠시 헛기침을 내뱉은 테오라드는, 카이셀의 옆에 서 깃발을 바라보곤 다시 입을 열었다.
“요즘 들어 무슨 고민을 하고 계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마, 스스로를 평범한 사람이라 생각하시는 게 아닙니까? 비범하지 않고, 그저 운 좋은 사람일 뿐이라면서. 여태껏 이뤘던 모든 것을 운에 치부하여 부정하죠. 그렇지 않습니까?”
“......”
“전하는 황태자입니다.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 제국에 한 사람 뿐입니다. 어찌 그것만으로도 지고하지 아니하다 할 수 있을까요. 이미 충분히 비범하시지 않습니까. 제국에 이제 셋 있는 소드마스터 중 한 분이, 스스로를 평범하다 여기면 많은 분들이 박탈감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나는, 에반처럼 강하지 않아.”
카이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조 섞인 목소리는 불어오는 바람에 섞여 흘러, 이윽고 허공을 향해 하얀 숨과 함께 부서지기 시작했다.
강하지 않았다. 모든 적을 혼자의 힘으로 분쇄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처럼 강했다면, 지난 하탄 토벌전에서 본 드래곤을 베어 위기를 헤쳐나갔을 터였다.
테오라드를 희생시키려 하지 않고...오히려 첨탑을 향해 진격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리하지 못했다. 허나 에반은 그걸 해냈고, 카이셀은 그 일에서 스스로의 무력함을 깨달았다.
“나는, 아버지처럼 모든 것에 능통하지도 않지.”
시골에서 사는 농부나 어부가 무엇을 하며 사는지는 알아도,
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지 이해해보려 한 적이 없었다. 민생(民?)이란 무엇인가,
아버지의 서고에 늘 가득 쌓여있는 책이었으나. 카이셀은 그것을 들춰본 적조차 없었다.
검을 휘두르고, 여인을 만나는 것에 힘을 썼다. 그런 사람을 과연 황태자라 할 수 있는가?
"내가 진정 황태자에 어울리는 사람인가?"
카이셀의 말에, 잠시 피식 웃은 테오라드가 카이셀의 등을 거칠게 후려쳤다.
“크윽!”
“아주 말도 잘하십니다. 적어도 스스로가 못난 사람인 것을 알고 있으니, 그것이 다행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는 말이네.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지난번처럼 또 대항할 수 없는 적이 나타난다면”
“그걸 알고 있으니, 비범한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겁니다.”
테오라드는 작게 미소 지었다. 스스로의 단점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것이 일국의 황태자라면 더더욱 적었다. 부족한 것을 알기에 고칠 수 있으며,
고칠 수 있기에 더욱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법.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비범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전하는 혼자가 아닙니다. 누구도 전하에게 혼자 모든 것을 해내라고 부탁하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부월을 주시면서, 홀로 마베트를 참살하라 하셨습니까?”
“그건...아니지.”
“그저 군사를 이끌고 절멸을 토벌하라 한 것뿐입니다. 전하께선 그저 저희들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전략이 있으면 그 전략대로, 폐하께서 스스로 망치가 되고자 하신다면 기사들은 그 모루가 될 뿐입니다. 어찌 부담을 느끼십니까? 오히려 부담을 느끼는 것이 더 괜찮겠군요. 기사들의 생명을 경시하지 않다는 소리니까요.”
“금칠하지 말게, 나는 그냥”
“사람에게는 누구나 주어진 제 역할이 있는 법입니다. 마베트를 스스로 참살하려 하신다면, 그건 에반에게 적합할 뿐이죠. 모든 사람을 아끼며 국가를 통치하려 한다면, 그건 아직 폐하께서 조금 더 잘하실 뿐입니다. 전하는 이제 스무 살이고, 아직 더 많은 것들을 보시지 않겠습니까? 스스로를 너무 비하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충분히, 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충분히 잘하고 있다, 라. 카이셀은 테오라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 그에게 들었던 말이 무엇이더라.
늘 칭찬만 듣고 살았던 제게 그가 처음 한 말이란, 아마도 꽤 거친 욕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망나니같은 녀석이 무엇하러 이곳에 왔냐며, 오냐오냐 자랐던 제게 검집을 던졌던 기사.
아버지에게 말해 죽이려다가 겨우 참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자신은 인간 말종에 가까웠다.
“...처음 아닌가. 내게 칭찬해주는 건.”
“그랬습니까?”
“그대가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들으니까...나쁘진 않군.”
슬쩍 웃은 카이셀이 조용히 시선을 떨궜다가, 이윽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한 방향이 아닌, 수많은 방향에서 동시에 이쪽으로 향해 달려오는 소리.
척봐도 거뭇하게 보이는 무리에 눈살을 찌푸렸다가, 그들이 들고 있는 것이 제국의 깃발이라는 걸 확인하곤 의아한 표정을 지을 따름이었다.
“설마...증원 군인가?”
“아무래도, 이종족들의 협력을 완전히 이끌어낸 것 같군요.
키가 작지만, 덩치가 키에 비해 크고 도끼와 망치를 휘두르는 종족.
땅의 사랑을 받으며, 대장장이가 아닐 때에는 그 누구보다도 사납고 용맹한 전사가 되는 종족.
긴 수염을 늘어트린 채, 말 위에 걸터앉아 있던 카심 백작이 거칠게 포효했다.
“아 호이!”
“형님, 그건 해적들이 쓰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방식이 있지 않습니까?”
“맥주! 소세지! 망치! 땜질!”
“그 모든 게 우리 드워프의 즐거움이지!”
제라드의 말에 킬킬대며 웃은 카심 백작이 머리 위로 차마 다 마시지 않은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하늘을 향해 튀는 하얀 거품을 머리에 맞으면서도, 드워프들은 하나같이 그 모습을 보며 웃기 바쁠 뿐이었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군대, 허나 그들의 힘을 알고 있는 카이셀은 그 모습에 조금은 후련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드워프의 합류는 큰 힘이 된다. 어쩌면 인간 기사 1천보다도 위력이 막강한 것이 드워프 5백이었으니,
게다가 이번에 합류한 군사는, 드워프 뿐이 아니지 않은가.
“아누 벨로레 델레라. 북엘프의 장로 아니스라고 합니다.”
“유리스의 기사 크리스 오스발딘 입니다. 엘프 합종군 1천 5백, 제국군에 합류하겠습니다.”
귀가 뾰족한, 인간들에게 미의 종족이라 알려진 엘프들이 합류함에 기사단의 사기가 크게 상승했다.
이들이 모인 이유란 오직 하나, 제국을 도와 절멸이란 세력을 완전히 대륙에게서 몰아내기 위함이 아니던가.
한때는 반목했으나, 이제는 서로를 적으로 보며 싸우지 않는다.
고개를 숙인 크리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이셀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대가 고생이 많군, 엘프들을 이끄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닐텐데.”
“드워프만 하겠습니까. 의외로 제 말을 무시하지 않아서, 나름 편했습니다.”
“그런데...은퇴했다고 하지 않았나? 에반은?”
“아마 곧 오지 않겠습니까? 저는 에반보다 먼저 출발한 터라, 에반이 언제 올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 제국군의 핵심이라 할만한 사람은 에반 프리드가 아니던가.
잠시 고개를 주억거린 카이셀은, 엘프와 드워프가 합류했음에도 저 멀리서 보이는 군세에, 테오라드와 크리스 또한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붉은 엄니 부족을 위하여!”
“타스딩고!”
입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엄니에는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선혈이 묻어있었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싸움을 멈추지 않기에, 붉은 엄니라는 이름을 대칸에게 허락받은 트롤 민족.
그 선두에 서있는 것은 인간보다도 훨씬 거대한 트롤이었으며,
그 옆에 있는 것은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기사였다.
"에반 프리드!"
"왜, 또."
가장 앞에 서있던 트롤이 푸른 피부로 뒤덮인 가슴을 두드리며 에반에게 입을 열었다.
벌려진 입에서 침이 튀긴 했으나, 에반은 꽤나 오랜만에 만나는 인연에 슬쩍 웃으며 어깨를 으쓱일 따름이었다.
“우리 아버지의 영혼이 너의 이름을 속삭였다. 네가 인간 중에서 가장 강한 이인가?”
“...아마도?”
“좋아, 이번 전쟁이 끝나면 우리 부족이 있는 베르뎅 산으로 와라. 네게 막고라를 신청할 테니까! 용과 싸우는 건 즐거운 일이지!”
막고라, 막고라도 좋지만...뭐, 에반은 이번 일에 대해 그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자 마음 먹은지 오래였다.
이전에 흑마법에 물든 쟌지르를 죽였던 것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하지 않았던가.
베르뎅 산의 인연이 이렇게 긍정적으로 이어질 줄이야.
잠시 피식 웃은 에반은, 저 멀리 보이는 황태자를 향해 유리스의 깃발을 흔들었다.
“내 살다 살다 트롤과 연합군을 짜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북부는 원래 상상보다 더한 일이 일어나는 곳이기 마련입니다.”
크리스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말을 이어갔다. 설마 트롤을 데려와 합류할 줄이야.
혹시 모른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정말로 트롤을 데리고 오는 에반의 모습에 크리스마저 할 말을 잃어 입을 벌렸다.
“전하,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전하는 혼자가 아닙니다. 이제 전하가 가장 잘하는 걸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제 곧 황제가 되실 분이니, 이번 기회로 연습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지요.”
“이종족과 연합한 군대를 이끄는 건 우리 아버지도 못 해본 일인데...뭐, 좋아. 까짓 거 해보는 것 말고 뭐가 더 있겠나?”
이미 가슴 한 구석에 있던 두려움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이종족 군세 3천이 더해진 연합군이었고,
남은 것은 그것들을 이끌어 절멸을 박살내는 것.
비범하지 않으면 무엇이 어떠하단 말인가. 자신은 제국에 하나 있는 황태자였고...카이셀이었다.
카이셀이 할 말이라곤 오직 하나뿐이었으니, 각자의 깃발을 휘날리는 연합군이 마침내 테라제인을 향해 출진하기 시작했다.
12월 30일, 새해를 맞이하기 하루 전 날.
이상하게도, 보름달이 붉게 빛나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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