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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28화 (128/181)

〈 128화 〉 붉은 달 (2)

* * *

다시 일주일이 지나고, 하루가 지나고. 아무런 소득 없이 사흘이란 시간을 다시 허비한다.

기사들을 풀어 어떻게든 본거지를 찾으려 해도 제자리만을 빙빙 돌 뿐,

황제가 직접 나서 독려한다한들 변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 순식간에 지나간 12일이라는 시간에 결국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제국 전역을 뒤졌는데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건, 그들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겠지.”

“...설마 테라제인을 얘기하시는 겁니까?”

“거기 말고는 가능성이 없지 않나. 기사가 아닌 병사 수십만을 풀어 대륙을 샅샅이 뒤졌다. 마법사들을 동원하여 대규모 텔레포트까지 수십 번을 이용했지. 산맥, 바다. 심지어는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는 오지마저 뒤졌는데도 나오지 않았다는 건...결국 그들이 몰래 숨은 곳이 한 곳이라는 얘기가 아닐까.”

황제는 조용히 지도의 한 구석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수색을 마친 곳이 다른 색으로 덧칠되어 지워졌으나, 유일하게 자기 색을 가지고 있는 곳.

테라제인의 영지가 있는 곳이란 것을 확인한 좌중에 순간 정적이 스쳐지나갔다.

“시간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에반 프리드의 말에 따르면, 이미 마베트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다더군. 어떻게든 참살한다. 붉은 달이 뜨기 전에, 고룡이 제 힘을 온전히 되찾기 전에 토벌한다. 카이셀.”

“예, 폐하.”

부복한 카이셀에게 부월을 건넨 황제가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은 전면에 직접 나설 수 없었다. 도움이 되지도 않을 뿐더러, 혹여나 죽었다간 혼란만 될 게 뻔했으니까.

아직은, 자신이 카이셀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에 이른 시기였다.

“군사는 네가 이끌어라.”

마지막 싸움. 어떻게든 고룡 마베트를 이번 싸움에 격파해야만 했다.

시간이 끌릴수록, 절멸에게 여유를 줄수록 불리한 것은 제국 쪽이 아니던가.

분명 많은 부담을 가지겠지만, 황제는 이 선택을 번복할 생각이 없었다.

무릇 황제가 될 사람이란 그에 맞는 배포를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초석을 쌓는다는 느낌으로, 황제는 이번 일의 모든 것을 황태자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카이셀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모든 신하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느끼며,

동시에 등골을 타고 쭈뼛 서는 듯한 짜릿함을 느꼈다.

태생이 지고에 어울리는 사람이었기에, 이런 자리에 일말의 부담감조차 느끼지 않는다. 지금 머릿속에 담긴 것이란 오로지 승리뿐.

마음에 걸리는 여인이 하나 있었으나, 카이셀은 그 생각을 애써 지우며 부월을 손에 쥘 따름이었다.

이윽고 카이셀이 다시 일어서자, 주변에 서있던 신하들이 한 몸처럼 무릎을 꿇어 카이셀 앞에 부복했다.

아마도, 아니. 반드시 마지막이 되어야 할 싸움.

군권을 상징하는 도끼를 머리 위로 올린 카이셀은,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순간, 제국이 해야 할 단 한 가지의 행동.

출정(出?). 그 한 마디의 명령에, 제국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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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제인으로의 출정이라더군요. 아마도 목표는 마베트, 제게도 명이 내려왔습니다.”

황제의 직인이 찍힌 종이를 든 에반의 말에 아이린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선 같이 싸우고 싶었지만, 몸이 이러니 어찌 그곳에서 함께 싸울 수 있겠는가.

다만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랄 뿐, 이곳에서 결과가 들려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는 현실에 아이린이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이런 상황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래도 마베트가 완전히 깨어나기 전에 싸운다면 위험한 일은 없을 테니까요.”

소설 속에서 고룡 마베트가 나타나진 않았으나, 흑마법사가 지닌 세력 대부분이 등장했었다.

소설에서 나오지 않았던 사람들중 로만과 하탄은 자신이 완전히 토벌했으니,

이제와서 그나마 위협이 되는 것을 찾겠다고 하면 고룡 마베트가 아닐까.

적어도, 인간 중에서는 자신을 다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에반은 자신의 실력에 대해 이제 나름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테오라드와 싸우더라도 자신이 완벽하게 우위를 점할 수 있으니,

하물며 그게 절멸과의 싸움이라면 더 많은 수를 사용할 수 있었다.

아스칼론, 빛의 정령, 용혈, 거기에 더해 용언까지. 물론 스칼렛이 마베트에게 잠식되어 나타난다면 전력을 다해야겠지만,

적어도 테라제인이란 곳을 토벌하는 전초전에서는 아무 문제없을 것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저만 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크리스의 얼굴을 떠올린 에반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은퇴했다면서 자기는 쉴 거라고 하더니만, 정작 엘프들을 인솔하러 갈 사람이 없으니 크리스가 자연스럽게 나서게 되었다.

이번 토벌전이 끝나면 같이 술이나 한잔 마시자고 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에반은 자연스럽게 누워 아이린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었다.

“졸려요?”

“이제 몇 시간 뒤엔 출정해야 하지 않습니까. 잠깐...이러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이죠.”

무릎에 누워 아이린의 얼굴을 보던 에반이 피식 웃었다.

분명 큰 싸움 하나를 코앞에 두고 있는데, 이상하리만치 긴장이 되질 않았다.

이번 싸움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 탓일까.

아니면 단순히, 이 싸움 자체가 그리 위험하지 않을 것이란 걸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일까.

에반은 구태여 그 의문의 답을 찾지 않았다. 그저 이 무릎에 누워 얼굴을 올려다보는,

바로 옆에 살짝 부풀어 오른 배에서 들려오는 야트막한 심장소리를 느끼는 것을 즐길 뿐이었다.

“아이린.”

“가만히 있어요. 머리 정리해줄 테니까.”

“우리 결혼하죠.”

흠칫.

에반의 머리를 매만지던 아이린의 손이 순간 허공에서 움찔 떨렸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냐며 묻는 것만 같은 시선에, 에반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아이가 태어나고, 몸 좀 괜찮아지면...정원에서 식을 올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결혼 하자는 얘기를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거예요?”

살짝 차가워진 눈빛에 에반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당겼지만,

오히려 이렇게 말해두는 편이 조금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백할 때처럼 조금 분위기를 잡고, 조금 더 길게 말하는 것도 괜찮겠지만.

어쩐지 결혼에 대해 얘기해야할 순간이 꼭 지금인 것만 같았으니까.

잠시 멋쩍게 웃은 에반은, 다시 몸을 일으켜 아이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장난으로 얘기한 게 아닙니다. 고백할 때처럼 조금 분위기를 잡고 해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제가 그리 낭만적인 사람은 아닌가 봅니다.”

“...그거 알아요? 결혼 얘기, 내가 먼저 하려고 했어요.”

아이린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에반을 흘겨보았다. 도대체, 왜 거기서 결혼 이야기가 나온단 말인가.

전쟁이 끝나면, 어디 분위기 좋은 언덕에 단둘이 있을 때 얘기하려 했다.

마음의 준비도 다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들은 청혼이란,

아이린의 심장을 괜스레 뛰게 만들었다. 에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걸까. 결혼, 결혼이라.

살짝 붉어지려는 뺨을 손으로 쓸어 안색을 되찾은 아이린은, 아무렇지 않게 에반을 향해 입을 열었다.

겉으로 보기엔 꽤나 덤덤한 듯, 어쩌면 청혼에 대해 거절할 것만 같이 보이는 표정에 에반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진심으로 한 얘기에요?”

“청혼을 장난으로 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성격 별로 안 좋아요. 내숭도 부릴 줄 모르고, 싫으면 싫다고 딱 잘라 말하는 편이에요. 요리도 해본 적 없고, 에반이 아는 것보다도 훨씬 할 줄 아는 게 적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좋아합니다.”

“아이를 잘 키울 자신은 없어요. 노력을 할 텐데...내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 지는 잘 몰라요. 의지 많이 할 거예요. 그렇다고 아이한테 이상한 걸 가르치려고 하면 화낼 거고, 집밖에 오래 있는 거...별로 안 좋아해요. 항상 내 곁에 있어요. 아이랑 있어도, 아이보다 날 더 사랑해줘요.”

“당연히, 그럴 겁니다.”

말을 이어가려다가, 갑자기 울컥 치솟는 감정에 아이린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입술을 뻐끔거리면서, 조절이 안 되는 감정을 애써 다잡는다.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았는데, 분명 기분이 좋은데...왜. 눈물이 나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무릎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숙인 아이린을 에반은 뒤에서 다가가 안아주었다.

흠칫 떨리는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이따금 끅 소리를 내며 흐느끼는 아이린의 눈가를 닦았다.

“...아이는 셋이 좋아요.”

그 와중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풋 웃음을 흘리면서, 에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를 더 낳아야 하나...? 아니, 그전에 감당을 할 수는 있을까.

여러 생각이 뒤섞였지만, 결국 아이린이 얘기하는 건 하나였다. 이 청혼을 받아들여줄 거라는 것.

“예전에, 평생 곁에 있을 거라고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기억, 해요.”

울음 섞인 목소리가 그 말을 긍정했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면, 자신은 그때부터 이 아가씨를 좋아하고 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봄이 막 끝나는 때에 만나,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지나서.

그 겨울이란 계절에 처음으로 탄생을 축복해준 여인에게. 순간이나마 연모의 감정을 품고 그리 말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그 약속을 지키겠군요.”

이제는 눈물이 완전히 마른 뺨을 문지른 아이린이 에반을 빤히 바라보았다.

4년 전과 많이 다른 얼굴, 하지만 변하지 않은 얼굴.

축제에서 보았던 초록색의 불빛이 사실 에반의 눈동자였다는 걸,

그 축제에서 자신이 보고 있던 게 에반의 얼굴이라는 걸 이제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자신이 마음을 품은 것이 언제였을까. 괜찮냐는 말 한마디를 들었던 그 때가,

수정궁에서 웃어주었으면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가.

겨울에, 에반이 흑마법사와 싸우고 다쳐서 돌아왔을 때가,

처음으로 허전함을 느꼈을 때가. 그 모든 순간이 아직 생생하게 마음 속에 남아있었다.

마음이란 것은, 순식간에 자리 잡는 것이 아니었다.

비가 오면 그 비가 몸을 적시고 흘러내리는 것처럼,

종이 위에 떨어진 물감이 번져 전체를 물들일 때처럼.

조금씩 스며든 감정이 결국 마음이라는 결실로 번져나갈 뿐이었다.

툭, 에반의 가슴팍을 건드린 손이 그대로 심장이 있는 부근을 스쳐지나갔다.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감촉이란, 그 안에서 들려오는 박동.

가볍게 첨단을 간질이는 느낌에 옅게 웃던 아이린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에반을 바라보았다.

“반지, 바꿔요, 이제 멀리 떨어져 있을 일도 없으니까. 내가 다이아로 새로 맞출 거예요.”

“그러겠습니다.”

“...청혼 말인데, 오늘 한 건 못 들은 걸로 할래요. 내가 먼저 할 생각이었단 말이에요.”

“그게 무슨­”

툭.

아이린은 그대로 에반의 머리를 가슴팍으로 끌어 당겼다.

더 이상 말하지 못하도록,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 입술을 달싹였다.

읍읍 거리며 입을 열려는 에반 때문에 가슴이 간지럽긴 했지만...

잠시 호흡을 고르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킨 아이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대신 오늘은 이걸로 만족해요. 청혼, 그거 나는 못 들은 거니까 대답 안 해줄 거예요.”

“......”

“그런데...이 말만큼은 하고 싶어요.”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연속해서 움직인 손가락이 에반의 머리카락을 두드렸다.

에반이 이전에 알려주었던 곡. 세이렌에서 들었던 세레나데.

건반을 두드리듯 잠시 손가락을 놀린 아이린은, 이윽고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언젠가. 에반이 제게 고백했을 때 지었던 표정을 따라지은 채.

“사랑하고 있어요.”

순간 화악­ 하고 달아오른 볼을 숨기기 위해 아이린은 에반을 놓아주지 않았다.

지금은 조금 일방적으로 말하고 싶었으니까. 이렇게 먼저 청혼해버린 에반이 괘씸하기도 했고,

마지막 몇 시간 남짓한 이 여유를, 자신이 조금이나마 독점하고 싶었다.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어느 순간부터, 내 눈에 에반이 보였으니까요.”

멍청해보이던 기사, 어벙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그 기사가 이제는 이렇게나 커져버렸다.

한 때는 키가 조금 비슷했던 것도 같은데, 이제는 고개를 들지 않으면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까치발을 들어도 닿지 않는 입술이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만큼은 이 가슴에 품을 수 있지 않은가.

기억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언젠가부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심장이 두근거렸을 뿐이었다.

뺨이 뜨거워지고, 에반이라는 기사를 남자로 인식하고,

손을 잡는 것에 행복을 느끼고. 입을 맞추는 것에 설레고, 끌어안는 거에 잠을 설치고.

“사랑해요.”

하지만 이 마음을 전부 설명하기엔, 자신의 말재주가 너무 부족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또 말한다. 늘 말하지만, 언제나 제 마음을 전부 담기에 부족한 네 음절의 말을.

그리고...다음 번엔 반드시, 제대로 에반에게 청혼할 수 있기를 다짐하면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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