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 붉은 달 (1)
* * *
“무슨 얘기를 한 거예요?”
“...그냥, 고룡 마베트에 대한 얘기를 조금 나눴습니다.”
에반이 세계수에서 나오자, 아이린은 다급히 에반에게 다가가 몸부터 살폈다.
여왕이랑 단둘이 있던 상황. 해가 떴을 때 들어가 해가 다 지고 나서야 나왔으니,
에반의 몸을 살피던 아이린은 아무런 흔적도 없는 것에 안심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에반을 믿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다른 여자를 믿을 수는 없었다.
...여왕을 의심하는 게 조금은 주책 같으면서도, 아이린은 이런 마음을 무시하고 싶지는 않았다.
가까이 다가온 에반의 몸을 도장 찍 듯이 한 번 꼬옥 안아주고는, 다시 슬쩍 떨어진 아이린이 입을 열었다.
“흠, 그래서. 우리와 협력해줄 거라고 하던가요?”
“그렇습니다. 어차피 장로와 전부 결정된 사항이었으니, 저는 그저 옆에 있었을 뿐이죠.”
에반은 가만히 아이린의 얼굴을 살폈다.
자신의 이야기를 아이린에 들려준다면...무슨 이야기를 들을까.
허나 언제까지고 숨길 수는 없는 일이리라. 숨긴다면 숨길 수 있는 말이었지만,
에반은 아이린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설령 그것이 부끄러운 일이더라도, 설령 그것이 씻을 수 없는 죄악이더라도.
천천히 올라간 손이 아이린의 뺨을 훑었다.
아까부터 계속 이곳에 서있던 건지, 꽤나 차가워진 뺨에 에반이 눈살을 찌푸렸다.
“계속 여기에 계셨던 겁니까. 추우셨을 텐데요.”
“...금방 나올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따듯한 곳에 계시는 게 훨씬 낫지 않았습니까. 감기라도 걸리셨으면 어쩌시려고.”
“안 걸려요. 저도 이제 익스퍼트잖아요.”
괜찮다는 표정을 짓는 아이린의 모습에 에반은 조용히 아이린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풀려있는 단추를 다시 잠그며,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드러난 목덜미 위로 덮었다.
아무리 기사라지만, 에반의 눈에는 그저 연약한 여인처럼 보이기 마련이었다.
감기에 걸리면 어쩌려고 이렇게 하는 건지. 목덜미처럼 둘둘 말린 옷에 잠시 흠칫 놀란 아이린은,
이 상황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아 가만히 에반을 바라봤다.
“걱정이 됩니다. 이렇게 조심성이 없으셔서. 이제 홑몸도 아니시지 않습니까.”
에반이 아이린의 배에 손을 가져다 대자, 흠칫 놀란 아이린이 에반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살짝 부풀어 오른 배는 이제 육안으로 보기에도 꽤나 부풀어 있었다.
이 안에 있는 것은, 자신과 아이린이 만들어낸 두 명의 아이.
이 아이가 태어난 뒤 볼 세상은 어떤 곳일까. 자신이 실수한다면, 이 아이들은 어쩌면 태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상상만으로도 어깨가 무거워지는 터라, 에반은 애써 싱긋 웃으며 아이린의 뺨을 두 손으로 꾹 눌렀다.
말랑말랑한 볼을 쭉 늘려 웃는 입모양이 된 아이린의 모습을 보며 큭 웃은 에반은, 손을 떼며 그냥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만약에 말입니다. 제가 마베트를 처리하지 못한다면, 그럴 기미가 보인다면”
“도망 안 갈 거예요.”
아이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상황이 온다면, 애초에 어디로 도망가야 한단 말인가.
에반이 제국군에서 어느 정도의 위상을 지니는지 알고 있었다.
에반이 패퇴하면, 더 이상 희망은 없다. 아이린은 그런 상황이 오면 차라리 에반과 함께 죽는 것을 택하고 싶었다.
꿈에서 보았던 것처럼, 홀로 쓸쓸하게 죽는 것은...다시 겪고 싶지 않았으니까.
에반은 예상했다는 듯 피식 웃으며 아이린의 머리를 아무렇게나 헝클어트렸다.
이럴 때만큼은 자기 말을 잘 들어줬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자신은 반드시 이길 터였다. 의문은 품지 않는다. 의구심을 지니지 않는다.
머릿속에 그리는 것은, 오로지 자신이 마베트를 상대로 승리하는 미래 뿐.
그런 상념을 조금 걷어낸 에반은, 아이린을 나무 한 쪽에 앉히곤 그 옆에 앉아 세계수를 바라보았다.
그 주변에 보이는 건, 이제 유리스의 영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엘프들.
사흘이면 모든 준비가 끝날 테니, 그들이 유리스로의 이전을 마치는 순간 다시금 마베트를 상대할 준비를 해야할 터였다.
“이제 끝이 조금 보이는 것도 같군요.”
참 오래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멸과 처음 싸웠던 것이 4년 전의 겨울이었는데,
이제야 겨우 그 끝인 고룡 마베트를 마주하게 되었으니까.
물론 그 싸움에서 꼭 이기리란 보장은 없었지만, 에반은 조금 더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고 싶었다.
모든 싸움이 끝나고 봄이 오면, 그리고 여름이 오면. 가을에 잉태되었던 아이가 세상에 나올 시기가 다가온다.
그때가 되면 정말 아빠라 불리는 걸까.
조금 어색한 그 호칭에 입꼬리를 끌어당긴 에반은, 하늘에 자리 잡은 별을 보며 시선을 멈추었다.
한 때는 외롭다고 생각했던 별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감상에 새삼스럽기도 했다.
아이린과 만나서 너무 많이 변한 게 아닐까. 피아니스트로 살 때는 무뚝뚝하다는 말도 많이 들었던 것 같은데...이제는 꽤 많이 웃으면서 다녔으니까.
“봄에 뭘 하면 좋을까요?”
“계절제에 참가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아니면, 여행이라도 한 번 갈까요?”
“나중에 배를 타보고 싶어요. 세상에 대륙이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배, 라. 생각해보면 에반 프리드로 살면서 바다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던 것 같았다.
여기서 북쪽으로 가면 바다가 있긴 하지만, 추운 날씨 탓에 항상 얼어붙어 있었으니.
잠시 뺨을 긁적이던 에반은 그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배를 타면 아마도 옆 대륙에 가지 않을까. 신혼 여행을 그곳으로 가는 것도 괜찮으리라.
“여름이 오면 뭘 할까요?”
“여름엔 바쁘지 않겠습니까. 한창 더울 때고...아이들도 태어날 테니까요.”
아이라는 말에 아이린은 하얀 숨결을 내뱉었다.
아이라니, 여전히 아이린은 쌍둥이가 제 뱃속에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엄마가 자신을 낳았던 것처럼, 이제 자신이 두 아이를 낳는다니.
그것이 감격스러우면서도 한 편으론 두려워서. 에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아이린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나는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저도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좋은 아빠, 좋은 엄마가 무엇인지 경험해본 것이 드문 두 사람이었다.
이따금 이야기나 소문으로 그런 것을 들을 뿐, 막상 자신들의 아이가 태어난다고 하니 막연한 걱정이 피어오를 따름이었다.
교육은 어떻게 하고, 또 아이를 어떻게 돌봐야 하는 건지.
“이름말이죠. 제가 엄청 고민해 봤어요.”
“저도 많이 생각해봤습니다. 뭐, 이런저런 이름이 있긴 한데...막 어울리는 건 없던 것 같더군요.”
할 일이 없을 때 생각하는 것은 역시나 아이들의 생각이었다.
아직 이르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름은 아이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라 하지 않던가.
많은 작명가들을 찾아가 돈도 써보고, 노신들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지만 결국 만족스러운 아이의 이름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걱정이네요. 만약 아들이 태어났는데 에반을 닮으면 어떡하죠? 에반처럼 여자들을 막 홀리고 다니면, 제가 감당이 안 될 것 같은데요.”
“뭐, 아이가 알아서 하지 않겠습니까? 일일이 만나지 말라고 할 수도 없으니까요.”
입술을 삐죽 내민 아이린이 에반의 어깨를 툭 치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지, 나중에 아이가 여자 아이를 우르르 몰고 다니면 자기가 책임질 생각이라도 하는 걸까.
에반을 닮았다면 그게 꼭 농담 같은 이야기가 아니게 될 테니,
아이린은 내심 자기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 아들이 여자문제로 유리스의 이름값을 해친다면...상상만 해도 골치가 아프지 않겠는가.
심지어 에반을 닮았다면 혼내기도 힘들 터였다.
에반과 똑같이 생긴 아이가 잘못하다고 빌면, 자신은 분명 마음이 약해져서 바로 용서해줄 것이 뻔했다.
“저는 오히려 딸 쪽이 더 걱정인데 말입니다.”
“딸이요?”
“아가씨를 닮아서 성격이 안 좋은...윽.”
“...제가 어렸을 때도 성격이 안 좋았던 건 아니거든요.”
그때는 오히려 로페나처럼 조금 더 수다쟁이에, 엄마에게도 종종 투정부리던 장난꾸러기에 가까웠으니까.
그런 자신의 모습을 꼭 닮은 딸이 태어난다면...자신과 같은 경우가 되지 않도록 신경 써줘야 하리라.
그 뒤로도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가을, 겨울, 그리고 그 다음해.
한참동안 이어지던 대화는, 하늘에서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는 눈 때문에 잠시 끊어졌다.
“눈이네요.”
“이제 너무 많이 봐서, 그냥 당연하게만 느껴집니다.”
“예전에 나한테 했던 말 기억해요?”
“어떻게 잊겠습니까. 아가씨가 거울 보면서 웃는 연습했던 것도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 아니...그런 걸 꼭 기억할 필요는 없어요.”
예전, 이제는 조금 흐릿해지기 시작하는 몇 년 전의 기억이었지만.
에반은 아직도 그 때의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공작의 말대로 기사단에 편입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고 아이린의 호위기사로 남겠다는 그 말을 무슨 생각으로 했는지는 이제 기억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결국 그 말은 이렇게 이루어졌는데.
하늘에 떠있는 달은 반만 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저 달이 온전히 둥글어질 때면 붉게 물들 터였다.
그리고 달이 붉게 물들면, 고룡 마베트와의 싸움이 시작되리라.
어쩌면 싸움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들이 마베트를 세상에 드러내기 전에 먼저 찾아내어 제압한다면, 아무런 싸움 없이 평화롭게 끝날 지도 몰랐다.
가장 희망적인 상황이지만, 에반은 아마 그렇게 끝날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허무하게 끝날 싸움이라면, 진즉에 끝나 아무도 죽지 않았으리라.
또 누군가는 이 뒤에 있을 싸움에서 죽을지도 몰랐다.
엘프들이 같이 싸우고, 모든 기사들이고 모이고, 심지어 자신이 전력을 끌어도 누군가는 죽을 싸움이었다.
그리고 패배하면, 그 순간 남은 것은 끝없이 내려가는 절벽과도 같은 결말.
자신이 보았던 소설의 결말은 과연 어떻게 됐을까.
절멸의 세력이 거의 완벽하게 남은 채 아이린이 죽었던 그 소설.
장미처럼 아름답게 보이던 여인의 가시가 결국 제국의 심장을 찔러버린 결말로 끝나지는 않았을까.
스칼렛 테라제인. 이제 에반은 그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장미 가시의 그대, 순수하던 여인은 결국 제국의 종말이 될 것이었다.
그녀가 소설 속에서 용언을 다루던 장면을 보며 의아해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소설이라 생각했으니, 주인공이니까 하고 넘어갔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용의 혈족만이 다룰 수 있는 것이 용언.
그걸 스칼렛이 사용했다는 건, 그녀가 자신처럼 용혈을 물려받았거나...
아니면, 용 그 자체던가. 원작의 시작은 붉은 달이 뜬 이후의 시점이었다.
지금처럼 바보같이 순수하지도 않고, 때로는 영악한 모습을 보였던 스칼렛은 지금의 스칼렛과 거리가 멀었다.
고룡 마베트, 이미 그 존재가 스칼렛 테라제인의 존재를 먹어치운 채 껍질만을 뒤집어 쓴 것이 분명했다.
황태자를 사랑이라는 구실로 제 편으로 끌어들이고,
황제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유리스를 압박하여 멸망시키고.
그 뒤에는 아마 제국 전체를 자신이 삼켰을 것이 뻔했다.
절멸에게 희생당한 여인. 잠시나마 그녀를 절멸의 수장으로 생각했으나,
이제는 그녀가 단지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막을 수 있을까. 붉은 달이 뜨기 전까지 그들의 본거지를 찾지 못한다면, 스칼렛이 죽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밖에 없을 터였다.
“이제 보름 남았습니다.”
붉은 달이 떠오르기까지 보름. 모든 것의 끝이 결정 나기까지 보름.
“다 잘 될 거예요.”
아이린의 말에 잠시 허공을 응시하던 에반은, 이윽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싱긋 웃어 보였다.
다 잘 되지 않을까. 모든 것이 다 잘 끝나서,
스칼렛도 살고...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고 고룡을 잡아내고.
그 뒤에는 이제 행복한 상상만 하며 살 수 있지 않을까.
새하얀 눈이 머리에 쌓여 천천히 녹아든다.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린 한기에 어깨를 움찔 떨면서도,
그 흔들린 어깨 위에 놓인 아이린의 머리를 본 에반의 눈이 살짝 크게 뜨인다.
마주한 시선에 지어지는 미소. 잠시나마 느꼈던 추위가 완전히 잊혀져, 지금 이렇게 두 사람만이 있다는 사실에 주의가 쏠린다.
추웠고, 어느 때보다 삭막한 겨울이었다.
풀 한 포기 없는 숲에 남은 것이란 썩어 넘어진 나무와 기나긴 겨울을 준비하는 엘프들 뿐.
하지만 그렇기에 더 나은 봄이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 겨울이 모두 지나면 다시 봄이 찾아올 테니까.
쓰러지는 나무는 거뭇했고, 그 위에 덮인 눈은 새하얗게 반짝였다.
오로지 하얀색만이 비치는 겨울. 각기 초록색, 푸른색을 띄는 눈동자가 그 위에 색을 그린다.
이제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면 보일 녹음을, 꽃을, 봄이라는 계절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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