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 세계수, 진실, 그리고 빙의 (5)
* * *
“혼란스러워 보이는 표정이네요. 어느 부분에서 그렇게 놀란 거죠?”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이 얘기한 모든 부분에서.”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스스로의 존재를 정의하지도 못하는 그대를, 우리가 천 년이나 기다려웠다는데 덤덤하면 그게 더 당황스러웠을 테니까요.”
“천 년을 기다렸다는 게...그러니까 이 제국이 세워질 때부터 저를 기다렸다는 겁니까? 왜 천 년이나 아니, 그보다 어째서 저입니까?”
여왕은 그 모습에 조용히 미소지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전해주고 싶었으나, 그의 존재는 아마 에반 스스로 정의해야 하리라.
지금 이 자리에서 밝힐 수 있는 것. 천 년 전을 떠올린 여왕은 에반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 년 전의 전쟁을 알고 있나요? 그대가 들고 있는 아스칼론을 알라르가 들고, 그 검으로 마베트를 베어 직접 외차원에 봉인 시켰다는 이야기.”
“알고 있습니다.”
“그럼 조금 더 이야기하기 편하겠군요. 그 때 우리는 마베트를 죽이지 못했어요. 알라르와 나, 그리고 프리드가 힘을 합쳤음에도 마베트를 봉인하는 것이 고작이었죠. 우리의 힘은 그때 이미 전성기에 다다랐으나, 마베트는 우리의 생각보다도 훨씬 강했어요. 그러니, 그 봉인도 영원할리가 없죠.”
여왕의 말에 에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봉인이 풀리는 것을 기다리기 위해, 그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절멸이 그토록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던가.
그것이 천 년의 주기라면, 그 때를 대비하기 위해 안배가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허나, 왜 그것이 자신이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어, 에반은 결국 여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설마, 제가 마스터가 된 것도 그 안배 중 하나 입니까?”
“아니라고 하기엔...조금 영향이 있긴 하지만, 그건 그대가 노력했기 때문에 이뤄낸 경지겠죠. 그건 그대가 더욱 잘 알고 있지 않나요? 두 번의 삶을 살면서, 또 다른 삶에서 에반 프리드라는 존재가 어떻게 됐는지 직접 보았을 텐데요.”
“...그 안배라는 게, 제가 겪은 두 번의 삶이라는 소리입니까? 그러면, 둘 중 하나는 환상이라는 거겠네요.”
“둘 다 진실 된 삶이죠. 그대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렸지만, 결국 그대가 직접 시간을 체감하며 겪은 삶이 아닌가요? 제게 묻는다고 해서 무언가 답이 나오는 게 아니에요. 결국 그대의 시간일 뿐, 고작해야 방관자에 불과한 제가 명확한 답을 내려줄 수는 없어요.”
진실 된 삶, 허나 대화가 이어질수록 머리를 뒤덮는 것은 해결되지 않는 의문뿐이었다.
피아니스트로 살아가던 25년은? 그리고 에반 프리도 살았던 20년은? 도대체 무엇이 진짜란 말인가.
두 개의 기억 모두가 생생했다. 무엇 하나 거짓 같지가 않아서, 두 개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 진실처럼 들렸다.
그렇다면.
‘...내가 읽은 소설은 도대체.’
‘장미 가시의 그대’라는 소설이 있었다.
로맨스 판타지 소설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사랑을 받았던 소설이었다.
그 소설의 주인공인 스칼렛 테라제인, 그리고 악역인 아이린 유리스.
남자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카이셀. 그 소설을 읽으며 슬퍼했던 자신은,그렇게 소설 속 세계로 들어와 에반 프리드가 되었던 것이 아니었나.
여태껏 굳게 믿고 있던 무언가가 깨지는 기분이었다.
빙의가 아니라, 애초에 이 세계 속에 자신은 살아있던 것이라고.
여왕이 말하는 것이 꼭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아서, 에반은 한숨을 푹 내쉬며 지끈 거리는 머리를 꾹 눌렀다.
“...도대체 아니, 그럼 제 몸에 있는 이 용혈 자체가 그 안배 겠군요.”
“정확해요. 프리드가 인간과 결혼한 이유는 인간을 너무 사랑해서 이기도 했지만, 마베트와 싸울 때 조금 이라도 승리할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였죠.”
“그중 가장 용혈을 짙게 물려받은 게 저였고...그래서 두 번의 삶을 살게 된 겁니까.”
아직 혼란스러웠다. 무엇 하나 쉬이 믿을 수 없고, 여왕의 말을 전부 진실이라 할 만한 증거가 없었다.
하지만 가슴 속에서부터 떠오르는 이 막연한 신뢰감이,
어떻게든 이 말들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프리드와 알라르, 그리고 여왕의 안배.
“용의 피는 기적을 불러오곤 하죠. 우리는 그대에게 두 번의 삶이란 안배까지 준비해두진 않았어요. 그래서 묻는 건데, 에반...그대는 두 번의 삶에서 무엇을 보고 느낀 거죠?”
귓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말은 에반이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제는 완전히 잊으려 했던 기억,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서.
아직까지 기억 한 구석에 똬리를 뜬 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던 기억.
에반 프리드가 아닌, 피아니스트 김수현으로 살아가던 기억을 되돌아보는 에반의 눈이 천천히 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 떠올린 것은, 불우했던 어린 시절. 피아노에 재능이 있었다.
어쩌면 누구보다도 높은 곳에 설 수 있는 재능이라는 걸 알아차린 것은 자신이었으나,
부모는 그 피아노를 단순히 취미로 두게 놔두지 않았다.
5살, 나갈 수 있는 모든 대회에 나가기 시작하여 유치원마저 제대로 갈 수 없었던 그때.
조금씩 피어오르는 부정적인 감정에 에반의 표정이 차츰 어두워졌지만,
에반은 그 기억 속에서 꽤 흥미로운 점을 찾을 수 있었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 이건 김수현이었을 때뿐만 아니라...에반 프리드였을 때도 겪었던 것이 아니던가.
둘 다 똑같이 무엇 하나에 재능이 있었고, 부모는 자식의 재능을 이용하여 스스로의 욕망을 충족하려 했다.
명예, 힘, 재물. 어린 나이의 자신은 그 말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던 것까지, 모두 같지 않았던가.
10살이란 나이에 해외로 향했다. 10살이란 나이에 유리스로 향했다.
쇼팽 콩쿠르에 우승했던 나이와, 익스퍼트가 되었던 나이가 같았다.
그것을 과연 우연이라 칭할 수 있을까. 그리고 거기에 하나를 더 하자면.
에반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동생이었다.
잃었기에 후회했다. 지킬 수 있는 돈과 명예를 가지고 있었는데도,
단지 아픈 것을 알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지키지 못했다.
소중한 사람을 한 번 잃었던 경험. 에반 프리드로 살아가면서 소중한 이를 잃었던 적은 없으나,
그것은 자신이 소중했던 사람을 잃었던 경험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이린 유리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자신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었나?
김수현으로 살아갈 때, ‘장미 가시의 그대’라는 로맨스 판타지 소설을 읽었기 때문이 아니던가.
뒤통수를 무언가로 얻어맞은 듯, 머릿속에서 댕 하고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왜 그걸 이제야 떠올린 걸까.
소설을 읽느라 수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면서도, 심지어는 댓글을 꼬박꼬박 읽으면서도 어색함을 느끼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었던 걸까.
어쩌면, 이 두 번의 삶은 용혈이 만들어낸 기적이 아닌 걸지도 몰랐다.
용혈이 만들어낸 기적, 그건 김수현으로 살아가면서 읽었던 한 소설이리라.
‘왜, 이걸 이제야 안 걸까.’
여왕이 앞에 있었음에도, 에반은 머리를 부여잡은 채 웃음을 터트렸다.
허리가 젖혀질 만큼이나, 하늘을 바라보며 그렇게 한참동안 웃던 에반은 조용히 여왕을 바라보았다.
“저는.”
거칠게 내뱉어진 호흡에 여러 감정이 뒤섞였다.
믿을 수 없었지만, 이제는 현실이 되었기에 믿을 수밖에 없는 진실. 인정해야 했다.
자신이 보았던 것이 단순히 오락을 위한 소설이 아니었음을, 그 소설은. 사실 자신을 위한 안배였다는 것을.
“...미래를 보았습니다.”
‘장미 가시의 그대’, 분명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고...많은 사람들이 댓글을 달며 동시에 사랑했던 소설이지만.
그 소설엔 특이한 점이 여럿 있었다. 연재 주기가 불규칙했으며,
등장인물의 일러스트가 마치 중세의 유화로 그려진 것처럼 나왔으며, 마지막으로.
‘작자 미상.’
작가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
아무도 그것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어야 했건만,
이제야 그 문제를 깨달은 자신이 멍청하게만 보여서.
에반은 허탈하게 웃은 채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태껏 빙의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빙의했으니까, 소설을 본 독자였으니까. 그렇기에 소설의 내용대로 모든 것이 흘러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이 본 미래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현실과 같은 건가요?”
“아뇨...다릅니다. 제가 바꿨으니까요.”
소설 속에서, 에반 프리드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이린 유리스는 죽었고, 황태자와 스칼렛은 아마도 결혼했을 터였다.
그 이후의 일은 알지 못했다. 소설을 더 이상 읽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하탄이, 그리고 로만이 빤히 살아있다면...그 이후는 뻔하지 않은가.
“제가 본 미래는, 아마도 이 세상이 멸망했을 미래였을 겁니다.”
평행세계, 현대라는 시대에서 살았던 에반에게 꽤 익숙한 단어였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선에서 그런 미래가 그려지는 것을 보여줌을 통해 ‘경고’해준 거라면,
이 모든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경고였다. 그래, 경고.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에반은 가슴 속에 뭉쳐 있던 무언가가 탁, 하고 풀리는 것만 같은 감정을 느꼈다.
자신이 미래를 알고 아이린을 도왔기에, 아이린의 호위 기사가 되어 절멸과 싸웠기에 소설 속의 내용을 그대로 밟지 않을 수 있었다.
로페나가, 크리스가 죽지 않았고 아이린 또한 아직까지 살아있었다.
등장하지 않았던 로만과 하탄을 토벌하고, 프리드와 테라제인이 절멸과 관련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이들이 말하는 ‘천 년’이 무엇을 위한 천 년이었는지 깨달은 에반이 한결 차분해진 표정으로 여왕을 응시했다.
제 몸속에 흐르는 용혈은, 오로지 흑마법사에게만 유효한 정화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흑마법사의 힘은 고룡 마베트가 품은 어둠에서부터 비롯한 것. 알라르의 아스칼론이 제게 주어졌고,
이렇게 엘프들의 여왕을 만나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은 김수현인가, 아니면 에반 프리드인가. 그 모든 것이 아직 정리된 것은 아니었으나, 아주 명확한 것이 하나 있다면.
“당신들이 기다린 건...마베트를 다시금 봉인할 사람이었던 겁니까.”
“맞아요. 알라르의 검을 쥐고, 프리드의 힘을 사용하며, 동시에 이 천 년이란 세월동안 흐른 진실을 깨닫고 마음에 품을 수 있는 사람. 허나 이 안배라는 것은 행동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효용이 없을 터였죠. 전부...그대가 절멸과 싸우기 위해 행동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다다를 수 있던 거예요.”
이제는 완벽하게 돌아온 기억 속에서, 아버지에게 온 편지를 읽은 자신은 분명 자결하려 했다.
혼란스러웠고, 또한 자신을 가르쳐준 크리스를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미약하게나마 남은 용혈이 정신을 막아, 그로 인하여 행할 수 있었던 마지막 상태.
에반은 조용히 목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칼은, 분명 목을 꿰뚫고 피를 흘리게 만들었다. 허나 다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생겨난 25년의 시간은, 에반 프리드의 시간을 멈추게 하고 동시에 모든 것을 변하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으니까.
눈을 떴을 때는 에반 프리드의 기억을 잃은 채, 그저 소설 속에 빙의했다고 믿는 김수현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동생, 그리고 아이린.
지키지 못했던, 그리고 목숨을 버려가며 지켰던 이.
“그대에게 이 모든 진실은 부담이 되겠죠. 보다 무거운 책임을, 천 년이란 세월 동안 쌓여온 모든 것들을 어깨에 짊어진 셈이 된 것이니까요. 나는 그대를 동정합니다. 고대의 존재로써 그대를 측은하게 여기며, 또한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죠. 허나, 지금까지 그대가 행한 모든 것은 우리의 안배와 상관없이 그대의 의지 그대로 행한 것입니다.”
잠시 입술을 깨문 여왕은, 에반을 바라보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앞으로의 일 또한 그대가 선택할 일, 우리는 더 이상 이 운명에 간섭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천 년 전 그 순간부터 스스로 방관을 선택했으니, 이제 모든 것은 그대의 선택일 뿐. 누구도 그대를 탓하지 않습니다.”
“...나는 바보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게, 오히려 제게 선택을 종용하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에반은 쓰게 웃었다. 그들의 안배라는 것이, 솔직한 심정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하필 자신이란 말인가. 자신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두려워하는 것도 있고, 소설 속에 나올법한 영웅처럼 모든 것에 담대하며 세상 모든 이를 품으려 하는 마음 또한 없었다.
그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하나를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칠뿐인데, 왜 이런 운명이 제게 온 것일까.
그들이 말하는 선택, 거부할 수 있었다.
이대로 어디론가 도망쳐 모든 것을 전부 놔버린 채 홀로 두려움에 떨 수도 있었다.
고룡 마베트란 이미 모든 것과 궤를 달리하는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에반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제 와 도망치면 아이린이 자신을 무슨 눈으로 보겠는가.
애초에 도망갈 생각 따위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이런 힘이 존재하게 만들어준 안배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할 따름이었다.
이미 이 세상을 단순히 소설 속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아이린도, 로페나도, 크리스도. 이미 자신에게 너무나 소중한 사람들이라, 욕심쟁이처럼 그들 모두를 품어 지키고 싶었으니까.
“이제 와 모든 것을 놓고 도망치기엔, 제게 남은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미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될 사람이었다. 한 여인의 연인이자 남편이 될 사람이었고. 이 절멸과의 싸움에서, 부끄럽게도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싸우겠습니다. 당신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오래전에, 처음 에반 프리드에 빙의했다고 착각하던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 에반은 슬쩍 웃어보였다.
아스칼론의 빛이 허공에 반짝였다.
백색의 불꽃, 그리고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은 다시금 황금색의 빛을 내뿜고 있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면, 자신은 아이린의...정확히는.
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였으니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는 악녀라고 부를 수 없는,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여인을.
화르륵. 에반의 등에서 불길이 일어, 이 공간을 두르고 있는 세계수의 넝쿨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넝쿨이 사라져 보이는 것.
세계수의 입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한 여인의 얼굴에, 에반은 어깨가 조금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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