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 세계수, 진실, 그리고 빙의 (4)
* * *
아마도 돌아올 때에는 조금 더 부드러운 분위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그렇게 기대한 에반의 기대는 살짝 부서지고 있었다.
분명 잘못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어째서 돌아오자마자 화난 아이린의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것일까.
조금 섭섭하기도 하면서, 막상 혼나는 내용이란 귀엽기 그지없는 터라 웃음을 참는 것에 열중할 따름이었다.
“도대체 여자들 앞에서 왜 웃고 그러는 거예요? 다 간 다음에 저한테만 웃어주면 되는 거잖아요.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서 그렇게 조심을 못하는 거예요?”
“아니, 그러니까...지금 웃었다고 이러시는 겁니까?”
“엘프들이 지금 에반 얼굴 보면서 부끄러워하는 거 안 보여요? 지금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그거?”
엘프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단 둘이 남은 이 곳에서 듣는 말이란 에반이 듣기에도 꽤 어처구니가 없는 말들이었다.
그냥 반가운 마음에 웃은 것뿐인데, 그걸로 이렇게 혼날 줄이야.
하지만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에반은 아이린을 꼭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질투하시는 거군요. 제가 이해하겠습니다. 제가 없는 하루동안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지, 질투가 아니라”
“다른 여자가 부끄러워한다고 웃지 말라는 분은 아마 아이린 말고는 없을 겁니다.”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라 아이린은 아무 말도 못한 채 에반의 품속에서 버둥거렸다.
여기서 인정하면 그저 추하게 질투하는 여자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그렇다고 아니라기엔 질투가 섞여있는 건 또 맞아서,
결국 아이린은 체념한 채 에반의 넓은 등을 꼬옥 끌어안았다.
“...안 다쳤죠?”
“이제 안 다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손수건도 받았는데, 그걸 더럽혔다간 무슨 들을까요.”
“손수건 줘봐요.”
에반에게 새하얀 손수건을 받아 이리저리 확인했지만,
손수건에 새겨진 방어마법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목숨에 위협이 될 만큼 큰 공격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리라.
그래도 하탄 토벌에 꽤 많은 위험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상상외로 적이 약했던 것이 아닐까.
실상은 에반의 무력이 압도적이었던 것이지만,
아이린의 상상 속에서 에반은 언제나 죽음의 위기에서 넘나다니는 부나방 같은 사람이었다.
실제로 에반의 죽음을 목도한 적도 있으니, 이렇게 불안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리라.
“그래서, 언제까지 이렇게 껴안고 계실 겁니까?”
근처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슬쩍 웃은 에반이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이미 주변의 엘프들이 이 장면을 구경하고 있어서, 아무래도 더한 행위까지는 할 수 없을 성 싶었다.
에반의 품에 안겨 한참동안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던 아이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에반의 품에서 황급히 떨어졌다.
“음, 이제 떨어질 생각이었어요.”
“방금 싸우고 와서, 피 냄새가 났을 텐데. 괜찮으신 겁니까?”
“...뭐, 에반이면 다 괜찮아요.”
피 냄새도, 설령 더한 것이 에반에게 묻어 있더라도 괜찮지 않을까.
아이린이 옅게 미소짓자, 그런 아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은 에반이 다시 엘프들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이제 그만 나와서 얘기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제가 없는 동안 협상은 끝냈을 테니, 엘드랏실로 향하면 될 것 같은데 말이죠.”
“큼, 네. 기사님의 말대로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는데.”
에반을 바라본 엘프의 장로의 눈이 가늘어졌다.
인간이라 보기 힘들 만큼이나 강대한 마나, 허나 엘프들이 바라본 에반의 존재는 단지 인간이라 정의하기 애매한 무언가였다.
인간이 아닌 그보다 더 위대하고, 또한 지고한 존재. 모든 이종족에게 군림했으나 이제는 신화 속의 하나로 사라진 존재.
“혹여, 용이십니까?”
에반의 속에서 꿈틀 거리는 기운이란 곧 용에게서 느껴지는 것과 같았으니,
그 기운을 느낀 엘프들 중 여럿은 이미 무릎을 꿇은 이들도 존재했다.
이런 상황은 그리 원치 않았는데, 잠시 웃은 에반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단지 용혈을 조금 짙게 물려받았을 뿐입니다. 저의 선조는 이전에 프리드라 불렸던 용이니까요.”
“프리드, 그렇군요. 이미 용을 멸절되었으니, 고룡이 아닌 용이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을리가 없죠.”
잠시 아쉽다는 눈빛으로 에반을 바라본 엘프는, 이윽고 아이린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데...혹여 엘프의 피를 물려받으신 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니,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잘생긴 건가요. 엘프는 차마 그 뒤에 이어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아이린의 눈이 한껏 싸늘해짐과 동시에 기세가 날카로워져,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간 아까 베풀었던 호의를 통으로 날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과연 자신들이 미의 종족이라 불리는 것이 옳은 것일까.
순간 그런 회의감이 들은 엘프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호위 기사분이 온 것 같으니, 지금 출발해도 괜찮겠습니까? 모든 일은 조금이라도 빠른 편이 좋을 테니까요.”
아이린은 그 말에 잠시 고민하며 에반의 눈치를 살폈다.
에반만 괜찮다면 조금이라도 빠르게 움직이는 게 좋겠지만, 과연 지금 그럴 여유가 있을까.
허나 에반은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탄의 토벌에서 사용한 체력은 극히 미미했기에,
지금 당장 그런 토벌을 한 차례 더 치르더라도 괜찮았으니까.
아스칼론과 빛의 정령이 더해진 마스터의 기량이란,
무릇 사람들이 상상하는 무력의 궤를 아득히 뛰어넘는 무언가에 가까울 따름이었다.
“그럼, 곧바로 출발하죠.”
세계수, 그리고 그 편린인 엘드랏실. 지금 겪고 있는 정체의 혼란을 떠올린 에반은 그 말에 살짝 표정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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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지는 않으십니까?”
에반의 물음에 아이린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춥다고 하기엔 에반이 이렇게나 꼭 붙어있는데, 어찌 춥다고 할 수 있겠는가.
붙어있다 못해 꼭 끌어안은 모양새였지만, 다른 엘프들의 시선을 읽은 아이린은 고개를 치켜들며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데, 도대체 언제부터 사귀신 겁니까?”
한 엘프의 물음에 에반은 4달 전이라 답했고, 작게 혀를 찬 엘프는 고개를 숙이며 저혼자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쉽다...4달만 일찍 나왔더라면.”
아이린이 그 말을 듣지 못해 다행이 아닐까.
아마 정확히 들었다면,엘프를 향해 싸늘한 시선을 보냈을 테니까.
이렇게 추파를 받을 거라곤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이린은 에반의 손을 꼭 쥔 채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설마 엘프들에게도 먹히는 외모일 줄이야.
미의 종족에게마저 먹히는 에반의 외모에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종족에게 노려지는 에반 때문에 불안할 따름이었다.
‘내가 지켜줘야지.’
자신이 아니면 누가 에반을 지켜주겠는가.
이제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사람으로써, 그리고 에반의 부인으로써 자신의 남편을 사수하는 것이 옳으리라.
허나 막상 부인이라 생각하니 어쩐지 열이 올라와서, 아이린은 붉어진 뺨을 에반의 손으로 가린 채 달뜬 숨을 내뱉었다.
“그래서, 언제 엘드랏실에 도착하는 거죠?”
"출발한지 이제 사흘이니까..."
겨울이 되어 완전히 삭막해진 숲, 간혹 상록수가 푸른 잎을 보여주긴 했으나 아주 적은 수일뿐.
앞이 훤히 보일 만큼 앙상해진 나무들 사이를 가리킨 엘프가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눈을 가늘게 뜨자 보이는 건 저 멀리, 저 혼자 하늘을 향해 높게 뻗어있는 거대한 나무였으니.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기사님이라면 저게 보이실 텐데요.”
“...저게 엘드랏실입니까?”
“그렇습니다. 세계수의 편린, 엘프들의 기원이자...모든 생명의 시작이죠.”
에반의 시야에 드러난 엘드랏실이란 과연 거대한 나무였다.
저것이 고작 묘목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이나 거대한 크기,
구름에 살짝 가려진 나무의 상단부는 하늘을 뒤덮을 만큼이나 거대했고.
동시에 그 아래에 수많은 고치 같은 것들이 달려 있었다.
“엘프들은 저 고치 안에서 사는 겁니까?”
“그렇죠. 이런 겨울을 견디는 것은 엘프에게도 고된 일이니까요.”
이제는 엘드랏실이 모두의 시야에 보일 만큼 근접했지만,
여전히 아무런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마을에 아이린이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나 생기가 느껴지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엘프들의 마을은 곧 풍요를 상징했다. 생명의 기운이 그 어떤 곳보다도 풍부한 곳,
영생에 가까운 장생을 누리며, 자연과 어우러져 한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 엘프이건만.
“...이건 도대체.”
엘프들의 마을은 이미 황폐화가 상당히 진행된 뒤였다.
돌아다니는 엘프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의 삭막함. 아이린과 에반의 표정을 본 엘프들은 하나같이 허탈하게 웃으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마을을 떠난 시간은 잠깐이었지만, 황폐화의 진행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이제는 엘드랏실마저 버린 채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절멸이란 세력을 완전히 지워내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란 판단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황폐화가 완전히 진행되기 이전에 마을을 떠났어야 할 터였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인간과 협력하여 절멸이 부활시킨 고룡 마베트를 완전히 죽여야 하는 것.
아직 완전히 썩지 않은 세계수의 중앙에서는 그들의 여왕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그대들은 여왕 폐하를 뵈어야 합니다. 그 전에 준비를”
“장로님, 여왕님의 전언입니다.”
다급하게 다가온 전령의 말을 들은 조금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에반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아이린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이 말을 전하면 무슨 생각을 할까.
살짝 걱정이 되었지만, 엘프들에게 여왕의 말은 절대적. 결국 고민을 거둔 엘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왕님이 보고자 하는 건 에반 프리드 그대 한 사람뿐이라는데. 괜찮겠나?”
“......왜 하필 에반인데요?”
“아마도 불순한 의도는 없을 겁니다. 여왕님은 엘프이되 엘프가 아닌 존재. 인간에게 품을 마음이란 것이 없으신 분이니까요.”
살짝 애매한 대답이었지만, 아이린은 그 대답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여왕도 에반을 보고 이상한 생각을 하겠는가. 인간에게 마음을 품을 존재도 아니라니,
에반에게서 살짝 떨어진 아이린이 에반을 조용히 바라보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어차피 협상은 전부 장로님이 내용을 전달해주실 테니, 제가 말할 내용도 별로 없을 테니까요.”
허나 자신을 부르는 이유는 알 수가 없어서, 웃는 낯을 띠면서도 내심 여러 생각을 품었다.
에반 스스로 여왕에게 물어볼 것이 있지 않던가. 어쩌면 여왕이 그 의문을 벌써 알아차린 것은 아닐까.
소설 속에서도 신비한 존재라 서술되던 것이 저 세계수였으니,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세계수의 안쪽은 그냥 텅 빈 나무 고목과 다를 바 없었다.
넝쿨처럼 얽힌 줄기들은 위로 뻗어 그 끝이 보이지도 않는 하늘을 향해 쭈욱 돋아나고 있었다.
잠시 그 광경에 멍하니 서있다가, 이윽고 앞에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건 한 명의 여인.
일반 적인 엘프와는 완전히 다른, 오히려 인간과 비슷한 형태를 지닌 여인이 나무에 얽혀진 채 그 몸을 살짝 내밀고 있었다.
“반가워요. 용혈을 타고난 자여. 아니,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할까요.”
잠시 그렇게 말하고 웃던 엘프 여왕은, 이어 샐쭉하게 웃더니 말을 덧붙였다.
“두 개의 삶을 살았으나, 하나의 영혼을 지닌 자. 그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제게 왔군요. 어서와요. 그대를 천 년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말을 들은 에반의 표정이란, 무언가로 형용하기 힘들 만큼이나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두 개의 삶, 그리고 하나의 영혼.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란,
꼭 자신이 빙의한 것이 아닌 원래부터 에반 프리드 였다는 것처럼 들리지 않던가.
스르륵 세계수의 뿌리에서 튀어나온 나무줄기들이 서서히 주변을 감싸며 올라왔다.
어떤 이도 듣지 못할, 그리고 들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 자연스럽게 장로가 그 자리에서 물러나자,
여왕은 에반과 자신의 몸을 줄기로 천천히 감싸 공간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대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참 많아요. 알라르도, 나도, 프리드도. 결국 언젠가 올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곱게 접힌 두 눈이 곱게 휘며, 이윽고 붉은 입술이 아주 살짝 떼어졌다.
"들을 준비가 되었으리라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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