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 세계수, 진실, 그리고 빙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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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힘으로 무엇을 바꿀 수 있냐 묻는다면, 보통은 고개를 내저을 터였다.
고작 해야 한 사람, 한 사람의 무력이 아무리 거대하다고 한들 전쟁이라는 거대한 판 아래에서 한 명의 인원이 무얼 바꾸겠는가.
허나 절멸들이, 그리고 제국군들이 목도하고 있는 현실이란 그간의 상식을 뒤엎는 무력이었다.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쏟아지는 빛에 구울들 수백 마리가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흑마법사들은 마법조차 영창하지 못한 채 검에 심장을 꿰뚫린다.
범인은 감히 맞서보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힘,
구더기골렘의 몸이 터져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카이셀이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럴 거면, 에반이 올 때까지 조금 기다렸다가 출병할 걸 그랬나?”
“놀랍습니다. 이건, 마치 신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이 아닙니까.”
화르륵, 에반의 몸을 휘감은 백색의 불꽃이 마치 수족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검으로 차마 베지 못하는 적들을 스스로 불태우며, 거대한 파도의 형태가 되어 상대의 전열을 휩쓴다.
에반은 앞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그 수가 눈에 띨 만큼이나 적어진 적들.
체력은 아직 한참 남아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이 성과가 온전히 자신만의 활약도 아니지 않던가.
히히힝!
에반의 뒤쪽에서 나타난 기사들이 말을 탄 채 구울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백색의 갑주, 그리고 손에 쥐인 것은 태양빛이 부서져 눈이 부실 만큼이나 새하얀 검과 창.
마나를 머금고 질주하는 말의 속력이란 익스퍼트 기사의 전력질주와 같았으니,
오로지 유리스에서만 볼 수 있는 백마의종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드워프의 두 야장이 만들어낸 무구,
오로지 어둠에게만 효과를 발하는 무구는 흑마법사들의 마나를 찢어발기며 동시에 구울들을 허무하리만치 참살하고 있었다.
검이 나아가는 궤적에 있는 구울들은 결코 살아나가지 못한다.
입고 있는 갑주는 흑마법을 상쇄했고,
동시에 몸에 닿는 구울들을 태우며 하얀 불꽃으로 불사를 따름이었다.
“...정예로군.”
정예(??). 유리스의 증원군 1천을 본 카이셀이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절멸과의 싸움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이 유리스라 생각했건만,
오히려 그 많은 싸움이 유리스의 동력이 되었다.
지난 번, 소가주가 납치 된 이후로 급증한 군비는 이것을 위함이었단 말인가.
작게 탄식을 흘린 카이셀은, 머리를 털어내며 에반을 바라보았다.
4년 전에 처음 만났을 때, 스스로 저 기사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검을 맞대고, 연속해서 승리를 거두며 자만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허나 지금은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자신보다 빠르게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것이 에반 프리드였고,
같은 마스터인 지금조차 감히 쫓을 수 없는 것이 에반 프리드였다.
느끼는 감정은, 아마도 허무함이 아닐까. 이제부터라도 다시 뛴다면 저 등에 다다를 수 있을까.
불가능할 지도 몰랐다. 에반이 그동안 가만히 있다면 모를까,
그가 가만히 자신이 따라올 때까지 기다릴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검을 쥔다.
비록 영역조차 사용하지 못할 만큼 비루한 몸이었으나,
저런 것을 보고도 싸움을 참는다면 그것이 어찌 황태자라 할 수 있겠는가.
가슴 속에 지피는 불꽃은 호승심, 그리고 든든함.
저런 기사가 같은 편이었기에, 그의 등 뒤에 싸우는 것이 곧 제국의 방패이기에.
기사들은 용기를 얻는다. 다시 살아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는다.
화르륵 약속이라도 한 듯, 기사 전원에게서 흘러나오는 푸른 불꽃이 전장의 한 곳을 장식했다.
“가실 겁니까?”
“가야지, 어쩌겠어.”
테오라드의 물음에 카이셀은 고개를 까딱였다.
에반처럼 날뛸 수는 없더라도, 저 전장에 한 숟가락 올리는 것쯤은 간단하지 않을까.
하탄 토벌까지 사흘을 예상했으나...아무래도 그것이 해뜨기 전에도 끝날 것다는 생각이 들어서.
카이셀은 오랜만에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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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탄, 그림자의 하탄. 제국의 5대 가문으로 군림하던 찬란한 시절은 모두 바람에 휩쓸려 사라진지 오래였으니.
부서진 하탄의 깃대를 바라보는 하탄의 가주가 조용히 웃었다.
하탄의 외곽이 공략당하고, 대평원이 뚫려 최후의 보루마저 공략당한 시간.
고작해야 하루였다. 아직 여명조차 어스름히 제 빛을 발하고 있는 새벽,
해가 지고 대평원에 도달했던 에반 프리드가 새벽이 끝나지도 않은 이 시간에 제 목에 칼을 들이밀고 있는 이 현실이 우스워서.
방안에 쓰러진 시체들은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을 지키고 있던 이들이었다.
나름 암살자로 이름을 날리며, 타국 주요 수뇌부들의 목숨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던 이들이 이렇게 쓰러져 있다니.
“우습군 그래.”
에반은 답하지 않았다. 이미 하탄의 가주가 지닌 눈빛에 체념이 꽤 섞여있음을 알긴 했으나, 그렇다한들 절멸이었다.
고작 체념 정도에 방심하기엔, 이번 토벌전에서 하탄이 꺼낸 전력이 너무도 방대하지 않았던가.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것을 준비했을까. 로만 또한 가진 전력이 많긴 했으나,
결국 빌테인과 아델 개인의 전력에 많이 의지하는 편이었다.
강대한 개인이 없어서인지, 하탄이 지닌 병력이란 이미 제국이 지니고 있는 병력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마스터가 없었다면, 아니. 아마도 자신이 없었다면 하탄 혼자서도 제국에게 큰 타격을 입히기에는 충분했으리라.
그렇기에 의문이 생겨난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일을 계획했단 말인가.
구울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한 사람의 시체,
평원을 뒤덮었던 수많은 구울 들을 생각해보면...이게 고작 4~5년의 준비로 가능한 일일까.
어쩌면 로만처럼, 하탄 또한 수백 년 전부터 이미 절멸과 관계가 있던 건 아닐까.
“죽일 생각인가?”
“전하가 정하셔야죠. 저는 위협만 하는 겁니다.”
“...일단 물어볼 게 많아서, 여기서 몇 개 묻고 가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카이셀은 턱을 쓰다듬으며 하탄의 가주, 로이를 바라보았다.
당장 떠오르는 의문들, 이것들을 로이가 전부 말해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물어봐서 손해볼 것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목숨줄만 붙여주겠다고 하면 어느정도까진 얘기해주지 않겠는가?
끝까지 얘기를 하지 않겠다면야...‘도구’를 조금 사용하면 될 일이고.
로이의 앞에 무릎을 굽힌 채 수그려 앉은 카이셀은, 로이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2년만인가, 이렇게 서로 얼굴 보는 일은.”
“...장성하셨군요. 아까만 하더라도 가망이 없어 보이셨는데, 이리 뜻을 이루시다니 다행이십니다.”
“뭐 그건 과거의 일이고. 결국 이렇게 그대 앞에 서있는 건 나니까, 전부 잘 된 것 아니겠는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물으면 대답해줄 건가?”
기긱 바닥에 무릎 꿇은 채 앉아있는 로이의 사타구니 쪽에 검을 가져다 댄 카이셀이 샐쭉하게 웃어 보였다.
어차피 자식을 더 낳을 수도 없을 텐데. 한 짝 정도 가져가도 아무런 탈 없겠지.
그 모습에 잠시 쓰게 웃은 로이는, 이윽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나갈 희망? 에반 프리드가 이곳에 나타난 시점에서부터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나마 살 가능성을 찾는다면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뿐이리라.
로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밝게 웃은 카이셀이 검을 치우며 빙긋 웃었다.
과연, 썩어도 준치라는 건가. 한 가문의 수장답게 빠른 판단을 내리는 모습에 만족한 카이셀이 다시 말을 이었다.
“5대 가문 중에 하탄과 로만을 제외하고, 또 절멸과 협력하는 가문이 있는가?”
“......큽!”
푸욱
무표정한 얼굴로 로이의 허벅지에 칼을 박아 넣은 카이셀은,
조용히 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로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대답할 생각이 있으면 빨리 말하면 좋을 텐데, 무엇하러 이렇게 시간을 끈단 말인가.
잠시 이를 악문 채 고통을 참아내던 로이는,
카이셀의 손이 다시금 위로 향하자 다급히 입을 열어 말을 내뱉었다.
“전부! 그게 전부입니다! 200년 전부터 절멸에 개입한 세력은 로만과 하탄 둘뿐, 나머지 가문은 애초에 절멸과 끈 자체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진즉에 이렇게 말하면 얼마나 좋은가.”
이 말을 곧이곧대로 신뢰할 수는 없겠지만,
카이셀은 로이의 눈에 적어도 거짓이 담겨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곤 살짝 마음을 놓았다.
만약 유리스가 절멸의 편으로 돌아선다면? 그 순간 제국의 흥망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오로지 남은 것은 멸망의 길로 접어드는 것뿐. 5대 가문 중 둘이면 모를까,
3개나 돌아서버리면 그 순간 황제가 지닌 인망까지 바닥으로 떨어질 터였다.
“야만족은 개입하나.”
“...야만족은 절멸과 협력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의 신앙을 존중해주는 대신, 서로의 불가침만을 추구했을 뿐이죠.”
야만족이 개입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야만족마저 절멸을 따라 제국을 침공했다면, 지금 이렇게 누군가를 추궁할 여유마저 잃을 것이 뻔했으니까.
그 뒤로도 여러 질문이 이어졌지만, 카이셀 스스로 경각심을 지닐 만한 위험 요소는 딱히 드러나지 않았다.
프리드라는 이름이 나왔을 때 에반의 표정이 잠시 굳긴 했지만,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이 아니던가.
황실이 알고 있던 정보와 절멸이 지니고 있던 정보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사실에 내심 안심하면서도, 테오라드에게 로이를 지켜보도록 명한 카이셀이 에반을 향해 입을 열었다.
“크게 조심할 건 없을 것 같은데. 아직 시간이 꽤 남지 않았나.”
“알고 있는 걸로 한 달 정도이긴 한데. 그래도 그것이 의미하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물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개기 월식이 일어나는 날 무언가가 일어난다는 것만 알지, 정확히 무언가가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는 기껏해야 마베트에 대한 것뿐이니까.”
개기월식이 일어나는 날, 고룡 마베트가 부활한다.
고작 그정도만 알 뿐, 그로 인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하지 않던가.
에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카이셀이 로이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
테오라드가 몸을 슬쩍 피해 로이와 시선을 마주하게 했다.
“...또 물어보실 것이 있으신 겁니까.”
“도대체 붉은 달이 의미하는 게 뭔가? 개기월식이라는 건 알고 있는데, 도무지 절멸이 붉은 달을 기다리는 이유를 알 수가 없군.”
“개기월식은...음영이 가장 가득 들어차는 날. 절멸이 추구하는 목표가 무엇인지는 알고 계십니까?”
“고룡 마베트를 부활시켜서 대륙 전체를 뒤집어엎는 것, 이것 아닌가?”
그 말에 눈을 둥그렇게 뜬 로이는, 이윽고 쿡쿡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카이셀과 에반이 동시에 의문을 표함에도 한참동안 웃던 로이가 고개를 든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였다.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들이 알고 있는 것은 고작해야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인데.
이를 알려주면 절멸의 계획 자체가 뒤틀릴지도 몰랐다.
허나, 이미 계획이 발설되는 것 자체에 대한 대비는 충분히 이루어진 상태.
피가 끓어오르는 목을 쓰다듬던 로이는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절멸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대륙을 뒤엎는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그게 아니면, 굳이 제국과 싸울 필요가 있나?”
“물론 제국을 멸망시키는 것이 절멸의 목표 중 하나이긴 합니다만, 그것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애초에 고룡 마베트가 왜 시조 황제 알라르와 대립했는지 알고는 계십니까?”
잠시 숨을 가다듬은 로이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보랏빛으로 완전히 물든 두 눈동자가 빛을 발하여,
어둠 속에서 순간 타오르는 집념에 에반의 눈살이 작게 찌푸려졌다.
“제국 건국 이래로 천 년이 흘렀습니다. 마베트님이 가장 우려했던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뭉쳐있다면 언젠가는 갈라지기 마련입니다.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한 제국이 여태껏 한 번도 분쟁에 휩싸이지 않았다는 말은, 분명 거짓이라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절멸이 제국을 뒤엎으려는 것은, 이렇게 희생을 하면서도 맞서는 건. 결국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리기 위해서일뿐입니다.”
“원점?”
“다시금 새로운 생명, 그것으로 만들어낸 문명으로 다시금 모든 것이 새로이 시작되는 것. 알라르는 이미 타락한 인간들을 위해 싸웠고, 거기에서 패배한 마베트님은 봉인되어 차원 어딘가에 봉인되었습니다. 이제는 다시 마베트님의 뜻을 받들어 모든 것을 원점으로 회귀”
하. 작게 한숨을 내뱉은 카이셀은 로이의 턱을 주먹으로 후려치며 조용히 숨을 가다듬었다.
궤변이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만 같은, 광신도들이나 할 법한 헛소리가 아니던가.
“비슷한 이야기가 있긴 합니다.”
에반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내뱉었다. 비록 저 하탄의 가주가 한 말 자체는 궤변이나 다름없었지만,
이미 제국의 국교가 지닌 경전 중에 이런 말이 있지 않던가.
“방주를 아십니까?”
“그쪽에 관심이 없긴 한데, 그래도 대강 알고는 있지. 자네가 말하고 싶은 건, 마베트가 타락한 인간에게 심판이라도 내리겠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는 거죠. 마베트가 신이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신이라, 카이셀의 시선이 뻥 뚫려버린 천장으로 보이는 흐릿한 태양으로 향했다.
신이 있다면 저 곳에 있을 테고, 분명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가만히 있는 것들을 과연 신이라 칭할 수 있을까.
설령 실제로 존재한다고 한들, 카이셀은 신이 자신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냥 자기네들의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한 헛소리일 뿐이야.”
그 말과 동시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잠시나마 정이란 것을 품었던 한 여인.
허나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들었고, 단순히 그 조직에 관련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속이 뒤틀리는 것만 감정이 들 따름이었다.
폐를 가득 채우는 공기에 가슴이 잠시 답답해졌다가, 이윽고 빠져나가는 숨에 후련해진다.
“스칼렛 테라제인.”
“이제 조금 마음을 정하신 겁니까?”
카이셀의 요청으로 잠시간 지연되었던 계획.
스칼렛 테라제인을 완전히 회유하거나, 아니면 사전에 처리하거나.
에반을 빤히 쳐다보던 카이셀은, 이윽고 고개를 떨구며 입술을 달싹였다.
“...회유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보지. 그래도 안 되면, 뭐 어쩌겠나.”
카이셀은 차마 그 다음 말을 내뱉지 못했다.
속이 뒤틀리면서도, 차마 뒤엉킨 감정 속에 혐오만이 만연하다고는 할 수 없지 않던가.
가슴 한 구석에 담긴 것은 분명 연()이었기에.
고개를 숙이는 에반을 멍하니 바라보던 카이셀은 허탈하게 웃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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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나날이었다. 황태자를 만나 조금씩 달라지는 스칼렛의 모습에 황궁 시녀들은 하나같이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늘 여러 여자를 끼고 사는 문란한 삶을 살던 황태자가 달라졌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황태자를 기다리는 여인마저 있었으니,
어쩌면 곧 황태손을 볼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들은 스칼렛은 얼굴을 붉혔다.
자신이 황태자와 결혼한다니, 처음에는 그저 중요한 사람이라는 얘기에 친해지려 했을 뿐이었지만.
허나 시간이 흐를수록 달라지는 생각들,
어쩌면 자신이 좋은 곳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절멸은 정말 나쁜 것이 아니었을까?
조금씩, 조금씩 변해가는 생각에 스칼렛은 더 이상 자신을 어릴 때부터 챙겨주었던 노집사를 자주 만나지 않았다.
황궁에 있는 시녀들과 자주 만나며, 조금씩 황도의 분위기 속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카이셀과 연인이라 불리는 주변의 소문에도 익숙해졌다.
가끔은 손도 잡고, 정말 진심으로 웃어주는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어째서 이전에는 이런 것을 알지 못했을까. 만약, 조금 더 카이셀을 일찍 만났더라면.
찻잔을 들은 채 발을 붕붕 휘두르는 스칼렛의 얼굴에는 미소가 만연했다.
붉은 달이 뜰 때 자신을 가문으로 데려가려 한다면 무어라 변명해야 할까.
차라리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가고 싶다 하면서 어리광을 부려볼까.
어리광을 부리기엔 너무 크긴 했으나, 자신의 부모님이라면 충분히 그 부탁을 들어줄 거라 스칼렛은 믿었다.
“...아무래도, 조금 더 복귀를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오로지 햇빛을 바라보며, 제 뒤에 생겨난 그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조금도 모르는 채로.
스칼렛은 여전히 제 가족들을 굳게 믿고 있었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굳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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