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22화 (122/181)

〈 122화 〉 세계수, 진실, 그리고 빙의 (1)

* * *

주변을 둘러보며 전황을 확인한 에반이 조용히 숨을 가다듬었다.

심장을 타고 흐르기 시작하는 마나, 그리고 다시금 눈을 뜨는 용혈.

지난 번 카심 백작에게 얻어 몸속에 심어진 빛의 정령 또한 피어나 마나 속에서 섞이기 시작했다.

마스터 대 마스터라면 모를까, 흑마법사와의 전투에서 자신 보다 강한 사람은 어쩌면 이 세상에 없지 않을까.

거기에 에반에게 심어진 용혈에 강렬히 반응하는 아스칼론 또한 더해졌다.

본 드래곤, 이전에 완전하게 부활하지 못했던 말로릭을 상대로 고전했으나.

그 때는 마스터가 아닌 단순히 익스퍼트에 불과할 뿐이었다.

설령 지금 만난 본 드래곤이 온전하다 못해 흑마법으로 강화되었다 한들,

에반은 그 용에게 조금의 위협조차 느끼지 못할 따름이었다.

‘...하루 안에 끝낼 수 있을까.’

하탄 토벌에 그리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곧 유리스에 엘프 사절단이 찾아오지 않던가.

엘프들이 오면 세계수를 꼭 봐야 했다. 이제는 완벽하게 되찾은 기억,

그 기억 속에서 떠올린 위화감에 에반은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화르륵­! 하얀 염화가 피어올랐다. 꽃처럼 타오르는 불꽃에 흑마법사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낀 본 드래곤이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펼쳤다.

같은 마스터들조차 온몸이 저릿할 만큼 공간을 죄여오는 마나,

그 녹색의 눈동자가 금색으로 변해갈 수록 점차 커져가는 압박감이란 가만히 서있던 흑마법사들을 기절시킬 만큼이나 강력했다.

콰가가각! 에반의 발에 닿은 땅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얻은 추진력으로 하늘을 향해 튀어 오른 에반이 그대로 본 드래곤의 가슴팍을 꿰뚫어 부수자,

그 중심부에서 터져 나온 섬광이 세상을 감싸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구울들이 떼처럼 모여 거뭇해진 무리 아래로 떨어진 에반이 눈을 떴다.

앞으로 보이는 것은 구울 들의 무리, 사방을 감싼 것은 보랏빛 눈동자를 흉흉하게 빛내는 절멸의 무리들.

쿠우웅­! 땅 위로 떨어진 본 드래곤의 사체에 일순간 정적이 흐른다.

하늘을 뒤덮어 제국군을 압박하던 본 드래곤이 너무도 쉽게 쓰러졌다는 현실에,

어떤 흑마법사는 지금 보고 있는 것을 환상이라 여겼다.

에반이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구울 수십 마리가 빛에 녹아 사라진다.

이 주변을 휩쓰는 저 새하얀 불꽃에 마법마저 녹아내려 완전히 무효화된다.

단지 한 명의 기사, 오로지 한 명의 출현으로 이 모든 것이 뒤바뀐다는 것이 말이나 된단 말인가.

우세였다. 비록 제국군의 기세가 막강했으나, 결국 수에서 압도하기에 결국에는 절멸이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본 드래곤이 나타난 직후까지만 하더라도 어떠했는가.

마스터 둘을 궁지에 몰려 처리할 수 있으리라 믿었건만, 그들이 지금 보고 있는 현실은 방금의 그것과는 너무도 동 떨어져 있었다.

금색의 물결이 밀려들어온다. 파도처럼 구울 들을 덮치고,

본 드래곤의 시체를 가루를 만드는 검이 허공에 선을 그릴 때마다 흑마법사들이 나가 떨어졌다.

수적 우세를 완전히 망각시킬 만큼의 무력, 첨탑의 꼭대기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탄의 가주 표정이 완전히 새하얗게 질리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

“아가씨, 뭐하고 계세요?”

“준비.”

로페나의 물음에 아이린은 짧게 답했다.

이제 완전히 깊어진 겨울, 결국 세계수가 있는 숲은 완전히 겨울에 뒤덮어 삭막해지고야 말았다.

숲에 살던 엘프가 어디로 사라지겠는가. 결국엔 인간들이 있는 곳으로 흘러들어올 터였고,

그렇게 되면 반드시 분쟁이 발생할 터였다.

분쟁이 발생하지 않게 하는 방법, 그중 가장 효과적인 것은 아마도 그들과 먼저 접촉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 곧 이곳으로 엘프들의 사절단이 올 거야. 너도 준비해두렴.”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이종족인데요.”

“괜찮아. 엘프들은 생명을 해치지 않으니까.”

엘프들은 생명을 해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아주 사소한 풀 한포기 일지라도, 엘프들은 결코 그것을 사소하게 대하는 경우가 없었다.

개미 한 마리조차 그들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배려하며, 동시에 모든 생명을 고귀하게 여기는 존재들.

그렇기에 엘프들은 인간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인간들에게 토벌 당한 여러 이종족과 달리 수천 년간 그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애초에 이번 사절단은 단지 협상의 자리를 어디서 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 할 뿐,

많은 인원이 이곳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세계수의 이름을 대신하여 찾아온 엘프 한 둘 정도일까.

에반이 없더라도 그 정도는 만날 수 있었으니,

어떻게든 불안한 마음을 씻어내기 위해 아이린은 차라리 일에 치이기로 마음먹었다.

“음식을 준비할 필요는 없어. 엘프들은 순수하게 숲의 정기만을 필요로 하니까. 겨울을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은 정기가 부족하겠지만...아마 세이렌 주변이라면 괜찮을 거야.”

세이렌은 아주 오래 전 용이 심어둔 마력을 가진 곳이었다.

숲의 정기 대신 가끔 마력을 섭취하는 것이 엘프였으니,

겨울 동안 그곳에서 지내면 괜찮으리라. 유리스의 병력은 상당수가 황태자를 돕기 위해 사라진 상태였다.

일반 사병이면 몰라도, 정예 병력인 기사 1천이 빠졌다는 사실에 엘프 사절단이 오는 것을 우려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아이린은 엘프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공작과의 담판 또한 잘 끝냈으니, 이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얘기하기 이전에 제 아버지와 먼저 만나야 하지 않을까.

순간 새어나온 웃음에 쿡, 하고 웃은 아이린이 따듯한 물을 마셨다.

공작과의 대화는 나름 색다른 느낌을 아이린에게 전해주었다.

한때는 두려워했던, 그리고 원망했던 사내와 단 둘이서 대면하는 것이 꽤 오래전이었으니.

몇 년이 흘러 다시 만난 아버지라는 존재는, 초라하리만치 위축되어 있을 따름이었다.

자신의 눈치를 보고, 고개 숙여 사과한다. 아직까지 가슴 한 구석에 흉터로 남은 기억,

그리고 이제는 서서히 사라져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 기억들까지.

귀가 닳을 만큼이나 들은 사과에 이제 질릴 따름이라,

아이린은 공작에 대해 꽤나 미묘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더 이상 아버지의 손길이 제게 닿지 않은 지 어언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에반을 만난 뒤로는 아버지가 무어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

이제는 그 원망이란 감정마저 희미해지기 충분한 시간이지 않던가.

­미안하다.

남들에게, 황제가 아닌 어떤 이에게도 고개 한 번 숙이지 않던 아버지가 제게 고개 숙이며 사죄하는 모습이란.

아이린에게 꽤나 통렬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등골에서부터 섬뜩한 감각이 올라와 어깨가 움찔 떨리는, 그리고 제 눈을 의심하며 상황을 환상이라 여길 만큼.

“아버지, 라.”

다른 이에게 공작을 말할 때는 아버지라 얘기하곤 했으나,

실제로 제 아버지에게 아버지라 얘기한 적은 어릴 적 이후로 손에 꼽았다.

에반에게 무어라 하는 아버지에게 단 한 번 했던 것이 마지막이었으니까.

그때 공작이 지었던 표정을 떠올린 아이린은, 피식 웃으며 허공을 시선으로 훑었다.

로페나 마저 나가 텅 빈 방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고작 그 한 마디에 헤벌쭉해지는 얼굴이란, 과연 자신을 어릴 때 그토록 괴롭히던 아버지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이제는 아이린도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 겪었던 그 모든 것들이 전부 아버지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것을.

언제까지고 원망만을 할 수는 없었다.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 언젠가는 제 아버지와 사과할 날이...

“과연올까.”

어쩌면 평생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이란, 10년이나 흐른 지금도 가슴에 사무치는 감정을 안겨주곤 했으니까.

그것이 아버지 당신의 탓이라며 원망했고, 아무것도 책임지지 못한 무능한 아버지라 탓했다.

아마 자신이 평생 혼자 남을 운명이었다면, 제 아버지에게 조금의 연민조차 주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꿈속에서 보았던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홀로 쓸쓸하게 죽은 아버지.

아이린은 그 모습에 자그마한 연민을 품었다. 그리고 의문을 품었다.

자신이 원하는 결말이 이런 것이었나. 언제까지고 원망하며, 그가 비참하게 죽는 것을 바라고 있던가.

...자식에게도 그리 좋은 광경은 아닐 터였다. 부푼 배를 쓰다듬은 아이린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이제는 겉으로 보기에도 살짝 부푼 것이 보일 만큼 커진 배였다.

이 안에 있을 두 아이는 나중에 제 할아버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까.

엄마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할아버지, 그리고 사이에서 난처해하는 아빠...

아이를 가진 탓일까. 아이린은 조금 감성적이 되어가는 것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슬슬 용서해도 되지 않겠는가. 몇 년간의 앙금을 풀고,

공작이라 불렀던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해도 되지 않겠는가.

탁자 한 구석, 뒤집어져 있던 액자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 아이린이 액자에 묻은 먼지를 천천히 닦아내었다.

그 그림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은 한 여자아이와 부부.

유독 남자 쪽에 가득 묻은 먼지를 완전히 닦자 드러난 것은 익숙한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지난 번 보았던 것보다 주름도 훨씬 적고, 꽤나 정정한 모습에 괜스레 입맛이 쓰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이린은 시선을 거둔 채 그 옆에 서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자신과 똑닮은 새하얀 색의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진, 그리고 푸른색의 눈동자를 지닌 여인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에반을 바라볼 때 자신이 짓는 웃음과 꽤나 닮은, 그리고 닮을 수밖에 없는 모습.

“...엄마.”

그림은 자신이 기억하는 모습을 완벽하게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늘 탁자에 올린 다즐링을 마시며 무릎을 내주었던 따스함을, 무릎에 앉힌 채 아빠가 이상하다며 투덜거리던 그 사소함을.

자신을 낳았을 때 엄마는 무슨 감정을 품었을까. 까마득한 감정이었으나,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은 그 감정에 아이린은 조용히 턱을 괸 채 그림을 멍하니 쳐다봤다.

“나도 이제 엄마가 되려나 봐요. 괜히...사람이 감정적이 돼.”

예전 같았으면 두려워서 보지 못할 액자였을 터였다.

괜히 잊었던, 그리워하던 사람의 기억을 떠올려 우울해질까봐.

하지만 지금 느끼는 감상이란 놀랄 만큼이나 아무렇지 않았다.

굳이 이 감정을 말로 표현하자면, 그냥 조금 가슴이 따듯해지는 감상뿐이라 해야 할까.

아이린은 조용히 웃었다.

그림에 그려진 그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이제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된다니, 엄마가 들으면 얼마나 웃을까.

같이 옆에 있다면, 그리고 한참 웃으면 좋을 텐데.

허나 이제 웃어줄 사람은 곁에 있지 않았다.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은 에반이었고, 남아있는 사람은 제 아버지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늘, 엄마에게 아무렇게나 말을 늘어놓던 것이 어릴 적의 자신이었다.

수다스럽다며 혼이 났을 만큼, 에반이 그런 얘기를 들으면 믿지 않겠지만.

자신의 어릴 때는 꽤 밝고 수다스러운 아이였다.

엄마의 무릎에 앉아 쿠키를 오독오독 씹으면서 서류를 한 쪽에 낙서를 하고,

공작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시녀들을 괴롭히곤 했다.

그것이 순수한 의도이든, 아니면 조금 맘에 들지 않는 시녀든.

옛날처럼, 아이린은 얼굴을 두 손으로 덮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옛날처럼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고, 자신은...엄마가 기억하는 아이린과 너무도 많은 차이가 있었다.

예전처럼 수다스러운 아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조금은 차가운 것이 좋았고, 조금은 어두운 곳이 어울렸다.

밝고 화사한 색의 드레스만 입던 아이는 이제 까맣고 파란 드레스를 즐겨 입었다.

키가 작은 것에 불평하던 아이는, 이제는 훌쩍 자라 새로운 생명을 품을 나이가 되었다.

“아무 말도 안 해주네요.”

그림 속에 그려진 여인이 무슨 말을 해주겠는가.

알고 있었지만, 괜스레 울컥 치솟는 감정에 아이린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그림 속의 엄마는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모습과는 조금 많이 달랐다.

피부가 창백하지도 않았고, 마르다 못해 앙상해진 팔도 없었고, 윤기를 잃어 푸석푸석해진 머리카락또한 없었다.

차라리 환청이라도 들렸으면 좋으련만,

아무런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방에서 아이린은 무릎을 끌어 안은 채 사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연인이 생겼어요. 엄마는 아마 모를 거예요. 엄마가 죽고 난 다음에 온 사람이니까.”

“잘 생겼어요. 솔직히 제가 생각해도 조금 위험하다고 생각해요.항상 주의를 주는데, 에반은 자기가 얼마나 잘 생겼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다른 여자에게 막 웃어주는 건 아닌데...내가 질투하는 건가 봐요.”

때로는 머리를 베베 꼬며, 에반의 얘기를 하는 아이린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고백은...에반이 했어요. 제가 먼저 하려고 했는데, 로페나가 여자 쪽이 먼저 하면 남자가 쉽게 질려한다고 하더라고요. 로페나는 아시죠? 제가 데려왔던 애인데, 이제 걔도 곧 있으면 성인이에요.”

활짝 펴진 손가락에 반지가 반짝였다. 아직까지 초록색의 에메랄드가 반짝이는,

그 반지를 그림을 향해 가져다 댄 아이린이 입을 열었다.

“에반이 준 반지에요. 아마...약혼 반지가 아닐까요? 결혼 얘기는 아직 안 했는데, 나중에 아마 제대로 청혼할 거라고 생각해요. 다음번엔 제가 해보려고요. 목걸이도 찾아보고 있어요. 에반에게 처음 받은 생일 선물이 목걸이였는데, 그것만큼 기억에 남는 게 없어서.”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어요.”

아이린은 그 말을 내뱉으며 동시에 쓰게 웃었다.

너무 많이 흘렀다. 만약 자신의 엄마가 돌아온다고 해도, 이미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이 변했다.

이전처럼 자신과 아버지의 사이를 돌릴 수 없었고, 에반과 만나기 이전의 시간으로 시간을 돌이킬 수 없었다.

가끔은 엄마가 다시 살아 돌아오는 상상을 하곤 했지만, 결국 상상일 뿐이었다.

변하는 건 없었다. 누구를 원망하기엔 엄마의 죽음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고,

이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때가 왔다고. 아이린은 생각했다.

“...무서워요. 이제 끝에 왔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끝에서 모든 것이 망가질까 봐.”

절멸이란 조직은 언제나 위협이 되는 것들이었다.

제 아무리 짓밟아 놓더라도, 다시금 되살아나 제국을 위협했다.

만약 이번에 에반이 실패한다면, 그 끝은 분명 제국이 멸망하는 것이리라.

애써 차분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두려웠다.

“모든 게 잘 끝 날 수 있을까요?”

그림은 아무런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조금도 변하지 않는,

그려진 미소를 띤 채 아이린을 쭉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어서, 아이린은 액자를 조용히 덮으며 액자의 뒷면을 바라보았다.

눈가가 시큰한 나머지, 살짝 흐른 눈물을 닦아낸 아이린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 액자가 계속 그림을 보이고 있으면, 아마도 이 그림을 볼 때마다 감상에 젖을 테니.

지금은 그런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신기하지 않은가. 혼자 허공에 대고 대화했을 뿐인데, 꼭 엄마와 대화하는 느낌이 들은 것은.

잠시 창문을 바라보던 아이린은 이윽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문 밖에 한참 쌓인 눈, 그리고 그 위로 보이는 초록색의 깃발.

세계수의 전령임을 알리는 그 깃발은 분명 자신이 오늘 상대해야할 사절단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방을 나서려다가, 잠시 멈춰 덮어진 액자를 빤히 바라본다.

겨울, 자신의 엄마가 하늘로 올라간 지 10번째가 되는 겨울.

자신의 엄마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떠올린 아이린은, 조용히 창문 너머를 바라보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거기는 조금 따듯하기를 바랄게요.”

이 겨울은, 엄마를 다시 떠올리기엔 너무 추운 겨울이었으니까.

나무 위로 쌓인 눈, 아마도 10년 전의 이 날에도 쌓여있을 것만 같은 눈을 바라보는 아이린의 눈은. 이전과 달리 조금 온기를 담고 있었다.

모든 일이 끝나 봄이 온다면, 그때는 조금 후련한 마음으로 액자를 바라볼 수 있으리라.

희망은 바람을 품고 나아간다.

언젠가는 저 남쪽에서 불어올 훈풍에 그 마음이 다시 담겨 돌아오길 바라며.

아이린은 사절단을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