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개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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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 후 2주. 어느덧 12월에 들어선 겨울의 날씨에 기사들은 저마다 입으로 하얀 숨을 내뱉으며 검을 쥐었다.
목표는 하탄, 하탄은 제국의 진격에 대해 공식적으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하탄이 보인 것은 하탄 공작령 전체를 뒤덮은 그림자였다.
로만 토벌에서도 몇몇 이들은 이미 보았던 그림자, 완전히 제국의 뜻에 반하겠다는.
그들이 절멸에게 돌아섰다는 의미를 품은 그림자에 결국 제국군은 칼끝을 하탄을 향해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상정하고 벌인 일이긴 하지만, 막상 정말 그렇게 되니 답답하군.”
“...그래도 3대 가문은 영원토록 충성을 바칠 것입니다. 3대라니, 분명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5대 가문이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메디브의 가주인 케인이 입을 열었다.
저 앞에 보이는 것은 이미 무더기처럼 쌓인 흑마법사들의 시체,
전염병이 창궐하는 도시의 쥐 떼만큼이나 불어난 흑마법사란.
그 어떤 것보다도 처리하기 까다로운 존재나 다름없었다.
세상 제일의 마법사를 아제스트라 칭하지만,
메디브는 마법으로 유명한 가문답게 아제스트와 완전히 다른 마법체계를 보유하고 있었다.
학살에 있어 아제스트가 최적의 마법을 지녔다면, 메디브는 결계와 속박술에 있어 스페셜리스트라 불렸으니.
흑마법사들의 마법을 ‘봉쇄’하고 ‘방어’하며, 동시에 ‘역산’ 할 수 있는 전력은 메디브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었다.
아제스트가 마법을 만들어내는 시간까지 방어하며 기사들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메디브, 카이셀은 케인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마도 이들이 없었다면, 진즉에 무참한 피해를 입고 패퇴했으리라.
개전 시작에 출진한 기사들이 약 9천명.
지금까지의 사상자가 거의 100명에 가깝다는 걸 생각해보면...하탄까지 이 전력의 7할을 살릴 수 있을 때.
어쩌면 절멸을 완전히 뿌리 뽑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만용이야.’
수십 년 전의 전쟁에서 제국은 3만에 달하는 기사 전력을 잃었다.
최전성기라 불리며 5만에 가까운 기사를 지녔음에도 그렇게 패퇴했건만,
제 아무리 마법 수준이 높아졌다 한들 절멸에 대해 과소평가를 내릴 수는 없었다.
당장 이 전력 자체가 전멸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사기가 아직도 충천하다는 점이었다.
“폐하의 연설이 효과를 단단히 본 것 같군요.”
“그렇지, 아무래도 제 가족을 위해 싸우라면 도망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병법에 이르기를, 기세는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하되 전투 시간은 짧다고 해야 했다.
최대한 이 사기를 유지하는 것도 한계가 있을 터,
마음 같아선 텔레포트로 단 번에 하탄을 공격하고 싶었지만. 하탄을 둘러싸고 있는 그림자는 마력의 접근을 완전히 막고 있었다.
그 안이라면 모를까, 그 외부에서 내부를 통해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소리였다.
“아마도 로만 토벌전을 보고 미리 대비한 거겠죠. 아제스트 씨의 메테오라면 하탄 전체를 초토화 시키는 것도 가능할 테니까요.”
“순전히 기사들로만 그들의 전력을 깎아먹어야 하는 건가. 전력을 많이 소모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래도 전하가 계시지 않습니까. 테오라드 경도 계시고요.”
그리고. 카이셀을 향해 시선을 돌린 케인이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하탄 공략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람이자, 절멸 토벌에 절대 빠져서는 안 될 이름.
“...에반 프리드는, 언제쯤 합류하는 겁니까?”
“모르지, 나도 정확히 알 수 없네 그건.”
카이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에반 프리드의 참전은 순전히 당사자의 의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황제가 강제로 명령을 내린다면 모를까, 황제마저 그에게 자율권을 내준 이상 에반 프리드의 움직임에 간섭할 수 있는 거라곤 이 세상에 딱 한 사람뿐이지 않은가.
“공처가로군요.”
“꽉 잡혀 사는 것 같더군. 도대체 어떻게 유리스의 소가주 쪽에서 잡고 사는 거지? 아무리 에반의 성격이 유순한 편이라고 해도...어색할 정도야.”
“저희가 모르는 사정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절멸과 싸우는 일에 연인을 섣불리 보내는 여자도 그리 많지는 않을 테고요.”
그렇기야 한데. 카이셀은 입에 둥둥 떠다니는 말을 굳이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에반이 제국군에 합류해서 싸운다면 훨씬 진격이 빨랐겠지만, 에반의 참전은 사실상 뒤로 미뤄진 상태였다.
공식적인 이유는 아스칼론의 소유권을 확실하게 이전하기 위해서,
그리고 비공식적인 이유는 아이린 유리스가 에반의 참전에 앞서 해야 할 일이 남았다고 했기 때문.
그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진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 카이셀은 입맛을 다시며 막사 밖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앞으로 하탄에 닿기까지 하루, 이제 내일이면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다.
최악의 상황이라면...붉은 달이 뜨는 날 고룡 마베트가 부활하는 것이 아닐까.
허나 애초에 최악을 상정하고 모인 군세였다.
“지금 생각할 건 어떻게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한의 성공을 거둘 수 있느냐, 겠군.”
“솔직히 말하자면, 욕심입니다. 적어도 3천은 죽을 거라 생각하는 게 편하겠죠.”
“여기서 3천을 잃는 것도 만용이라고 보네. 어쩌면 자네나 내가 죽을 수도 있지.”
“전하께서 승하하시면...절멸을 끝내도 제국은 망하겠군요. 그 끝이 어떻게 될지 훤히 보입니다.”
피식 웃은 카이셀은 견장을 툭툭 두드리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죽을 생각은 없었다.
마스터씩이나 돼서 죽을 일이 그리 많지도 않았고,
아마 고룡 마베트가 부활하여 싸우는 정도가 아니라면 괜찮으리라.
“슬슬 갈까.”
“이제 내일인 겁니까.”
“내일 에반이 합류하면 좋겠지만...그렇게 잘 풀릴지 모르겠군. 부딪혀 봐야지, 최대한 빠르게 끝내는 것을 목표로.”
화르륵 타오르는 횃불에서 재가 날린다. 바람에 뒤섞인 불씨가 눈을 녹이며 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나부끼는 깃발, 완벽히 도열한 기사들을 바라보던 카이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코를 찌르는 짙은 전운(戰雲)의 향. 비릿한 혈향과 함께 느껴지는 것은 저 멀리 느껴지는 어둠이었기에.
카이셀은 다시금 진군(??)을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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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전쟁이란, 딱히 어떤 신호를 통해 시작되는 것이 아니었다.
눈을 마주치고, 서로를 확인하고. 동시에 발을 구르며 칼을 맞대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행위엔 규칙이랄 것이 없었다.
그것이 서로를 증오하고, 서로의 끝이 멸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두 세력이라면.
싸움은 그 어느 때보다도 거칠어질 따름이었다.
기사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하탄 공작령 중심에 있는 공작저였다.
기사들의 속도라면 하루만에 도달할 수 있는 곳,
마법사들의 마법으로 순식간에 뚫린 외곽의 방어선을 찢으며 달린 기사들은 흑마법사들을 도륙해내기 시작했다.
개인 하나하나가 익스퍼트 이상의 경지를 지녔으니, 제대로 진열을 갖추지 못한 흑마법사들은 방어선을 지키지 못한 채 다급히 후퇴할 뿐이었다.
쿵! 기사들의 발이 땅을 구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손에 쥔 검에 묻는 것은 살점과 피,
제 앞에 씌워진 그림자를 마나로 가르며 호흡을 고른다. 심장이 뛰었다.
이 순간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죽을 것이 자신들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기사들은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황태자가 앞에서 싸운다. 제국의 두 마스터가 전열에 있었다. 쐐기처럼, 바람을 가르고 창공을 찢는 화살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기세를 탄 기사들이 빠르게 진격한다.
대지를 밟고, 시체를 짓이기며 앞으로 나아간다. 카이셀은 앞을 확인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따라오는 기사 3천, 그리고 양 옆으로 날개를 찢어 나아가는 기사들이 각각 2천 5백.
후위를 위해 남겨둔 1천의 기사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기사가 앞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외곽을 뚫고 진입하는 것은 수월했으나, 상대는 흑마법사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리라.
그런 카이셀의 눈앞에 보인 것은 인간과 그 크기를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이나 거대한 거인.
거뭇한 몸을 지닌 거인의 주먹을 발견한 카이셀이 입을 열어 크게 소리쳤다.
“전군 산개하라!”
쿠웅! 굉음을 내며 쪼개진 대지의 파편이 기사들을 덮쳤다.
언뜻 봐도 15m의 크기를 자랑하는 거인은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다행히 순식간에 퍼진 기사들이 입은 피해는 미미했으나,
그들의 표정에 서린 경악을 읽은 카이셀이 혀를 찼다.
"다들 흩어져라, 내가 상대한다."
흑마법으로 만들어진 골렘들, 골렘의 몸에 마나가 스며드는 것을 확인한 카이셀이 검을 들었다.
호흡을 고르며, 동시에 마나를 온 몸에 순환시킨다. 말은 버리는 게 나을 터였다.
애초에 마스터의 신체란, 말의 기동성보다도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으니까.
투콰앙! 골렘과 부딪힌 카이셀의 검이 파공을 내뿜었다.
허리를 뒤틀며 다시금 땅을 밟고, 그렇게 회전한 몸이 골렘의 팔을 향해 검을 내지른다.
카가각 파고드는 검, 마치 돌을 베는 것만 같은 감각에 카이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생각보다 단단하지 않은가. 지금은 괜찮았지만, 마스터가 아닌 다른 기사들에게 이런 골렘이 붙는다면 처리가 곤란했다.
골렘의 팔을 자르며 다시금 마나가 솟구쳤다.
푸른색의 불꽃이 몸을 뒤덮고, 이어 불꽃을 검에 담은 카이셀이 허공에 사선을 그었다.
오른쪽에서 왼쪽 아래로, 선을 그리며 나아간 검이 골렘의 몸에 커다란 흔적을 남긴다.
다시 그어지는 흔적, 시간이 흐를수록 골렘의 몸에 남겨지는 흔적이 커지기 시작했다.
몸이 서서히 싸움에 적응해 나간다는 증거. 호흡을 고른 카이셀이 다시금 진각을 밟았다.
얼굴을 향해 뻗어오는 주먹을 피해낸다.
허리를 뒤로 숙이며, 동시에 그 탄력을 추진력 삼아 그대로 골렘의 심장부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파앙! 순식간에 좁혀진 간격, 골렘을 상대할 때 그 코어를 파괴해야 함을 떠올린 카이셀의 검이 가슴을 꿰뚫어 파고들었다.
“테오라드! 가슴 중앙에 코어가 있다!”
“이미 하나 부쉈습니다. 옆에 조심하십시오!”
생각보다 처리가 빠르군. 한차례 혀를 찬 카이셀이 골렘의 몸에서 검을 뽑아내자,
거뭇한 제 몸의 색깔을 잃어버린 골렘이 그대로 땅을 향해 무너져 내렸다.
이제 하나, 테오라드가 하나 처리했으니. 남은 것은 기사들과 함께 처리하면 되지 않을까.
골렘을 처리하는 과정은 수월했다. 골렘을 처리하는 도중에 흑마법사들이 난입했다면 골치 아팠겠지만,
마법사들의 합류로 순식간에 골렘 셋을 더 처리한 카이셀이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너무 빨리 끝난 것 같은데.”
눈이 가늘어진다. 그 얇아진 시야 속에 보이는 건 하늘을 향해 뻗어오른 공작저,
마치 첨탑처럼 생긴 공작저는 로만에서 보았던 것처럼 불길한 기운을 풀풀 풍기고 있었다.
허나 로만의 전력처럼 그리 강하지는 않을 터. 왜 그들은 처음부터 강하게 반격하지 않은 것일까.
케인의 생각 또한 그것에 다다라, 조금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첨탑을 바라보았다.
“이상합니다.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조금 더 주변을 살피면서 갈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적은 하탄입니다.어떤 함정이 있을 지 모릅니다.”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너무 시간을 지체할 수도 없으니, 곤란하군.”
기세는 좋았다. 하지만 이 기세를 하루종일 유지할 수는 없었다.
싸움의 기한을 사흘로 잡는다면, 적어도 내일까지는 저 첨탑까지 당도해야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가능성을 볼 터였다.
상대가 하탄인 만큼, 너무 시간을 지체할 수도. 그렇다고 너무 빠르게 이동할 수도 없었다.
그림자의 하탄, 가장 은밀한 5대 가문이었고, 가장 조용한 5대 가문이었다.
암살자와 정보수집을 주로 담당하는 곳이 하탄이었기에 함정같은 것에 통달했을 것이 분명했다.
절멸과 하탄, 어쩌면 시간을 지체했을 때 가장 힘든 곳은 이 하탄 일지도 모르리라.
잠시 기사들의 상태를 확인하던 카이셀은, 테오라드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진격하지. 여기 있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지 않은가.”
“주의할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메디브를 믿지. 기사들은 그런 거 잘 몰라.”
잠시 피식 웃은 케인이 한숨을 내쉬자, 카이셀은 마나를 끌어올리며 영역을 주변에 흩뿌렸다.
푸른 마나가 하늘에 날리며, 동시에 깃털이 사방에 뿌려진다.
푸른색의 깃털은 곧 하나의 칼날이 될지니. 이윽고 깃털에 닿은 흑마법사들의 시체가 잘게 부서지는 모습을 본 테오라드가 입술을 달싹였다.
“전력으로 가는 겁니까.”
“그래야지. 조금 불안하니까.”
그 말에 테오라드 또한 영역을 끌어올리자, 완전히 변한 주변의 기세에 케인은 조용히 서클을 공명시켰다.
펼쳐지는 마법진, 기사들을 사슬로 이어 흑마법이 지닌 어둠에 대해 약간의 방비를 끝낸 케인은 뒤로 물러나며 카이셀을 바라보았다.
후열에 자신이 있긴 하겠지만...과연 하탄이 어느 정도까지 준비했을 지는 자신조차 짐작할 수 없었으니까.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됐으면 좋으련만, 잠시 기사들의 사기를 둘러본 케인은,
아제스트와 함께 방어 마법을 준비하기 위해 다시금 후열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계속해서 나아간다. 목표는 공작저가 있는 곳까지 얼마 남지 않은 분계선.
하탄의 입장에서는 공작저로 오는 적들을 저지하기 위한 마지막 저지선이었으며,
제국군의 입장에서는 공작저로 향하는 유일한 길목이자 마지막 난관이나 다름없는 그곳을 반드시 함락해야만 했다.
허나, 이곳에 성벽은 없었다. 남은 것은 조금의 생명조차 찾아볼 수 없는 평원과 군세.
저 멀리 보이는 새까만 사람들의 물결을 발견한 카이셀이 헛웃음을 흘렸다.
왜 여태껏 아무런 방비조차 하지 않는 건지 의심스러웠건만, 이들이 노린 것이 바로 이것이었단 말인가.
주변을 어떤 방향을 둘러봐도 수만 명의 적이 보였다.
새까맣게 칠해진 사람의 물결은 마치 개미떼처럼 보이는 것도 같았다.
드넓은 평야. 이곳을 뚫고 나아갈 곳이라곤 고작해야 이곳까지 걸어온 길 하나.
저들을 무시하고 다시 돌아갈 확률을 따져보던 카이셀이 천천히 허리춤을 향해 손을 옮겼다.
“폐하께서 말씀하셨지. 우리는 아마 아무런 보상조차 없을 무모하고, 잔인한 싸움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검을 쥔 손이 잘게 떨렸다. 긴장하는 건가.
태어나 몇 번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었으나, 수 만에 이르는 적을 앞에 둔 자신은 조용히 떨고 있었다.
정확히는, 전율하고 있었다. 파스스 하늘에 솟구친 깃털이 바람을 타고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푸른 마나가 눈처럼 부서져 떨어지고 있었다.
점차 어두워지고 있는 하늘을 수놓아, 별처럼 보이는 빛을 향해 검을 들어 올린 카이셀이 말을 이어갔다.
“아무래도 지금이 그때인 것 같군.”
퇴로는 없다.
여기서 살아나가기 위해서 믿을 것이라곤 오직 손에 들린 검과 심장에 품은 마나뿐이란 걸 깨달은 기사들의 표정이 점차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갑주가 끼워진 손에 땀이 흐르고, 어떤 기사는 다리를 덜덜 떨며 이빨을 부딪히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도망치면 죽는 것을 알고 있기에, 여기서 도망치면. 죽는 것은 자신의 가족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누구도 그대들의 목숨을 보장하지 못한다. 허나 살고 싶으면, 죽을 각오로 싸워라.”
화르륵, 카이셀과 테오라드의 몸에 푸른 불길이 일었다.
서로의 영역이 주변을 감싸며, 상대의 전열을 담당하고 있던 흑마법사들을 그 불꽃에 타오르게 만들었다.
그 모습에 용기를 얻는다. 누군지도 모를 대장장이가 벼려낸 검이 피를 머금어 울린다.
발걸음이 하나되어 땅을 밟고, 그를 통한 진동이 심장박동과 어우러져 하나가 된다.
“살고 싶나?”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카이셀 또한, 그 말에 누가 대답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모두가 바라는 것쯤은 간단하게 알 수 있었다. 그 누가 죽고 싶겠는가.
악도, 선도. 결국엔 삶을 바란다. 그렇기에 검을 든다.
착검, 타오르는 푸른 불길이 검에 붙는다. 의지를 담아, 아직까지 충천하는 사기를 담아. 그렇게 기사들은 뛰기 시작했다.
“...진격하라.”
도합 9천, 이를 악문 기사들이 휘두르는 검은 다가오는 흑마법을 가르며 절멸을 향해 그 끝을 겨누었다.
인간의 수십 배만큼이나 거대한 골렘의 심장을 부수고,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흑마법사들의 손아귀를 찢어발긴다.
뛰는 심장의 맥동을 느끼며 아직 생존해있음을 느낀다.
흐르는 피가 아직 몸 안을 순환하고 있음에 검을 휘두른다.
이 순간 바라는 것은 제국의 안위도, 가족의 생환도 아닌, 오로지 자신 스스로의 생환(??).
이기적일 수도 있지만, 가장 원초적인 그 욕망에 기사들은 생을 불태운다.
살아 돌아간다.
반드시.
이 가망 없는 전투에서, 기사들이 품은 생각이란 모두 단순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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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배웅해주지 않으셔도 되는데 말입니다.”
“그냥 와봤어요. 저도 말 정도는 탈 줄 아니까요.”
아이린의 말에 에반은 옅게 웃으며 허리를 끌어안았다.
새하얀 말 위에 탄 아이린은 살짝 아쉽다는 듯 에반을 바라봤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이 전쟁에 자신이 참전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래도 태자 전하가 뭐라 하지는 않겠죠. 조금 늦긴 했지만, 이정도 전력이면 도움이 될 테니까요.”
“전부 카심 백작님의 무구를 착용한 겁니까?”
“수는 적지만, 아마 제국군 9천 보다 유용할 거예요. 흑마법사들을 상대로 한다면, 그 어떤 기사보다도 효과적일 테니까요. 물론 에반보다는 아니겠지만.”
자신의 뒤로 늘어진 기사들의 수를 헤아린 에반이 어색하게 웃었다.
자신이 기사들을 이끌게 될 줄이야. 비록 쌓인 명성 덕에 자신의 명령을 따라주곤 있으나,
그래도 1천이나 되는 기사를 이끄는 게 영 어울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또 다쳐서 오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가볍게 다녀오는 겁니다. 빌테인 보다 강한 사람도 없을 테니까요.”
이제는 아주 익숙하게, 에반의 가슴팍에 하얀 손수건을 걸어준 아이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손수건의 의미를 몰랐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무사히 돌아오도록 바라는 하나의 염원.
에반의 뺨에 입술을 맞춘 아이린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에반 또한 자신의 가슴팍에 매달린 손수건을 보곤,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다녀와요.”
그 뒤에 이런저런 말을 덧붙이고 싶었지만, 아이린은 그것을 다음으로 기약하며 손을 흔들었다.
에반의 뒤로 보이는 것은 저무는 태양. 그리고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첨탑.
기사들을 이끌고 가는 에반의 뒷모습에, 새하얀 불꽃이 치솟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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