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 개전 (2)
* * *
잠이 들 때면, 늘 반복되는 꿈이 하나 있었다.
매일매일 꾸며, 또한 조금씩 그 내용이 변해가는 꿈.
눈을 감으면 혹여 그 꿈을 꿀까 걱정하면서도, 점차 변해가는 내용에 이제는 호기심마저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허나 조금도 익숙하지 않은 내용이란,
도무지 이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조금도 알 수 없었으니까.
에반이라면 이 꿈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허나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얘기하기엔 참 얼토당토 없는 꿈이라,
결국 에반에게 얘기하지 못한 채 속으로 의문만 품을 따름이었다.
처음에 보이는 건 안개. 시꺼멓고, 조금의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안개 속에서 홀로 걷는다.
한 걸음, 두 걸음.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아 이 방향이 옳은 지조차 알 수 없는 곳에서 한참을 걷다보면,
어느덧 꽤나 익숙한 장소에 앉아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자연스럽게 상황에 녹아든다.
마치 원래부터 이 장소에 있던 것처럼, 자리에 앉아 서류를 살피는 행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이 상황이 이해하기 이전부터 완벽히 적응해버린 몸.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성인이었건만, 한참 낮아진 눈높이는 이 꿈 속에서 자신이 어려졌음을 깨닫게 만든다.
스르륵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손, 늘 그렇듯 서류를 살피는 눈에는 조금의 감정조차 비치지 않는다.
자신의 어릴 적, 지금 보면 한없이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무감한 표정.
한참 동안 탁자를 향하던 시선은 어느 순간 줄 끊어진 인형처럼 툭, 하고 멈췄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자신이 기억하는 것보다도 훨씬 어둡고 음울한 표정을 지은 크리스의 시선이 닿는다.
피부가 따끔거릴 만큼이나 강렬한 시선,
허나 그건 제게 향하는 분노라기 보다는스스로를 향한 원망과 슬픔에 가까웠다.
무엇에 그리 슬퍼하는가. 처음 이 꿈을 꾸었을 때만 하더라도 꽤나 놀랐겠지만,
자신은 이미 저 뒤에 이어질 말을 알고 있었다.
움직이지도 않는 손을 아주 약간이나마 꿈틀거리며, 마음 속으로 그 말을 들을 준비를 마친다.
늘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말이다.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말, 절대로,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
“...기사 견습생 하나가 죽었습니다. 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제가 수습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이름은 어떻게 되죠.”
특유의 중후한 목소리가 파르르 떨린다. 자책하는 이의 마음속에는 죄책감이 가득하여,
이어 자신을 향한 시선마저 떨어트린 크리스가 입을 열었다.
“에반 프리드...입니다.”
너무도 잘 아는, 익숙하다 못해 이제 제 일부가 되어버린 이름에 어깨가 움찔 떨린다.
물론 속마음일 뿐이었지만, 아무리 들어도 결코 적응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이 생동감이 넘치는 현장 속에서 들리는 이 말은 그 무엇보다도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다.
꿈의 시작부터 에반을 죽이고 시작하다니, 이 보다도 끔찍한 악몽이 또 있을까.
그래, 악몽이었다. 혈향도 흐르지 않는, 육편도 튀기지 않는,
허나 그 무엇보다도 아프고 끔찍한 환몽은 그렇게 시작하곤 했다.
에반 프리드가 죽었다. 에반이 죽었다.
그 말을 듣고도 무심하게 넘기는 어린 자신이란,
거울을 보는 것처럼 똑같이 생긴 자신이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넘기는 모습에 울화가 치민다.
고작 이 정도로 반응으로 끝날 일이 아닌데, 하지만 이 때의 자신은 에반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지 않았던가.
잠시 속으로 쓰게 웃다가, 다시금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의 물결 속에 몸을 맡긴다.
에반이 죽고, 그 다음.
거리를 거닐 때 따라오던 호위 기사는 난생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꽤나 어벙해보이는 얼굴, 자신의 호위인 만큼 그 실력은 괜찮겠지만...역시나, 습격한 암살자들에게 목숨을 잃는다.
암살자들의 몸을 살핀다. 지금의 행위는 꿈이 아닌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행해지는 것.
역시나, 작게 눈살을 찌푸린다. 절멸. 이때부터 자신을 노리고 있던 것일까.
쓰러진 호위 기사는 목을 움켜쥔 채 컥컥 대기 시작했다.
울컥거리며 쏟아지는 토혈을 잠시 바라보다가, 눈을 감는다. 혈향이 사라진다.
속이 울렁거릴 만큼이나 지독한 혈향이 사라지면, 시야에 보이는 것은 그 어떤 곳보다도 아름다운 정원.
수많은 영애들이 모여 차를 홀짝인다. 다과 하나를 집어 입에 털어놓고,
다시금 자신에게 시선을 보낸다. 이 다과회를 연 사람, 그리고 이 다과회에서 가장 조용한 사람.
로페나와 몰래 대화하고 있어야 할 에반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야, 이미 죽어 사라진 뒤였으니까. 더운 날씨에 시체는 썩어 부패했을 터였다.
허전한 마음, 괜스레 피어오르는 그 마음에 다즐링을 홀짝인다.
입안을 가득 메우는 향에 잠시 속을 진정시키면서도, 아직까지 제 옆에 서있는 로페나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아가씨, 저 잠시 멀리까지 다녀와도 괜찮을까요?”
“아니, 여기에 있으렴.”
차가운 대꾸에 로페나가 소매를 살짝 움켜쥔다.
체념한 듯, 옅게 숨을 내뱉은 로페나는 아쉬운 듯 쿠키가 담긴 바구니를 바라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에반이 없었다면...자신은 이렇게나 차가운 사람이었던 것일까.
작은 나비의 날갯짓보다도 미약했을 한 사람의 죽음이 수많은 것들을 뒤바뀐다.
이제는 즐길 수 없는 축제가, 수정궁의 무도회가 지나친다.
관심조차 없는 약혼자의 손을 잡은 채 무미건조한 춤을 추고,
아무도 없는 발코니에서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치운다.
아무도 없는, 고독한. 그리고 다시 겨울.
눈이 내리는 날의 광장은 여느 때보다 꽤 어수선했다.
로브를 뒤집어쓴 채 나타난 광인을 제압하기 위해 공작령의 기사단이 전부 출격했다.
그리고 3할을 잃는다. 스스로를 절멸이라 칭한 흑마법사,
그리고 퍼져나간 질병. 약조차 없는 질병은 공작령의 주민들에게 순식간에 번져나가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기사들에게까지 감염되곤 했다.
마나를 끌어올림에도 사라지지 않는 병.
제 아무리 강인한 기사라 한들 그것에 버티지 못하고 결국 쓰러지기 마련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던 몸을 움직여 복도를 거닌다.
활기라고는 하나조차 찾을 수 없는 공작저, 분명 이때쯤이면 로페나가 복도를 뛰어다니며 에반을 찾아다녔겠지만...
눈이 내리는 창 너머의 풍경은 새하얗기만 했다.
이 꿈속에서 보았던 그 침대처럼, 침대 위에 누워 눈을 감았던 한 아이처럼.
로페나는 죽었다. 반복되는 꿈속에서 단 한 번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피를 울컥 토하며, 온 몸에는 검은 반점이 잔뜩 난 채 죽은 아이.
전속 시녀 자리는 이후로 채워지지 않았다.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그 비워진 자리를 보며 조금이라도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로페나가 죽었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자신은, 도대체 무엇일까.
김이 서린 창문에 손가락이 스쳐지나간다.
살짝 흔적을 남겼다가도 다시 밖의 추위에 새하얗게 변해가는 창문.
고작해야 옅게 남은 얼룩만이 손가락이 지나갔음을 알려줄 뿐이었다.
지금의 기억도 마찬가지. 반복되는 꿈속에서 로페나와 에반의 죽음을 아는 것도 자신뿐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사실, 창문에 옅게 남은 흔적처럼 그것을 알아볼 사람이라고 해야 오직 자신 하나라니.
만약 이게 현실이었다면, 자신은 버틸 수 있었을까.
꿈에서 겪는 15살의 겨울. 평소보다 훨씬 삭막해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복도 너머에서 들려오는 비척거리는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저 너머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시녀, 리제의 얼굴은 퀭한 채 목에서는 거뭇한 반점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 너도 곧 있으면 죽겠구나.
“...누가 죽었느냐.”
이제는 일상적인 대화가 되어버린 말이 차갑다.
즐거운 삶이라는 것이 천박한 농담이 되어버린 이 공작령에서,
누가 죽었냐는 질문은 이제 인삿말에 불과했다.
그리고 리제의 입에서 들려온 말에 잠시 고개를 젖혔다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마지막 낙엽을 보며 한숨을 내쉰다.
크리스가 죽었다.
이 지긋지긋한 꿈속에서 깨어날 시간은, 도대체 언제쯤이면 자신에게 찾아오는 것일까.
천천히 눈을 감는다. 싸늘한 바람이 몸을 휘감아, 소름끼치는 한기가 등골에서부터 타고 흐르기 시작한다.
애석하게도, 아직 겨울은 한참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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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달라지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늘 달라지는 호위 기사,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은 채 어둠 속에 갇혀 사는 제 아버지.
전염병이 도는 공작저에는 더 이상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얼굴도 모를 어린 시녀 하나가 바닥에 넘어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황도에서 찾아온 성직자마저 고개를 저으니, 그저 질병의 손아귀가 제게 닿지 않음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오랜만이네요.”
“...가시죠. 별로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네요.”
“이번에 연회가”
“아델 로만.”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오자, 아델은 자신을 보곤 흠칫 표정을 굳힌다.
조금의 대화조차 섞고 싶지 않았다. 저 보랏빛 눈동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저 미래에서 보고 온지 오래였으니까.
“가세요. 더 이상의 대화는 없으니까.”
그렇게 끊긴 대화를 더 이상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미 저 눈에 애정이란 것이 조금도 섞여있지 않음을 알고 있지 않던가.
자신에게 애정을 품은 눈빛을 보이던 이는 이미 꿈속에서 죽어 사라진 뒤였다.
크리스도, 로페나도 없다. 리제도, 에반도 없다.
아무도 기댈 곳 없는 이 꿈은, 아이린 유리스라는 사람에게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게 꿈이라 망정이지, 아마 진즉에 미치지 않았을까.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다가오는 이들을 가시로 찌르고 베어,
마치 장미의 가시처럼 자신을 지키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저 멀리서 자신을 노려보는 시선은 분명 테라제인 백작의 딸이리라.
언제나 자신에게 친근하게 대했던 이가 이토록 노려보는 것에 웃음을 흘린다.
기쁘거나 즐거워서가 아닌, 그렇게 넘기지 않으면 차마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썩 좋은 감정은 아니었다. 이 꿈에서 깨어나고 싶은 마음만 점점 불어나가,
어느덧 새벽이면 늘 세이렌 근처를 거닐곤 한다.
잔잔한 호숫가에는 이제 파문조차 일지 않았다.
비가 오지 않으면, 모두 전염병에 죽어 저 호숫가의 물을 건드릴 생물조차 남지 않았으니까.
피아노를 감싸던 숲은 이제 없다. 숲속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피아노에 앉아,
자신을 향한 세레나데를 연주하던 남자는 없다.
그 사실이 못내 씁쓸해서, 한기가 담긴 숨결을 내뱉으며 조용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별이 외롭다는 에반의 말이 떠올랐다. 분명, 외로워 보이긴 했다.
저 캄캄한 어둠 속에 홀로 떠있는 별이 꼭 자신인 것만 같아서.
바람에 흩어지는 숨을 조용히 바라보기만 할 따름이었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이 지루한 반복이 3번을 이어짐에도 크게 변하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또 사람이 죽고, 또 죽어서 이젠 5대 가문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이나 유리스가 망가졌다는 것이 그나마 남은 사실일까.
담쟁이넝쿨이 잔뜩 휘감긴 벽면을 무심하게 쳐다본다.
새하얗게 칠해진 공작저의 벽은 현실의 것이었다. 현실과 똑같이 19살을 맞이한 봄,
공작저는 더 이상 예전의 위상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이나 무너져 있었다.
“가주님.”
그 말에 고개를 돌린다. 이제는 공작마저 저주에 잠식되어 쓰러진지 오래였으니,
유리스의 가주는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돌아왔다. 허나 운영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운영할 만큼의 무언가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나마 남은 것이라 해봐야 제게 기어코 붙어있는 약혼자라 해야 할까.
반지도, 서약도 없이 그저 구두로만 맺어진 약혼이 무어라고 이렇게 남아있는지.
뒤에 서있는 로만의 사람에게 향한 시선을 거둔다.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
그냥 눈을 감고 조금 기다리보면, 어느새 시간이 흘러 다음 사건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절멸이 발호(??)했다. 유리스의 가주였던 가롯 유리스가 저주에 휘말려 죽고,
빈껍데기만 남은 유리스를 자신이 온전히 물려받았다. 황태자가 절멸에 대한 토벌을 선언했다.
익스퍼트였던 황태자가 수많은 절멸들과 싸우며 마스터에 다다랐다.
제국에 단 둘뿐인 마스터, 그 엄청난 신위를 발휘하여 수많은 흑마법사들을 죽이고,
스칼렛 테라제인이라는 아름다운 여인과 동화같은 사랑이야기 또한 그려냈다.
시골에서 태어난 순박한 여인과, 수많은 흑마법사들을 죽이며 피폐해진 청년.
두 사람은 마치 운명처럼 만나 운명처럼 이어졌고,
어느 순간부터 악녀라 낙인찍힌 자신과는 달리 모든 사람의 호의를 얻으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어색하지 않은가. 갑작스레 나타난 여인치고는, 이상하리만치 많은 사람들의 애정을 얻는 것이.
하여 끊어내고자 했다. 아무리 보아도 수상했으니까.
이곳이 꿈속이라는 것과는 별개로,
스칼렛 테라제인이라는 여인이 보이는 행보는 마치 누군가와 짜고 치는 것처럼 너무도 순조로워 보였다.
만약 그 짜고 치는 누군가가 절멸이라면, 막아야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철혈을 운운하며 황태자에게 어떻게든 떨어트리려 노력했다.
그런데.
“아이린 유리스, 반역 혐의로 즉결 처분하라는 황명이다.”
그 끝이 이것이라는 사실에 아이린은 조용히 웃었다. 목에 닿은 칼날이 차가웠다.
섬뜩한 기세를 흩뿌리는 황태자의 눈에는 놀라울 만큼이나 아무런 호의조차 없어서,
다시금 이것이 꿈이라는 걸 깨달은 아이린이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델 로만, 하탄의 적자, 그리고 황태자.
저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는 스칼렛 테라제인까지.
자신의 질투가 꽤나 심했는지, 꿈에서 마저 악역으로 나타나는 스칼렛의 모습을 본 아이린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 움찔거리는 병사들은 아델 로만이 손으로 막아세웠다.
마지막 동정인지, 아니면 연민인지. 중요한 건 저들이 현실에서 죽어 없어졌다는 소리이리라.
만약 에반이 로만을 토벌하지 못했다면, 이런 현실이 자신에게 찾아왔을지도 몰랐다.
쐐애액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칼을 보며 생각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미래인가, 아니면 그저 환몽에 불과한 걸까.
눈을 감았고, 이어 목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끝나는 꿈, 조용히 제 눈을 비추는 선명한 햇빛을 바라보며 그렇게 잠에서 깨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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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은땀으로 잔뜩 젖은 몸, 그 옆에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에반이 있었다.
햇빛이 살짝 비치는 방 안에서 선명하게 보이는 그 녹안에 피식 웃자,
에반은 그런 아이린을 걱정스레 바라보며 몸으로 끌어안았다.
“식은땀을 너무 흘리신 거 아닙니까.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냐는 이 말이 왜 이리 안심이 되는 건지, 꼭 5년 만에 듣는 말에 아이린은 조용히 웃었다.
꿈의 시작에서 에반은 죽었으니, 그 꿈에서 아무도 제게 괜찮냐는 한 마디를 던지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렇게 죽는 것까지 꿈을 꾼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앞으로도 이렇게 죽는 꿈을 계속 꾼다면 조금 섬뜩하지 않을까.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아낸 아이린이 에반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쿵쿵 들려오는 심장 소리를 느끼면서, 제 팔을 감싸 안는 체온에 몸을 비벼댄다.
속옷 하나 없는 탓에 가슴이 그대로 에반에게 닿지만...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악몽에서 겨우 깨어난 여인이 유일하게 누릴 수 있는 낙이 이것이니,
한참 동안 에반에게 붙어있던 아이린이 천천히 에반의 얼굴을 살폈다.
“안 죽었네요.”
“...설마 죽었겠습니까? 먼저 쓰러지긴 했습니다만...그냥 피곤했을 뿐입니다.”
“맨날 피곤하다고 먼저 쓰러지고, 남자가 그래도 돼요?”
“아가씨가 너무한 겁니다. 도대체 그런 걸 어디서 배우신 건지...”
“책에서요.”
책이라, 에반이 그 말에 쓰게 웃자 아이린은 배시시 웃으며 에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얼굴에 닿는 따스한 햇살, 그리고 명백하게 느껴지는 이 체온.
아마도 모든 것은 그저 악몽이었을 뿐이라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악몽.
완전히 달라질 현실과 대비되는, 그런 환상이었을 뿐이라고. 아이린은 굳게 믿었다.
그날 이후로, 아이린은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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