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 개전 (1)
* * *
“개기월식까지 앞으로 한 달 하고도 보름.”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에 용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황실의 상징이자 에반젤리움을 상징하는 용.
수 천 명의 기사가 나열한 광장에는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 기사들의 눈동자에 서린 것은 그 무엇보다도 차가운 분노였으니.
그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지켜볼 수만은 없다.”
에반 프리드라는 개인에게 의존했다. 황실 기사단의 단장인 테오라드와 황태자에게 의지했다.
허나, 더 이상 불어가는 절멸을 그 셋에게 전부 처리하라고 한 뒤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황태자 대신 전면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무려 20년 만의 일이었기에,
어느 때보다도 사기가 충천한 기사들이 황제를 향해 시선을 두었다.
금실로 수놓아진 망토가 펄럭였다. 그 안에 입은 것은 붉은 색과 흰색이 뒤섞인 제복,
그 어떤 옷보다도 화려했으며. 그 어떤 옷보다도 휘황찬란한 옷이 태양빛을 받아 사방에 빛을 흩뿌렸다.
황제의 위엄, 제국의 가장 지고한 자이자, 태양 아래 가장 존엄한 이가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수 천 명. 익스퍼트에 오른 기사 중 황실이 소유한 이들을 전부 불렀지만...
이들이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결국 모든 것의 끝을 알리는 것은 마스터들이 할 일이었다.
허나, 이 기사들이 앞으로 출진함이 중요했다.
절멸과의 전면전, 수십 년의 시간이 흘러 전력을 겨우 복귀한 제국이 다시금 일척간두 위에 섰다.
넘어져 완전히 무너지느냐, 아니면 균형을 잡고 다시 일어서느냐.
그 문제를 생각하던 황제는, 이윽고 허리춤에 있는 검을 쥐며 입을 열었다.
“에반젤리움의 광영을 위해 목숨을 바치란 말은 하지 않겠다. 욕심이고, 만용이다. 절멸이란 상대는 그리 함부로 싸울 상대가 아니다. 내 이 제국의 황제이고, 자신을 짐이라 칭하는 유일한 존재지만. 지금만큼은 그대들에게 쉬이 제국을 위해 싸워달라 할 수가 없겠군. 흑마법사들은 간악하다. 평소에 상대하던 몬스터처럼 정정당당하게 맞서 싸워주는 존재가 아닌, 사람의 생명을 벌레보다도 하찮게 여기는 것이 그들이다.”
좌중이 침묵에 잠겼다. 황제의 말이 끝난 직후,
찬물이 끼얹어진 듯한 분위기에 황제는 피식 웃으며 가슴께에 주먹을 가져다 대었다.
“생명을 하찮게 여겨 너희들의 가족들을 겁탈하고 죽이는 존재들이 절멸이다. 마을은 불타고, 그대들이 소중히 여기는 무수한 것들이 모래처럼 흩어져 바스라질 것이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돌아와 봤자 그대들을 반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오직 허무만을 느끼겠지. 허나.”
말을 잠시 끊은 황제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잠시 태양을 가렸던 뭉게구름이 사라져, 태양빛이 자신에게 곧게 향하고 있었다.
“그건 그대들이 패배했을 때의 이야기겠지.”
패배란 것은 언제나 찾아올 수 있는 존재였다.
승부가 있는 한 그 어떤 것보다도 가까이 있는 존재였고, 짜릿한 승리 뒤에는 늘 통렬한 패배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쿵 심장이 뛴다. 이 순간 살아있음을 실감하게 하는 박동이. 황제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제국의 황제가 되어 제국을 위해 싸우지 말아달라니,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겠는가.
허나 이건, 단지 모든 이들을 절박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가장 지고한 존재였기에 할 수 있는 방법. 쿵 황제가 가슴팍을 주먹으로 두드리자 동시에 기사들이 발을 굴렀다.
수십, 수백, 수천의 발걸음이 하나가 되어 울린다.
퍼지는 진동이 하늘에 닿아, 작게 떨린 구름이 흩어져 완전히 푸른 창천(??)을 드러내었다.
“지킬 사람이 있으면, 지킬 사람을 위해서 싸워라. 지킬 사람이 없고 오직 명예만이 남았다면, 그 명예를 위해 싸워라. 이전과는 다르다. 패배하면 끝이다. 제국이 망가지고, 모든 것이 무너져 남는 것은 피로 물든 강뿐일 터. 이기면 너희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평생토록 사람들에게 경의의 시선을 받을 명예뿐이다.”
명예, 기사들의 표정이 점차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뒤는 없다. 물러설 곳이 없다.
절박한 황제의 외침이었으며, 그 사명을 자신에게 맡김에 기사들은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거친 숨소리에 희열이 섞였다.
“무모하다. 그리고 위험하지. 누구도 너희들의 생존을 보장해줄 수 없다. 그대들 중 누군가는 죽을 것이고, 누군가는 다칠 것이다. 너희들의 옆에 있는 누군가는 죽을지도 모른다. 당장 지금 그곳에 서있는 너희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 제국도, 심지어 짐조차 그대들의 생환을 보장할 수 없다."
기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법사들은 강했다.
익스퍼트 개인이 흑마법사를 이기는 것은 정말 희귀한 일로,
용혈을 타고난 에반 프리드가 아니었더라면 흑마법사를 처리하기 위해 많은 기사들이 희생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도망칠 수 있겠는가.
이 자리에서 도망친다 한들 누구도 겁쟁이라 놀리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황제가 단언할 만큼 위험한 것이, 절멸과 싸우는 것 그 자체 였으니까.
하지만 그 어떤 기사도 발걸음을 떼지 않았다.
서로의 심장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한 그 광장에서, 기사들은 모두 황제가 입을 열 때까지 눈을 부릅뜰 따름이었다.
명예, 승리 이후에 겪을 기쁨. 설령 아무런 보상이 없더라도 좋았다.
천년 동안 대륙에서 군림했던 제국이 위태로운 이 때에,
자신의 힘으로 이 제국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은 기사들의 심장을 미친 듯이 뛰도록 만들고 있었다.
빠르게 흐르는 혈류가 흥분을 일으켰다. 온몸에 흐르는 피와 마력.
기사들의 표정을 본 황제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미소를 지운 뒤, 조금 더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에도 싸우겠는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들 모두 결심한 뒤였다.
제국을 위해서 아닌, 그저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이자 물욕. 그것을 자극한 황제는 조금 솔직하게 웃으며 검을 하늘을 향해 들어올렸다.
“그렇다면, 출진하라."
태양은 누구의 위에도 평등하게 떠있으니, 기사들은 저마다 가슴에 희망을 하나씩 품었다.
이윽고 터지는 함성이, 황도 에반젤리움 일대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개기월식까지 한 달 하고도 보름 남은 어느 날, 절멸과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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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입니다.”
에반이 입을 열었다. 원래의 역사보다 한참은 빨리 시작된 전쟁,
오랜 시간을 끌 수는 없었기에, 에반 또한 출진을 준비 중이었다.
가장 먼저 타격할 곳은 당연하게도 하탄, 로만 토벌과는 달리 수많은 인원이 동원 될 터였고.
이번엔 자신 또한 마스터였기에 꽤 수월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불안하십니까?”
“...티 나요?”
“네, 무척이나.”
흐으음. 침음을 삼킨 아이린은 에반을 슬쩍 바라보다 이윽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말은 안 했지만, 불안한 건 여전하지 않은가.
황제가 절멸을 향해 전면전을 선포한 것은, 순전히 자신의 세력이 그를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절멸을 완전히 끝내고 싶다는 에반의 말과, 결국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자신의 의지.
그리하여 이렇게 전면전이 시작되긴 했지만, 역시나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차라리 자신도 검을 쥐고 싸운다면 어떻게 될까.
하지만 그렇게 싸우기엔, 이미 조금 부풀어 오른 배가 마음에 걸렸다.
“아버지는 요즘 무어라 안 하죠?”
“설마 그러겠습니까. 그렇게까지 혼나셨는데, 저를 볼 때마다 그냥 혀만 차고 끝날 뿐입니다.”
“혀를 차요?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진짜.”
아이린의 말에 에반은 흐뭇하게 웃었다.
며칠 전 공작, 아니. 이제는 장인어른이라 부르는 가롯 유리스와의 대답이 얼마나 불편했던가.
하마터면 얘기 도중에 기절할 뻔 했으니, 그 때의 기억은 떠올리기만 하더라도 심장이 절로 두근거렸다.
물론 자신이 잘못한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안전한 날이라 했던 것도 아이린이었고,
한 번으로 끝내자고 했던 것을 무시한 것도 아이린이었고,
자신을 침대에 넘어트린 것도 아이린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과정이 전부 지나간 뒤 나타난 것이 자신에게 조금 위험했을 뿐이었다.
혼전 임신, 그걸 장인어른에게 숨기고, 심지어 첫 임신에 쌍둥이.
아마 자신이 가롯 유리스였다면 아이린의 연인이고 뭐고 칼춤을 추지 않았을까.
물론 공작의 분노는 채 하루를 가지 못했다.
시끄럽다며 인상을 찌푸린 채 나타난 아이린이 공작을 몇 시간 동안 타박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가두시려고 그러는 건가요, 아버지?
그 말을 들은 공작의 표정이란.
새하얗게 질리다 못해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리던 공작의 모습을 떠올린 에반은 쓰게 웃으며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은 부녀였다. 언제쯤이면 서로의 앙금을 전부 털어낼 수 있을까.
어쩌면 평생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아이가 태어나면...할아버지 노릇은 잘 해내지 않을까.
“그나저나, 엘프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아, 엘프.”
엘프를 떠올린 아이린은 에반의 얼굴을 살짝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흔히 미(美)의 종족이라 알려진 엘프였지만, 막상 만난 엘프 남성은 에반보다 한참 못난 편이었다.
콩깍지가 씌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로페나 또한 생각보다 별로라 하지 않았던가.
엘프 여성들이 에반을 유혹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에 빠진 표정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린 에반의 모습에 살짝 웃은 아이린은,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아마도 곧 한 번 만나 협상을 해볼 것 같아요. 이번엔 그냥 먼발치에서 지켜본 것이 전부지만, 이제 겨울이 깊어지면 그들도 숲에서 계속 지낼 수는 없으니까요. 내가 직접 처리해야겠죠. 그대를 데리고.”
“세계수를 만나는 겁니까.”
그 말에 에반은 조용히 창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베르뎅 산 너머로 혼자 우뚝 솟은 거대한 나무. 세계수의 묘목이라 불리는 엘드랏실,
저 곳이라면 요즘 들어 되살아나는 기억의 정체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아마 협상이 있다면 하탄 토벌 이후의 일이겠지만...
세계수를 하루 빨리 보고 싶다. 에반은 그 생각을 하며 조용히 차를 홀짝였다.
“그런데, 세계수를 만나고 싶어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냥...어쩐지 세계수를 꼭 만나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요.”
“그렇게 보입니까?”
여기서 자신이 사실 에반 프리드가 아니라,
피아니스트 김수현이 에반 프리드라는 몸에 빙의한 거라 말하면 무슨 대답이 돌아올까.
자신이 생각해도 퍽 웃긴 터라, 에반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신기해서 그런 겁니다. 저렇게 큰 나무가 세계수의 묘목이라니, 만약 진짜 세계수가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면 어떤 느낌일까. 하고요.”
“아이 같네요.”
“젖을 먹기엔 너무 큰 아이긴 하죠.”
그러자 아이린의 얼굴이 확 붉어져서, 에반은 의아함을 느끼며 아이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기 가슴께를 슬쩍 가린 아이린이 눈치를 힐끔 쳐다보자,
에반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어깨를 으쓱일 따름이었다.
“...아직 젖은 안 나오는데.”
“......큽.”
입술을 씹은 에반이 애써 웃음을 참아내었다.
목에서부터 올라오는 열기가 얼굴 전체를 덮어서,
천천히 호흡을 조절한 에반이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아이린의 얼굴을 손가락 사이로 힐끔 쳐다보았다.
붉어진 뺨을 손으로 덮으며, 고개를 푹 숙인 아이린의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아니, 그 전에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창문을 연 에반이 바람을 쐬며 뜨겁게 달아오른 뺨을 조용히 식혔다.
“못 들은 걸로, 예. 전 방금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네. 저도 아무 말 안 했어요. 그냥 농담 삼아서, 그냥 한 번 말해본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아이린의 심장 쿵쿵 뛰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이 나온 걸까. 아기가 먹을 그런 것을 에반에게
이어진 망상이 끝에 달하자, 기어코 완전히 붉게 물든 얼굴을 한 아이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손으로 부채질을 해도 사라지지 않는 열기에 방에 가득찬 열은 마치 한여름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임신을 한 탓일까,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망상에 아이린이 입술을 짓씹었다.
자신이 나쁜 게 아니라, 그냥 임신을 한 탓에 이상해진 것뿐이라고.
애써 생각을 고친 아이린이 다시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에반을 바라보았다.
혹시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하지만 에반은 책에서 봤던 내용을 떠올리며 아이린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임신 초기,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었다...
“하아.”
에반은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아까의 그 말 때문일까,
속살이 훤히 비치는 보라색의 네글리제가 유독 눈에 띄는 것만 같았다.
목을 타고 내려오는 새하얀 피부, 그리고 그 아래 옷에 가려져 살짝 드러난 쇄골.
잠시 침음을 삼켰다가, 자신을 힐끔 쳐다보는 아이린의 시선 또한 제 상체에 있음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어디를 보시는 겁니까.”
“아, 안 봤어요.”
“...참기 힘드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 말에 아이린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아랫배가 당기는 탓에 잠시 배를 매만지면서,
에반의 눈치를 보며 슬쩍 뺨을 붉혔다. 참기 힘들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것을 깨닫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난 에반이 그대로 아이린의 입술을 탐했다.
“아직 낮인데, 읍.”
입술 사이에 떨어지는 하얀 실타래를 닦아낸 에반은,
조용히 웃으며 아이린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손가락으로 턱을 간질이며,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춧자락을 하나씩 푸는 모습에 아이린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였다.
“...그래서, 싫어?”
평소라면 하지 않을 반말에 움찔 몸을 떨면서도, 아이린은 멍하니 에반의 시선을 마주했다.
사람을 빨아들일 것만 같은 녹안, 단추가 풀린 셔츠 안 쪽에 보이는 가슴팍을 쳐다보다가.
비틀거리는 다리로 겨우 일어선 아이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 일찍...잘까요?”
창문을 가리던 커튼이 닫히고, 방문이 덜컥 거리는 소리와 함께 잠겼다.
아무런 대답도, 아무런 신호도 없었건만. 한 겨울, 아직 해가 아직 환하게 비추고 있는 대낮.
탁
불이 꺼지는 소리와 함께, 아이린의 방이 어둠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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