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16화 (116/181)

〈 116화 〉 순조롭게 (6)

* * *

꿈을 꿀 때마다 새로운 기억이 되살아난다.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허나 마치 이전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 기억들.

처음에는 스쳐가듯 떠오르는 기억들이었으나,

이제는 매일 밤마다 새로이 자리 잡는 기억에 에반은 혼란마저 느끼고 있었다.

빙의 이전의 기억이 이제 와서 떠오르는 이유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차라리 빙의 직후에 떠올랐다면 빙의의 과정이라 해석했을 터였다.

하지만 4년이 흘러, 이제 막 원작 시점에 다다르는 지금 기억이 떠오르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은 에반이 눈썹을 찡그렸다.

완전히 사라졌던 14년의 기억이 다시금 머릿속으로 들어오며 생긴 일종의 과부하,

관자놀이를 꾹 누르자 통증은 잠시 사라졌지만. 여전히 남은 기억들이 뒤섞여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내가 왜 죽을상을 하고 있던 건지는 알 것 같네.’

크리스 경이 계속 얘기했던, 빙의하기 이전의 에반 프리드가 혼란스러워 했던 이유라 하면 역시 그 편지 때문이었다.

용언에 대해 해석하지는 못했지만, 몸속의 용혈 덕에 완전히 세뇌되지 않아 정신 자체가 뒤틀렸으니.

아마 자신이 빙의하는 시점에서 이미 정신이 붕괴된 상태가 아니었을까.

원작에서 나오지 않았던 이유도 아마 정신이 붕괴된 탓이리라.

되살아난 기억 덕에 알지 못했던 여러 것들에 대해 실마리를 얻을 수는 있었지만,

왜 기억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그저 추측만 할 따름이었다.

마치 자신이 원래부터 에반 프리드였던 것처럼...이렇게 자연스럽게 남은 기억이 에반에게는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한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자신에게 좋은 부모는 그다지 인연이 없다는 것이 아닐까.

조용히 웃은 에반은 허공을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프리드, 라.”

되살아난 기억 속에서는 어릴 적의 에반 프리드 또한 등장했다.

흐릿한 얼굴을 지닌 아버지를 따라 검을 휘두르던, 그리고 마나를 느끼고 처음 크리스 경을 만난 날까지.

지금의 얼굴보다 훨씬 젊은 크리스 경은, 자신을 보며 꽤나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린 에반 프리드를 자신이라 칭해야 할지, 아니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칭해야 할지조차 헷갈리는 것이 지금 심정이라.

에반은 고개를 한 차례 젓곤 그대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달력을 넘기자 보이는 숫자가 ‘11’, 벌써 11월이라니. 아이린이 회임한 지도 벌써 8주차에 접어들었다.

아직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지만,

조금 부풀어 오른 것처럼도 보이는 탓에 여러모로 신경이 쓰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앞으로 8개월, 그리고 붉은 달이 뜨기까지 2개월.

이제 겨우 끝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끝에 과연 도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할 수 있을까.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에반은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 머리가 아플 때는 아이린을 보는 것이 가장 좋을 터였다.

#

다즐링 대신 따듯한 물을, 검술을 다루는 것 대신 정원을 산책하는 것은 어느덧 아이린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었다.

이제 자신에게 내려오는 업무도 훨씬 적어졌으니, 그나마 남은 고민이라 해봤자 자신의 아버지에게 회임 사실을 알리는 것.

자신에게 무어라 그런다면 그야말로 양심이 없는, 일말의 용서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겠지만.

에반에게 무어라 할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요즘 들어 에반을 자주 부르는 게 설마 알아차리고 타박하는 것은 아닐까.

허나 시녀들은 공작에게 아직 입 하나 뻥긋 한 적이 없다고 했으니,

언젠가는 이야기 할 내용이었지만...과연 제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것을 떠올린 아이린은 긴 눈썹을 접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아가씨, 모임에서 전해져온 서신인데요.”

서신을 받은 아이린은 이윽고 그 내용을 확인하곤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모임이라 하는 것은 아이린이 이전부터 구축해왔던 하나의 파벌,

직접 움직일 수 없는 아이린에게 정보를 가져다주고, 아이린은 그런 정보를 모아 파벌의 행동 방향을 정해주며 이끌어왔다.

유리스의 차기 가주이자, 현 제국 4대 가문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것이 유리스였기에 아이린이 수장이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스럽게 커지는 파벌은 어느새 제국 전역에서 발생하는 정보를 손쉽게 수집할 수 있을 만큼이나 불어있었다.

자신이 에반처럼 직접 검을 들고 움직일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전처럼 홑몸일 때면 몰라도, 이제는 홑몸이 아니지 않던가.

에반 또한 자신이 움직이는 것을 그리 원치 않을테니, 아이린은 후방에서 에반을 지원하는 것을 택했다.

“테라제인이 움직였다고.”

서신에 적힌 내용은 다분히 문제가 될 소지가 넘쳐나는 내용이었다.

황제 또한 주시하고 있던 테라제인이 움직일 기미를 보인다는 이야기.

개기 월식이 2달 남은 시점에서 그들이 움직였다는 건, 결코 좋은 소식으로 보기 힘든 사실이었다.

‘이제 와서 움직였다는 건...그들이 말하는 계획을 그대로 결행할 생각이라는 걸까.’

황태자와 스칼렛의 사이가 꽤 가까워진 지금, 그들이 스칼렛을 이용할 거라 봐도 무방했지만.

아이린은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직 남은 시간은 두 달, 당장은 테라제인보다 하탄에 집중하는 것이 좋으리라.

하탄에 대한 것에 대해 적혀있는 것은 꽤 적었지만, 오히려 그것만으로도 절멸과 접촉했을지도 모른다는 증거가 되었다.

제국의 정보 대부분을 담당하는 하탄이 외부로 유출되는 정보를 제한하고 있단 사실은 곧, 제국의 뜻에 반(反)한다는 뜻이었으니까.

아마 이번 달 내로 하탄 토벌이 시작되지 않을까.

에반이 그 토벌에 참여하는 건 당연했지만, 이번에는 아이린 나름대로 토벌에 도움을 줄 생각이었다.

“로페나, 크리스는 지금 뭘 하고 있지?”

“아가씨가 부탁한 걸 하고 계실 거예요. 사람들을 추려내는 데 조금 걸릴 거 같다고 하셨어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익스퍼트 이상의 기사로 꾸려진 특수 기사단.

유리스 내에서도 정예라 불릴 법한 이들이라면, 카심 백작의 도움을 받는다는 가정 하에 흑마법사에게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을 터였다.

이미 몇 차례 검증을 시도하기도 했으니, 흑마법사에게 특별한 힘을 지니는 ‘무구’에 대한 서류를 확인한 아이린의 눈이 곱게 휘었다.

아마 이 무구가 자주 사용될 일은 없을 것이었다. 아니, 절대로 자주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올해가 넘어가고도 이 무구가 사용될 일이 생긴다면...아마 이래저래 문제가 되지 않을까.

아이린은 계속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에반이 마스터가 된 이후로는 에반이 크게 다칠 거란 불안감이 많이 사라지긴 했으나,

빌테인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어떤 존재에 대한 공포가 마음 한 구석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었다.

‘고룡 마베트.’

먼 옛날 알라르가 직접 아스칼론으로 베었다는 용이지만,

절멸이 그것을 부활 시킨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막연한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뱃속에 있는 새 생명 때문일까, 아니면. 그 외의 어떤 연유로 불안감이 생기는 것일까.

잠시 턱을 괸 채 허공을 응시하던 아이린은, 복도 너머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희미하게나마 화색을 띠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매만지고,

매마른 입술을 핥아 윤기가 나게 만든 아이린이 문을 바라보자 이윽고 익숙한 얼굴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늘 변하지 않는 녹빛의 눈을 본 아이린은 옅게 미소 지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은 저 눈동자에 서린 따스함이 아닐까.

방금까지 느꼈던 불안감이 완전히 흩어져 사라지는 감각에 아이린이 팔을 벌리자,

에반은 그대로 아이린의 품에 안기며 배에 귀를 가져다 댔다.

“아직 아무 소리도 안 들릴 텐데요.”

“그냥, 이제는 이렇게 확인하는 게 버릇이 됐으니까요.”

아직 부풀지 않은 배였지만, 이 배가 부풀기 시작한다면...

에반은 아직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배에 귀를 가져다 댄 채 조용히 미소 지었다.

쿵쿵­ 저 안에서 언젠가 심장 소리가 들리는 날이 올까.

아직 출산까지 8개월이란 시간이 남았지만, 순식간에 흘러가는 시간은 아마도 눈 깜짝할 새에 출산일에 다다를지도 몰랐다.

아이린의 품에서 떨어진 에반은 책상에 놓인 서류를 보곤 눈을 가늘게 떴다.

아주 잠깐 스쳐지나간 내용이었으나, 아이린이 구상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흑마법사를 상대로 효과적인 무구라. 아마도 이제는 자신의 소유가 된 아스칼론 때문이겠지만,

이런 게 벌써 구상되고 있다는 것이 퍽 놀라울 따름이었다.

원작에서도 등장한 것이 이 대(?)흑마법사 전에서 효과적인 무구였으니까.

그때에도 황태자가 지닌 아스칼론을 모델로 만들었던 것 같은데,

원작 전개가 아예 달라진 지금도 이런 것이 똑같다는 사실이 퍽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효과가 꽤 있을 터였다. 일반적인 익스퍼트로 이루어진 기사단이 흑마법사를 상대로 충분히 싸울 수 있을 만큼이나.

원작의 후반부에서 흑마법사 토벌이 순식간에 진척되었던 이유가 바로 그 무구가 아니던가.

이제는 순전히 마스터의 힘에 기대어 토벌하지 않아도 되니,

에반으로서는 무구가 제작되는 것을 꽤나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들어 꽤 바쁘신 것 같습니다. 그 ‘모임’이라는 걸 직접 운영하신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신 겁니까?”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요. 에반에게 조금 도움이 되고 싶기도 하고, 또 언젠가는 내가 유리스의 가주가 될 테니. 미리 준비해두는 거죠.”

아이린의 말을 들은 에반은 흐뭇하게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아이린이 스스로 사교계에 발을 들여, 이렇게 큰 세력을 만들어 낼 거라곤 상상도 못했건만.

어느덧 사교계의 거물이 된 자신의 연인을 보는 에반의 눈에는 애정이 잔뜩 서려있었다.

허나 언제까지고 아이린 만을 쳐다볼 수는 없으니, 이윽고 시선을 돌린 에반의 눈에 창문 밖 풍경이 담겼다.

이제는 만연한 겨울이라 할 법한, 북부의 설원.

삭막한 나무 위로 쌓인 눈이 떨어져,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새하얀 눈에 자그마한 눈더미가 생겨나고 있었다.

고작해야 11월에 막 들었을 뿐인데 눈이 저렇게 쌓이다니,

너무 일찍 찾아온 북부의 겨울은 여러모로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엘프들이 서서히 내려오고 있다 들었습니다. 아직 문제는 없는 겁니까?”

날이 추워짐에 따라 점차 인간과 접촉이 잦아지는 이종족들.

아무리 인간과 우호적인 이종족이라지만, 자신의 영역이 침범당하는 것에 예민한 건 인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엘프라서 망정이지, 오크나 오우거들이 내려오기 시작하면 그건 또다시 이종족과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겨울은 숲의 생기를 빼앗는 계절이었다.

물론 엘프의 마법 덕에 북부에도 울창한 숲이 남아있긴 했으나 그건 순전히 일부일 뿐,

평소보다 훨씬 일찍 찾아온 겨울에 잦아지는 엘프와의 접촉은 유리스가 최근 겪는 문제 중 하나였다.

“글쎄요. 어떻게 처리하려고 노력은 하고 있는데...아무래도 엘프와 직접 대화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아요.”

“어쩌면 세계수를 보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세계수 엘드랏실, 엘프의 상징이자 엘프의 수장들이 거주하는 곳들을 상징하는 말이었으니.

태초에 존재하던 거대한 세계수에서 갈라져 나온 일종의 새싹들이라지만 그것 또한 인간의 상상하는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은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엘프 들의 수장은 그 안에서 평생을 살아간다.

인간이 그들과 협상하기 위해선 오로지 세계수를 직접 찾아가는 것뿐이란 걸 떠올린 아이린이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이 절멸 토벌에 합류하면 좋을 텐데요.”

거주지를 주는 대신 절멸 토벌에 힘을 보태달라고 요청한다.

정령과 소통하는 유일한 존재가 엘프인 만큼, 흑마법사를 상대하는 것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엘프의 협력이었다.

이미 드워프 야장인 카심과 제라드가 이 일에 협력하고 있으니 어쩌면 엘프의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생각처럼 될 확률이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아이린은 그 얕은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보고자 했다.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국이 절멸에게 패망한다면, 가장 피해를 받을 이들이 그들일 테니까요.”

“그래도 엘프는 아직 절멸에게 받은 피해가 없긴 하죠. 흑마법사들은 의도적으로 자연을 해치는 것을 피하고 있으니, 어쩌면 엘프들은 그들을 상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절멸이 자연을 해치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는 건 에반 또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계수는 만나는 게 좋지 않을까.

엘프의 협력을 이끄는 것은 둘째치고, 에반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본질을 꿰뚫어본다는 세계수 그 자체였다.

요즘 들어 계속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뒤섞이는 빙의 이전의 기억들.

마치 자신이 애초에 에반 프리드였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기억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었다.

이게 빙의가 아니라면, 자신이 이전에 읽었던 소설책은 무엇이란 말인가.

엘프들이 신성시하는 세계수라면, 자신의 존재를 정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에반이 엘프에 대한 얘기를 꺼낸 것은 그런 이유였다.

어쩌면 엘프들을 따라 엘드랏실로 향할 수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물론 이 겨울이 조금 더 깊어져야 만날 가능성이 생기겠지만...그래도 놓칠 수 없는 가능성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직 아무 말 없는 거죠?”

아이린의 물음에 에반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린의 회임이 한달 지난 지금까지 공작이 그 사실을 모르는 게 조금 불쌍하긴 했지만,

시녀들이나 기사들이나 스스로 그 이야기를 발설하지 않는다는 것이 퍽 신기할 따름이었다.

최근 들어 절멸로 바쁠 공작일 테니 어쩌면 모르는 것이 당연한 걸까.

로페나가 가져온 냉수를 들이마신 에반이 쓰게 웃었다.

공작이 과연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반응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불같이 화를 낼 것 같기도 하면서, 어쩌면 아이린의 눈치를 보곤 그냥 조용히 넘어갈 것 같기도 했다.

언젠가는 얘기해야할 텐데...이걸 언제 얘기해야 할까.

“만약 아버지가 그대에게 뭐라 할 것 같으면 나한테 말해요. 내가 따로 가서 무어라 할 테니까.”

“...굳이 그러시지 않아도 될 겁니다. 아마 상처만 받으실 테니까요.”

예전의 일을 아직 후회하고 있는 공작이 아이린에게 타박까지 듣는다면, 자신을 붙잡고 또 술을 마실지도 몰랐다.

요즘 들어 종종 자신을 부르는 것은 아이린이 제게 쌀쌀맞게 군다며 술을 대작해달라는 이유였으니까.

에반은 그 걸 그리 마음에 들어하진 않았지만,

막상 자신도 아버지가 된다고 생각하니 공작이 조금은 불쌍해보일 따름이었다.

자기가 자초한 일이긴 해도, 하나 있는 딸이 아버지를 싫어한다면.

‘아마 죽고 싶을 거야.’

공작은 에반에게 훌륭한 타산지석이었다.

자신은 절대로 저런 아버지가 되지 않으리라.

아들이나 딸이나, 아이린과 함께 착하고 바른 아이로 키우기 위해 그 무엇보다도 힘쓸 예정이었다.

아이린은 아들이 베릴루드, 딸이 로벨리아면 어떻겠냐고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이름을 짓기에 이른 시기인 건 마찬가지지 않던가.

에반이 아이린과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자, 어느덧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밤이 되었다.

새하얀 눈만이 고독하게 남은 시간, 하늘에 덩그러니 뜬 초승달이 빛을 발하자 아이린은 졸린 눈을 비비며 에반의 무릎에 천천히 머리를 기대었다.

함께 잘 수는 없어도, 무릎베개 정도는 이제 익숙해진 둘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전엔 팔베개만으로도 하루종일 부끄러워 했건만, 이런 게 익숙해질줄이야.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 에반이 허공을 바라보기도 잠시,

복도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발소리에 아이린이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기사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로페나의 얼굴은 무언가를 보고 놀란 듯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그 표정에 에반이 피식 웃자, 로페나는 에반의 어깨를 붙잡곤 덜덜 떨며 입술을 달싹였다.

“공작님이 알아차리셨어요.”

그 말에 아이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것은 에반 또한 마찬가지라,

이윽고 아이린을 힐끔 쳐다본 에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설마?”

“아가씨 임신 하신 거, 공작님이 이제 알게 됐다구요!”

밖에 내리는 새하얀 눈처럼.

에반의 얼굴색이 새하얗게 질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