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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13화 (113/181)

〈 113화 〉 순조롭게 (3)

* * *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생각이에요?”

책상 앞에서 서류를 살피던 아이린이 입술을 달싹였다.

뒷덜미에서 느껴지는 숨결에 어깨를 움찔 떨면서도,붉게 물든 뺨은 이런 행동이 마냥 싫지만은 않은 듯 보였다.

남들이 보면 어쩌려고 이러는 것인지,

에반의 무릎 위에 앉은 아이린이 다리를 동동 구르자 에반은 피식 웃으며 그대로 아이린의 배를 끌어안았다.

“하던 거 마저 하시죠.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가 있을까요. 정말, 애도 아니고.”

이전과는 달리 노골적으로 장난을 치는 에반의 모습에 아이린은 푹 한숨을 내뱉었다.

요즘 들어 배가 조금 무거워진 것 같아 신경 쓰고 있는데, 혹시 살이 찐 것은 아닐지.

에반이 알아채면 어떡하나 싶은 마음에 배를 끌어안은 손을 떼자,

목덜미에 느껴지는 뜨거운 숨결에 아이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순간 신음을 내뱉을 뻔 한 입을 가리자, 에반이 뒤에서 큭큭 웃으며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에반, 자꾸 그러면 화낼 거예요.”

“알겠습니다. 내려갈까요.”

“...그건. 됐어요. 이대로 있어요. 여기서 나가면 또 뭘 할 줄 알고.”

제 아무리 정식으로 교제하고 있다지만, 몇몇 시녀들의 행태를 여태껏 봐왔기에 완전히 안심할 수가 없었다.

리제라는 아이도 그렇게 믿었건만, 결국 에반에게 연심을 품었지 않았던가.

비록 얼마 전에 시녀 일을 그만두고 떠나긴 했으나,

아이린은 그 일을 보곤 시녀들을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온전히 믿을 수 있는 것은 로페나 하나, 나머지는 공적으로는 믿을 수 있었지만.

에반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에 있어서는 그다지 신뢰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로페나마저 잠시 휴가를 얻고 크리스와 함께 계절제를 즐기러 갔으니, 아이린은 최대한 에반을 제 곁에 두고 싶었다.

크리스, 그 이름을 떠올린 아이린은 잠시 책상에 놓인 서류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에반을 향해 입을 열었다.

“크리스 경이 은퇴한지도 벌써 일주일이네요. 조금 더 오래할 줄 알았는데...섭섭하지 않아요?”

일주일이란 소리에 잠시 조용히 창문 밖을 바라본 에반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벌써 일주일이나 되었던가.

처음 은퇴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이젠 크리스 경이 조금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빌 뿐이었다.

뭐, 말이 은퇴지 지금도 매일 같이 이곳에 들리지 않던가.

듣자하니 공작이 크리스 경에게 명예직을 줄지도 모른다니, 어쩌면 평소처럼 그를 볼 수 있을 지도 몰랐다.

“은퇴한다고 했을 때,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습니다. 이제 크리스 경도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원래부터 로페나를 아끼긴 했죠. 누가 보면 숨겨진 손녀딸이 아닌가 할 착각할 만큼이나요. 매일 같이 로페나를 보러 오니...도대체 전에는 어떻게 그런 것을 숨기고 살았는지 모르겠네요.”

그 말에 에반은 조용히 긍정했다. 어쩌면 자신들이 모르는 사이에 결혼하여 손녀까지 본 것이 아닐까.

꽤 오랫동안 그를 봐왔지만, 로페나에게 지니는 애착이란 쉬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린 아이들 모두에게 그런 것이라면 그저 어린 아이를 좋아하는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로페나에게만 유독 그리 친절하니.

솔직히 섭섭하긴 했으나, 다른 사람도 아닌 크리스 경이 그런 다는 점에서 부드럽게 넘어갈 용의가 있었다.

게다가,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으니.

에반은 며칠 전 황태자에게 받았던 서신을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용언을 전혀 모르더군. 어쩌면 그저 착각일지도 모르네. 용언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그 용혈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프리드 말고 용혈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 그 생각은 그저 기우일걸세.]

스칼렛이 용언을 모른다는 서신,

에반과 황제의 부탁을 받아 스칼렛과 부쩍 친해진 황태자가 보낸 그 서신에,

에반의 머릿속은 그야말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원작에서 용언을 멀쩡하게 사용하던 스칼렛이 어째서 사용하지 못한단 말인가.

원작과 기껏해야 3개월 차이가 날 뿐인데, 너무나 많은 차이를 보이는 스칼렛의 모습은 여러모로 어색할 따름이었다.

‘붉은 달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 지 알아내야 하는데...’

절멸이 아닌 이가 그것에 대한 의미를 어떻게 알겠는가.

빌테인 조차 그 붉은 달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말해주지는 않았다.

짐작할 수 있는 건 그저 고룡 마베트가 그때를 기점으로 부활할 것이라는 것,

에반은 이제껏 판단의 기준이 되었던 원작의 내용을 가감없이 버리는 것이 나을 거라 판단했다.

애초에 너무나 많은 것이 달라졌다. 지금이 원작의 시점도 아니었고,

무엇이 이유인지는 몰라도 원작과 현재는 아예 다른 세상이라고 보아도 할만 했다.

스칼렛과 만난 황태자가 아무런 감정을 지니지 않으니, 그것부터가 꼬인 것이 아니겠는가.

탁, 생각에 잠긴 에반의 손이 탁자에 떨어지자 아이린이 그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에반을 바라보았다.

남은 손으로 턱을 괸 채, 허공을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

그 어떤 여인이 보더라도 매력적이라 생각할 이런 사람이 자신의 연인이라니.

어쩐지 비현실적이라 느껴지는 광경을 음미하던 아이린의 손이 에반의 목선을 훑었다.

스윽­ 상념에 잠겨 있던 에반이 그 손길에 살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쿡 하고 웃은 아이린이 에반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개기 월식까지 앞으로 세 달이 채 남지 않은 지금, 이런 시간을 얼마나 즐길 수 있을까.

허나 이런 여유를 즐기는 와중에도 에반이나 자신이나 여러모로 할 일이 많았으니,

이렇게나마 쉬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활짝 핀 손가락, 약지에 낀 반지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만약 절멸과 관련된 일이 전부 무사히 끝난다면...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있을까.

예전에는 미래에 대해 잘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아이린은 미래를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 퍽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매일매일을 지루하다고 생각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기를 급급했던.

무엇 하나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며 그저 죽을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조금이나마 이 삶에 재미를 붙이고 있지 않은가.

활짝 펴진 손이 에반의 손 위에 겹쳐지자, 똑같은 자리에 있던 반지가 부딪혀 청아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반지를 낀 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나, 이제는 반지를 빼려고 해도 잘 빠지지 않게 되었다.

이 반지를 빼게 될 날이 오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으나,

이 반지의 모양이 바뀌는 날은 언젠가 오지 않을까.

요즘 들어 자꾸 혼인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은 자신만의 생각인지,

아니면 에반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아이린은 의문을 품었다.

에반이 자신의 곁에 없는 모습을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어서,

또한 그렇게 되면 차마 견뎌낼 자신이 없어서 이렇게 조급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앞에 놓인 큰 사건을 모두 끝낸 뒤에 제대로 결실을 맺고 싶은 마음이리라.

동화의 끝부분처럼, 얼마 읽지도 않은 동화의 결말부를 떠올린 아이린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자신과 에반의 이야기를 그린 동화책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얼마나 우스웠던가.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 동화의 결말처럼 모든 것이 끝맺었으면하는 마음이 아이린의 가슴 한켠에 자리 잡았다.

“오래오래...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저도 모르게 뱉은 말에 아이린이 살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혹여 에반이 듣고 무어라 추궁할까 하는 마음이었지만,

어느새 새근거리는 숨을 내쉬며 잠든 에반의 모습에 살짝 웃으며 그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언제 잠든 것인지, 자신을 이렇게 앉혀놓고 잠들다니. 조금 괘씸한 마음이 들긴 했으나,

아이린은 그런 에반을 용서하며 다시 조용히 머리를 기대었다.

며칠 전보다 훨씬 많아진 낙엽이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어느덧 알록달록한 옷을 내려놓고 휑환 모습을 드러낸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그 삭막한 풍경 위로는 완전히 반대되는 파아란 하늘이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후욱­

불어오는 찬바람이 뺨을 간질여, 살짝 붉게 물든 얼굴을 문지른 아이린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 여유를 조금이나마 즐기기 위해서, 그리고 에반과 함께 있는 이 시간을 조금이나마 더 만끽하고 싶어서.

이윽고 새근거리는 호흡소리가 방을 가득 메우자, 바람에 흔들거리던 창문이 절로 탁 소리를 내며 닫혔다.

살짝 걷혀진 커튼이 두 사람의 눈 위로 새어나오는 햇빛을 우연히도 가리니,

이윽고 어두워진 방 안에 들려오는 것이란 공교롭게도 완전히 겹쳐진 얕은 숨소리뿐이었다.

#

하탄. 그리고 테라제인과 프리드.

절멸과 확연히 관계가 있을 거라 의심되는 가문은 이 셋뿐이었다.

나머지는 완전히 소탕되었거나 그 진의가 확실치 않으니,

황제는 에반과의 독대에서 가장 먼저 칠 가문을 하탄이라 명시했다.

하탄, 흔히 제국의 그림자라 불리는 가문이었기에 단지 정보 수집에 탁월한 곳이라 여겨지곤 했지만.

에반은 그들이 단순히 정보 수집에 뛰어난 것만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여자 주인공과 엮이던 남자 중에는 하탄의 후계자도 있었으니까.’

허나 하탄의 토벌은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장 급한 것은 황실 기사단의 재정비,

그리고 황도 에반젤리움의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었기에 초겨울을 알리는 10월은 아마도 큰 사건이 벌어지지 않을 터였다.

절멸 또한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해야 사태를 관망하며 준비하는 것뿐이지 않겠는가.

황제에게 받은 칙서를 살피던 아이린이 다즐링을 홀짝이며 눈살을 찌푸렸다.

10월은 여유로웠다. 허나 에반의 생일은 11월 초...

선물을 전해주려면 그 전에 주는 것이 좋을 텐데, 도대체 어떤 선물을 골라야 할까.

그런 아이린을 빤히 쳐다보던 로페나는 초콜릿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이제 표정만 봐도 무슨 고민을 하는 지 알 수 있는 터라,

표정은 저렇게 심각해보여도 결국 에반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로페나는 금세 알아차렸다.

뭐...척봐도 생일 선물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신 또한 그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으니,

기사님의 연인인 아가씨가 그런 고민을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선물 고민하세요?”

초콜릿을 삼킨 로페나가 말하자, 아이린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가늘게 뜨곤 로페나를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눈동자는 누가 봐도 어떻게 알았냐는 뜻이었으니,

어깨를 으쓱인 로페나는 입 안으로 초콜릿을 하나 더 집어넣으며 우물거릴 따름이었다.

“그렇게 티가 나는 걸까...”

“아마 제가 아니면 눈치 채지 못할 거예요. 저니까 알아보는 거지, 다른 사람들은 눈치 못 챌 걸요.”

“그럼 다행이지만.”

아이린의 시선이 로페나에게 향하자, 로페나는 초콜릿을 마저 삼킨 채 입을 열었다.

“저도 아직 무슨 선물을 드릴지는 못 정했어요. 그리고 애초에 저는 맨날 먹을 것만 드렸는 걸요.”

“...고민이야. 무엇을 줘야 할지. 여태껏 주종으로써 선물을 주긴 했지만, 연인이 되어서는 처음 주는 거니까.”

“꽃 같은 건 어떠세요?”

꽃이라. 아이린은 그런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를 들어 흑장미의 꽃말은 영원한 나의 것이라는 의미였으니,

에반에게 준다면 이런저런 의미로 꽤 괜찮은 선물이 될 법했다.

허나 그렇다고 면전에서 꽃을 선물하기엔, 자신의 품위가 꽤나 떨어지지 않겠는가.

명색이 유리스의 소가주인데, 자신의 연인에게 기껏해야 꽃 하나를 선물하다니. 누가 들으면 코웃음을 쳐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값비싼 악세사리를 주기엔 에반이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으니,

검이나 보구같은 것 또한 이미 선물했던 것이었기에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끈 거리는 머리를 잠시 꾹 누른 아이린이 한숨을 내쉬며 탁자에 엎어지자,

그런 아이린을 불쌍한 듯 쳐다보던 로페나가 입을 열었다.

“기사님은 아가씨가 아무런 선물을 주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하실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에반이 속으로 실망하면 나는...”

로페나는 그런 아이린의 모습에 눈썹을 찡그렸다.

아무리 연인이라 해도 그렇지, 이렇게 기사님에게 무른 모습을 보이면 어떡한단 말인가.

언제는 주도권을 잡고 흔들고 싶다고 하더니,

사귄 뒤에도 하나 변한 것 없는 제 아가씨의 모습에 로페나가 단호하게 팔짱을 꼈다.

“아가씨, 아직 시간 많잖아요. 조금 더 천천히 생각해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그리고 아가씨는 기사님한테 생일 선물로 뭐 받았는데요? 맞춰서 선물해줘야죠. 아무리 기사님이라지만­”

생일 선물이라는 말에 아이린이 조심스럽게 목걸이를 꺼내들자,

그 목걸이의 가치를 깨달은 로페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지간한 귀족조차 쉬이 구매할 수 없는 고가의 목걸이.

게다가 아이린이 좋아하는 디자이너가 만든 세상에 단 하나뿐인 목걸이였으니,

에반이 아니라면 도저히 구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으음...어.”

확실히 저런 선물이라면, 아가씨가 고민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마땅히 대답을 찾지 못한 로페나는, 고개를 휙휙 저으며 애써 다른 주제로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선물은 천천히 고민해도 되는 일이라며,

에반 또한 아가씨가 부담을 느끼는 걸 그리 원치 않으리란 말에 아이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뱉은 로페나가 땀을 닦아내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조금 편해진 안색의 아이린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말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 아가씨. 요즘 들어 어디 편찮은 곳이라도 있으세요?”

“그럴 리가. 내가 아팠으면 아마 에반이 먼저 알아차렸을 걸.”

“흐음. 이상하다. 빨래를 담당하던 애가 아가씨 건강 어떠시냐고 한 번 물어봐 달라더라구요. 그 뭐냐...음.”

잠시 말을 고민하던 로페나는, 아이린에게 총총거리며 다가가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 생리를 안 하시는 것 같다고.”

“...아.”

로페나의 말에 아이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달에 한 번씩 하던 것이 최근 들어 주기가 돌아오고 있지 않긴 했는데.

그래도, 간혹 생리 주기가 변할 때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그렇기에 그냥 우연에 불과하다며 치부한 아이린이 입을 열었다.

“그래봤자 일주일인데, 설마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너무 걱정하지 마렴.”

“으음, 그렇죠?”

순간 머릿속에서 이상한 단어가 하나 떠오르긴 했지만,

자신의 아가씨와 기사님을 믿는 로페나는 애써 그 단어를 지워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러겠는가. 알 거 다 아는 사람들이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잠시 분위기가 정적 속에 파묻히자, 아이린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찻잔을 들었다.

최근에 레몬티만 마시다가 다시 다즐링을 찾았건만,

여전히 조금 역하게 느껴지는 향에 고개를 갸웃거릴 따름이었다.

사람 입맛이 이토록 순식간에 변하던 것이었을까.

그렇게 다즐링을 입에 댄 순간,

아이린은 목구멍에서부터 차오르는 이물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젖혔다.

“우욱­.”

거칠게 찻잔을 떨어트리며, 이윽고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무언가에 헛구역질을 해대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속, 허나 다즐링이 훑고 지나간 목구멍은 여전히 텁텁했으니.

잠시 심호흡을 하며 속을 진정시키던 아이린이 떨어트린 찻잔을 주우며 로페나를 바라보았다.

“...엣.”

덜덜 떨리는 손으로, 들고 있던 초콜릿을 바닥에 떨어트린 로페나가 멍하니 아이린을 쳐다보았다.

최근 들어 유독 레몬티를 비롯하여 신 음식을 찾던 모습,

입맛이 달라지고 심지어 생리마저 하지 않는 모습.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냈던 단어가 스멀스멀 기어들어와 로페나의 머리에 댕­ 하며 경종을 울려대었다.

입덧.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잠시 입술을 오물거리던 로페나는 아이린의 시선을 힐끔 피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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