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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12화 (112/181)

〈 112화 〉 순조롭게 (2)

* * *

"요즘 들어 기분이 좋아보이십니다.”

“아, 태자 전하랑 사이가 좋아졌거든요. 처음에 만났을 때는 깜짝 놀랐는데, 생각보다 좋으신 분 같아요.”

“다행입니다. 그 분과 사이가 좋아지셨다니, 자작님께서도 꽤 좋아하시겠군요.”

“오늘도 만나서 같이 도서관에 가기로 했어요.”

해맑게 웃는 스칼렛의 모습에 노집사는 따라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황태자가 중요 인물이란 말을 하긴 했으나, 이토록 훌륭하게 제 역할을 해낼 줄이야.

모시는 이로써, 그리고 어릴 적부터 봐왔던 이로써 가슴 속에서 괜스레 보람이라는 이름의 감정이 피어오르는 것만 같아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스칼렛은 한창 때의 소녀처럼 보였다.

책을 읽다가도 갑자기 가슴팍에 책을 껴안고선 발을 동동 구르고,

혼자 뺨을 붉히며 정원을 한참 동안 걸어 다니기도 했다.

예전 같았으면 비싸다며 손도 대지 않았던 드레스나 악세사리에 관심을 가지는 모습은 이미 그녀가 사랑이란 감정을 알았단 것이니,

그 대상이 황태자 카이셀이라는 것에 노집사는 진심으로 기쁜 듯 껄껄 웃었다.

“제가 얼마 보진 못했으나, 두 분께서 꽤나 잘 어울리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렇게 보여요? 정말요?”

“예, 소문도 간간히 들리던데. 이제야 황태자 전하가 제 짝을 찾은 것 같다는 사람도 있다는 것 같군요.”

이어지는 노집사의 말에 스칼렛의 표정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시골 영지에서만 지낼 때 그저 꿈으로만 여겼던 것이 현실이 될 거라 생각하니,

스칼렛의 머릿속에는 벌써 황태자비가 된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사실 이제 겨우 조금 친해진 수준에 불과했지만, 망상에 무슨 죄가 있겠는가.

노집사는 의외로 스칼렛과 황태자가 잘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한 번 품은 여자와는 깊은 관계까지 가는 일이 종종 있었으니,

어쩌면 이번 일로 스칼렛과 황태자의 관계가 돈독해질 수도 있는 것이 아니던가.

붉은 달, 개기월식이 시작되기까지 앞으로 3개월.

전반적인 계획을 앞당겼으니, 그에 대한 성과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건만...

이대로라면, 개기월식이 일어나는 날 모든 것을 앞당겨 시작해도 괜찮지 않을까.

여전히 해맑게 웃고 있는 스칼렛을 향해 노집사가 고개를 꾸벅 숙이자,

스칼렛은 손을 흔들며 노집사를 배웅했다.

“...다행이군.”

스칼렛을 대할 때와는 꽤나 다른 표정을 지은 노집사가 중얼거렸다.

감정이란 것이 전연 없는 표정, 거뭇한 그림자가 깔린 벽을 쳐다보던 노집사가 허공에 오망성을 그려냈다.

룬문자와 함께 그려지는 마법. 이윽고 마법진에서 치직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노집사는 주변을 둘러 본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달이 뜨기 전에 폐기할 필요까진 없어 보입니다.”

[가능성은 높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하기 힘든 목소리를 들은 노집사는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더니, 이윽고 입술을 달싹여 말을 이어갔다.

“높다고 보긴 힘들지만, 걸어볼만 합니다. 잘만 된다면, 달이 뜨자마자 모든 것을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치지직­

한참동안 마법진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노집사는 오망성을 지우며 다시 스칼렛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잘만 되면...여러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었으나, 그는 이 계획이 성공하리라 믿었다.

앞으로 3개월, 다음 해가 되었을 때 모든 것은 어떤 모양새를 그리고 있을까.

노집사의 눈동자가 아주 잠시, 보라색을 띄었다.

#

“은퇴하실 생각이라 하셨습니까?”

“그래, 뭐. 이제 네가 있지 않느냐.”

난데없이 은퇴라니, 황궁에서 돌아오자마자 들은 말에 에반은 작게 입을 벌렸다.

언젠가 은퇴를 할 거라 예상은 했다만, 그 시기가 너무 빠른 것이 아닌가.

원작에서 크리스라는 기사는 나오지 않았으나, 그의 존재는 이미 에반에게 꽤 크게 마음속에 머물고 있었다.

나름 ‘스승’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에반 프리드라는 낯선 몸에 처음 깃들었을 때,

이 세상 속에 적응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건 크리스라는 노기사였다.

“조금 더 재고해보시죠. 아직 정정하지 않으십니까.”

“정정? 하, 농담도 잘 한다. 이 머리카락이 안 보이는 게냐.”

크리스는 하얗게 샌 머리카락을 툭툭 건드리며 웃었다.

은퇴한다고 얘기하면 잘됐다며 보내줄까 내심 걱정했는데,

이렇게 붙잡는 모습을 보니 그리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은퇴하기에 아직 이르다는 생각은 있었다.

아직 갑주가 무겁게 느껴지지도, 검을 들었을 때 몸이 삐걱거리지도 않았으니.

조금 더 관리를 잘하면 10년쯤은 더 해먹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살다가 은퇴해서 시골로 내려가 농사나 짓고 그렇게 살면...나름 괜찮을 터였다.

“지금은 그냥 쉬고 싶구나.”

하지만, 그런 마음보다도 큰 것이 쉬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전부 다 내려놓고, 서서히 늙어가는 몸을 챙기며 주변을 둘러보고 싶었다.

유리스의 기사로 지낸지 어언 50년 정도가 흘렀음을 떠올린 크리스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늙었으나, 병들지는 않았다. 지쳤으나, 진정으로 몸을 일으키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잠시 생각을 거듭하던 크리스는, 이윽고 피식 웃으며 눈을 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여태껏 생각해본 적이 없는 주제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도 나름 나쁘지 않으리라.

어차피 제게 주어진 시간은 아직 많았으니, 천천히...

“로페나 데리고 살 작정입니까?”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크리스가 눈살을 찌푸리자, 에반은 쿡쿡 웃으며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머리가 완전히 하얗게 새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이제는 원래의 머리카락 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모습에 괜스레 입맛이 썼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흘렀나 싶기도 하고, 막상 흐른 시간을 따지면 그리 많이 지나지도 않아 그가 느낀 감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 같기도 했다.

아마 꽤 힘들어하지 않았을까. 그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은 아마 평생 힘들겠지만,

아이린이 납치당했을 때 가장 자책하던 것이 크리스라는 것을 에반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불가항력의 힘에 당했을 뿐인데도, 스스로의 약함에 분노했던 기사.

어쩌면 그가 은퇴하려는 이유가 그것일지도 모른다고, 허나 그것을 구태여 입밖으로 내뱉지는 않을 따름이었다.

“은퇴한다고 바로 내려가지는 않을 거다. 아마 이 근처에 살면서 종종 들르겠지. 설마, 보내주지 않는 건 아니겠지?”

“제가 제렌 경한테 말해두겠습니다. 혹시 크리스 경이랑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있다면 절대 들여보내지 말라...윽.”

“이 녀석이, 아까부터.”

에반이 옆구리를 움켜쥐자, 그런 에반을 흘겨보던 크리스가 이내 껄껄 웃으며 에반의 등을 두드렸다.

뭐, 여기에 남아 있는 이유라 해봤자 한 사람 때문이긴 했지만.

크리스는 로페나를 떠올리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자신에게 유독 의지하는 아이, 손녀딸 같다는 생각에 챙겨주긴 했지만...

만약 자신이 떠난 뒤에 어떻게 살아갈까 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처음엔 그냥 불쌍하다고 생각해서 챙겨주었을 뿐인데,

언제 이렇게 제 마음속에 자리를 잡은 건지.

이제는 며칠 안 보면 또 그리움이 맺힐 정도였으니,

어쩌면 로페나를 핑계로 죽을 때까지 이 근처에서 머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크리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로페나에겐 얘기하셨습니까?”

“아니, 나중에 얘기해야지.”

“...저는 오늘 얘기 못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왜? 갑자기 왜 그러는데.”

“저한테 먼저 얘기한 걸 로페나가 알면 뭐라 그러겠습니까?”

아마 서운해하지 않을까. 그 생각을 떠올린 크리스는 이윽고 어깨를 흠칫 떨었다.

로페나가 삐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 로페나가 토라지는 모습을 생각하자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왜 저한테 먼저 안 알려주신 거예요? 미워요.

“허억.”

“...이제 좀 아시겠습니까? 로페나한테 먼저 얘기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저도 모르게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낸 크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딸처럼 돌봐준 아이가 자신에게 그렇게 말한다고 상상하니,

상상만으로도 치가 떨리는 일이지 않은가. 그런 크리스의 모습에 에반이 피식 웃자, 크리스는 그런 에반의 옆구리를 툭 치며 장난스레 입을 열었다.

“웃기는, 지금 누구 걱정을 하는 거냐. 침대에서 지는 놈이, 어딜 당당하게 쏘아다녀.”

“침대...아니, 그걸 지금 왜 얘기하는 겁니까? 그리고 안 졌습니다.”

에반이 소리치자, 크리스는 그 말에 크게 웃었다.

안 지기는 무슨, 주제에 자존심은 있다고 그리 변명하다니.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에반이 고개를 살짝 돌리자, 크리스는 다시 웃음을 터트리며 에반의 등을 팡팡 쳤다.

“어디 가서 마스터라고 하지 마라. 듣는 내 얼굴이 붉어지니까.”

“...단지 피곤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거 왜 얘기하고 그러시는 겁니까. 새벽에 있던 일이라 아무도 모르는데!”

“뭐...네가 먼저 로페나 얘기를 꺼내지 않았느냐. 그냥 복수일 뿐이다.”

그 말에 에반은 입을 작게 벌렸다.

은퇴할 때가 되더니 성격마저 쪼잔해진 건지,

그 사소한 말에 일일이 복수하는 크리스를 본 에반이 이내 쓰게 웃었다.

이제 이런 얘기도 몇 번 나누지 못하지 않을까. 크리스가 은퇴하면,

이제 자신과 친하게 지냈던 기사들이 전부 은퇴하는 셈이었다.

경비대장 제렌과는 어쩐지 조금 껄끄러운 사이였고, 기사들보다는 시녀들과 친한게 자신이었으니.

화를 내려다가 한숨을 푹 내쉰 에반은, 창문을 바라보며 그 너머의 풍광을 눈에 담았다.

이제 완전히 가을이 끝났는지. 나무에 걸려있던 붉은 단풍들이 하나둘 땅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봄, 여름, 가을을 거치며 아슬아슬하게 잡아두었던 불씨마저 전부 꺼진 것일까.

세상은 점차 고요에 접어들고 있었다. 색을 잃고, 다시금 무채색의 계절로 저물어드는 것이 지금.

가을의 끝을 알리는 은행이 희미하게나마 그 향으로 코를 찔러와, 코밑을 쓱 닦은 에반이 입을 열었다.

“외로우실 겁니다.”

“알지. 그러니까 일찍 가는 거다. 조금이나마 익숙해지려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에 스친 낙엽이 땅을 구르고,

거뭇한 흙과 뒤섞여 천천히 제 색을 잃어간다. 저 나뭇잎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겨울이 오면, 원래의 색이 무엇이었든 옅은 갈색을 띄곤 부서지는 것이 낙엽이었다.

설령 상록수의 잎이라 한들 시간이 지나면 갈색이 되어 바스라지니,

크리스는 그 낙엽이 어쩐지 자신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사는 건지 조금도 알지 못한 채 늙어만 가는 것이.

꼭 저 낙엽 같지 않던가.

철컥, 허리춤에 달린 검을 떼어낸 크리스가 이내 그 검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처음 받았을 때만 하더라도 광이 번쩍 나던 검이었건만, 이제는 낡고 무뎌져 크기마저 작아진 검이었다.

“너는 나처럼 살지 마라.”

“...그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습니다.”

“원래 이 나이 정도 되면 다들 비슷한 말을 하곤 하지. 너도 나처럼 될 거다.”

“저주하시는 겁니까? 저는 나이 먹어서도 잘생겼을 겁니다. 지금 처럼요.”

에반이 능청스럽게 말하자, 크리스는 혀를 쯧쯧 차며 에반을 흘겨보았다.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서 무얼 잘생겼다는 건지.

도무지 여자들은 왜 저런 놈을 좋아한단 말인가?

그에 대해 무어라 한마디 하려던 크리스는,

에반의 연인이 자신이 모시는 사람이라는 걸 떠올리곤 입을 꾹 다물었다.

‘나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참 많은 것이 달라졌다는 생각을 하며, 크리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에반은 일어서는 크리스를 잡지 않았다. 이미 결심한 사람의 마음을 자신이 어찌 되돌리겠는가.

그냥,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조금 묘한 감정이 떠오를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처음 빙의했을 때 제일 먼저 본 사람이 크리스 경이었다.

호통을 치며, 아가씨가 부르니 준비하라는 말에 멍하니 옷매무새를 다듬었지 않았던가.

그리고 아이린을 만나고, 로페나를 만났다.

익숙하지도 않은 훈련이 몸에 익숙해지고, 이제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그가 가르쳐주었던 훈련을 스스로 행한다.

그랬던 사람이 은퇴를 한다고 하니, 어찌 아무런 감흥이 없겠는가.

“나 갈 거다.”

“......”

뒤를 향해 슬쩍 고개를 돌린 크리스가 입을 열었지만,

에반은 그런 크리스를 빤히 바라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묘한 표정으로 뒷모습을 바라보며, 처음보다 조금 작아진 크리스의 키를 가늠할 따름이었다.

훅­

불어온 바람이 에반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노란색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가, 잠깐 질끈 감긴 눈을 떴을 때엔 이미 크리스는 사라진 뒤였다.

그 잠깐 새에 무엇이 급해 사라진 건지.

잠시 크리스가 사라진 자리를 빤히 쳐다보던 에반은 조용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까보다 조금 더 차갑고, 건조한 바람이 뺨을 간질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익숙한 얼굴들은 하나둘 떠나갈 터였다.

그만큼 새로운 얼굴들을 마주하겠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지나간 것에 더 집착하는 경향이 있으니 자신 또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진 않으리라.

늘 자신과 함께 아이린의 호위 기사로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은퇴한다는 말을 들으니...싱숭생숭한 마음을 달래기가 쉽지 않았다.

로페나도, 아이린도 아마 자신과 비슷한 기분이지 않을까.

툭,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던 에반의 이마에 나뭇잎 하나가 달라붙었다.

방금 막 나무에서 떨어진 건지, 이슬이 맺힌 나뭇잎의 색은 조금 옅어졌을지언정 여전히 붉었다.

손가락으로 나뭇잎의 잎맥을 만지다가, 이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생각에 다시금 바람에 실어 창문 밖으로 나뭇잎을 떠나보낸다.

바람에 실린 나뭇잎은 어디로 갈까.

갑작스레 불어온 바람에 나뭇잎이 저 너머로 사라지자, 에반은 창문틀에 턱을 괸 채 밖을 바라보았다.

나뭇잎이 어디로 갈지는...나뭇잎만 알지 않겠는가. 우스울 만큼이나 간단한 대답이었다.

설령 도중에 강물에 떨어져 물속에 잠길지도,

어쩌면 땅에 떨어져 그대로 땅에 파묻힐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결국 나뭇잎이 택할 일이었다.

자신이 이제 와 신경 써봤자,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지 않을까.

또 반대로 바람이 불면, 그 바람에 섞인 그 나뭇잎을 다시 만날 날도 오는 것일 테지.

에반은 미련을 거두었다. 크리스 경이 은퇴한다고는 했지만, 아직 제게는 할 일이 꽤나 많이 남아있었으니까.

할 일 하면서, 모든 것이 마무리 되었을 때. 그때 크리스 경의 은퇴를 축하하면 되는 일이리라.

탁­

창문이 닫히고, 더는 제게 불어오는 바람이 없다는 걸 느낀 에반이 등을 돌렸다.

크리스가 앉아있던 자리를 잠시 바라보다가, 그렇게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걸어 아이린에게 향한다.

텅 빈 복도,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한 줄기 희미한 바람에 잠시 걸음을 멈춘 에반은,

이윽고 아무렇지 않게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풀려있던 셔츠의 윗 단추를 잠그고, 대충 덮고 있는 제복 상의를 당겨 입는다.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이번 겨울은...전과 달리 조금 더 추울 테니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에반에겐 조금 더 추울 겨울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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