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 순조롭게 (1)
* * *
“예상은 했는데, 어째 예상대로군. 자네 괜찮겠나?”
“...저는 괜찮습니다. 다만 아가씨께서 조금.”
카이셀의 물음에 에반은 애써 미소 지었다.
연회.자신에게 시선이 쏠리는 것이야 이제 꽤 익숙해졌지만,
아이린은 그런 것을 무척이나 신경 쓰고 있는 듯 보였다.
주변의 여인들을 힐끔 쳐다보면서, 이따금 시선을 마주치는 여인에게 차가운 미소를 짓는 걸 본 에반이 쓰게 웃었다.
“힘들겠군 그래.”
카이셀은 킥킥대며 에반의 등을 두드렸다.뭐, 처음부터 예상은 했다만.
이제는 완전히 연인이 된 두 사람의 관계를 연회장에서 보니 괜스레 더욱 새롭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저 넘겼을 시선을 이젠 연인의 눈치를 살피며 신경 써야 했으니,
이전과 달라진 에반의 모습을 보던 카이셀이 시선을 돌려 주변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직접 연 연회라 그런지, 이 넓은 연회장에 참 많은 귀족들이 빼곡하게도 들어와 있었다.
개중엔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귀족도 있었고,
5대 가문의 일원인 메디브와 킬로그 또한 있었기에.
몇몇 귀족들이 그들과 어울려 어떻게든 친분을 만들려 하는 모습이 카이셀의 시야에 들어왔다.
하탄은...하탄의 모습을 찾던 카이셀은 이윽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는 아예 나타나지도 않을 작정인가.
하기야, 어차피 적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이렇게 나오는 편이 되려 편하지 않던가.
하탄을 향하던 일말의 의지마저 끊어버린 카이셀은 이윽고 손에 들린 술잔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액체가 잔 위에 찰랑거려, 잔 위에 꽂힌 라임과 함께 시큼한 향을 내뿜고 있었다.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어가는 술, 취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요즘 들어 꽤 취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제위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도 그렇고,
절멸에 대한 것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것도 그렇고...
이래저래 신경 쓸 게 너무 많은 것이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여자를 만나며 그런 생각을 잊어보려 해도 결국 무상하다는 느낌만 들 뿐,
비어버린 술잔을 탁자에 놓은 카이셀이 에반의 어깨를 두드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난 좀 주변 좀 둘러보다가 들어가야겠네. 잘 마시고...흠, 잘 좀 챙겨주고.”
“그래야겠죠.”
카이셀의 말에 에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황태자가 일찍 돌아가 준다면 에반에게는 꽤 좋은 일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황태자의 옆에 있는 것은 순전히 황제가 부탁했던 것 때문이었으니까.
내일이면 돌아갈 테니, 스칼렛과 황태자가 만날 지에 대해 딱 오늘까지만 신경쓰면 되지 않겠는가.
하여 아이린의 따가운 눈초리를 맞으면서도 이렇게 버티고 있었는데,
황태자가 스스로 들어갈 거라 하니 에반으로서는 반색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하아.”
아이린은 에반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황태자를 유심히 바라보는 모습,
황제와 독대한 뒤로 쭉 황태자를 지켜보는 것에 분명 무언가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그 이유를 직접 물을 수 없어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에반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떠는 몇몇 여인이 눈에 띄었다.
임자가 있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골적인 시선을 보내는 이들.
‘하필이면 에반을.’
자기 곁에 있는 사람에게나 신경 써줄 것이지,
함께 온 파트너는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에반을 바라보는 여인들을 보는 아이린의 시선에 한껏 한기가 서렸다.
이런 시선을 받을 것은 예상했지만...그래도 자신이 옆에 있는데도 이런 것은 너무한 것이 아니던가.
예전 같았더라면 직접 불만을 표했겠지만, 아이린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으려 했다.
“글라스칸 영애.”
아이린이 손짓하자, 뒤에 서있던 여인 중 하나가 옅게 웃으며 아이린의 옆에 섰다.
이전에 마정석 광산을 일방적으로 뺏었던 글라스칸 백작의 여식,
사교라는 것에 눈을 뜨며 아이린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이전에 무례를 저질렀던 이들에게 사과하는 일이었고.
그런 사과를 통해 얻은 것이 지금 형성한 일종의 ‘무리’였다.
“네, 부르셨나요?”
“주변을 조금 정리해줄 수 있을까요. 이쪽으로 향하는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라서 말이죠.”
“아, 시선이요.”
생긋 웃은 애시드는 자신의 뒤쪽에 있는 여인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자신을 필두로 아이린 유리스라는 여인에게 속한 이들이었기에,
애시드의 눈짓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인 여인들이 곧바로 에반에게 향하는 시선을 치워내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시답잖은 주제를 꺼내며 대화를 트고, 에반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이들을 몰래 데려가 에반이 보이지 않는 곳에 두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골적인 시선을 보내던 몇몇이 사라지자, 아이린은 흡족하게 웃으며 애시드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어머, 저에게 감사를 표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당연히 저희가 해야 하는 일이지 않나요?”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죠. 고마워요, 애시드.”
오랜만에 불린 이름에 활짝 웃은 애시드는 다시금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주변을 정리하던 여인들 역시, 아이린이 부를 때를 기다리며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로 섞여 사라졌다.
아이린이 사교란 행위에 힘을 쓰며 만들어낸 무리,
비록 그 세력이 거대하지는 않았으나 유리스라는 이름은 그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암투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전장에서 싸우는 것이 에반이라면,
아이린은 물밑에서 에반을 지원하기 위해 이런 일을 시작했다.
표정을 숨기는 것이야 가장 자신 있는 것이었으니, 아이린은 늘 미소를 띤 얼굴로 자신의 편을 하나둘 만들어냈다.
가장 거대하지는 않더라도, 더 이상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파벌.
적어도 절멸이란 공통의 적이 있는 한 절대 무너지지 않을 파벌을 완성시킨 아이린이란,
더 이상 누구도 아이린을 예전의 외톨이 공녀로 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다른 영애와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는 아이린의 모습에 에반은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예전에 다과회에서만 하더라도 홀로 있는 것이 익숙해 보였는데, 이젠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과 어울리는 모습이라니.
“대견하십니다.”
“...네?”
“이제 다른 사람과도 훌륭하게 대화하시니, 어쩌면 이제 제가 필요 없어진 게 아닐까...”
“무슨 소리에요, 그게.”
아이린은 입술을 삐죽이며 에반의 손을 거칠게 끌어 당겼다.
필요 없어지다니, 자기 입으로 평생 곁에 있겠다고 했으면서.
장난인 건 알았지만, 그럼에도 섭섭한 것은 섭섭한 것이리라.
아이린이 쏘아보자 에반은 장난스레 미소 지으며 아이린의 손에 깍지를 꼈다.
“춤이라도 추시겠습니까?”
“됐어요. 다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거죠?”
“당연한 말씀을.”
춤을 잘 못 추는 걸 알면서도 춤추자 하는 말에, 아이린은 눈살을 찌푸리며 에반의 가슴팍을 툭툭 두드렸다.
고양이가 장난치듯, 아프지도 않은 그 손짓에 에반은 샐쭉하게 웃으며 아이린의 뺨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말랑한 볼이 손바닥에 눌려 삐죽 튀어나오자, 에반은 그런 아이린을 꼭 끌어안으며 숨을 토해내었다.
“사, 사람들이 보잖아요.”
“상관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항상 이쪽 보는 건 똑같은데.”
“그, 래도...”
“그래서, 싫으십니까?”
품속에서 에반의 시선을 마주친 아이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살짝 고개를 저으며 그대로 에반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어떻게 싫다고 할 수 있겠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아이린은 나름대로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스칼렛이라는 여인이 여기 있다면 보고 있겠지, 에반에게 확실하게 임자가 있다는 사실을.
두 사람의 모습에 웅성거리던 좌중 속, 스칼렛은 아이린을 품에 안은 에반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눈살을 찌푸리다가도, 아이린이 자신을 본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아 어깨를 움찔 떨며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자신을 내내 쳐다보던 그 차가운 시선,
여태껏 한 번도 그런 시선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스칼렛은 태어나 처음으로 한 사람을 무서워하게 되는 경험이었다.
에반 프리드에게 함부로 다가가선 안 됩니다. 그는...설명하려면 꽤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만나봐야 좋을 것 하나 없는 사람입니다.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진 않는데.”
스칼렛은 눈썹을 찡그리며 에반을 바라보았다. 저런 사람이 좋을 것 하나 없는 사람이라니,
이렇게만 보면 누구보다 선한 사람 같지 않은가.
비록 연인이란 여자가 조금, 아니 엄청 무섭긴 했지만.
자신의 집사가 해주었던 말을 떠올린 스칼렛은 그 말 자체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에반이 나쁜 사람이면, 세상에 착한 사람은 하나도 없겠군.”
“흐익.”
“무얼 그리 놀라는지 모르겠군. 황태자 처음 보나?”
피식 웃은 카이셀이 스칼렛을 바라보았다.
멍하니 입을 벌리다가, 이윽고 황태자라는 이름에 꾸벅 고개를 숙이며 다급히 죄송하다며 연신 입술을 달싹였다.
황도에 오기 전에 몇 번이고 듣지 않았던가, 황도에서 만날 사람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이 황태자라고.
그런 사람과의 첫 만남이 이런 식이라니,
난처함으로 물든 스칼렛의 얼굴을 슬쩍 본 카이셀이 능청맞게 어깨를 으쓱였다.
살짝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늘 그렇듯 붉은 색의 눈동자를 반짝인 카이셀이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여자를 상대할 때면 보이는 그 미소.
스칼렛의 뺨이 살짝 붉게 물들자, 카이셀의 눈동자에 순간 이채가 일었다.
#
“황도는 처음이라고.”
“네, 저는 여태 영지에서 살고 있었거든요. 거긴 진짜 볼 게 하나도 없어요.”
“여기도 볼 것이 없는 건 마찬가지야. 늘 보던 것만 보면 질리는 법이지. 나는 오히려 그 시골이란 곳이 더 궁금한데.”
“볼 거라 해봐야 풀이랑 동물 밖에 없어요. 거긴 이종족들도 거의 없는 걸요. 아주 가끔 엘프들이 내려오긴 하는데...사이가 그리 좋진 않아요.”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스칼렛의 모습에 카이셀은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시골 영지에서 온 여인, 황도의 귀족가 영애들과는 달리 순박한 면을 지닌 모습은 그에게 조금 색다른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다.
때하나 묻지 않은 순수함. 황도의 모든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여인.
자신이 황태자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에 대해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란,
처음엔 그저 우연으로 만난 여인이었음에도 카이셀의 관심을 끌게 하기에 충분할 따름이었다.
이런 여인과는 어떻게 말을 이어가야 할까.
황도의 영애들 마냥 다루기엔 그 순수함의 정도가 심해서, 잠시 고민하던 카이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런 연회는 싫어하는 건가?”
카이셀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스칼렛은, 이윽고 옅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것보다는 그냥 책을 보는 게 더 좋다고,
황제 폐하가 부르신 것이 아니라면 오지 않았을 거란 말에 카이셀은 조용히 스칼렛을 바라보았다.
‘특이하군.’
남들 같으면 이런 연회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기뻐할 텐데.
황태자인 자신 앞에서 이런 자리가 싫다고 말할 줄이야.
일부러 그렇게 말한다고 생각하기엔, 만약 자신이 그런 대답에 눈살을 찌푸릴 것까지 생각하고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정말 순수하게, 본연 그대로.
정말 조용하고 한적한 활동을 좋아하는 것일까.
시험 삼아 알고 있던 책 몇 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자,
스칼렛은 눈을 반짝이며 책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듣던 카이셀이 살짝 질릴 만큼 한참동안 얘기를 늘어놓던 스칼렛은,
카이셀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움찔 떨었다.
“아, 으. 죄송해요. 제가 책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혼자 너무 신나 해서.”
“...아니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냥 남들과는 조금 다른 여인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것 같군.”
그리고 잠시 스칼렛을 바라보던 카이셀이, 다시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 거 싫어하지는 않아.”
“네?”
“못 들었으면 됐네. 슬슬 돌아갈까 생각 중인데.”
“아니, 저 아직 몇 마디도 못해봤는데요?”
“평생을 살아도 나와 몇 마디 나누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지. 이 잠깐의 시간이 얼마의 가치를 지니는지 알고 있나?”
“...얼만데요?”
얼마냐고 묻는 스칼렛의 물음에 카이셀은 웃음을 터트렸다.
근래에 들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시원한 웃음에 자기도 당황한 터라,
스칼렛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곤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도대체...멍청한 건지, 아니면 정말 빌어먹을 만큼 순수한 것인지.
혹여 자신 때문에 이 순수함이 까맣게 물들까 하는 어리석은 걱정이 떠올릴 만큼,
스칼렛이란 여인은 그동안 카이셀이 보았던 여인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여인이었다.
어디서 이런 사람이 튀어나왔을까.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으로 스칼렛을 살피던 카이셀은,
이윽고 아무렇지 않게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얼마냐고 직접 물어볼 줄은 몰랐는데.”
“아, 그러면 안 되는 거였나요? 죄송해요...”
“죄송하다고 할 것까진 없지. 그냥 조금 당황스러워서 그런 것뿐이야.”
스칼렛은 카이셀과 대화하는 내내 카이셀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보였다.
조금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싶었는데.
카이셀이 계속 그녀를 당황스럽게 하는 터라,
스칼렛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간혹 엉뚱한 대답을 내뱉는 것이 전부였다.
허나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가 테라제인이라는 자그마한 영지에서 보고 배운 것이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알고 있었기에 내뱉을 수 있었던 순수한 대답.
카이셀은 그런 대답에 스칼렛에게 묘한 호감을 느꼈고,
아주 간혹. 텅 비어있던 마음 한 구석이 차오르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여인과의 대화에서 즐거움을 느낀 것이 얼마만이던가.
아이린과 에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심 동경했던 카이셀은,
스칼렛이라는 여인에게 괜스레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허나 시간은 흘러간다. 연회가 막을 내릴 때까지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가던 카이셀은,
이윽고 귀족들이 하나둘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곤 쓰게 웃었다.
시간이 너무도 빨리 흘러가지 않았던가. 조금은 아쉬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자,
스칼렛은 처음 보았던 그 밝은 미소 그대로 웃어 보이며 사라졌다.
“스칼렛.”
카이셀이 입을 열자, 문을 향해 걸어가던 스칼렛이 발걸음을 멈춘 채 카이셀을 바라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카이셀은, 이윽고 팔짱을 끼며 스칼렛의 시선을 피하곤 말을 이었다.
“...황도에 계속 있을 거면, 가끔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저도 좋아요! 어디서 만날까요?”
“뭐, 거리 어디든 좋지. 시간이 되면, 만나는 걸로. 괜찮겠나?”
“괜찮아요. 정말로요.”
슬쩍 손을 흔든 카이셀이 다시 팔짱을 끼자, 배시시 웃은 스칼렛은 그대로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그 사라지는 모습을 계속, 하염없이. 조금은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카이셀의 표정이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아.”
꽤나 힘겨운 듯, 방금과는 완전히 다른 표정을 지은 카이셀이 손수건을 꺼내어 입술을 닦았다.
이렇게 대화하는 건 조금 질색인데 말이지.
누군가를 질책하는 것 같은 그 말에, 기둥 뒤에 숨어있던 에반이 고개를 슬쩍 내밀며 입을 열었다.
“눈이라도 맞으신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설마...아닐 거라 믿습니다.”
“거, 참. 내가 아버지의 말을 듣고도 그럴 거라 생각하나? 나는 바보가 아니야. 그냥 조금 어울려 줬을 뿐이지.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 여자가 절멸과 관계가 있을 것 같진 않은데 말이야.”
“지금은 그저 확인 과정일 뿐입니다. 아직 아무것도 확실치가 않죠. 전하의 역할이 참 중요합니다.”
에반의 말을 들은 카이셀이 그런 에반을 흘겨보았다.
자신을 이용한다는 말을 어떻게 저리 뻔뻔하게 할 수 있는지.
하지만 친우의 부탁이라며 받은 것이니 이제와 거절 할 수도 없지 않은가.
방금의 그 스칼렛이라는 여인이 절멸과 관계있다는 걸 쉬이 믿고 싶지는 않았으나...
모든 정황이 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걸 카이셀은 알고 있었다.
정황이 그렇다면야, 카이셀은 딱히 그에 대해 부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정이 들기 전에 처리하고 싶을 뿐. 그런 카이셀의 모습을 본 에반은 언제나처럼 옅게 웃었다.
균열이 일고 있었다. 원작과는 서서히 달라지는 전개, 그 방점을 찍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이 아닐까.
모든 것이 달라지고 있었다. 아주 순조롭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