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 철혈이 그대를 거부한다 (4)
* * *
아침, 에반은 해가 뜨자마자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가슴팍에 안겨있는 여인, 아이린을 보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젯밤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같이 자자고 할 때만 하더라도 혼자 식겁했지만, 아이린은 정말 순수하게 같이 자자고 했을 뿐이었다.
에반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스스로를 힐난했다.
동침이라는 단어에 그런 것을 떠올리다니...아니, 어쩌면 그런 것을 떠올리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잠시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이윽고 아이린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 해가 온전히 뜨지 못한 새벽, 푸르스름한 하늘엔 아직도 어둠이 조금씩 끼어있었다.
달과 해가 함께 떠있는 것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에반은 아이린이 깨지 않도록 침대에서 일어난 뒤, 문 옆에 서있는 시녀 한 명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부르셨다고요.”
“그렇습니다. 밤에 힘을 쓰느라 힘들었을 것을 알지만, 시간이 많지 않아 이렇게 부르는 것에 대해 사과한다고 하셨습니다.”
“...힘 같은 건 안 썼는데.”
에반은 멋쩍게 웃었지만, 시녀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일 따름이었다.
에반이 일찍 일어난 이유, 에반은 새벽에 들은 한 명령을 떠올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금으로 테두리를 칠하고, 붉은 색의 비단으로 짜진 카페트는 황궁 바닥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제국의 정점, 에반젤리움 위에 군림할 수 있는 황제가 제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까.
‘...간단하게 생각하면 내겐 좋은 일인데.’
황제는 소설 속에서도 제 존재감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은 존재 중 하나였다.
언제나 물밑에서 활동했으며, 모든 상황에서 제 전부를 보여주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의 뜻을 대신하여 수행했던 것은 황태자, 에반의 입장에서 황제를 가까이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폐하께선 어떤 분이십니까?”
에반은 시녀를 향해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이린에게는 미안했지만, 에반은 제 외모를 사용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미소에 살짝 얼굴을 붉힌 시녀는, 잠시 에반을 빤히 바라보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저는 잘 모릅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함부로 용안을 남들께 보이는 분이 아니시니까요. 다만.”
“다만?”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 많은 것을 알고, 보는 분이시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추상적인 답변에 에반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많은 것을 알고, 보는 사람이라. 이미 용혈을 타고난 자신이란 존재가 있었다.
초대 황제 알라르로부터 어떤 특별한 핏줄이 이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모를 일.
시녀의 답변을 곱씹으며 한참을 걷다가, 이윽고 드러난 거대한 문에 에반의 발걸음이 멈췄다.
거대한 문이었다. 테두리는 봉황의 깃털이 음각되어 있었고,
그 중앙으로 갈수록 용과 호랑이가 다투듯 서로의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용의 눈알에는 푸른 보석이, 호랑이의 눈에는 붉은 보석이.
나머지는 온통 금으로 칠해진 문은 황제의 위엄을 한껏 나타내는 듯 했다.
“이제 저는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홀로 이 안을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에반은 등골을 타고 느껴지는 오싹함을 느꼈다.
바람 한점 불어올 리 없는 황궁 내부임에도 싸늘함이 느껴졌다.
뚜벅, 문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어. 이윽고 그 거대한 문을 양손으로 밀자 문이 끼긱 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열리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자, 그 너머에 드러난 것은 단순히 공간이라 칭하기에 어려운 곳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통로, 어지간한 방보다는 훨씬 넓은 폭을 지닌 공간 한 가운데에 노란색 금실로 짜여진 천이 기다랗게 펼쳐져 있었다.
그 양 옆을 장식하는 옥으로 조각된 용.
입에 여의주를 문 채 하늘을 향해 승천하는 용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통로 너머까지에도 존재했다.
빛이 들어와 에반에게 닿았지만, 에반의 시선은 그 밝은 빛보다도 천장에 그려진 그림에 가있었다.
거대한 날개를 부풀린 채 하늘의 빛을 가린 한 용,
그리고 그 밑에 날개를 펼친 채 그 용에 맞서 저항하는 자그마한 용.
용이 지키는 것은 이 수도인 에반젤리움이었기에, 에반은 그 그림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궁에 있기엔 조금 불길한 그림이 아니던가.
누가 보더라도 제국의 멸망을 그린 것만 같은 그림일진데, 어찌하여 이런 것이 여기에 있을까.
그 그림을 한참 바라보다가, 에반은 문득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아직 저 그림 이후에 대한 것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지.”
“...당신은.”
에반 보다는 조금 작은 키였다. 허나 몸집은 컸으며, 붉은 색의 눈동자는 형형하게 빛나 총기를 띄고 있었다.
검은 색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화려한 제복을 걸친 이. 남자는 이윽고 에반을 보며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만나서 반갑네. 황제라고 소개하면 되겠나?”
순간, 에반의 눈이 크게 뜨였다.
#
사람 하나로는 한참 부족한 거대한 옥좌, 그 가운데에 태연하게 앉아있는 이는 무릎 꿇은 에반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용혈을 타고난 이, 제국의 수호자...최근 들어 이런저런 칭호를 얻었다곤 하지만, 그가 관심을 지니고 있는 칭호는 다른 곳에 있었다.
“아스칼론을 지니고 있다고.”
아스칼론, 알라르가 들었다고 전해지는 성검이자, 용살검.
에반은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건 에반 또한 무어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태껏 잘 사용했고, 심지어 빌테인을 그 검으로 베긴 했지만.
정통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황실에서 그 소유권을 요구한다면 에반으로선 그저 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습니다.”
“아스칼론의 유래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겠지. 태조께서 들고 고룡 마베트와 싸웠던 그 검을. 일개 기사가 지니고 있다는 것을 내 이전에 들어 잘 알고 있었네. 뭐, 마스터를 일개 기사라 하기엔 묘한 감이 있다만.”
황제는 에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스칼론, 가지고 있으면 좋았다.
황실의 정통성을 의미하는 검이자, 시조 황제는 황제가 지니는 권력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였으니까.
‘지금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황제가 지니는 권력은 매우 중요했다.
전제 군주정에서 군주가 지니는 권력이란 곧 정책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했으니,
허나 지금 아스칼론까지 거둬들이며 권력을 챙겨야 할 만큼 궁핍한가?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었다. 역사상 수많은 황제가 있었으나,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모든 권력은 황제에게 온다.
검은 부러졌으나, 방패가 자신을 지지하고 있었다. 마법이, 눈이 아직 건재했다.
흑마법사의 천적이라 불리는 에반 프리드의 전력을 깎는 것은,
제국인들의 지지를 사실상 깎아먹는 행위에 불과했다.
황제가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것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
황제는 그런 쪽에서 너그러운 편이었다.
지금은 전시 상황, 제국인들이 절멸에게 위협을 느끼는 만큼 권력은 제게 집중되었고.
고작 성검 하나쯤은...얼마든지 버릴 수 있었다.
“가지게.”
“예...?”
“내가 그리 옹졸한 사람처럼 보이던가. 아스칼론, 자네 소유로 하라는 말일세.”
에반은 멍하니 황제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빼앗길 수도 있을 거라 각오했건만,
너무도 흔쾌히 가지라 하는 황제의 진의를 읽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그런 에반의 표정에 한차례 피식 웃고는, 손을 휘두르며 입을 열었다.
“이런 말 하나하나에 그리 큰 의미가 담기진 않아. 그냥 가지라 했으니, 그대는 마음 놓고 검을 휘두르면 되는 거겠지. 불만이라도 있나?”
“불만이라뇨.”
“그래, 불만을 가지기엔 우리가 할 게 너무도 많지. 하탄, 그리고...”
황제는 잠시 에반을 보며 고개를 까딱이다가,
이윽고 옥좌의 손잡이 부분을 가볍게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프리드.”
“...알고 계셨습니까.”
“부정하지는 않는군. 하기야, 가장 가까이에서 어둠을 보았을 것이 그대일 테니. 추궁하지는 않겠네.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용언을 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을 테니까.”
“외람되오나, 용언을 배운 것은 어떻게 알고 계신 겁니까?”
“내가 알려주라고 했으니까.”
황제의 대답에 에반은 허탈하게 웃었다. 설마 테오라드 경이 자신에게 용언에 대해 알려준 것도,
그 종이를 통해 배운 것으로 자신에게 온 편지를 해석한 것도...
“뭐, 그대를 감시하거나 그런 건 아니야. 단지 그대가 가문과 편지를 주고받을 거라 생각했고, 내가 프리드였으면...그대를 어떻게든 절멸 쪽으로 돌리려 애썼을 거라 예상한 것뿐이지. 자네는 몰랐겠지만, 프리드는 내가 주시하고 있는 가문 중에 하나거든.”
그리고 자신의 붉은 눈동자를 가리킨 황제는, 이내 쓰게 웃으며 낮게 읊조렸다.
“이 눈은, 때로는 싫어도 많은 것을 보여주곤 하지.”
“특별한 능력이라도 있는 겁니까?”
“카이셀에겐 존재하지 않아. 아주 간혹, 황가의 핏줄 중에서도 드물게 발현되는 힘이지. 뭐, 특별한 힘은 아닐세.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이 사고하게 되고, 조금 더 추리하게 될 뿐이니까.”
황태자보다 조금 더 짙은 색을 띄는 황제의 눈동자가 꿈틀거렸다.
살아있는 것처럼, 심장처럼 박동하는 눈을 감은 황제가 말을 이었다.
“...내가 하탄과 프리드, 그리고 다른 몇몇을 의심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지. 그리고 프리드에 있어선, 결국 그대를 부를 수밖에 없더군.”
“......”
“프리드를 단독으로 처리하는 일은 없을 걸세. 하탄과 함께 처리하지도 않을 거고, 어쩌면 그대에겐 생소한 이름인 가문과 함께 처리하게 될 테지.”
잠시 메마른 입을 다문 황제는, 가만히 고개를 숙인 에반을 향해 입을 열었다.
“테라제인. 알고 있나?”
에반의 눈이 크게 뜨였다. 테라제인이라는 이름이 나온 것에서,
에반의 사고는 이미 스칼렛 테라제인에게까지 닿아있었다.
그것은 황제 또한 마찬가지라, 붉은 머리의 여인을 떠올린 황제는 작게 눈살을 찌푸려 보였다.
그 평범한 여인이 이토록 거슬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평범했다.
평민으로 태어나 귀족 가문의 수양딸로 거두어져 남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는 것 외에는 조금도 평범한 점이 없었다.
평민이던 시절에도 이렇다 할 행적이 없었으니,
사실 경계할 대상이라기엔 무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허나 황제의 눈은 그 여인에게서 불안을 읽었다.
정확히는, 그 여인을 바라볼 때 자신이 느끼는 불안을 읽었다.
제국에 해가 된다. 설령 지금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나중에 해가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만나서 판단할 생각이네. 내가 테라제인이라는 가문을 어떻게 다뤄야할지, 아니면 그냥 두어야 할지.”
“제 도움이 필요하신 겁니까?”
“도움이라기엔, 그냥 지켜보라는 거지. 흑마법사를 가장 많이 상대해본 것이 그대가 아닌가? 직접 보고, 새겨두게. 테라제인이라는 가문이 제국에 어떤 존재가 될지.”
“저는 곧 돌아갈 사람입니다. 어찌 그들을 볼 수 있겠습니까?”
에반의 말에 황제는 코웃음을 쳤다.
옥좌에 팔꿈치를 댄 채 턱을 괴어, 그대로 에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일 여기로 테라제인의 수양딸이 오지.”
“농이 지나치십니다.”
“농? 내가 농을 잘한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듣지 못했는데 말이야.”
에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스칼렛이 황궁에 온다.
그말인 즉슨, 아이린과 스칼렛이 마주친다는 소리이지 않은가.
에반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지자, 황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테라제인의 수양딸과도 아는 사이인가?”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안색이 꽤 안 좋군 그래. 혹여 무슨 일이라도 짐작하고 있는 것이라면...”
“아가씨께서 질투가 조금...”
아 황제는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과 아이린의 이야기라면 이미 황도에서도 유명한 이야기 였으니,
그 이야기를 떠올린 황제는 흐뭇하게 웃으며 에반을 바라보았다.
지고지순한 사랑인줄 알았는데, 사실 여자쪽에게 꽉 잡혀 사는 쪽이었던가.
나름 마스터라는 기사가 여자에게 눌려지내다니...
“허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한 번 만나보는 건 어떻겠나?”
황제의 단호한 요청에 에반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아이린과 스칼렛이 만나는 것에서 두려워하는 건 아이린이 질투하거나 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소설 속의 장면, 만약 소설처럼 스칼렛이 황태자와 이어지고. 그를 통해 아이린을 견제하려 한다면...
‘그렇다한들 크게 달라지는 건 아니겠지만.’
에반은 안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렇게 하기 위한 것이 지난 4년간의 노력이 아니던가. 이제 와 불안에 떠는 것은,
이전까지의 일들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에 반증이나 다름없었다.
에반의 표정이 차분해지자, 잠시 에반을 바라보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아까의 그 그림 얘기를 하는 걸세.”
“그림 말씀입니까.”
천장의 그림, 황제의 손가락은 황제가 기거하는 궁 천장 전체를 덮고 있는 그림을 향해 있었다.
검은 색의 거대한 용이 하늘을 가리는 그림.
“고룡 마베트.”
“...검은 용을 가리키시는 말씀이시군요.”
“생각했네. 절멸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이 말하는 제물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왜 이렇게 무리하면서까지 제국인들을 납치하고, 감금하고, 살해할까.”
불량한 자세로 앉아있던 황제가 자세를 고쳤다.
꿈틀거리는 붉은 빛의 눈동자가 기괴하게 빛나며, 창문 새로 새어 들어온 빛과 함께 형형하게 반짝였다.
“수십 년 전, 절멸은 제국을 괴멸시키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 우스운 이야기네. 그때 황태자였던 나는 모든 것을 지켜봤고, 모든 것을 전부 알고 있지.”
“설마”
“괴멸시키지 않은 것일세. 용이 제국을 보우했다? 웃기는 얘기지. 그들이 바라는 때가 아니었기에, 그때 당시에 제국을 무너트려봤자 득 될 것이 없었으니까. 단지 하지 않은 것뿐이야.”
황제의 손가락이 하늘을 향했다.
그 손가락 끝에 있는 것은, 포악하고, 잔인한. 이 세상의 멸절(?)을 의미하는 고룡.
마베트.
“그들은 마베트를 부활시키려 하네. 붉은 달이 뜨는 그날, 그들이 노리는 것은 그날일세.”
“허나 그것이 쉬이 되겠습니까. 이미 로만이 무너졌고, 말로릭이 죽었습니다. 로만 토벌에서 사용될 제물 또한 많이 사라지기도 했고요. 그리고 그 붉은 달이 뜨는 날이 뜨는 날이 언제인줄 알고...”
“개기 월식을 알고 있나?”
황제가 차갑게 답했다. 개기 월식,
현대인이었던 에반은 그 단어를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등골을 타고 느껴지는 차가움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올해가 끝나는 날 밤, 개기 월식이 시작되네.”
에반은 그 말에 쓰게 웃었다. 아무래도, 올해가 끝나기 전에 할 일이 많을 성 싶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