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 철혈이 그대를 거부한다 (1)
* * *
머리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새하얀 빛에 눈을 뜬 에반이 조심스레 주변을 바라보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이불의 감촉, 잠시 그 밑을 바라보던 에반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어지러워...”
몸에서 느껴지는 탈력감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할 따름이었다.
빌테인과 싸울 때도 이렇게 힘들진 않았는데, 이대로 검을 휘두르면 그대로 쓰러지지 않을까.
흐릿한 시야를 다잡기 위해 관자놀이를 꾹 누르던 에반은,
자신의 손 한 쪽을 잡고 있는 새하얀 손을 보곤 쓰게 웃었다.
결국 여기에서 잠들었나. 해가 뜰 때까지 그런 짓을 했으니,
아무리 자신이라 한들 체력이 버텨주지 못했다.
반쯤 기절한 상태에서 겨우 아이린을 제 곁에 눕힐 수 있었으니,
갑작스레 끼친 소름에 에반은 어깨를 흠칫 떨며 아이린의 뺨을 쓰다듬었다.
이렇게 잘 때는 얌전한데...새벽에는 도대체...
그래도 서로 한 걸음 다가간 기분이라, 에반은 그것으로 족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쁠 것은 없지 않은가. 어차피 아이린도 항상 이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술에 취한 것과 분위기 탓에 그런 것이라 에반은 굳게 믿었다.
어제는 자신도 조금 피곤했던 터라 체력이 온전하지 않았으니, 다음에는 이번 같지 않을 터였다.
해가 막 떠오를 때 잠들어서인지, 커튼을 살짝 걷자 하늘 중앙에 떠있는 해가 눈에 띄었다.
이렇게 늦게까지 잔 것이 얼마만이더라. 시녀들이 이 시간까지 깨우지 않은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다시 침대에 누운 에반은 조용히 아이린의 몸을 끌어안았다.
밤에 그토록 격렬하게 했음에도 여전히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장미향에 미소지으면서,
동시에 품에 끌어안아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렇게 계속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밤에 했던 것을 매일 할 수야 없겠지만, 언젠가는...이렇게 같이 잘 수 있으면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결혼, 그 단어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에반은 옅게 한숨을 내뱉었다.
일단은, 절멸과 스칼렛이 먼저였다. 결혼을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은 그 이후이지 않을까.
만약 밤에 했던 것으로 뜬금없이 아이린이 잉태하거나 그런 거라면 몰라도, 지금 당장 고민하기엔 너무 이른 문제였다.
“으음...에반...?”
뒤척이던 아이린이 살짝 눈을 뜨자, 에반은 조용히 웃으며 아이린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에반이 옆에 없을까 불안해하던 아이린은 그 입맞춤에 불안감을 떨쳐내면서,
그대로 에반의 몸을 끌어안아 몸을 비볐다. 손을 잡거나 포옹할 때와는 달리 완전히 느껴지는 체온,
이불 아래에서 알몸을 맞댄다는 것이 조금 야릇했으나,
아이린은 그 따스한 온기에 미소를 지으며 에반의 가슴팍에 입술을 맞췄다.
몸 구석구석에 남겨진 붉은 자국은 밤의 기억이 현실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생생하게 남은 기억, 아직까지도 배 안 쪽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것을 느낀 아이린은에반의 품에 안긴 채 입을 열었다.
“...항상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해봐도 될까요?”
“얼마든지 하셔도 괜찮습니다.”
아이린은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에반을 바라보았다.
늘 혼자였기에, 아주 어릴적을 그리워했던 자신이지 않았던가.
아침에 눈을 뜨면 늘 자신을 품속에 두고 있었던 어머니에게 했던 말,
허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한 번도 입에 담지 못했던 말.
이제는 혼자가 아닌 둘이 된 침대 위에서, 아이린은 상념을 흩어내며 입술을 달싹였다.
살짝 수줍은 마음에 고개를 숙이면서도, 에반의 어깨를 잡은 아이린이 배시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침이라 하기엔 해가 너무 높은 곳에 있었지만, 에반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화답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이린.”
커튼 사이로 새어나온 햇빛이 아이린과 에반의 얼굴을 비췄다.
천천히 걷어지는 그림자, 빛에 닿아 선명하게 드러난 얼굴은 그 무엇보다도 환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아침이라기엔 너무 밝고, 저녁이라기엔 그 빛이 선명한 오후.
두 사람에겐 그 어떤 날보다도 새로운 날이, 그리고 좋은 아침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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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본 에반은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퀭한 눈가, 움푹 파인 볼. 누가 보면 생기를 빨린 것이 아닐까 착각할 만큼의 몰골에 에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생기를 빨린 건 아니었지만...아니, 어쩌면 빨린 것도 맞지 않을까?
속된 말로 쥐어 짜였으니, 에반은 밤의 기억을 떠올리곤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책에서 배웠다고? 하,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마스터에 다다르고 체력이 많이 늘었다고 생각했다.
거울에 비치는 아이린을 잠시 본 에반은, 이윽고 시선을 돌리며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렸다.
이런 걸 지금 생각해서 무얼 하겠는가. 나중에 생각해도 괜찮을 터였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아이린과의 관계가 한층 깊어졌다는 점이었다.
“뭐해요? 다친 곳이라도 있어요?”
“흠, 다친 곳이라면 있죠.”
에반은 피식 웃으며 가슴팍에 잔뜩 찍힌 자국을 가리켰다.
빨아들인 자국이 그대로 남아 붉게 남은 자국을 본 아이린은 뺨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밤에 보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보여줬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에반은 그런 것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아이린이 기억하는 밤의 모습은 그야말로 짐승과도 같았다.
오로지 욕정만을 탐닉하는, 에반이 지쳐 잠들 때까지 몸을 요구하던...
아이린은 그런 모습이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처음이라 서툴기도 했고, 만약 다음번에 그런 기회가 오면 더 잘해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에반이 그런 자신을 피하진 않을까?
문득 두려움이 일었지만,여전히 선한 눈빛의 에반에 안심할 따름이었다.
이전과 다르지 않은 눈빛이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을 향한 시선이 더 깊어진 것만 같았다.
평소에도 오늘처럼 함께 잘 수 있을까.
그런 짓을 구태여 하지 않더라도, 아이린은 에반이 곁에서 잠들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안정감을 느꼈다.
하지만 고작해야 연인 사이일 뿐이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영애가 남자와 함께 잠을 잔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에반이나 자신이나 그리 좋은 얘기를 듣지는 못하리라.
결혼, 그 단어를 떠올린 아이린은 잠시 눈을 끔뻑였다.
참 멀리 있는 단어 같으면서도, 당장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 거리감이 느껴졌다.
자신이 결혼하자고 말한다면 에반은 무어라 답할까.
좋다고 할까, 아니면 그건 아직 무리라며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할까.
‘성급할 필요는 없어.’
아이린은 아직까지 따듯한 복부를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조급해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시간은 많았고, 그 시간은 자신의 편이라 아이린은 굳게 믿고 있었다.
서로의 처음을 공유한 사이가 아니던가.
밤의 일도 그랬지만, 이전에도 서로의 처음엔 항상 서로가 끼어있었다.
그 생각에 슬쩍 웃은 아이린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이제 들어가도 돼요?”
“들어오렴.”
이윽고 방문을 연 로페나는 방 안에 있는 에반을 보고 살짝 놀랐다.
아침부터 방에서 나오지 않기에 어디에 있나 찾았는데, 아가씨 함께 있었다니.
도대체 언제 일어나서 들어간 것일까. 평소에 춥다는 이유로 창문을 잘 열지 않았건만,
오늘따라 열려 있는 창문에서 샌 바람에 로페나의 몸이 움찔 떨렸다.
곱게 개어져 있는 이불, 그것이 무언가 이상해졌다는 느낌을 받고 다가간 로페나는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이불의 냄새를 킁킁 맡았다.
이걸 무슨 냄새라고 해야 할까. 냄새를 맡자 몸이 살짝 달아오르는 것만 같은...
이미 전부 마르긴 했지만, 이전에 맡았던 밤꽃향이 이불에서 나는 것이 조금 의아했다.
왜 갑자기 이런 냄새가 날까?
로페나가 이불에 코를 묻을 때마다 에반의 입꼬리가 씰룩였지만,
아이린은 그런 에반의 표정을 애써 무시한 채 딴청을 피웠다.
‘설마...로페나가 알아차리진 않겠지? 그럴 리가.’
아직 이런 관계를 들키기엔 조금 민망했기에, 책을 들고 있는 아이린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만약에 들킨다면 무어라 해야 할까. 그렇게 로페나를 바라보자,
이불을 들고 냄새를 맡던 로페나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에반을 바라보았다.
분명...뭔가가 있었다. 아침에 자신을 들어오지 못하게 했던 것도 그렇고, 자연스럽게 이 곳에 있는 에반도 그렇고.
에반의 퀭한 얼굴을 본 로페나는 이 방안을 가득 메운 미묘한 분위기마저 깨달았다.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이 방에 놓인 증거들,
이불에서 나는 묘한 냄새,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
그런 것들을 바탕으로 생각을 거듭하던 로페나는 이윽고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에반에게 추궁하려는 찰나,
“로페나, 로페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여기에 있었군요.”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크리스가 로페나를 찾았다.
노크 없이 문을 열었다는 점에서 아이린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크리스는,
로페나를 보며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로페나, 내가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따라오거라.”
“에? 아니, 저 할 일 있는데요?”
“그것보다 급한 일이다. 빨리.”
크리스가 재촉하자, 잠시 아이린과 에반을 바라보던 로페나가 입술을 삐죽이며 크리스를 따라갔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크리스가 하는 말을 듣지 않을 생각은 없었기에,
방을 나서면서 툴툴거리는 로페나의 모습에 크리스는 피식 웃으며 로페나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아악, 그만해요!”
“그러게 왜 두 분 사이를 참견하려 드느냐. 내가 늦었으면 아가씨가 곤란해 하셨겠구나.”
“아니, 뭔가 이상해서 기사님한테 물어보려 했단 말이에요. 분명 뭔가가 있는데, 뭐 알고 있는 거 계세요?”
“몰라도 되는 일이야. 너는 몰라도 돼.”
로페나의 머리에서 손을 뗀 크리스는 허공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노인은 새벽에도 쉬이 잠들지 못했고, 새벽에 들리는 모든 소리를 똑똑히 듣고 있었다.
정식으로 교제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그렇게 될 줄이야.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푸르렀다. 높디 높아서, 젊을 적에 보던 하늘보다도 훨씬 높게만 보였다.
늙은 몸, 이제는 한창 때처럼 검을 휘두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시는 이가 납치당했을 때에도 무기력하게 당했던 것이 자신이 아니던가.
그 실책이 없던 일이 되어 아직까지 기사로 남아있었지만,
크리스는 내심 그 것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용서 받을 수 없는 실책.
자신을 믿고 남겨주었던 공작에게도, 아가씨에게도, 에반에게도 사과해야할 일이었다.
이런 자신이 언제까지고 호위 기사라는 직책에 있을 수는 없었다.
늙은 몸, 몇년전과 달리 완전히 가까워진 아이린과 에반을 떠올린 크리스는 샐쭉하게 웃으며 로페나를 바라보았다.
“로페나, 이번 계절제에 나를 좀 데리고 가는 건 어떠냐?”
“계절제요? 좋죠. 이번 겨울 계절제에 볼 게 그렇게 많다고 들었어요. 근데, 시간이 있으세요?”
“글쎄.”
희끗해진 턱수염을 매만지던 크리스는, 이윽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앞으로 시간이 꽤 많아질 것 같구나.”
이제 자신이 기사로 있을 시간은 끝났으니까.
로페나의 머리를 쓰다듬던 크리스는, 그 생각을 구태여 입에 담지는 않았다.
로페나가 크리스와 함께 방에서 사라지자, 에반은 크리스의 뒷모습을 보곤 뺨을 긁적였다.
분명 자신들을 도와주었다. 아마도 새벽에 깨어있던 것일까.
아이린 또한 그것을 깨닫곤 얼굴을 붉혔다. 아무도 듣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크리스 경이 깨어있을 줄이야. 어색한 침묵 속에서 입을 먼저 연 쪽은 에반이었다.
구태여 그런 주제를 입에 담는 것보다는, 다른 얘기를 하는 편이 나아보였다.
밤에 있었던 일을 언급했다간 서로 어색해지기만 할 테니까.
다른 얘기라 하면...황제가 불렀다는 것을 떠올린 에반은,
아이린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저번에 황제 폐하가 부르신 일에 대해선 어떻게 되었습니까? 슬슬 가야 하는 게 아닙니까.”
“그렇죠, 겨울이 오기 전에는 에반이 가야 할 텐데...”
아이린이 말끝을 흐리자, 에반은 조용히 웃으며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혼자 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리라.
아마도 황제를 만나러 황궁에 가는 것은 하루이틀로 끝날 일이 아니었으니까.
이렇게 오래 떨어지는 것은 처음이었으니, 아이린이 불안해하는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 에반이 다시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만 뵙고 오겠습니다. 제가 거기서 다른 누구를 만나겠습니까?”
“....올 수 있는 한 최대한 빨리 와요.”
“당연히 그래야죠.”
자신이 없으면 아이린이 외로워할 테니까.
게다가 이번에 함께 자면서 깨달은 사실은, 아이린이 누구와 함께 자는 것을 생각보다 많이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가능하면 이번처럼 함께 잘 수 있음 좋겠지만...그것이 가능할까.
빨리 오라면서, 살짝 떨리는 눈동자를 숨기려 시선을 돌린 아이린이 입술을 달싹였다.
“나도 같이 갈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허락을 한 번 구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에반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유독 자신을 배려하는 황제였다.
그 연유는 알지 못했지만, 아이린이 따라가는 것 정도를 허락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어차피 황궁에 머무르는 동안 황제를 만날 때를 제외하고 함께 하면 되는 일이니.
에반이 혹시나 하고 꺼낸 말에 아이린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게 가능할까요. 일단 할 수 있으면 해보겠지만...”
황태자가 직접 언급하지 않았던가. 가급적이면 에반 홀로 오는 것을 바란다고.
그 말이 이제와 편지 한통에 바뀔까.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아이린은 편지를 적었다.
혹시 자신이 에반과 함께 갈 수 있냐고,
그 가능성이 적다 한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것이 아이린의 심정이었다.
며칠 동안 에반이 없으면, 그 허전함을 도무지 견디기 힘들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고백을 받기 전이라면 모를까, 정식으로 교제하고 이제는 몸마저 섞은 사이였다.
함께 자는 것까지는 무리라 하더라도,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을 욕심이라 할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이 욕심이라면, 아이린은 욕심을 부려보고 싶었다.
서신을 보내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이린에게 도착한 한 장의 깔끔한 종이는 아이린이 그토록 바라던 내용이 적혀져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셨네. 같이 와도 될 거야. 정식으로 교제한다고 들었는데, 나도 그 이야기를 듣고 싶군. 축하하네.]
아이린은 한참동안 그 편지를 바라보다가, 옆에 있는 에반을 바라보며 활짝 웃어 보였다.
황궁으로 함께 간다. 떨어지는 일이 없어졌다는 사실 만으로도 아이린은 가슴 가득히 퍼지는 행복감을 느꼈다.
비록 공작저에 있을 때처럼 행동할 수는 없겠지만,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 어디란 말인가.
자연스럽게 맞닿는 입술에 배시시 웃던 아이린은, 이윽고 에반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이마를 맞대었다.
함께라는 단어가 이토록 행복한 단어였을까.
비록 황제와 무슨 얘기를 나눌지는 몰랐으나, 아이린은 이 순간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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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 저 어떡하죠?”
“아가씨, 조금 차분하게 움직이셔도 됩니다. 황제 폐하께서 부르신 게 아닙니까?”
“심장이 막 떨려요. 거기에 가면 황태자 전하도 계시겠죠? 듣던 소문으로는 엄청 잘 생겼다던데. 물론 에반 경만큼은 아니겠지만요.”
붉은 색의 머리카락이 어깨에 겨우 닿는,
순박하면서도 꽤 귀엽게 생긴 얼굴을 지닌 여인이 허둥지둥 마차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여인의 뒤를 따르는 노집사가 어색하게 웃었지만,
여인은 그런 시선조차 모른 채 앞에 있을 미래를 그리며 행복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항상 시골에만 있었기에 얘기로만 들을 수 있었던 황도의 이야기들.
에반젤리움에 무엇이 있을 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서,
피식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못한 채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스칼렛 아가씨, 수도 가셔서 남자 조심하세요. 순박한 아가씨 꼬실까 봐 걱정이 다 드네.”
“걱정마요. 내가 다 알아서 잘 할 테니까. 아빠가 또 테라제인의 수치라고 하면서 혼내는 거 안 듣는다고 생각하니까 완전 신나!”
“그러고보니 아가씨, 제가 해드린 말씀 전부 기억하고 계신 겁니까?”
노집사의 물음에 잠시 기억을 더듬던 스칼렛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해맑게 웃어 보였다.
에반젤리움에서 이상한 사람을 따라가지 말 것, 늘 사람들에게 친절히 대할 것, 그리고
“절멸이란 단어가 나오면 모른 척하라고 그랬지?”
“그렇습니다 아가씨. 황도에 계시면, 제가 말씀드린 이름 말고는 아무에게도 그런 단어를 꺼내시면 안 됩니다.”
“알아, 알아. 맨날 그 얘기만 지겹게 들었으니까 다 알지.”
항상 지겹게 들어왔던 소리를 떠올린 스칼렛은 작게 눈살을 찌푸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절멸을 위해서 항상 듣는 말이었지만,
그게 세상 사람들에게는 나쁜 것처럼 포장되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며칠 전에는 종종 자신과 대화를 나누던 베르만 삼촌도 죽었다고 듣지 않았던가.
스칼렛은 멍청하지 않았고,
사람들이 절멸이 좋은 곳이란 걸 알게 될 때까지 입을 다물 것이었다.
모든 것은
절멸을 위해서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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