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 Love is an open door (3)
* * *
“아는 여자에요?”
에반은 태어나 처음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거대한 난처함을 느꼈다.
평소 같았으면 무슨 말이든 그저 웃어넘겼겠지만,
이번만큼은 스스로도 어찌 대답해야 할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린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가을,
아직 얼음이 얼기에 무리가 있는 날씨였지만 에반은 온몸을 죄여오는 추위에 몸을 떨었다.
평소에 보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눈빛,
아이린은 제 손을 붙잡은 에반의 손을 쳐내면서. 조용히 탁자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탁, 탁. 점점 빨라지는 손가락에 에반이 조용히 그것을 바라보자,
아이린은 이내 기가 찬 듯 숨을 내뱉으며 에반을 쏘아보았다.
다른 여자와 인연이 있다는 소리는 여태껏 한 번도 듣지 못했지 않던가.
자신에게 숨겼던 건지, 아니면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건지.
여기서 짚고 가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는 직감이 강하게 떠오른 아이린이 에반을 바라보았다.
테라제인이라는 가문에 스칼렛이라는 여인이 있긴 했다.
나이는 자신과 비슷했고, 에반이 만날 마음이 있다면 아마도 만나는 것에 그리 어려움을 겪진 않았으리라.
에반은 그럴 능력이 있었고, 어지간한 여자는 그런 점에 쉬이 넘어갔을 테니까.
하지만 북부와 완전히 떨어진 남부의 여인을 만날 계기가 있긴 했던 것일까.
어렸을 때...라는 가정이 있긴 했으나, 프리드 가문 또한 제국 북부에 위치한 가문이었다.
이 넓은 곳에서 게이트 없이 남부와 북부가 교류하는 일은 드문 만큼,
어릴 때 유리스로 온 에반이 그런 여인과 만나 친분을 나누었을 가능성은 극히 적다고 할 수 있었다.
“...아이린, 정말 아닙니다. 저도 그런 이름을 알고만 있었을 뿐이라니까요.”
“어떻게 알고 있었는데요.”
그 차가운 대꾸에 입술을 오물거리던 에반은, 이윽고 한숨을 내뱉으며 땅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고 있냐고 묻는다면 무어라 대답한단 말인가. 사실 이 세계가 소설입니다?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에반은, 아이린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전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흑마법사들이 간간히 언급했던 이름이었으니까요.”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 흑마법사들이 테라제인이라는 가문을 언급하곤 했으니까.
전개가 아무리 틀어졌다고 한들 그것까지 달라졌겠는가.
에반이 아이린의 눈을 마주하며 말하자, 아이린은 그 축 늘어진 어깨를 보곤 마음이 약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이름 정도는 알고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흑마법사와 항상 싸우던 것이 그였으니, 이런 정보에 대해서는 가장 해박할 터였다.
사실 빌테인이 제게 얘기한 제물이라던지,
붉은 달 같은 것들에 대한 정보도 따지고 보면 흑마법사들이 알려준 것이었으니까.
에반이 그 이름에 대해 안다고 한들 특별하다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힘없이 늘어진 어깨. 방금까지의 당당한 태도는 완전히 사라져,
제 눈치를 보고 있는 한 남자를 보던 아이린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자신이 너무 차갑게 추궁한 것이 아닐까. 그냥 나긋나긋하게 물어보아도 됐을 텐데,
혹여 상처입어 자신을 싫어하게 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에 눈앞이 새하얗게 되는 것만 같았다.
혹시 또 예전처럼 자신을 대했다고 토라지는 건 아닐까?
나중에는 이런 것이 싫어서 헤어지자고 하는 것은 아닐지,
잠시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본 아이린은 등골이 쭈뼛 서는 것 같은 감각을 느끼곤 어깨를 움찔 떨었다.
여전히 에반은 제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인 채였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에반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생각에 잠겨있던 아이린은 이내 화들짝 놀라며 에반의 허리춤을 붙잡았다.
“자, 잠깐만요. 나 아직 얘기 안 끝났어요.”
“......”
에반은 그저 이 자리가 불편할 따름이었다.
아까부터 무표정한 아이린의 표정도 그렇고,
스칼렛 테라제인에 대한 얘기를 너무 성급하게 꺼낸 것이 걸리지 않던가.
아직 스칼렛에게 무언가가 있다고 판단하기엔 일렀다.
물론, 흑마법사와 관련되어 자주 언급되는 가문에 속해있다는 것은 놀랍긴 했다.
원작에서 테라제인이 언급되는 경우는 주로 자신을 적대하는 골칫덩어리 중 하나로 언급되었을 뿐이었으니까.
잠시 아이린을 바라보던 에반은, 이윽고 아이린의 차가운 표정을 보곤 작게 고개를 숙였다.
“믿어주시는 겁니까?”
“...항상 믿고 있어요. 그런데, 잠깐 다른 여자 이름이 나오니까. 나도 모르게 잠시 정신을 놓았나봐요. 미안해요.”
“아가씨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또 아가씨라고 부르네요.”
아이린의 그 말에 에반은 잠시 허공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이린, 미안합니다.”
“나는 그냥 놀랐을 뿐이에요. 다른 여자 이름 좀 말할 수도 있죠. 그런데...내가 조금 놀랐나봐요, 에반이 그렇게 말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요.”
“그냥 이름만 알고 있는 사람일뿐입니다.”
아이린은 에반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에반의 손을 잡았다.
사실 조금 화났을 뿐이지, 에반이 하는 말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눈치를 이토록 보는 에반을 보니, 어쩐지 미묘한 감정에 휩싸인 아이린은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믿어요.”
의심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아이린은 그 잠시간의 의심마저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에반을 의심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고백을 해준 것도, 반지를 끼워준 것도,
자신을 구하겠다며 목숨까지 내걸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의심한 자신이 어리석은 것이리라.
허나 한 가지 짚고 가야할 점이 있다면.
아이린의 눈이 다시금 스산해지자, 어깨를 살짝 떨은 에반이 입술을 달싹였다.
“에반, 저는 에반이 무얼 하든 좋아요. 이렇게 손을 잡고 있는 것도, 이렇게 같이 있는 것도 다 좋은데...”
잠시 에반을 바라보던 아이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모든 것을 보듬어주고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한들 한 가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조금은 추잡하고 음습한 감정이라 할 수도 있으나,
아이린은 이 감정에서만큼은 양보할 생각이 추호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여자는 안 돼요.”
에반의 손을 붙잡은 아이린의 손아귀 힘이 강해지자, 에반은 헛웃음을 흘리며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방금보다 눈빛이 차가워진 것 같은 것은 기분 탓일까.
“저번 연주회 때, 에반이 다른 여자들에게 시선을 주는 걸 봤어요. 눈웃음도 짓고, 어떤 영애에겐 웃어도 주더군요?”
“...그건”
“지금 그걸 무어라 하는 게 아니에요. 그때는 교제하는 사이도 아니었으니, 제가 무어라 할 자격은 없겠죠. 하지만 이제부터가 중요한 거예요 에반.”
에반은 그때의 일에 대해 무어라 변명하려 했지만,
아이린의 단호한 말투에 결국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단지 로만 공작에게 보냈던 제스처가 아니던가. 결국 통하지 않아 아이린이 납치되긴 했으나,
이전에 아이린에게 해명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며 에반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만약 에반이 다른 여자에게 그렇게 한다면 나는...”
아이린의 눈동자가 불안한 마음과 섞여 떨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마음을 준 사람이었고, 처음으로 의지하게 된 사람이었다.
자신이 처음 경험했던 것의 대부분이 에반과 함께했던 것이었고,
에반이 죽었을 때의 기억을 아이린은 아직도 아픈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깨문 입술에서 비릿한 맛이 새어나왔다.
그런 에반이 다른 여자와 함께 미소짓는 것을 보게 된다면.
잠시 눈을 질끈 감은 아이린의 입에서 무거운 숨이 토해졌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릿했다. 그런 현실이 있다는 것을 믿기도 싫었고,
단지 망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어쩌면 조금은 질척이는 감정이라 할 수도 있었지만,
아이린은 그것을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의 에반은 자신에게 있었고,
에반의 마음 또한 제게 있지 않은가. 다만 그것이 바뀌지 않도록 노력할 뿐이었다.
점차 일그러지는 아이린의 얼굴을 보던 에반은 손을 뻗어 아이린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평소에는 시선 관리에 신경을 쓰고 있었건만, 아무래도 조금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성 싶었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이린은, 제 등을 토닥이는 에반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옷깃을 붙잡아 그대로 훅 당겨, 코앞까지 다가온 에반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조금 조심해줘요. 알았죠?”
“......”
그렇게 거리가 벌어지고, 아무렇지 않게 싱긋 웃는 아이린이었지만.
에반은, 그날 처음으로 아이린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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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에반은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신경을 기울였다.
아이린이 다른 여자와 관련된 일에 민감한 만큼,
자신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는 여자라면 시녀라 한들 일부러 피해 다닐 따름이었다.
오는 편지는 이전보다 줄었지만, 그래도 로페나에게 부탁해 자신에게 전달되지도 않도록 노력했다.
더 이상 정원에서 편지가 불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스칼렛이라는 이름을 듣고 불안해하던 아이린 또한 그런 일에 대해 아예 잊은 듯 보였다.
사실 기억하고 있었지만, 아이린은 구태여 그런 것을 에반 앞에서 티내지는 않고 있었다.
허나 이런 사이가 언제까지고 쭉 이어질 수는 없었으니,
그것은 아이린에게 있어서 커다란 고민이나 다름없었다.
연인이 되었지만, 사실 이전과는 다를 것이 없는 사이가 아니던가.
조금 더, 이 관계에서 한 발자국을 더 내딛는다면.
“흠.”
아이린은 이전에 로페나가 했던 조언을 떠올렸다. 에반이 그런 것을 신경 쓰지 말라하긴 했으나,
결국 아이린이 도움을 받을 사람이라곤 로페나 뿐이지 않던가.
천천히 기억을 되살리던 아이린의 얼굴이 점차 붉어졌지만,
애초에 아이린 혼자뿐인 방에서 그런 것을 신경 쓸 사람이라곤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손, 잡았다. 포옹도 했고, 입술 또한 이제 가볍게 맞추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허나 그런 것은 정식으로 교제하기 이전에도 했던 것들이었으니,
결국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제외하곤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아이린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아가씨, 그거 아세요?
며칠 전 로페나와 나눴던 대화.
사랑은 이미 활짝 열려진 문과 같다며, 서로 마음만 맞는다면 그 무엇을 하더라도 어색하지 않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잠시 곱씹던 아이린의 뺨이 잠시 붉어지긴 했지만,
그녀는 그 말을 꽤나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지난 번 일로 조금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에반을 언제까지고 지켜보기만 하겠는가.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런 것에 대해서 조금도 알지 못하는 아이린으로서는 그저 막막할 따름이었다.
그저 침대에 누워 남녀 간의 교합이 이루어진다는 것만을 알 뿐,
그 이전 단계나 애초에 그 교합이란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조금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것이 아주 부끄럽고 망측한 것이란 걸 잘 알고 있는 터라,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아이린이 이내 달뜬 숨을 내뱉으며 손부채질을 해댔다.
그리고는 책장에서 책을 하나 빼내어,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고는 그 책의 첫 장을 가볍게 열어젖혔다.
눈밭처럼 새하얀 첫 페이지 가운데에 적힌 글자.
아직 잉크가 채 마르지 않아 살짝 번진 종이에는, 떡하니 평범하지 않은 단어들이 적혀있었다.
[영애의 50가지 그림자]
꿀꺽
아이린의 목울대가 크게 한차례 움직였다.
이런 책을 구입하게 될 것이라 상상도 하지 못했으나, 그래도 공부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민망함이 가시는 것 같았다.
책을 처음 로페나에게 받았을 때의 그 떨림, 아직도 터질듯이 뛰는 심장 소리가 밖에 들릴까 아이린이 다시금 주변을 살폈다.
로페나에게 아무도 들이지 말라하긴 했지만, 그래도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듯 했다.
“...후우.”
로페나가 추천해준 책이었다.
남녀 간의 관계를 조금 더 높은 단계까지 이르게 해줄 수 있는 마법같은 책이라며 제게 추천해준 책.
약간의 음담패설이 섞여있다고 했지만, 그래도 참고할 만한 책이라는 말에 덜컥 구입한 책이었다.
표지는 깔끔한 것이 그 말이 맞는 것 같았지만, 이 구석에 박힌 19라는 숫자가 마음에 걸렸다.
빨간 테두리 안에 적혀진 19라는 숫자,
그리고 그 밑에 적혀져 있는 쳥소년 구매 불가 표시. 잠시 눈살을 찌푸리던 아이린은,
이윽고 책의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장, 한 장. 종이를 넘길 때마다 어깨를 움찔 떨던 아이린은,
잠시 뒤 책을 중간 즈음 읽다가 이내 미묘한 표정으로 책을 덮었다.
“......”
아이린의 표정은 무표정에 가까웠다.
무언가를 생각하듯, 그리고 무언가를 고민하듯.
진지한 표정으로 한참동안 허공을 바라보던 아이린은 자신이 보던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책에서 본 내용이 사실이라면. 아이린의 입꼬리가 천천히 비틀렸다.
허탈하다는 듯, 정적 속에서 새어나온 한숨은 그 어떤 한숨보다도 깊을 따름이었다.
허나 이내 번뜩인 아이린의 눈동자에서는 이전과 사뭇 다른 분위기가 풍겼으니,
살짝 붉혀진 뺨을 매만지던 아이린은,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 론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
“하아.”
한숨을 내쉰다. 하릴 없이 내뱉은 한숨은 그저 바람에 섞여 아무 흔적 없이 사라질 뿐이었지만,
여전히 답답한 속은 도무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대충 손으로 털어내며,
거울 속에 비치는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던 에반이 이내 쓰게 웃었다.
스칼렛이라는 이름을 들은 뒤로 이래저래 싱숭생숭한 터라,
아이린에게 이전처럼 신경을 잘 써주지 못하고 있지 않던가.
그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지만, 혹여 아이린이 그 때문에 마음이 상했을까 이런저런 부분에서 신경이 많이 쓰이는 터였다.
나름대로 조심한답시고 행동하긴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니던가.
차라리 속으로 생각할 걸. 구태여 스칼렛이라는 이름을 밖으로 내뱉은 자신의 행동에 후회하며,
거울을 짚은 채 한숨을 내쉬던 에반은 조용히 복도로 향했다.
이제는 모두가 잠들었을 새벽, 허나 완전히 어두워졌어야 할 복도 한 쪽에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을 본 에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새벽에 누가 나와 있단 말인가. 불이 켜진 것이 식당 쪽이란 걸 깨달은 에반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자,
이윽고 식당 안에서 보이는 한 인영을 보곤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아이린.”
평소에 입던 옷은 어디로 갔는지, 젖은 머리카락을 그대로 냅둔 채 새하얀 가운 하나를 걸친 아이린이 식탁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 앞에 놓인 잔, 그리고 그 속에서 찰랑이는 붉은 색의 액체.
영락없이 와인이라는 걸 알아차린 에반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자, 그런 에반을 발견한 아이린이 입을 열었다.
“안 취했어요.”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왜 혼자 술을.”
“그냥, 생각하는 게 있어서요.”
살짝 붉어진 볼을 본 에반이 침음을 삼켰다.
지난번처럼 제대로 취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취기가 올라온 것처럼 보였다.
방으로 데려가기 위해 손을 내밀자, 그 손목을 낚아 잡아 챈 아이린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안 된다는 듯, 와인이 묻어 살짝 붉어진 입술을 핥은 아이린이 에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살짝 감긴 눈, 조금은 야릇해보이는 시선에 에반이 어깨를 움찔 떨자 아이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한 잔 할래요?”
당연하게도, 에반은 그 요청에 거절 할 수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