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98화 (98/181)

〈 98화 〉 그대에게 (6)

* * *

“...아가씨.”

“왜요?”

“언제까지 저를 깔고 계실 겁니까.”

잠시간의 입맞춤이 끝나고, 에반은 자신의 위에 포개진 아이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렇게 있는 것도 괜찮으나, 그래도...부끄럽지 않은가.

가슴팍을 누르는 부드러운 감촉에 살짝 볼을 붉히자, 쿡 하고 웃은 아이린이 에반을 그대로 끌어안았다.

“안 비킬 건데요?”

에반은 조용히 웃었다. 숨이 막힐 것처럼 끌어안은 터라, 신경 쓸 것이 여간 많은 것이 아니었다.

가슴팍에 닿은 감촉, 에반의 시야에 아이린의 목덜미가 들어왔다.

조금의 잡티조차 없이 새하얀 목덜미는 음욕을 불러 일으켰으니,

에반이 내뱉는 뜨거운 숨결에 아이린에 귓불이 붉게 달아올랐다.

연인처럼 행동했지만, 연인이 아닌 사이였다. 좋아하는 티를 내긴 했지만,

정작 입밖으로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 미묘한 관계였기에 하지 못했던 것들,

이제야 비로소 욕심을 낼 수 있는 것에 대해 아이린은 조금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허나 아직 고백의 여운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에반이었기에,

아이린이 이토록 저돌적으로 행동하는 것에 대해 그저 당황해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좀...”

꾸욱­

“아이린, 제발­”

꾸욱­

점점 가슴을 짓눌러오는 부드러운 무언가에 에반은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놀린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조금 너무한 게 아닌가.

아래에서 서서히 고개를 들어올리려 하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눈을 부릅뜬 에반이 이어 아이린의 팔목을 붙잡았다.

아이린의 입장에선 그게 꽤나 갑작스러운 행동이었고,

그대로 몸이 뒤엉켜 입장이 역전된 아이린은 자신을 쏘아보는 에반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어, 음.”

“그만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에반의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여러 감정이 뒤섞인 눈을 본 아이린은 입꼬리를 어색하게 당겼지만,

에반은 이토록 당돌한 제 아가씨를 용서해줄 생각이 없었다. 참고 있는 것이 어디 그녀뿐이었던가.

자신 또한 아주 오랜 시간 참고 있었다.

3년, 그 시간을 떠올린 에반이 조용히 팔목을 붙잡았던 손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깨를 거칠게 움켜쥔 터라, 아이린은 저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

생각보다 아프다­ 허나 에반은 멈추지 않았고, 점차 제 가슴께로 향하는 손길에 두 눈을 질끈 감기에 이르렀다.

묘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연인이 되자마자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지만, 이 열기 또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간의 침묵, 쇄골까지 닿은 손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깨달은 아이린이 에반을 향해 천천히 눈을 떴다.

명백하게 망설이는 모습, 살짝 힘이 빠지는 나머지 길게 숨을 내뱉은 아이린이 입을 열었다.

“뭐해요...?”

에반은 그런 아이린의 시선을 피한 채 입술을 오물거렸다.

부끄럽게 만들어주려고 했는데...막상 손을 뻗을수록 부끄러워지는 것은 자신이라,

도무지 더 이상의 선을 넘을 수가 없었다. 이런 것은 처음이지 않던가.

잠시 한숨을 내뱉은 에반은, 이윽고 아이린의 허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처음이지 않습니까.”

“......”

“처음을 이렇게...하는 건, 그다지 바라지 않습니다.”

살짝 시선을 내리 깔은, 진지한 표정을 지은 에반이 조용히 중얼거리자.

그런 에반을 조용히 바라보던 아이린이 이윽고 웃음을 터트렸다.

입을 손으로 가린 채 한참을 웃는 에반을 멍하니 쳐다보는 에반이 작게 눈살을 찌푸리자,

배어나온 눈물을 닦아낸 아이린이 입을 열었다.

“장난이었는데, 왜 이렇게 진지해요.”

“장난이라뇨.”

“설마 했는데, 혹시 제 몸을 만지려고 했나요? 평소에도 저를 그런 눈으로­”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에반이 다급히 소리치자, 피식 웃은 아이린이 에반의 몸을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둘 다 성인인데, 고작 그런 것으로 기겁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던가.

얼굴을 잔뜩 붉힌 에반의 모습을 보는 것은 꽤 오랜만인 터라,

쿡 하고 웃은 아이린이 에반의 뺨을 두 손으로 꾹 누르며 답했다.

“이런 점이 좋아요.”

손바닥에 눌린 볼이 부드러워서, 잠시 손을 이리저리 움직인 아이린이 장난스레 웃어 보였다.

“볼이 부드러운 점 말입니까?”

“그것도 있고요.”

조금은 놀림당하는 기분이었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어째서 그렇지 않겠는가.

이제는 이렇게 해도 되는 사이였으니까. 이제는, 연인이었으니까.

새삼스레 그것이 믿기지가 않아서, 에반은 멍하니 아이린을 바라보다 이윽고 뺨에 닿은 손을 잡아끌어 내렸다.

“솔직히 말해도 됩니까?”

“무얼요?”

“꿈인 것 같습니다. 지금 이렇게 된 것 말입니다.”

고백을 하고 이제는 연인이 되었다, 라. 상상은 해왔지만 막상 그것이 현실이 되자 얼떨떨할 따름이라,

텅 비어있는 아이린의 손가락을 바라보며 에반은 조용히 침묵했다.

바람이 불어와 뺨에 닿았다. 새하얀 긴 머리카락이 그 바람에 흩날려 얼굴을 간질일 만큼이나 가까운 거리.

어색하리만치 푸른 하늘과, 주변을 장식한 장미의 군집은 꼭 몽환 속의 한 장면과도 같지 않던가.

허나 이 모든 것이 사실이었고, 자신은 이제 아이린과 연인...사이가 되었다.

“나도 그래요.”

앉아있는 에반의 무릎에 털썩 누운 아이린이 입을 열었다.

머리를 기댄 채, 커다란 나무 위에 걸린 나뭇잎들을 바라보며 이 순간을 만끽한다.

꿈만 같다는 감상은 에반만 느끼는 것이 아니리라. 지금 이렇게 함께 있으면서도,

방금까지 서로의 몸을 포갠 채 입을 맞췄음에도 그리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설마 눈을 감았다가 뜨면 전부 꿈이었던 것은 아닐까­ 잠시 질끈 눈을 감은 아이린이 눈을 떴을 때,

그 눈에 담긴 것은 언제나 보고 있었던 풀빛의 눈동자였다.

부드럽게 휜, 저를 향해 웃어주는 이 얼굴은 분명 자신의 연인이지 않던가.

“꿈은 아니네요.”

“...엉뚱하신 면도 있으셨군요.”

“그래서, 싫어요?”

“......”

언젠가 한 번 겪어본 것만 같은 대화에 에반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이린은 드디어 에반에게 한 방 먹여주었다는 생각이 들어 샐쭉하게 웃었고,

이내 한숨을 내뱉은 에반이 부드럽게 그 흰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고백은 했지만, 아직 줄 것이 남아 있었다. 품속에 있는 반지를 끼워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허나 차마 그 말을 언제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 본 채 상념에 잠길 뿐이었다.

세이렌이 언제까지고 이 환상을 보여줄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장소는 제게 꽤나 의미 있는 곳이었으니,

기왕이면 이곳에서 반지를 끼워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아이린의 눈치를 살피던 에반은 이윽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 생각보다 낭만적이지 못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에요 갑자기?”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백이야 얼떨결에 했지만, 도무지 반지를 어떻게 줘야 할지에 대해선 뚜렷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말이야 몇 번이고 해줄 수 있었다. 부탁하지 않더라도, 입술이야 몇 번이고 맞춰줄 수 있었다.

허나 반지를 준다는 것은 그와는 차원이 다른 일이 아니던가.

“사랑한다는 말만으로도 충분히...낭만적이었어요.”

“그렇습니까.”

아이린의 말에 에반은 피식 웃었다. 사실 어떻게 말했는지조차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입이 열렸고, 목소리가 나왔고. 단지 그 정도를 기억할 뿐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것을 입에 담았는지 잘 떠올릴 수 없지 않던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솔직하게 말하는 것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는 걸, 마음에 담고 있는 걸 최대한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전부였다.

솔직하게.

점차 흐릿해지는 빛은 이제 곧 세이렌의 마법이 끝나감을 의미하고 있었다.

반짝이는 햇빛이 사라져 그 자리에 별빛이 스며든다.

새하얀 장미는 어둠에 적셔져 보랏빛 음영에 물든 잔디로,

하늘을 향해 솟아 오른 나무가 있던 자리는 달빛이 빛무리를 그려내는 호수로.

그 변화를 바라보면서, 에반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가씨와 연인이 된 것이, 솔직히 말해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갑작스레 그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에반의 말에 아이린의 표정이 점차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을 사랑한다면서, 이제와 말을 바꾸려 하는 것일까.

무릎에 누워 변해가는 하늘을 바라보던 아이린이 몸을 일으켜 쏘아보자, 에반은 조용히 그 차가워진 시선을 마주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 말대로 입니다.”

“방금은­”

“연인으로는, 만족 못 할 것 같다는 말입니다.”

이윽고 에반의 품속에서 꺼내진 반지함을 본 아이린은 벙찐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금의 생각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은 채 연속으로 튀어나온 그것들은 분명­

“지금은 단지 증표일 뿐입니다. 우리 사이가 연인이라는 증표, 서로가 사랑하고 있고, 앞으로도 영원하기를 바라는 증표.”

달칵­

열린 반지함에서 드러난 반지는 두 개였다.

하나는 푸른빛을, 또 다른 하나는 풀빛을 띄는 보석이 박힌 반지.

사파이어가 박혀진 반지는 조금 컸고, 에메랄드가 박혀진 반지는 조금 작았기에.

아이린이 그 반지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깨닫는 것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반지가 제 존재감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약혼 반지, 아니면 단순히 연인끼리 착용하는 반지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반지만으로도 심장이 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리라.

아까와는 또 다른 설렘이 찾아와서, 아이린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멍하니 에반을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리 낭만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그저 증표일 뿐이라 말하긴 했으나, 고작 증표에서 끝날 반지가 아니었다.

앞으로의 영원을 약속하기 위한 반지였다. 고백하며 꺼내려 했지만,

갑작스레 자신을 덮친 아이린 탓에 차마 반지를 꺼내지 못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주는 것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그 마음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솔직할 따름이었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금처럼, 설령 싸우는 일이 있더라도 사이가 깨지지 않기를.

언제나 제 빛을 잃지 않는 보석처럼 영원히 서로를 사랑할 수 있기를.

그 염원을 담은 반지를 조심스럽게 꺼내들은 에반은,

이윽고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은 채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재촉하듯,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아이린이 입술을 달싹였다.

“...연인으로 만족 못 한다는 말, 진심으로 한 건가요?”

“당연하게도, 진심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에반이 장난스런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설마, 아가씨는 연인으로 만족하시는 것이­”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하아, 한숨을 내뱉은 아이린이 제 앞에서 무릎을 꿇은 에반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낭만적이지 못하다고 할 때부터 알아들었어야 했는데,

이렇게 갑작스레 반지를 받을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한 터였다.

허나 그렇다고 이 상황이 싫느냐고 묻는다면, 아이린은 에반을 보며 피식 웃었다.

왜 싫겠는가. 사랑하는 사람이, 연인에서 만족하지 못한다며 후일을 약속하자는 징표를 주겠다는데.

다만 이대로 받을 수는 없어서, 아이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이걸 받으면, 에반은 평생 다른 여자 쳐다보지도 못 보게 할 거예요.”

“쳐다볼 생각도 없습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언제나 아가씨만 눈에 비춰진다고.”

“나중에 도망간다고 해도 안 놓아줄 거예요. 묶어서라도 제 옆에 둬서, 에반이 한 말을 꼭 지키게 할 테니까요.”

“제가 아가씨를 두고 어째서 도망가겠습니까?”

“...늘 내 곁에만 있어야 해요. 봄이 와도, 여름이 와도, 가을이 와도, 겨울이 와도. 내 곁에만 있어요.”

조금은 머뭇거리는 말에, 에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야 말로 가장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었으니까.

잠시 그런 에반을 바라보던 아이린이 천천히 손을 뻗자, 에반은 조심스럽게 그 손을 붙잡았다.

가느다란 손가락, 약지에 반지를 끼워 넣으며 일렁이는 아이린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영원히,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서지는 빛이 흩어져 어둠 속에 스러진다. 모래가 흩날리는 것처럼 환상이 흩어지고 있었다.

벌써 이런 광경을 두 번째 보는 것이었지만, 그렇다한들 이 광경을 어찌 황홀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금가루가 반짝이듯, 별이 흐르듯 주변을 가득 메우는 빛무리가 두 사람을 감쌌지만.

서로의 눈은 오직 서로를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사랑해요.”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선 채 자신을 바라보는 에반을 향해 아이린이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지금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오직 그것뿐이었다.

에반은 그 말에 미소 지었다. 공교롭게도,

에반 또한 내뱉을 수 있는 말이란 고작해야 그것을 긍정하는 것뿐이었다.

“다행이네요. 저도 그렇습니다.”

처음처럼, 몸은 포개어지지 않았다. 아까처럼, 서로의 입술이 맞닿지는 않았다.

서로의 손을 잡은 채로, 약지에서 느껴지는 어색한 금속의 촉감을 느낀 채 그렇게 호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달이 뜬 하늘, 별이 자리 잡아 조금의 어둠도 새어나오지 못하는 그 찬연한 빛무리.

에반은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이 운명이라면, 이제야 그 운명에 비로소 첫걸음을 걸은 것이 아닐까 하고.

로판 속 악녀의 호위 기사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을 떠올린다.

그때 눈을 부시게 만들었던 새하얀 햇빛 대신에 달빛이 있었고,

조금은 지저분한 방 대신에 별 아래 반짝이는 호숫가가 있었다.

그것이 변한 것처럼, 그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지지 않았던가.

로판 속의 악녀는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여인이 되었고, 자신은.

그런 여인의 연인이자 호위 기사였으니까.

불어오는 바람 소리에 두 사람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3년 전, 이곳에서 연주했던 노래가 들려오는 것만 같은 것은 어째서일까.

어쩌면, 아직 환상은 끝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의 환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까.

앞으로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그런 환상 속에 두 사람은 있을 터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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