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Dolce(달콤하고, 부드럽게)
* * *
마음의 준비를 전부 마쳤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인지 입술이 쉬이 열리지 않았다.
별처럼 반짝이는 눈을 바라본다. 어떠한 대답을 기다리는 것인지,
묘한 침묵 사이에서 여전히 마주하는 시선을 피한 에반이 조용히 숨을 내뱉었다.
탁한 숨소리가 바람 소리에 파묻혀 사라진다...여전히 변하지 않은 풍광 속에서,
애꿎은 벌레 울음소리가 고백을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에반?”
아이린의 말에 에반은 답하지 않았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것일까.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조용히 가다듬으면서, 이윽고 잡고 있는 아이린의 손을 살짝 잡아 당겼다.
따라오라는 듯, 부드럽게 끌어진 손길에 아이린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조용히 호숫가를 걸으면서, 에반이 무어라 말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을 뿐이었다.
아이린의 시선이 에반을 향했다. 하려던 말이 무엇일까.
여러 생각이 떠올랐지만, 아이린은 그 어떤 생각에도 확신을 지닐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괜한 기대감을 품었다가 깨진다면 어떻게 할지에 대한 두려움이 막연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저 혼자만의 기대라면, 서로의 생각이 미묘하게 어긋난다면. 하여 말을 삼갔다.
이따금 툭 튀어나온 돌이 밟히는 흙바닥을 쓸어 걸으면서, 누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침묵을 노닐 따름이었다.
스으으
불어온 바람이 호숫가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호숫가 위에 보이는 바위에 앉아있던 새 하나가 달에 비춰 그림자를 만들었다가,
이윽고 파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하늘을 향해 날았다. 그렇게 다시, 바람이 분다.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은 건조했다. 여름의 습한 공기는 어느덧 사라져, 서늘한 가을 바람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여전히 나뭇잎은 푸르렀으나, 서서히 그 속은 변해가고 있음이라.
변화, 에반은 바람에 섞여 휘날린 나뭇잎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말을 꺼낸다면, 이제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에 대해 조금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만약 거절당한다면앞으로도 계속 아이린의 호위 기사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타당한 두려움이었다.
거절 몇 번으로 사그라질 마음이 아니었기에. 에반은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싶었다.
허나, 그렇다한들 더 이상 물러날 수는 없었다. 앞으로 절멸과의 싸움은 이어진다.
빌테인과 싸울 때처럼 생사를 오갈지도 모르고, 이 모든 싸움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엔.
그 시간이 언제일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오늘이 아니면, 이 다음은 언제일까.
여전히 손을 잡고 있는 아이린을 바라본 에반이 옅게 웃어 보였다.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진 않았을까. 고백도 하기 전에 그 생각을 간파당하는 것만큼 우스운 일은 없으리라.
천천히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에반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이 있었다. 여러 감상을 전해주는 그 별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가끔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아이린의 시선이 에반을 향했다. 완전히 사라진 구름,
달빛에 희미하게 빛나는 에반의 눈동자가 잠시 일렁였다.
그 눈동자에 얽힌 감정이란 무엇일까. 허나 알 수가 없어서,
아이린은 조용히 에반을 바라본 채 입을 다물었다.
그런 아이린의 시선에 슬쩍 웃은 에반은,
손가락과 손가락을 이어 깍지를 낀 채 가볍게 손을 흔들곤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이 모든 것이 전부 꿈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있는 것도, 시선을 마주하는 것도, 추억이라 생각하며 남겼던 기억도. 사실은 그저 환상에 지나지 않아 언젠가는 이 꿈에서 깨어나지 않을까 하고,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알고 있음에도 그렇습니다. 전해지는 체온이 거짓일리가 없는데도, 가끔은 그런 막연한 두려움이 들곤 합니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전부 사라질까 봐, 비참했던...그리고 다시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던 그 때로 되돌아갈까 봐.”
아이린은 알지 못하는 과거의 이야기였다.
이런 얘기를 듣고 그녀는 과연 어떤 생각을 품을까 에반은 조용히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뱉고 있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여기서 보냈던 4년이 전부 그저 망상에 지난 것은 아닐까.
여전히 자신은 그 단칸방 속에 몸을 웅크린 채 누워있고,
그저 소설을 읽다 잠들어 영원한 환몽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허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렇다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고, 너무 많은 인연들을 만났으며,
이 세상이 소설 속이라는 것 자체에 의심을 품을 정도였다.
이곳은, 이미 자신에게 하나의 세상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소중한 사람이 있었다.
제 목숨마저 기꺼이 바칠 만큼 사랑스러운 세상이었기에, 에반은 이윽고 그 의심을 지울 수 있었다.
“그저, 그렇게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이 손을 놓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리라.
에반에게 아이린은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소중했으며, 사랑하고 있으며, 동시에 모든 것이기도 했다.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을 증명해주는 이, 자신이 환몽이 아닌 현실 속에 있음을 자각시켜주는 이,
그리고. 이렇게 닿아있을 때면, 그 어떤 때보다도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이였다.
깍지를 낀 손에 힘이 들어가자, 아이린은 조용히 에반의 손을 다른 손으로 감싸 안았다.
떨고 있었다. 불안해하는 것일까. 긴장하는 것이라 생각할 지도 몰랐으나,
아이린은 에반이 미약하게나마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혹여 이전의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면.
아이린이 입을 열려는 찰나, 에반은 다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허나,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어쩌면 아이린이 이 손을 놓더라도,
에반은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자신을 위해 울어주는 사람을 만났다.
에반은 조용히 아이린의 눈가를 쓸어내렸다. 울지는 않았으나, 그 부드러운 손길에 아이린은 천천히 몸을 기대었다.
그때 붉게 충혈 되었던 눈, 떠나지 말라며 붙잡는 아이린을 보며 어떤 감정을 느꼈던가.
그 눈물을 멈추게 하기 위해 안심하는 것보다도,
평생토록. 자신이 그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욕망이었고, 어쩌면 추악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생각이었다.
허나 스스로 그런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허리를 끌어안은 이 손을 떼고 싶지 않았다.
이것은 불안이나 집착 같은 것이 아니라, 에반은 조용히 이 감정의 이름을 떠올렸다.
분명, 사랑이었다.
가슴팍에 기댄 채, 아이린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에반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얼굴이 쓸어내려지면서도, 그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목소리에 섞인 미약한 정열이 가슴에 와 닿았다.
불안하다면서, 이제는 아니라는 것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잠시간 이어진 침묵 속에서, 마침내 시선을 마주한 아이린이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네요.”
“푸념입니다. 예전에는 그랬다는, 이제는 의미 없는 얘기에 불과하죠.”
에반에게서 살짝 떨어진 아이린이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여전히 영문 모를 소리만 늘어놓으니, 이제와 의미 없는 얘기를 하는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허나 의미 없는 얘기를 하는 사람치고는, 에반의 표정은 퍽 진지해보였다.
그의 시선은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별, 흩뿌려진 어둠 사이에 박힌 별을 향해 있었다.
“별,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전에는 그랬죠.”
별이 외로워 보였으니까요. 말을 덧붙인 에반은 천천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신기하게도, 동생을 떠올렸음에도 별 다른 감정이 피어오르지 않았다.
후회도, 슬픔도, 회한도 없이. 그저 하늘이 아름다워 보인다는 감상뿐이지 않던가.
“지금은 안 그래요?”
“그냥 예뻐 보이기만 합니다.”
“풋.”
예뻐 보인다니, 아이린은 갑작스레 터져 나온 웃음에 입을 가린 채 에반을 바라보았다.
에반은 머쓱한 나머지 볼을 긁적일 따름이었다. 그렇게 웃을 필요까지야 있었을까.
나름...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생각이 변했던 건데.
허나 그런 이유를 세세히 말할 수가 없어서, 에반은 이내 어깨를 한차례 으쓱이며 그 말에 모른 채했다.
쿡쿡, 아이린은 그런 에반을 보며 웃음을 숨겼다.
이렇게 쑥스러워 하는 에반을 보는 일은 드물었으니,
조용히 웃던 아이린의 머리카락이 갑작스레 불어온 바람에 휘날렸다.
휘날린 머리카락이 빛무리에 섞였다. 휘영청 떠오른 달.
호숫가에 비추어 실선처럼 이어진 빛에 눈을 감자, 그제야 불어온 바람이 따스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따듯하다. 여름 바람처럼 덥고 습하지도, 초가을의 바람처럼 조금 서늘하지도 않은기분 좋은 훈풍.
뺨을 스쳐가는 무언가에 눈을 떴을 때, 아이린은 완전히 변해버린 풍광에 눈을 크게 떴다.
하아얀 꽃잎, 그리고 허리께까지 자라 시야를 뒤덮는 꽃의 무리들.
“...아.”
새하얀 드레스가 꽃에 어우러져 빛날 때, 아이린은 이 주변을 내리 쬐는 새하얀 빛에 품어졌다.
드넓은 언덕, 하얀 장미가 잔뜩 피어난 언덕이 찬연한 빛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언덕 가운데에 솟아오른 나무를 멍하니 보고 있을 무렵, 아이린은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에 살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제가 좋아하는 장소입니다. 예전에...참 많이 왔던 곳이죠.”
“많이 왔다니, 주변에 이런 곳이 있었나요?”
“그런 건 아닙니다. 지금은 없는 곳이니까요.”
언덕에 솟아오른 나무 한 그루를 멍하니 보는 것은 에반 또한 마찬가지였다.
허나 놀라움이나 당황보다는, 순수하게 경탄과 기쁨이 어우러진 눈빛이었다.
언덕, 익숙한 장소였다. 에반 프리드가 아닐 때에도 많이 왔던 곳이었고,
심상 세계에서 보았던 장소였으니까. 나무에 다가가 뻗어난 줄기를 만지던 에반은 옅게 웃었다.
그 언덕에 있던 꽃은 장미가 아니었는데, 세이렌이 보여주는 풍광은 생각보다 낭만적이었다.
동생과 보았던 하늘은 별이 비치는 하늘이었지만, 지금은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뿐이었다.
주변을 한없이 내리쬐는 태양빛, 그리고 그 빛에 비추어 빛을 내는 장미꽃과 아이린.
여전히 멍하니 주변을 아이린을 바라보던 에반은, 이윽고 그녀에게 다가가 조용히 손을 잡았다.
아이린은 에반이 손을 잡은 것도 모른 채 주변을 바라볼 뿐이었다.
마법처럼 변해버린 주변.
이전에도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단번에 적응하기엔 너무도 특이한 광경이지 않은가.
순식간에 뒤바뀐 주변의 풍경을 멍하니 보던 아이린은 이내 입술을 달싹였다.
“...예쁘네요.”
“......”
“피아노는 없나 보네요. 연주, 한 번 더 듣고 싶었는데.”
아쉽다는 듯 주변을 살피는 아이린의 모습에 에반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연주가 어떤 연주인지 안다면 아이린은 무어라 대답할까.
어느새 어깨를 누르던 긴장감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무언가를 말하려 한다면, 아마 지금이리라.
허나 에반은 곧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자연스럽게.
장미가 늘어진 언덕, 아주 자그맣게 비어있는 공간에 나란히 앉은 채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지만 아이린은 그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서로의 몸이 맞닿아, 비좁은 이 공간에서 딱 붙어있는 것이 좋았다.
옅게 올라간 입꼬리를 매만지면서, 하늘에 나비처럼 흩날리는 새하얀 꽃잎을 보던 그 때에 에반이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는, 이런 곳에 집 짓고 사는 게 꿈이었습니다. 나무에 그네를 만들고, 밤이 되면 의자에 앉아 하늘에 있는 별을 세고 싶었죠.”
“의외로 낭만적이네요. 조금...소소한 것 같기도 하고요.”
살짝 의문이 담긴 시선, 에반은 조용히 아이린과 눈을 마주쳤다.
소소하다, 라. 이따금 구국의 영웅이라며 칭송받고 있었고,
이전에도 세기의 피아니스트 소리를 듣곤 했지만. 그래도 그런 꿈이 쉽사리 사라지진 않았다.
사소한 것에 행복을 느꼈다.
사소한 것이야말로, 그 어떠한 것보다도 쟁취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니까.
과거에도, 지금도. 어쩌면 미래에도 생각은 바뀌지 않으리라.
“아가씨는 꿈이 있으십니까? 하고 싶으신 것이라든지.”
“글쎄요...그런 걸 생각하기엔, 아직 너무 바빠서요.”
꿈이라니, 아이린은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사치에 불과했다. 모든 것이 끝난다면 모를까,
지금 상황에 미래를 생각하기엔...역시 무리란 생각이 들었다.
에반은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 많습니다. 하고 싶은 것도 그렇고, 보고 싶은 것도 말입니다.”
“그런가요, 그게 뭔데요?”
손을 맞잡은 채, 아이린이 눈동자를 반짝이며 물어왔다. 푸른 눈이 바다처럼 일렁였다.
이 새하얀 물결 속에서 홀로 이는 푸른 파문, 허나 그것이 좋아서. 에반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하루 온종일 자보고 싶습니다. 아침에 자서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고, 그러다가 졸리면 그날 밤까지 쭉 자는 것 말입니다.”
“뭐에요, 그게.”
아이린이 빙그레 웃자, 따라 살며시 미소 지은 에반은 눈썹을 까딱였다.
전부 진심인데, 이런 사소한 것이 때로는 그 무엇보다도 행복하지 않던가.
허나 영 믿는 눈치가 아니라, 그것에 무어라 하는 대신 계속해서 입을 열 따름이었다.
“커피에 각설탕을 3개씩 넣고 젓기도 해보고, 가끔은 눈이 오는 날 나가서 커다란 눈사람도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황궁에 가서 악보 없이 즉흥곡을 연주하는 것도 괜찮고, 넓따란 저택에 홀로 남아 여기저기를 탐험하듯 돌아다니는 것도 나쁘진 않겠죠.”
“...어린 애 같네요.”
“봄이 오면, 흩날리는 꽃 속에 파묻혀 잠들고 싶고. 여름엔 흐르는 강물에 몸을 맡긴 채 그대로 흘러가고 싶습니다. 가을엔 단풍 아래에 이런저런 식도락을 즐기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겨울엔 따듯한 옷을 사러 이런저런 옷을 사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죠.”
허나 그 와중에 하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에반은 말을 덧붙인 채 입을 다물었다.
아이린을 바라보며, 맞닿은 손을 느낀 채 조금씩, 그렇게 제 옆에 앉은 여인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서로의 이마가 닿을 만큼이나 가까워졌을 때. 붉어진 귓가에 에반은 조용히 속삭였다.
“그 옆에, 아가씨가 계셨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움찔거리는 손을 에반은 놓치지 않았다.
그 행위를 즐기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건 당신이었기에.
이 손을 놓친다면 영영 놓칠 거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들었기 때문에. 에반은 다시 입을 열었다.
“비가 올 때면, 아가씨의 곁에서 우산을 들고 있고 싶습니다. 눈이 올 때면, 그 눈 사이에서 아가씨의 몸을 끌어안은 채 체온으로 덮어주고 싶습니다. 봄에는 꽃이 흩날리는 정원에서 함께 차를 마시고, 여름이면 차디찬 물속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싶습니다.”
“...에, 반.”
아이린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지금 자신이 듣고 있는 말이 무엇인지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뜻을 마침내 헤아렸을 때, 에반이 제게 하는 것이.
그 마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란 걸 알게 되자 곧바로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심장이 쿵쿵 거리며 뛰었다. 피어오르는 몸이 열을 뒤덮어, 이내 열병에 걸린 것 마냥 달뜬 숨이 내뱉어졌다.
허나 벗어날 수 없었다. 잡힌 손목을 움켜쥔 에반이 웃으며 제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백? 상상한 적은 있었지만, 갑작스레 다가온 이런 상황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귓가에 하나하나 박히는 말들이 심장을 찔러왔다. 그리고 부드럽게 녹아들어, 마치 초콜렛처럼 달콤하게 마음을 감싸는 것만 같았다.
하얀 장미꽃이 휘날려 에반의 주변을 휘감았다. 쏟아지는 햇살처럼,
호숫가를 가리던 어둠을 단번에 걷어낸 에반은 하나의 빛이었다.
아니, 자신에게만 그렇게 보이고 있는 것이리라.
“...곁에 있기만 하더라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에반이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자신은 언젠가 떠날 사람이었으니까. 설령 닿더라도, 이어질 수 없을 가능성이 컸으니까.
허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마음이 점점 커져 어느덧 걷잡을 수 없는 욕심이 되었다.
이제는 평생토록, 단지 호위 기사로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여인의 남자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아니더군요.”
에반의 말에 아이린은 조용히 그 시선을 마주했다.
웃고 있지만, 한 편으론 옅게 떨리는 눈동자였다.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인지 아이린은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어서 그가 하려는 말도. 하지만 입이 열리지 않아서,
아직은 두근거리는 심장이 제게 무어라 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조용히 손을 잡은 채 바라보는 것이 아이린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놓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단순히 곁에 있는 것만으로는, 이제 만족할 수 없게 됐습니다.”
샐쭉하게 웃은 에반이 덧붙였다.
“전부 아가씨 탓입니다.”
“...아, 아니”
“제가 이전에 연주했던 노래가 무슨 곡인지 알고 계십니까? 두 번째로 연주했던 곡 말입니다.”
아이린은 고개를 저었다. 항상 곡의 이름에 대해 잘 답하지 않았던 것이었기에 그저 의문만 품고 있을 뿐이었다.
허나 이제 와 그걸 묻다니. 아이린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에반은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린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세레나데입니다. 그 곡은.”
“세레나데라면”
“맞습니다, 사랑 노래.”
살짝 부끄러운 나머지 에반이 뺨을 매만지자, 아이린은 입을 작게 벌린 채 에반을 바라보았다.
그때 흘러든 곡이 묘하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설마 그때의 그 음악이 그런 것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3년 동안 궁금해 하던 노래를 비로소 알게 된 감정이란. 아이린은 천천히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붉어지는 뺨을 가리기 위해서, 그리고 기쁨으로 당겨지는 입을 가리기 위해서.
에반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애써 말을 더듬지 않기 위해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좋아합니다, 아가씨.”
목구멍으로 새어 나온 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튀어나온 말에 에반은 스스로 그 말에 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허나 그랬기에조금 더 대담해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 마음을 그저 좋아한다고 표현하기엔 꽤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것보다도 더 뜨겁게, 좋아하는 것보다도 더 간질거리는 이 마음이.
에반의 입에서 새로운 말을 내뱉게 만들었다.
“아니, 사랑하고 있습니다. 아이린.”
에반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망가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걸쳐진 마음이 위태롭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사랑하고 있다. 허나 이 마음이 거절당한다면, 에반은 속으로 웃었다.
아이린에게는 미안한 얘기였지만, 아마 분명 무너질 터였다.
걷잡을 수 없는 구렁텅이,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 갇혀 평생을 헤맬지도 몰랐다.
허나 그만큼 간절했기에, 에반의 눈에선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감정이 담겨져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 아이린은 이 상황에서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에반.”
허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이린은 에반을 바라보았다.
고백, 어쩌면 오늘이 아닐 수도 있었기에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이토록 제 존재감을 알리며 심장이 뛰는 이유는.
수많은 시간을 보내오면서,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럴 때엔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할까. 가볍게 승낙해야 할까,
아니면 길게 무어라 답해야 할까 수없이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에게 대답할 것이라곤, 이미 정해져 있지 않던가.
자그마한 손이 에반의 목을 휘감았다. 덮어지는 몸,
에반의 코를 간질이는 장미향은 주변의 꽃이 만들어내는 향이 아니었다.
순간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이나 고혹적인 향에 멍하니 아이린을 바라볼 때,
에반의 위에 앉은 아이린이 옅게 미소 지었다.
“나도 그래요.”
“...아이린.”
“그대가 내게 세이렌에서 연주했던 그 날부터, 아니. 처음 만난 그때 괜찮냐고 내게 물었던 순간부터...”
닿을 듯 말 듯한 거리, 서로의 코가 살짝 스칠 만큼의 간격에서 아이린은 작게 속삭였다.
“그대를 사랑하고 있었나 봐요.”
포개어진 몸, 마주하는 입술이 부딪혀 부드럽게 서로를 감싸기 시작했다.
이제는 마음을 확인했기에, 비로소 그 숨겨진 마음을 밝혔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햇살이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 꽃잎이 휘날렸다.
아무도 없는 푸른 정원, 녹음이 푸르게 진 풀 위로 솟은 거대한 나무, 그리고 새하얀 장미꽃.
만개한 장미꽃들이 노래했다. 별이 백건을, 어둠이 흑건을.
새하얀 장미꽃이라는 오선지에서 비로소 마침표가 찍힌다.
이제는 한 사람의 세레나데가 아닌 두 사람의 아리아가 울려 퍼지는 정원이 선율에 맞추어 춤추듯이 흔들리고,
그렇게 사랑은 때 아닌 봄을 맞이했다.
더 없이도 따듯한, 그리고 기분 좋은 바람과 함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