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그대에게 (5)
* * *
“후후.”
아이린은 조용히 웃었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오로지 자신 혼자만이 들을 수 있는 웃음소리를 내며 입을 가린 채 어깨를 잘게 떨었다.
마음 같아서는 발을 동동 구르고 싶었지만, 아이린은 애써 그 마음을 억누르며 홀로 기뻐할 뿐이었다.
데이트
에반의 입에서 나온 것치고는 퍽 감미로운 말이 아니던가.
늘 자신을 놀리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즐기는 제 호위 기사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 아이린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데이트, 데이트. 머릿속에 맴도는 그 달콤한 단어를 곱씹던 아이린은,
이윽고 조용히 자리에 일어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청아한 달빛이 방을 비추고 있었다. 일렁이는 촛불 하나로 빛나는 방,
원래 같았으면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이나 아이린의 눈꺼풀은 그 어느 때 보다도 가벼웠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해가 뜨고 날이 밝아오면, 에반과 단둘이...
스륵,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아이린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상상만 하더라도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조용히 가슴팍을 꼭 쥔 채 창문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머리를 짧게 자른 에반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조금은 차분해져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아 힘겹게 숨을 내뱉은 아이린이 다시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역시 잠자리에 들기엔 무리가 아닐까. 조용히 허공을 바라보던 아이린은,
이내 굳은 결심과 함께 벽에 달린 종을 흔들었다.
새벽 3시, 황급히 잠에서 깨어난 로페나가 아이린의 방으로 돌아갔을 때.
아이린은 이미 옷장 문을 활짝 열어젖힌 채 로페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옷 고르는 것 좀 도와줄 수 있겠니?”
“...아가씨?”
해가 뜰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 허나, 아이린의 아침은 그 시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
“흠, 솔직히 말할까요.”
“좋아요.”
해가 떠오르고, 아이린이 슬슬 준비할 거라 생각한 에반은 내 방문 앞에 서있는 아이린을 보곤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치장을 끝낸 듯, 챙이 길게 늘어진 모자까지 쓴 아이린이 자신을 보며 샐쭉하게 미소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회장에 갈 때처럼 화려하지 않으나 충분히 눈에 띌 법 한 새하얀 드레스에 길게 늘어진 푸른 띠.
영락없이 여름에 걸맞게 치장한 모습에 입을 벌리기도 잠시, 에반은 당황한 것을 숨기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지금 8시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평소 같으면 지금쯤 준비를 시작하셨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설마, 새벽부터 준비하신 겁니까?”
“흠.”
잠시 헛기침을 내뱉은 아이린은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얼굴을 살짝 붉힌 채 사뭇 당당한 모습으로 대꾸했다.
“조금 일찍 준비했어요. 설마, 이제와 약속을 안 지키려는 건 아니죠?”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꽤나 많이 기대했던 것일까.
벌써부터 이리 치장한 모습을 보니 에반 또한 괜스레 긴장이 되었지만,
그런 것을 억누르며 아무렇지 않은 척 옅게 웃어 보였다.
“그럴 리가요. 준비에 얼마 걸리지 않으니, 금방 나가겠습니다.”
그리 답한 에반은 곧바로 준비를 시작했다.
사두었던 향수를 어색한 손놀림으로 뿌리고, 옷을 챙겨 입고.
콩쿠크를 준비할 때의 경험이 그나마 도움이 되어 이런 치장에 완전히 무지하지 않았던 점이 조금은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시녀 여럿이 달라붙어 치장한 아이린 만큼은 아니더라도,
에반은 스스로 타고난 것을 적절히 다룰 줄 알았고.
에반이 완전히 준비를 끝마쳤을 때 아이린은 그런 에반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힐 따름이었다.
‘확실히...’
사교를 그리 즐기지는 않았으나, 그런 과정에서 여러 귀족 자제들을 만난 것이 자신이었다.
하지만 에반의 외모는, 그런 자제들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뛰어났으니.
아이린은 이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에반을 바라보았다.
“잘 어울리네요.”
“...그렇습니까? 사실, 아직 조금 어색하긴 합니다만.”
에반은 그런 아이린의 칭찬에 뺨을 긁적였다.
사실, 에반 프리드로 지내며 늘 머리를 길게 유지했기에 짧은 것이 되려 어색하게 느껴졌다.
옷을 사고 향수를 뿌렸지만 이게 정말 괜찮은지도 반신반의해서,
아이린의 잘 어울린다는 말에 그저 쑥쓰러울 뿐이었다.
허나 이대로 공작저에 있을 수는 없을 터. 에반은 아이린을 향해 손을 조용히 내밀며 입을 열었다.
“에스코트 해드리겠습니다. 레이디.”
레이디? 아이린은 풋 하고 웃으며 에반을 바라보았다.
늘 짓는 능글맞은 미소였지만, 평소와는 달리 살짝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꽤 보기 괜찮지 않은가.
나름 데이트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인지, 아이린은 그런 에반의 손을 가볍게 잡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잘 부탁해요, 에반 경.”
아이린과 에반이 밖으로 나서자, 그 모습을 몰래 보던 시녀들은 저마다 이런저런 말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말이었지만, 그 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속이 시원하다는 말이었다.
답답한 두 사람이 언제쯤이면 제대로 교제할까 생각했는데, 이제야 그 끝이 보이지 않는가.
적어도 유리스 공작저엔, 두 사람을 응원하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두 사람은 그런 것을 전혀 몰랐지만 말이다.
#
에반은 생각했다. 데이트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긴 했지만,
사실상 데이트보다는 그 본질이 프러포즈에 가까운 것이 이번 외출이 아니던가.
가능하면 분위기 좋은 곳에서 고백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허나 어떻게? 하여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여 결정한 것이 오늘 나서는 데이트 였고,
에반은 차분히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아이린을 이끌었다.
“기억나십니까? 지금 걷고 있는 이곳 말입니다.”
“...여기라면.”
아이린은 에반의 시선을 따라 한 서점을 발견한 에반은 이내 조용히 에반을 째려보았다.
좋은 기억이라곤 딱히 없는, 오히려 에반에게 처음 책망한 곳이 아니던가.
아이린의 시선을 받은 에반은, 이윽고 깍지를 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 아가씨를 보았을 때만 하더라도 다가가기 힘든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아이린은 그 말에 구태여 부정하지 않았다.
그때의 자신은, 누군가가 제 마음 속에 파고드는 것을 그리 원하지 않았으니까.
장미 가시를 가득 두른 정원처럼, 자신이 품은 미약한 안정 속에 홀로 남기를 원했다.
우습게도, 그런 와중에 한편으론 남의 애정을 바라기도 했다.
그래서 그 괜찮냐는 한 마디에 그토록 동요하지 않았던가.
아이린이 침묵하자, 에반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진 않은 것 같지만, 많이 나아지신 것 같습니다.”
“에반...”
“아가씨가 그때 주신 책은 아직 책장에 꽂혀 있습니다. 가끔 기억을 떠올리며 읽곤 하죠. 다과회, 그리고 그 다음에 축제. 그래도 그때 못봤던 불꽃 놀이는 다시 봐서 다행이지 않습니까?”
“나쁘지 않았죠. 축제 때는...솔직히 말해 에반에게 미안했어요.”
에반은 그 말에 살짝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아이린이 그때 보여준 모습은 거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있었다.
그때의 아이린과 지금의 아이린은 완전히 달랐으니,
요즘 보여주는 모습만으로도 추억을 남기기엔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상처 입었으리라 생각한 걸까, 자신의 눈치를 보는 아이린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에반은 그런 아이린의 손을 바싹 당겨 잡아 완전히 옆으로 끌어 당겼다.
몸이 달라 붙은 아이린의 얼굴이 붉게 물들자, 에반은 그런 아이린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 하루종일 미안해하실 생각입니까?”
“그런...건, 아니지만요. 그런데 너무 가깝”
“쉿. 오늘 하루 아가씨를 빌리겠다고 했으니, 제 말을 따라주셨으면 합니다.”
빌리기로 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시간이었지만,
이런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라 아이린은 아무 말 없이 에반에게 달라붙었다.
몸이 붙으니 체온이 전해지고, 체온이 전해지니 자연스레 열이 달아오른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온 몸에 피를 맴돌게 해서,
금세 얼굴이 붉게 물든 두 사람은 영락없이 풋사랑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수많은 사람들, 휴일이라 그런 것일까.
평소보다 배는 많은 사람들 탓에 아이린과 에반의 몸은 계속해서 스쳤다.
잡고 있는 손, 가까이는 팔, 다리, 그리고 이어 몸이.
거의 껴안듯 몸이 붙어있는 형국이 되자 에반도 아이린도 도무지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닿아있는 가슴팍에서, 그리고 등에서 서로의 심장이 쿵쿵 대며 울리는 것이 계속해서 느껴졌다.
이 상황에서 평정을 찾는다면, 그 사람이 이상한 것이 아닐까.
“아...”
“...음.”
서로의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힘들게 되자, 에반은 힘겹게 입을 열어 이 상황을 무마하고자 했다.
완전히 밀착된 몸에 정신을 차리기도 힘들었으나, 오랫동안 준비해둔 계획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일단, 저 좀 따라오시겠습니까?”
에반이 입을 열자,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피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붙어있는 몸 탓에 생각을 하기가 힘들었다. 차라리 한적한 곳으로 향한다면 조금 낫지 않을까.
그렇게 서로의 손을 잡은 채 천천히 뗀 발걸음은, 이어 아이린도 꽤나 익숙한 골목으로 향하고 있었다.
허름한 식당들, 허름한 골목. 입은 옷에 비하면 한참 어울리지 않는 건물들이 나열된 곳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그 어떤 식당보다도 친숙한 곳이라 할 수 있었다.
이제는 나름 유명해져 간판도 생긴 식당, 아이린은 그 식당을 보곤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몇 년 전에 왔을 때만 하더라도 그 외형에 기겁했건만,
지금은 예전의 추억에 그저 친숙하게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얼굴에 주름이 조금 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풍성한 수염을 자랑하고 있는 주인이 손님들을 반겼다.
4년, 오랜만에 왔음에도 전혀 변하지 않은 바닥에선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낡은 탁자, 그나마 변한 것이 있다면 이제는 낡았던 문이 새로 끼워졌다는 것일까.
“고기 스튜랑, 뒷다리를 썰어서 주면 좋겠군요.”
에반의 주문에 아이린은 씰룩이는 입꼬리를 손으로 가렸다.
그때와 똑같은 주문이 아니던가. 주문에 맞춰 나온 것 또한 그 때와 똑같아,
에반과 눈이 마주친 아이린은 서로 무어라 할 것 없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랑 똑같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술을 추가할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가씨에게 술을 주고 싶지는 않더군요.”
“음...”
“평생 아가씨에겐 술을 안 드릴 겁니다. 혹여나 저 몰래 드실 생각이 있다면, 차라리 제 허락을 받고 마시는 게 어떻습니까?”
“평생 옆에 있을 것처럼 말하네요.”
잠시 옛기억을 떠올리며 부끄러워하던 아이린은이어진 에반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평생이라니, 에반이 만약 자신의 곁에 평생 있겠다고 해준다면 술에 입도 안댈 자신이
“그럴지도 모르죠.”
“...에반?”
에반은 더 이상 답하지 않았다. 그저 포크로 아이린의 접시를 가리키며 마저 드시라 했을 뿐,
이후로 입을 열지 않는 에반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이린은 이윽고 상념에 빠진 채 나이프를 움직였다.
기계처럼 고기를 입가에 넣으면서, 에반이 했던 말에 대해 고민했다.
그럴지도 모른다니. 분명 자신이 평생 있을 거라 말한 것에 대해 그렇게 답한 것일 텐데.
그 말의 진의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평생 호위 기사로 남겠다는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아이린의 시선이 에반에게 향했으나, 에반은 그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가늘게 눈을 뜬 아이린은, 에반이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을 것을 깨닫고는 조용히 한숨을 내뱉었다.
평생 호위 기사로 남아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허나 정말 그렇게 된다면 조금 아쉽지 않을까.
단지 기사와 영애로 남는 것, 아이린은 그 관계에 대해 미약하게 아쉬움을 품었다.
조금 더 가까운 관계여도 괜찮을 텐데. 식사를 마친 뒤 움직이면서도 그 상념을 쉽사리 사라지지 않아,
살짝 어두워진 아이린의 표정에 에반은 조용히 손을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에요, 아무것도.”
평생 옆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애써 고개를 저은 아이린은 다시 밝은 표정을 지으며 에반을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그 말에 대해 물을 날이 찾아오지 않을까.
다만 지금은이렇게 함께 있는 시간을 즐기고 싶었다.
아직 하늘의 중앙에 해가 떠 있지 않은가. 시간은 많았고, 물어볼 시간 또한 아직 한참 남아있었다.
둘은 그렇게 한참을 걸으며 돌아다녔다. 저 멀리 솟아오른 베르뎅 산을 보며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고
, 에반은 그 때 아이린이 울었던 것을 기억하며 아이린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자신을 위해 울어준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삶이 아닐까.
허나 더 행복해지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에, 에반은 품속에 있는 반지함을 확인하곤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제는 사라진 보라색 천막, 이전에 연애점을 본 기억이 떠오른 아이린은 조심스럽게 에반을 바라보았다.
서로가 서로를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이제는 안다.
허나, 걸리는 점이 있다면 그 때 들었던 점괘의 내용이었다.
험난하며, 많은 피를 흘릴 것이란 내용. 그 말대로, 에반은 많은 피를 흘렸다.
다치고, 또 다치고. 죽을 뻔한 위기를 넘나들며 한 번은 정말 죽은 적도 있지 않던가.
허나 그에게 고난이 아직 남아있다면, 그런 것을 바라만 봐야 하는 자신은 어찌 버텨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심장이 뚫려, 피에 젖은 채 아무런 말을 내뱉지 않았던 그의 모습을 기억했다.
만약 또다시 그런 일을 겪게 된다면 과연 자신은 버틸 수 있을까?
아이린의 눈이 살짝 흔들리는 것을 본 에반은 무어라 하는 대신에,
그런 아이린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괜찮을 겁니다.”
보라색 천막이 있던 자리를 보곤 공교롭게도 아이린과 같은 것을 떠올린 에반이었다.
그때의 점궤, 솔직히 반신반의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믿고 있지 않은가.
그 점괘를 내준 것이 대마법사 아제스트인 것도 그랬지만, 실제로 그 점괘처럼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결말 또한 점괘대로 되지 않겠는가.
결국엔 이루어질 터였다. 그리고 자신이그렇게 만들 터였다.
에반이 아이린의 등을 토닥였고, 아이린은 그제야 안심한 채 에반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들려오는 심장 소리가 생생했다. 따스한 체온을 느끼자 이대로 계속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이내 몸을 떼어냈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걸었다. 시계탑을 보며 절멸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고,
잠깐 지나쳤던 악세사리점을 보곤 피식 웃기도 했다. 에반은 부서진 아이린의 목걸이를 떠올리곤 조용히 한숨을 내뱉었다.
다시 떠올려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기억이 아닌가. 이제는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둘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 걸음, 서로의 발걸음을 맞추는 데에 신경 쓰며 다시 웃음을 터트리고.
하늘에 떠있던 해가 차츰 저물어 지평선을 향해 사라지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밤이 온다. 흐르는 바람에 별이 걸려 별 또한 같이 흐르는 칠흑은 수채화처럼 어둠을 흩뿌리고 있었다.
하늘에 걸린 달빛이 호숫가에 비춰 빛무리가 일렁인다. 이어지는 정적,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주었던 호숫가에서 에반은 아이린의 손을 잡은 채 물결치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참 멀리도 왔습니다.”
여러 의미가 섞인 말이었다. 도시에서 꽤 많은 거리를 걸어야 닿을 수 있는 곳이 세이렌이기도 했지만,
그동안 겪었던 시간을 함축하여 표현한 시간이었다.
냉대하던 사이에서, 이제는 서로를 연모하여 그 마음을 애써 감추는 사이가 되기까지.
더 나아가 서로의 손을 잡고, 입술을 맞추는 사이가 되기까지.
꼭 4년이라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가.
이렇게 손을 잡고 있음에도, 그 손을 금방이라도 놓치게 될까 마음이 급급했다.
조금이라도 이 시간을 늘리고 싶어서,
조금이나마 함께하는 시간을 길게 가지고 싶어 깍지마저 낀 손에 아이린은 조용히 웃었다.
“옛날 생각나네요.”
“확실히, 그렇습니다.”
에반은 이 호숫가에 미묘한 감상을 받았다. 이곳에서 연주했던 음악들,
떠나보냈던 과거를 떠올리자 조금은 입맛이 쓰기도 했다.
아직까지도 그때 연주했던 곡에 대해 사실을 털어놓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사실은 당신에게 고백하고자 했던 것이라 말하고 싶었지만,
쉬이 떨어지지 않는 입술에 에반은 호숫가를 두른 울타리를 쥔 채 쓰게 웃었다.
허나 이제는 말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품속에 있는 반지함,
그 속에 있는 반지를 떠올린 에반이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세이렌이 이루어주는 인간의 염원, 그 염원이 이번에도 닿을까.
의문이 떠올랐지만, 만약 아무 일이 생기지 않더라도 말할 생각이었다.
찌르르
풀벌레 우는 소리가 정적 속에 섞여 들려왔다.
물이 흐르는 소리, 달이 만들어낸 음영이 서서히 제 몸집을 불려 주변의 빛을 집어 삼키고 있었다.
구름이 드리워진 달이 가려져, 서서히 어두워지는 와중에 두 시선이 마주했다.
푸른빛을, 그리고 풀빛을 띄는 눈동자가 닿아 묘한 분위기를 흘렸다.
“아가씨.”
에반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이린은 답하지 않았다.
찬연한 달빛이 사라진 호숫가가 만들어내는 이 침묵에 홀린 것처럼,
그 어둠 속에서 여전히 빛을 내고 있는 에반의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마침내 구름이 사라진 달이 에반에게 닿았을 때, 아이린은 이 어둠 속에서 에반 홀로 빛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트러진 어둠 속에서 별이 제 빛을 내기 시작했다. 가득 차오른 만월 또한 빛을 뿜어냈다.
마법처럼, 더없이 밝은 빛이 내려진 공간에서 숲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세이렌, 그 어떠한 사람조차 홀린다는 전설이 이름 붙여진 호숫가.
에반의 눈을 마주한 아이린은 설명할 수 없는 끌림을 느꼈다.
만약 운명이 있다면 그것은 오늘 찾아올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별이 백건을, 어둠은 흑건을.
그렇게 밤의 세레나데가 연주를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