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그대에게 (4)
* * *
에반이 귀금속점에 들린 뒤, 다시 호위 기사로 복귀하고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허나 이따금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있었으니,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 아이린도 그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괜스레 피어오르는 짜증은 덤이었기에,
그런 아이린을 바라보던 크리스는 이윽고 헛기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심기가 꽤나 불편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근무 태만, 명령 불복종 등 다양한 죄목을 생각 중이었지만,
아이린은 구태여 그런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계속 방에 있었으니 답답해할까 묵인했건만,
이제는 어디로 가는지 얘기조차 하지 않고 나가니 불안한 마음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리라.
허나 그렇다고 일일이 묻기에도 뭐한 상황이니 아이린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기다리는 것이 전부였다.
“에반이야 뭐, 그저 머리를 식히려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크리스의 말에 로페나가 덧붙이자, 그런 둘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본 아이린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기야, 에반이 자신을 두고 다른 여자를 만나러 다니겠는가.
할 수 있었다면 진즉에 그랬을 터. 이제 와 그러지 않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되리라.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지만, 다시 서류를 보던 아이린이 갑작스레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집중이 되질 않는다. 그 근본적인 문제가 에반의 부재라는 사실을 깨달은 아이린이 괴로운 듯 머리를 꾹 누르자,
크리스는 그런 모습을 보며 쓰게 웃었다. 참으로 오래 살고 볼 일이 아니던가.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 고작 남자 하나에 저리 쩔쩔 매는 모습이라니.
헌데 떠오르는 의문이 하나 있다면, 왜 아직까지도 정식으로 교제하지 않느냐는 점이었다.
로만 공작가의 중추가 궤멸되면서 사실 로만이랑 가문 자체가 제국의 역사에서 지워지는 것이 확정된 지금,
더 이상 아이린을 속박하던 약혼은 그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당사자인 아델 로만도, 약혼에 대해 구두로 이야기했던 빌테인 또한 죽지 않았던가.
지켜보는 입장도 이리 답답하건만,
아직까지 별 진전 없는 둘의 관계는 이미 공작저에서 가슴을 두드리게 만드는 일 중 하나였다.
당연하게도, 답답해서 말이다.
“...그래서, 황궁에 들렸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습니다. 이렇다 할 수확은 없었지만요.”
아이린은 애써 잡념을 지우며 입을 열었다. 최근 크리스 경을 황궁에 보낸 것은,
이번 황제가 에반을 만나려 하는 것에 대해 조금이고자 알아보려 했던 하나의 시도였다.
자식인 황태자조차 알지 못하는 황제의 진의를 어떻게 파악하겠냐마는,
그나마 5대 가문 중 가장 신뢰를 얻고 있는 유리스이기에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황궁이라, 크리스는 조용히 침음을 삼켰다.
나름 몇십 년 전 절멸 토벌전에 참여하기도 했고, 이래저래 명망이 있는 자신이었지만.
그럼에도 이번 방문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지 않았던가.
예전에 먼발치에서나마 황제를 본 기억을 떠올린 크리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황제의 진의를 알려면 에반이 그를 직접 만나는 것뿐이리라.
“그저 황제가 에반에게 꽤나 너그럽다는 것만 알 수 있었습니다. 황태자 전하가 말씀하시길, 에반이 편한 시일에 맞추어 와도 괜찮다고 했으니까요.”
“그런가요. 황제가 에반에게 호의적이라...”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으나, 그 대상이 황제인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왜, 에반이 여태껏 그토록 많은 흑마법사와 심지어 본 드래곤을 처치할 때까지도 움직이지 않았던 황제가 이제야 그에게 관심을 보인단 말인가?
구태여 따지자면 에반이 마스터에 오른 것과 5대 가문 중 하나를 쳐냈기 때문일 텐데.
“혹여 추궁하려는 것은 아니겠죠?”
“추궁할 생각이었다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을 겁니다. 흑마법사에 대한 것은 예전부터 꽤나 강경하게 대응하셨던 분이니까요.”
그렇다면 별 문제가 되진 않겠지만. 아이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허공을 응시했다.
왜 이렇게 묘한 감이 드는 건지는 몰라도, 에반이 황제를 만나고 온 뒤에 이런저런 것을 집요하게 물어볼 생각이었다.
붉은 달, 제물. 빌테인이 입에 담은 것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것은 아닐까.
‘수고했어요, 크리스 경. 그 정도면 당장은 충분할 것 같네요.’
“그건 그렇고, 에반은 지금쯤 어디 있을까요.”
아이린이 그렇게 말한 순간, 방에는 한동안 싸한 정적이 오갔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이린을 본 크리스는 잠시 로페나를 힐끔 쳐다보았다가,
이윽고 한심한 듯 제 아가씨를 보는 로페나의 표정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 와중에도 제 호위가 어디에 있는 건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 침묵을 이해한 아이린의 얼굴이 붉게 물들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고,
서류에 얼굴을 파묻은 아이린을 보며 로페나와 크리스는 웃기에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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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둑
잘려나가는 머리를 보며 떠오르는 생각이란, 의외로 그리 많지 않았다.
다 자른 뒤에는 어떻게 될까, 혹시 어울리지 않으면 어떡할까 따위의 생각만 할 뿐,
거울 속에 비치는 이발사의 얼굴이 붉게 물든 것은 이미 아무렇지 않게 받아 들인지 오래였다.
조금 머리가 길다고 생각한지 오래 된 터라, 언젠가는 잘라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는데.
이제야 잘랐으니 조금은 늦은 감도 들었다.
마침 최근에 시간이 꽤나 널널해 지기도 했고,
이제는 완성된 반지를 받기도 했으니 어떻게 보면 오늘이 가장 머리 다듬기에 괜찮은 날이 아닐까.
길었던 머리카락이 짧아져, 이제는 완전히 깔끔하게 드러난 이마를 보자 괜스레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뒤로 넘겨서 그렇지 내리면 이마가 가려지긴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훨씬 짧은 머리긴 했으니까.
“괜찮나요?”
“네, 네? 네에...괜찮아요.”
허둥지둥거리는 이발사를 힐끔 바라 보다가,
머리를 조금씩 매만지며 건드리자 조금 나아진 듯 해서 그만두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깔끔하다고 보아도 무방할 테니.
조금 더 인상이 샤프해진 느낌이 들었지만, 이전의 덥수룩했던 머리보다야 훨 낫지 않을까.
밖으로 나오자 곧바로 내게 꽂히는 시선에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조금 더 노골적으로 변한 시선에 고개를 까딱이며 애써 시선을 피할 따름이었다.
요즘 들어 아이린이 날 바라보는 시선이 차가워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일부러 그런 것을 유도하기도 했지만, 내가 괜히 밖으로 나와 돌아다녔겠는가.
품속에 있는 반지함 2개를 매만지며 천천히 한숨을 내뱉었다.
이걸 건네주기 위해서 무얼 해야 할까, 하는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나온 것이 전부이지 않던가.
다행이라면, 무엇을 할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고민을 끝마쳤다는 점이었다.
반지를 전해주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 분위기겠지만,
그런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것은 그 이전 단계일 테니까. 고민이 많았다.
무턱대고 반지를 주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만큼,
그 이전에 거쳐야 할 것들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단순하지만.’
고민을 마친 뒤의 결과물은 개인적으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린이 마음에 들어할 지는, 이게 우리가 평생토록 기억할만한 무언가가 될 지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이긴 했지만 말이다.
오늘 이렇게 나온 이유를 구태여 꼽자면, 나를 조금 꾸미기 위해서였다.
단 하루를 위한 준비 치고는 과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더라도,
평생토록 기억에 남길 하루였으니 이런 치장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직접 치수를 재 옷을 맞추고, 향수를 사고, 심지어 머리까지 정돈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평소 쓰지 않는 봉급은 전부 여기에 투자했고,
나름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거울을 보자 조금은 깔끔해진 내 모습이 보였다.
뒤로 넘긴 짧은 머리가 조금 어색한 것을 제외하더라도,
그건 단지 시간의 문제이니 차츰 괜찮아지지 않을까.
물결처럼 찰랑이는 녹색의 눈동자가 때 아닌 이채를 발하고 있었다.
귀금속점에서 보았던 에메랄드보다도 선명하고,
그 속에서 보았던 한 폭의 정원보다도 그윽한 정원이 노니는 듯한 녹음의 눈동자.
새하얀 피부에 각도기로 잰 듯 오똑한 코가 돋보였다.
허나 그럼에도 야위어 보이지 않는 것은 셔츠 아래로도 부각되는 탄탄한 근육 때문이리라,
굵은 목 위로 날렵하게 뻗은 턱선은 오히려 거친 인상을 주었다.
살짝 접힌 눈은 살짝 피폐한 인상도 주어서, 슬쩍 웃자 꽤 괜찮은 얼굴이란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콩쿠르에 나설 때는 그리 화장에 신경 쓰지 않았으니,
이렇게 꾸민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살짝 어깨가 으쓱여졌다.
보고 싶은 것은 아이린의 반응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대로 공작저에 들어서자, 날 보던 경비대장이 흠칫 놀라며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 갔다 오는 거냐.”
“잠시 나갔다 왔습니다. 머리 좀 정돈하고 왔죠.”
“...하, 시녀들하고 마주치지 마라. 정분날까 겁난다.”
정분이라니, 그 어처구니 없는 말에 피식 웃자 경비대장은 내게 진지한 표정으로 한 번 더 경고했다.
그대로 방에 돌아가 잠이나 자라고. 허나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잠시 뒤에 아이린을 만나야 하고, 어찌 되었든 호위 기사로써 업무는 해야 하니까.
하여 공작저로 들어서니, 나와 눈이 마주친 시녀가 갑자기 멈칫하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리제 씨?”
“에반, 너 머리 잘랐니?”
잘게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키는 그 모습에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자,
얼굴을 쓸어내린 리제가 슬쩍 내게 다가오며 입가를 매만졌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니 꽤나 동요하고 있단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아까 경비대장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분, 정분이라. 그럴 확률이 높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조심할 필요는 확실히 있을 성 싶었다.
“어, 어음...잘 어울린다. 진짜로. 진작 자르지 그랬어.”
“그럼 다행이네요.”
날 바라보는 리제가 붉어진 뺨을 가리며 애써 손부채질을 했지만,
그녀가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는 터라.
나는 그저 멋쩍게 웃으며 그녀를 지나칠 따름이었다.
어쨌든 이 정도면 반응 정도는 충분하지 않을까.
리제라는 사람이 머릿속에서 잊혀지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이린이 이걸 보고 괜찮게 반응해주었으면 좋을 텐데,
어쩌면 리제처럼 반응해주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살짝가슴이 떨렸다.
어쨌든 이건 내 나름대로 예고를 하기 위해서였고,
그 예고는...어떻게 보면 인생의 단 한 번 뿐인 무언가를 결정하게 될 테니까.
잘 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빌테인과 싸우러 갈 때보다 지금이 더 떨리는 것만 같았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올까 차분히 숨을 들이 마신다.
아이린의 방문 앞에서 그렇게 한참을 서있다가, 팔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똑똑 한참의 정적, 너머에서 분명 목소리가 들려올 텐데,
혹여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이 피어올랐다.
“들어와요.”
그리고 그 목소리에 다시금 무거운 숨을 토해낸다.
이게 무어라고, 그냥 평소대로 하자는 생각을 떠올리며 문고리를 돌리자 이윽고 안 쪽의 풍경이 보였다.
격자무늬의 카페트, 그 위에 놓인 자그마한 탁자. 탁자를 둘러싼 소파.
거기서 시선을 돌리면 보이는 커다란 책상에 앉아있는 여인.
푸른 눈동자와 마주치자 그제야 경직된 표정이 조금 풀리는 듯 해서, 슬쩍 입꼬리를 당겼다.
“......”
찻잔을 든 채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아이린의 모습은 꼭 그 공간만 멈춘 것처럼 보였다.
살짝 확장된 동공이 파르르 떨리다가, 이윽고 입을 살짝 벌린 아이린이 조용히 물었다.
“에반?”
“맞습니다.”
“머리를 잘랐...네요. 그렇죠? 내 눈이 이상한 게 아니라면.”
“이상합니까? 너무 길어져서 조금 잘라봤는데, 아무래도 저는 조금 어색해서 말입니다.”
잠시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아이린은 나를 빤히 쳐다보곤 입을 오물거렸다.
뺨이 서서히 붉어지고, 가냘프게 흔들리는 속눈썹은 분명 그녀 또한 동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기에, 나는 천천히 아이린을 향해 다가가며 머리를 매만졌다.
“대답이 없으신 걸 보니, 그리 어울리지는 않나 봅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어울린다는 건 알고 있었다. 미용사나, 리제나, 아이린이나.
하나같이 일관된 반응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다만 놀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면 조금 더 붉어지는 뺨을, 급해지는 숨을, 하여 뜨거워지는 숨결을.
조금이나마 더 눈에 담고 느끼고 싶었을 뿐이었다.
점점 간극이 좁아지자 아이린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느새 책상에 내가 손을 올리자,
서류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가슴팍으로 당겨 모은 아이린이 나를 올려다보았고.
나는 아이린을 보며 슬쩍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답이 없으시군요.”
“...향수 뿌렸네요?”
나는 그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뿌렸으니까.
너무 진하지 않게 은은하게 퍼지는 향이었건만,
그 미세한 차이를 눈치챈 아이린이 이내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잘 보일 사람이라도 있어요?”
“있죠, 당연히.”
무슨 생각을 할지 눈에 뻔히 보여서, 나는 웃는 것을 애써 참으며 옷깃을 쓰다듬었다.
일부러 옷도 샀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어깨를 툭툭 치고,
펄럭이는 옷자락에서 향수 향이 방 안을 메우기 시작했다.
자신이랑 있을 때 내가 이런 적이 없으니, 아마도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허나 구태여 오해에 해명하지는 않았다.
여유롭게 웃으면서기분이 안 좋아진 아이린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이린의 눈이 점차 가늘어졌지만 나는 어깨 한 번을 으쓱이는 것이 전부였다.
조금만 더 생각해도 알아서 결론에 도달할 테니. 내가 먼저 말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제가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몰라요. 그런데, 원래는 이렇게까지 하지 않지 않았나요.”
“아가씨.”
나는 조금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라 해봐야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그게 누구인지 궁금하네요.”
퉁명스레 대답하는 아이린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올 것 같아서,
아이린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아이린과 눈을 마주쳤다. 그게 누구냐고 묻는다면.
글쎄. 일단 성격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닌 것 같았다.
툭하면 질투하고, 의심하고. 다른 여자와 있는 걸 싫어하고, 가끔은 저 혼자 이상한 망상에 빠져 기분이 상하고.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면 또 상처입겠지. 의외로 여린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 말에 신경을 많이 쓰면서, 제 행동거지를 교정하려 애쓴다.
그랬기에내가 처음 만났을 때의 아이린이 그토록 날을 세웠던 것이리라.
그 괜찮냐는 말 한 마디를 못 들어서, 조금 신경써주는 사람이 없어서.
하지만 이제는 내가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아이린은 꽤 많은 점에서 변했다.
이렇게 가끔 토라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가끔은 웃고, 가끔은 부끄러워했다.
남들처럼, 이 단어와 가장 거리가 멀었던 그녀가 다른 사람들 처럼 행동한다는 것만으로도 참 많이 변한 것이 아닐까.
“누구냐고 묻는다면, 제 앞에 있는 사람이겠죠.”
하여 조금 더 지켜보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눈을 감을 때까지.
그 곁에 있고 싶었다. 그렇기에 했던 준비였고, 여태까지 싸워온 것이 아닐까.
품속에 들린 반지함이 들킬까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애써 웃으며 아이린을 바라본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결코 평범하지 않은 말을 건넸다.
“아가씨의 시간을 하루 빌려도 되겠습니까?”
“...무슨 의미에요?”
무슨 의미냐고 묻는다면, 너무도 당연한 말이 아니던가.
“지금 데이트 신청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아가씨께 말입니다.”
이렇게 당당하게 말한 적은 아마 처음인 것 같은데, 그래서 일까.
유독 당황한 아이린의 눈이 순간 크게 뜨였다. 파아란 눈동자가 파르르 떨려서,
이윽고 눈동자와는 정 반대로 새빨갛게 물든 입술이 달싹였다.
허나 대답대신 돌아온 것은 어색하게 끄덕여지는 고개라.
나는 그저 부끄러워하는 아이린을 보며 환히 웃을 따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