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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92화 (92/181)

〈 92화 〉 그대에게 (1)

* * *

“사실, 아가씨랑 기사님의 관계를 알고 있어요.”

“...뭐?”

“두 분 서로 좋아하는 사이죠?”

아이린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이 공작저에서 아무도 모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로페나가 그것을 알고 있다니.

당황, 그리고 놀람 등이 여지없이 드러난 표정을 본 로페나는 잠시 한숨을 푹 내쉬며 자신의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사실, 이제와 이렇게 말하는 게 조금 늦은 것일 수도 있었다.

이미 두 사람이 서로 진도를 상당히 나간 것을 아는 이상,

자신의 조언이 별 쓸모없을 수도 있지 않은가.

허나 자신이 아는 아가씨라면...분명 기사님에게 휘둘릴 것이 분명해보였다.

이전에 들었던 그 부끄러운 소리도 결국 아가씨가 일방적으로 당하던 소리가 아니던가.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살짝 얼굴이 붉어진 로페나가 이윽고 아이린을 빤히 쳐다보았다.

자신이 소문을 숨기려 해서 그렇지 알 사람들은 전부 알고 있었다.

아가씨와 그 호위 기사의 사이가 그렇고 그렇다는 건 이 공작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진실이었으니,

이번에 약혼이 깨진 김에 두 분이 잘 되었으면 하는 것이 로페나의 마음이었다.

‘...이왕이면 아가씨가 주도권을 잡는 쪽으로.’

에반 프리드라는 기사의 전부는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 들려오는 소문을 들어 어느정도는 알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인기가 많았고, 매일 같이 아가씨가 편지를 태울 만큼 이런저런 혼약도 굉장히 많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 것에 익숙해진 사람이라면, 흔히 오만해지기 쉽다는 걸 로페나는 떠올렸다.

그럴 사람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라는 게 있지 않은가.

잠시 숨을 고른 로페나는, 이윽고 아이린을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

“으, 응?”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 관계를 알고 있다는 말을 들은 직후부터 그러더니.

로페나는 그런 아이린의 모습에 앞으로의 일에 대한 불안을 느꼈다.

고작 이런 걸 들켰다고 저리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연애에서 어떻게 주도권을 잡았겠는가.

분명 휘둘리고, 또 휘둘리다가 마음대로 농락당했을 것이 분명했다.

로페나의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기사님도 좋고, 아가씨도 좋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최우선 순위는 아가씨였다.

기사님에게 과연 아가씨가 첫 사랑일까? 로페나는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분명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여러 여자를 만났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저 순수한 아가씨를 막, 자기 마음대로 막...

“그렇게는 안 돼요.”

단호하게 말을 내뱉은 로페나가 자신을 바라보자,

그 시선에 아이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렇게는 안 된다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어쩐지 그 말에 따라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그 쪽에 대해서는 전문가에요. 연애를 해본 적은 없지만, 제 주변 친구들은 남자를 많이 만나본 사람들이 많죠.”

“...그러니?”

“아가씨, 연애는 있잖아요. 절대로 아가씨 생각처럼 풋풋하지 않아요. 처음에는 몰라도 어느 순간부터는 주도권을 쥐고 줄다리기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구요.”

“줄다리기...”

잠시 에반의 얼굴을 떠올린 아이린은 확실히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자신은 에반에게 항상 휘둘리지 않았던가.

줄다리기, 그 단어를 가슴 속에 품은 아이린은 로페나를 바라보았다.

늘 어리숙한 아이라고 생각했는데...이제 보니 이런 부분에서 조언을 들어도 꽤 괜찮을 것 같았다.

아이린의 표정이 진지해지자, 신이 난 로페나는 친구들에게 들었던 이런 저런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그 태반이 굉장히 많이 부풀려진, 어지간해선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린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입을 작게 벌렸다.

자신이 여태껏 해왔던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을 맞추고 혀를 섞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라며, 그 이후의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했건만.

로페나가 해준 이야기는 아이린에게 여러 의미로 새로운 세상을 깨닫게 만들었다.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서로의 귀에 간드러지는 얘기를 속삭이는 것이 아닌...

침대에 누워­

“으...”

상상만으로도 얼굴이 뜨거워지는 생각에 아이린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아직 서로에게 제대로 고백도 하지 못했는데, 그런 과정이 꼭 필요한 것일까.

로페나는 그런 아이린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이미 둘이서 전부 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부끄러워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그런 것을 묻기에도 조금 민망하니, 로페나는 너무 성급할 필요가 없다며 말을 덧붙였다.

“꼭 그렇게 하실 필요는 없죠. 그냥 기사님이 아가씨에게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만 하면 된다니까요.”

“어떻게?”

아이린이 묻자, 한 차례 씨익 웃은 로페나가 아이린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일단 죽부터 끓이죠.”

#

로페나의 조언을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아이린은 그 조언이 꽤나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로만이란 가문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달라진 자신과 에반의 관계.

이제는 슬슬 그 방점을 찍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연인인 듯, 연인 아닌 사이에서 벗어나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먼저 좋다고 하시면 안 돼요.

허나 로페나가 그렇다니 어쩌겠는가. 사실, 로페나가 제게 알려준 것은 그저 죽을 끓여줘서 가져다주는 것뿐이었다.

비록 직접 떠먹여주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에반이 괜찮다고 했을 때 아이린은 입꼬리가 하늘로 향하려는 것을 겨우 참아냈다.

조심스럽게 표정을 조절하면서, 천천히 에반의 안색을 살폈다.

로만 토벌전이 끝난 이후 아이린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에반의 상태였다.

건강은 둘째치고, 일단은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지 않던가.

혹시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는 척하고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힘들어하지는 않을까.

에반이 요즘 들어 자주 외출을 시도하려는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기에,

아이린 또한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에반이 가슴팍을 매만질 때마다 심장이 철렁이는 것만 같은 느낌에 시달리는 것도 벌써 일주일 째가 아니던가.

외출을 시켜주고는 싶었지만, 자신이 보았던 에반의 모습 때문에 쉽사리 밖으로 내보낼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만 아는 어느 한 곳에 가둬두고 싶은 심정이지만,

어떻게 에반에게 그러겠는가.

에반의 눈가가 퀭한 것을 본­사실 그저 조금 음영이 진 것뿐이지만­아이린은 가슴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황제가 에반을 볼지도 모른다는 서신을 받긴 했다.

하지만 그런 자리에 에반을 보냈다가 혹여 황제가 에반을 무리하게 시킨다면 몸 상태가 더 나빠질 수도 있지 않을까.

완전히 회복되기 전까지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밖으로 내보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에 확신이 든 것은, 이어 에반이 내뱉은 말 때문이었다.

“그냥 잠이 잘 오질 않습니다. 아마도 빌테인과 싸워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종종, 큰 싸움을 겪은 기사들이 악몽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다고 듣지 않았던가.

그럴 때 필요한 것은 마음을 평온하게 하여,

이제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시켜주는 것임을 떠올린 아이린은 조용히 에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잠을 재워주는 것 정도는...괜찮지 않을까?’

그리하여 별 생각 없이 에반의 침대에 누운 아이린은,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침대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 그리고 옆에 앉아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에반,

그리고 침대에 누운 채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가 된 자신의 몸까지.

이 3가지가 적절히 어우러지자, 아이린은 처음 했던 각오는 완전히 잊은 채 그저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침대를 두드리면서도 얼굴을 완전히 배게 파묻은 채,

한편으론 베개에서 나는 에반의 향에 몽롱해진 정신을 겨우 붙잡고 있을 따름이었다.

분명 어머니가 어린 자신을 재울 때 이렇게 했던 것 같아 따라 했던 것일 뿐인데.

막상 이런 상황이 되니 수치심을 참을 수가 없어서, 아이린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와중에 일어나면 에반은 무슨 반응을 보일지 알 수가 없었다. 혹여 실망하는 것이 아닐까.

로페나가 말해줬던 것들은 아이린의 머릿속을 한층 효과적으로 괴롭히고 있었다.

이전까지 아이린이 알지 못했던 세계들,

조금 더 끈적거리는 연인간의 이야기를 떠올린 아이린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은 채 방황했다.

“...아가씨.”

에반은 그런 아이린의 모습에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행동하고도 부끄러운 것을 아는 걸까.

몸부림치려는 것을 꾹 참는 것이 아무래도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 같았다.

침대에 누워있는 아이린을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냥 덮칠까, 하는 충동도 들었고.

그게 아니면 정색을 하며 이게 무어냐며 장난을 칠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렇기엔 아이린이 너무도 부끄러워하는 것 같지 않은가.

자신의 베개에 얼굴을 숨긴 것을 보자 괜스레 민망함이 피어오르기도 했다.

자주 빨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베고 있던...베개니까.

잠시 침대보를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던 에반은, 잠시 숨을 들이쉰 뒤 그대로 아이린의 옆을 향해 누웠다.

“누우라 하셨으니, 눕겠습니다.”

“에, 에반?”

훅­ 눕자마자 코를 찔러오는 향에 에반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 같아선 옆에 누운 아이린을 끌어안고 싶었으나,

지금은 잠시 인내해야 할 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애써 욕망을 억누르며, 옆에 누운 아이린의 손을 쥔 에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러니까, 조금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같군요.”

신기하게도, 아이린이 옆에 있으니 마음이 편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누우면 눈앞에 아른거렸던 빌테인의 싸움도, 심장이 꿰뚤린 자신을 보며 흐느끼는 아이린의 얼굴도 보이지 않아서.

에반은 옆에 누운 아이린의 얼굴을 보며 옅게 미소지었다.

“이렇게 보니 색다르지 않습니까? 누워있는 얼굴은 저나...아가씨나, 서로에게 처음 보여주는 거니까요.”

“...보지 말아요.”

아이린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자, 에반은 옆으로 돌아누워 아이린의 손을 가볍게 들어 치워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인데도, 그 아래에 새하얗게 보이는 목덜미가 얇은 머리카락 사이로 훤히 드러나고 있었다.

드레스의 파인 부분으로 보인 가슴의 굴곡, 애써 시선을 돌린 에반은 이불로 아이린의 가슴팍을 가리며 입을 열었다.

“유혹하시는 겁니까?”

“그런 게 아니라, 에반...!”

“이렇게 제 침대에 누우셔서, 옆에 누우라 하시는데. 이걸 제가 무어라 받아들여야 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에반의 얼굴에 아이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다 알고도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닌가. 가슴팍을 두드릴까도 생각했지만,

가슴에 둘러진 붕대를 본 아이린은 살짝 들린 손을 내리며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무것도 안 하실 생각이면, 저 이제 잘 겁니다.”

“아,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저는 또, 저를 눕히시고 이것저것 하실 줄 알았는데 말이죠.”

그 말에 아이린은 얼굴을 붉힌 채 입술을 뻐끔거렸다.

사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막상 에반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꼭 속마음을 들킨 것만 같지 않은가.

차라리 조용히 잠이라도 자면 모를까,

옆에서 마음을 쥐고 흔드는 에반의 입담에 아이린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턱을 괸 채 그런 아이린을 보던 에반은, 붉게 물든 귀를 바라보며 이내 피식 웃어보였다.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이 도대체 얼마만인지. 요즘 들어 아이린이 이런저런 것에 무감각해진 터라,

이렇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는 듯 했다.

다시 몸을 돌려 눕자 새하얀 천장이 보였다.

어느새 어둑해지는 창문 새로 붉은 노을빛이 새어 들어와,

조금씩 어두워지는 방의 분위기가 미묘해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편안해진 탓일까. 조금씩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알아차린 에반이 입술을 달싹였다.

“...누웠는데 베개가 없습니다. 아가씨가 얼굴을 파묻고 게시니, 저는 딱딱한 침대 위에서 머리를 뉘여야 겠군요.”

“가져가면 되잖아요.”

“그걸 말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다시 아이린을 돌아본 에반은, 아이린의 팔 한 쪽을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팔베개 한 번 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팔...이요?”

“네. 그렇게 해주시면 잠을 푹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이린은 에반의 얼굴을 보면서 입술을 오물거렸다.

팔베개...못해줄 것도 없긴 하지만, 시간이 조금 많이 흐르지 않았는가.

에반이 잠들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 지도 모르고,

자칫 밤이 지날 때까지 이곳에 있다간 무슨 소문이 돌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에 머뭇거리기를 잠시, 아이린을 바라본 에반이 살짝 시선을 내리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안 됩니까?”

꼭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꽤나 서운해 하는 표정을 본 아이린이 입술을 짓씹었다.

한 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소문이 도는 거야 로페나에게입 단속을 시킨다면, 아마도 괜찮으리라.

점점 어두워지는 에반의 표정을 바라보던 아이린은 이윽고 눈을 질끈 감았다.

에반을 향해 팔을 내밀면서, 고개를 살짝 돌린 채 힘겹게 입을 열었다.

“누워요. 지금 아니면 안 해줄 테니까. 빨리요...”

에반은 아이린의 팔에 머리를 기댄 채 조용히 미소 지었다.

혹여나 팔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팔을 벤 에반이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보지 않으려 시선을 다른 곳으로 향한 모습이 귀여워서,

손등으로 뺨을 쓸어내리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음이 고요해진다. 방 안에 흐르는 정적,

그 사이에 들려오는 서로의 숨소리가 무척이나 가까운 것이 영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허나 그런 것이 좋아서, 눈을 감은 에반은 서서히 밀려오는 졸음에 몸을 맡겼다.

아이린이 옆에 있어서일까. 아니면 단지 이렇게 닿고 있어서일까.

무엇이 옳은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하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이렇게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눈을 감고 있던 에반은 아이린의 시선이 제게 향했음을 알아차렸다.

부끄럽다면서, 살짝 팔꿈치를 들어 제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모습에 입꼬리가 씰룩였다.

지금이라면 편히 잘 수 있지 않을까. 몰려드는 수마를 에반은 구태여 피하지 않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하게. 꽤나 오랜만에 만끽하는 수면 속에 빠져들었다.

“...에반?”

잠시 시간이 흐르고, 에반의 호흡이 옅어졌음을 깨달은 아이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여 잠든 걸까.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깨있는 것 같았는데,

어느새 잠든 에반의 모습에 아이린은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에반이 악몽을 꾼다는 건 공작저에서 간간히 들었던 얘기였다.

허나 지금은 편히 자고 있으니, 어쩌면 자신이 팔을 내준 덕이 아닐까.

살짝 땀에 젖은 에반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아이린은 에반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자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던가.

살짝 타오르는 촛불에 의지해 보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술, 뺨, 감긴 눈을 살짝 매만져도 깨어나지 않는 에반의 모습을 잠시 보던 아이린은,

살짝 고개를 숙여 에반의 이마에 작게 입맞춤했다.

에반은 모르는, 오직 자신만이 아는 기억이 생겼다는 사실에 아이린은 살짝 미소 지었다.

늘 자신을 놀리던 사람이 이토록 무방비하게 있다는 사실이 조금 새롭기도 하고,

그런 사람이 옆에 누워있다는 사실이 아이린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자신이 이런 감정을 품게 될 줄은...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에반이 깨지 않도록, 다시 조심스럽게 옆에 누운 아이린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늘 에반이 누워서 바라보았을 천장을 빤히 쳐다보면서.

언젠가 잠든 자신의 귓가에 들렸던 목소리를 떠올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잘 자요.”

꿈에서 만큼은, 부디 편히 쉬기를.

아마도, 그때 자신이 들었던 목소리는 에반이 아니었을까.

그런 상념과 함께 아이린 또한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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