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Crescendo (5)
* * *
시꺼멓게 물들었던 하늘이 서서히 빛을 되찾아간다.
하늘을 칠했던 거뭇한 물감이 지워지고, 그 자리에 드러나는 푸른 하늘을 본 테오라드가 작게 숨을 내뱉었다.
무너지는 석상들, 공작저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빛에 가고일들이 서서히 쓰러지고 있었다.
“...에반 경이 해냈나 보군요.”
“하마터면, 이 자리에서 그대로 죽을 뻔 했군.”
땀과 피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린 카이셀이 중얼거렸다.
가고일, 아무리 베어도 죽지 않는 괴물에게 죽을 뻔했던 위협을 떠올리자 등골이 오싹했다.
흑마법사들을 상대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아무리 베어도, 몸을 부숴도 다시 재생하여 일어나는 적이라니.
완전히 바닥나버린 마나에 몸을 지탱하는 것조차 포기한 카이셀이 바닥에 주저앉자,
머리에 흘러내린 피를 닦아낸 테오라드가 공작저의 꼭대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분명 에반 프리드의 마나가 소멸되었다고 느꼈는데,
지금은 빌테인의 마나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 마나의 순도, 분명 마스터가 아닌 사람이 다룰 수 없는 마나가 아니지 않던가.
하늘에서 떨어진 목걸이, 그리고 에반 프리드가 지어 보였던 표정.
쉬이 그 이유를 유추한 테오라드는 이윽고 한 차례 쓰게 웃었다.
빌테인이 결국 역린을 건드린 것일까.
하늘을 물들인 암흑이 그의 영역이었다면 승산은 충분했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몰랐으나,
결국 이 주변을 마지막으로 물들인 것은 눈이 부실만큼이나 찬연한 빛이었다.
마스터, 세상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일 수 있는 존재.
까맣게 물든 공작저의 어둠이 걷어져, 이제는 본연의 색을 되찾는 것을 본 카이셀은 조용히 숨을 골랐다.
이상하게도, 격차가 더 벌어진 것에 대해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았다.
이제는 아득히 차이가 벌어져 실감조차 나지 않는 탓일까.
이번 싸움으로 인해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언젠가는...자신 또한 저 영역에 다다르리라. 황실 창고 어딘가에 있을 무언가를 생각하며,
카이셀은 조용히 공작저의 끝을 바라보았다. 수채화처럼 번진 빛깔들이 노니는 광휘의 첨단.
에반 프리드가, 그리고 아이린 유리스가 염원하던 것들이 이제는 이루어 지지 않을까.
상상만으로도 꽤 즐거운 것이라, 카이셀은 조용히 피식 웃어보였다.
#
빌테인은 침묵했다. 온 몸에 조금의 힘조차 들어가지 않아서,
꿈틀거리는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이내 하늘을 쳐다보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라는 것을 깨달았다.
도대체...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흑마법을 접한 것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였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그 말에 혹해 아버지를 따라 흑마법사와 계약한 것이 아마 처음이었다고.
빌테인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곤 옅게 웃어 보였다.
허나 결국 패배하지 않았던가. 자신을 바라보는 녹안을 보던 빌테인이 작게 입을 열었다.
“...즐겁겠군. 이제 모든 일이 너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겠나. 젊은 나이에 마스터에 올라, 이제는 5대 가문 중 하나인 로만을 토벌 했으니까. 웃어도 좋아, 그런 것을 가지고 탓할 만큼 힘이 남지는 않았으니까.”
“글쎄.”
에반은 그런 빌테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깻죽지부터 허리께까지 갈라진 그의 모습이란, 참혹하다 못해 아직도 숨이 붙어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갈라진 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거뭇한 피, 저것이 그가 품고 있던 흑마법의 편린인 걸까.
승리했다. 허나, 승리함에도 가슴이 후련하지는 않았다.
지금 그가 보이는 눈빛은 패배한 뒤에 발악하는 비참한 모습이 아닌,
그저 무언가에 초탈하여 허무해 보일 뿐이었으니까.
빌테인 로만, 제국의 검, 그런 이의 말로가 이렇게나 초라할 것이라고 그 누가 상상했겠는가.
어쩌면, 심상 세계를 겪지 못했더라면.
에반은 쓰러져 있는 것이 빌테인이 아닌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가슴팍이 괜스레 욱신거리는 듯 했다. 실제로 한 번 꿰뚫리지 않았던가.
아직 이런저런 상처가 남아 피가 흐르긴 했지만, 가슴팍이 뚫린 것은 흔적조차 없이 완전히 치유된 뒤였다.
“내가 우스운가?”
빌테인의 중얼거림에 에반은 답하지 않았다.
우습냐고 물어본다면,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차마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품은 저의를 알지 못했다. 마지막에 그가 보여주었던 절박함,
단순히 제국을 멸망시킨다는 목적을 품은 사람치고는 광기마저 어린 눈이 아니었던가.
제국이 그토록 증오스러웠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알지 못하는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그것을 알지 못했기에 에반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피식, 그런 에반의 표정을 본 빌테인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미묘한 감정이 치솟았다. 꽤나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감정,
쉬이 입을 열지 않는 저 기사는 자신을 배려하고 있었다. 방금까지 서로를 죽이기 위해 칼을 휘둘렀음에도,
심지어 심장을 꿰뚫은 이가 이렇게 무방비하게 누워있음에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
처음 하늘을 보았을 때만 하더라도 원망스러운 마음이 가득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옅어져 어울리지 않는 평온마저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평생토록 해온 일들에 비하면, 생각치도 못할 만큼 좋은 죽음이리라.
지그시 눈을 감은 빌테인이 천천히 한숨을 내뱉었다.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꽤 남아있었다.
“나는, 제국을 증오하지 않는다.”
“헛소리를.”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 감정도 없다는 것이 옳겠지. 충성한 적도 없다. 그저, 나는 제국을 이용했을 뿐이다. 내 가문과 절멸을 위해서.”
친우였던 테오라드마저 배신했던 이유는, 그저 그보다 위에 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제국의 검이라는 호칭을 받았고, 태어나 검을 들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강해지고 싶은 꽤나 단순한 욕망에 이끌렸다.
제국을 향한 충성? 애초에 허울 뿐인 맹세가 아니던가.
5대 가문이라 한들 저마다 우선으로 두는 것이 있는 법이었다.
메디브는 마나에 대한 진리를, 킬로그는 그 어떤 국가보다도 많은 정보를 얻는 것을 우선으로 했다.
그리고 로만, 그 가문의 수장인 자신은 누구보다 강해지기를 원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흑마법사의 힘을 빌렸다. 그들이 말하는 계획.
붉은 달이 뜨는 날부터 시작되는 계획은 제국을 무너트릴 것이며,
그것을 돕는다면 누구보다도 강한 기사가 되도록 돕겠다는 말에 손을 잡았다.
로만은 꽤 오래 전부터 썩어있었으니, 설령 그런 마음이 없었더라도 손을 잡지 않았을까.
“마스터에 ‘너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무슨...”
“그냥 알고만 있어라. 정확한 것은 아니니까.”
언젠가, 글씨가 흐려져 제대로 보이지 만큼이나 오래된 문헌에서 보았던 한 글귀.
세상을 색으로 물들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이 세상의 의지라 불리는 마나를 깨우칠 수 있는 경지가 있다고 했다.
허나 단지 알고 있을 뿐, 결국 닿지 못하지 않았던가. 빌테인은 에반을 바라보았다.
그라면, 그 문헌에 적혀있던 것을 해낼 수 있을까.
허나 구태여 그런 것을 설명하지는 않았다. 만약 정말 너머가 있다면 그는 스스로 닿을 수 있을 테니까.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빌테인은 옅게 웃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유리스에 남은 이들 중 누구도 죽이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노린 것은 너였으니까. 네가 가장 크게 반응할 아이린 유리스만 데려왔을 뿐이었다.”
“...정말로?”
“믿는 것은 자유지만, 누구도 죽이라고 명한 적은 없었다. 해가 뜨면 깨어나도록 조치해두었다. 어차피 내 계획이 제대로 통했더라면 해가 뜰 일은 없었을 테니.”
태양빛이 빌테인을 비추었다. 계획이 성공했다면 볼 일이 없었겠지만,
에반 프리드는 훌륭하게 자신을 격퇴했다. 우습지 않은가.
한 평생 검을 잡아왔건만, 그 절반조차 살지 못한 이에게 이렇게 지다니.
하지만 가슴이 후련해서, 빌테인은 에반에게 무어라 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괜스레 호의까지 느낄 정도이지 않은가. 심장이 멎어감을 느낀 빌테인이 한 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너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에반 프리드.”
이 싸움은 사실 자신이 이길 싸움이었다. 애초에 테오라드가 도왔더라도 이길 자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운 좋게도, 에반 프리드가 용혈을 지니고 있었고.
운 좋게도, 그가 마스터라는 경지에 대해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자신이 패배한 것뿐이었다.
그런 운이 언제까지 그에게 따라줄까.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빌테인은, 자신 스스로 그가 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퍽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패배했기 때문일까. 이왕이면 그가 절멸까지 홀로 정리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자만하지 마라.”
오만을 품지 마라. 늘 주변을 둘러보아라. 에반은 묘한 표정으로 빌테인을 바라보았다.
적이 아닌, 마치 응원하는 이에게 충고하는 듯한 이 상황에 떨떠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태도가 변한 이유가 무엇일까. 허나, 결코 우스갯소리로 들어 넘길 말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은 그저 운이 좋았기에 살아남은 것일지도 몰랐다.
심상 세계를 겪지 않았더라면, 그 안에서 동생을 보지 못했더라면,
아이린이 없었더라면. 설령 마스터로 각성한다한들 마음에서부터 꺾였으리라.
자만? 그런 것을 품을 생각 따위 추호도 하지 않았다.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고, 다만 끝의 시작을 성공적으로 끝마쳤을 뿐이었다.
“...당신의 말대로, 나는 그저 운 좋은 사람일 뿐입니다.”
에반은 더 이상 빌테인을 바라보지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빌테인의 몸이 빛에 스러지고, 그 편린이 점차 바람에 날려 흩어지고 있었다.
그 끝을 지켜보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니리라.
이런 충고를 남겨준 이에 대한 마지막 배려라 생각하며, 뒤돌아 선 에반이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 당신처럼은 되지 않을 겁니다.”
자만했기에, 오만을 품었기에, 이 자리에 쓰러져 있는 것은 빌테인이었다.
어찌 보면 기분이 나쁠지도 모를 말이었으나, 그 말을 들은 빌테인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자신처럼은 되지 않는다, 라. 그것으로 족했다. 최후에 듣는 말로는, 꽤 괜찮은 말이 아닌가.
“그랬으면 좋겠군.”
빌테인은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탁한 어둠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빛을 가리던 거뭇한 장막은 사라지고, 새하얀 태양빛이 주변을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구름, 하늘, 태양. 오랜만에 그 단어를 입으로 곱씹던 빌테인이 허탈하게 웃었다.
어쩌면 자신이 찾던 것은, 그토록 목표로 삼던 것은 저 빛이 아니었을까.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는 마음이 실로 산뜻해서, 빌테인은 마음 한 구석을 가득 채우는 감정에 조용히 숨을 멈췄다.
허무했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건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시꺼먼 공허,
구태여 바라지 않더라도...최후엔 결국 어둠을 보게 되지 않던가.
이것을 조금 일찍 깨달았더라면 어땠을까. 어둠을 거닐던 이는 결국 끝에 이르러 빛을 그리워했다.
끊어진 숨, 파들거리던 손가락이 이내 움직임을 멈추었을 때.
빌테인의 몸은 흔적조차 남지 않은 채 바람과 함께 사라진 뒤였다.
아주 자그마한 그림자조차 남기지 못한 채.
#
한 곳에 작게 피어오른 기둥 속으로 손을 내밀자,
그 손을 붙잡은 아이린이 조심스럽게 밖으로 빠져 나왔다.
다친 곳은 없나 확인했지만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 터라,
나는 옅게 한숨을 내뱉으며 아이린의 손을 붙잡았다.
“...다행입니다. 다친 곳이 없으셔서.”
만약 내가 쓰러진 사이에 아이린이 크게 다쳤더라면,
빌테인을 저리 깔끔하게 보내주진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나도 침착하지 못했겠지. 정말...빌테인의 말처럼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새삼스레 깨닫는 것이지만, 이제와 아이린은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지 않은가.
부드럽게 손을 움켜쥐자, 아이린도 나를 따라 손을 마주 잡으며 옅게 웃어 보였다.
“로만 공작은, 죽은 건가요?”
“확실하게 죽었습니다. 더 이상 소생할 가능성은 없었으니까요.”
그 말에 아이린은 다행이라는 듯 조용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가 소생했더라도 우리에게 적대할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아이린에게 이번 밤은 꽤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것을 차치하더라도, 내가 죽는 것을 직접 보지 않았던가.
그런 생각에 아이린을 조심스럽게 쳐다보자,
이윽고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린이 내 품에 머리를 툭, 하고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피 냄새.”
“아무래도, 닦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미안하라고 한 말이 아니에요. 그냥, 에반이 이렇게 내 앞에 있는 환상인 것만 같아서...조금 확인 해보고 싶었어요.”
부드럽게 가슴팍을 스친 손이 심장에 닿는다.
두근, 아이린이 가까워지자 세차게 뛰기 시작한 심장 소리를 들었는지,
피식 웃은 아이린이 내 허리께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살아있는 거...맞죠?”
“살아있습니다. 꿈도, 환상도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품에 들어온 아이린을 끌어안으며 대답하자, 아이린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팍에서, 아이린의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씩 빨라지는 고동 소리,
서서히 붉어지는 뺨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나는 아이린의 머리를 살짝 당겨 내 가슴팍에 그대로 묻었다.
좋아한다고 말한다면 어떨까.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마음을 고백하기엔 상황이나, 주변이 조금 지저분하지 않은가.
아이린의 상태도 그렇고, 연달아 싸운 내 몸 상태 또한 말이 아니었다.
위에 걸친 것이라 해봤자 찢어져 붉게 젖은 셔츠 한 벌이 전부였으니, 역시 지금은 무리이지 않을까.
품속에서 아이린의 가녀린 숨소리가 들려왔다. 미약한 숨소리였으나,
예민해진 감각이 들려주는 그 소리에 나는 한 차례 헛기침을 내뱉으며 천천히 아이린을 가슴팍에서 떼어냈다.
어째 점점 품속으로 파고드는 것만 같아서, 이 이상 파고들면 내가 더 곤란할 것 같았다.
떼어낸 아이린의 눈을 붉게 물들어져 있었다.
떨리는 어깨를 그제야 눈치 챈 나는 아이린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왜 갑자기 울고 그러십니까. 제가 실수한 겁니까?”
“죽어버린 줄 알았어요...영영, 만나지 못할까봐. 나는, 그대에게 무엇 하나 도움이 된 것이 없는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도움이 되지 않았다니.”
구름 사이를 가른 햇빛이 아이린에게 닿았다. 그 새하얀 머리칼에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반짝이고, 그와 함께 눈물이 담겨 일렁이는 아이린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아가씨가 있어서 돌아온 겁니다.”
이 세상에 미련이 있다면, 그건 오직 아이린 한 사람 뿐이었다.
소설을 보면서 그녀를 위해 슬퍼했고, 그녀가 비극을 겪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제는 그녀를 마음에 품어, 한 여인으로 아이린을 바라보았기에. 정확히는, 그녀를 사랑했기에.
이렇게 다시 살아 돌아온 것이 아니던가.
“제 곁에 계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됩니다.”
살짝 벌어진 입술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미소 짓는다.
붉은 입술이 손가락에 눌려 하얗게 변하고, 그 입술에 닿았던 손가락으로 볼을 푹 찌른다.
“그러니 울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렇게 돌아왔는데, 이런 모습만 보여주시면...조금 섭섭하지 않겠습니까.”
“...풋.”
내 손가락으로 살짝 당겨진 입꼬리를 보며 고개를 까딱이자,
그제야 웃음을 터트린 아이린이 내 손을 치우며 내 품에 기대었다.
늘 감도는 장미향이 코를 찌른다. 순간 정신을 훅 놓을 만큼이나 강렬한 향.
피가 묻어있음에도 사라지지 않은, 그 달콤한 잔향에 홀린 것처럼. 아이린을 향해 얼굴을 가까이했다.
“...가까워요.”
알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가까이한 얼굴이 생각보다 그 간격을 많이 좁혔다는 것을.
허나 피하지 않았다. 지금이 아니면 하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가까스로 얻은 용기는, 오로지 지금 이 순간에만 통할 테니까.
허리를 가볍게 휘감았다. 한 팔로 붙잡으면 충분할 만큼이나 가녀린 허리였다.
그 때처럼 과일향이 나지는 않았다. 알싸한 술의 향도, 코끝을 붉힐 만큼이나 달뜬 숨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뜨거웠기에, 햇빛이 무색해질 만큼이나 붉게 물든 뺨이. 입술이.
이토록이나 달콤한 향을 풍기고 있었으니까.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무 말을 내뱉지 않았다.
이 순간만큼을 기다려온 것처럼, 입술이 맞닿자마자 서로의 혀가 얽히기 시작했다.
까치발을 든 아이린의 몸을 받친 채로, 그렇게 입술을 탐했다.
어쩌면 절박해보일 수도 있었다. 새벽에 겪었던 그 끔찍한 기억들.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런 사람을 둔 채로 힘없이 스러지던 기억.
잊고 싶은 마음에 서로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붙잡은 어깨에 새빨갛게 손자국이 남을 만큼, 허리를 끌어안은 손이 새하얗게 질릴 만큼이나.
서로의 숨결을 느꼈다. 앞에 있는 이가 살아있음을 확인했다.
우리가 살아있음을, 앞으로도 계속 함께 할 수 있음을.
숨이 막힐 만큼이나 입을 맞췄음에도, 다시 눈을 마주친 채 입술을 맞댄다.
벅차오르는 숨에 달뜬 숨결이 닿고, 뜨거운 호흡과 함께 입가에서 은빛의 실이 흘러내렸다.
“...하아.”
어느새 벽에 기댄 아이린이 힘겹게 숨을 내뱉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볼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면서, 다시금 살짝 입술을 맞추었다.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누구의 피 일까...허나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그런 것을 알아내지 못할 만큼이나, 꽤 많은 서로의 타액이 섞인 뒤였으니까.
살짝 몽롱해진 아이린의 표정을 보며 살짝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더 할 수 있었다.
하지만...이제는 언제든지 이렇게 할 수 있지 않은가.
단지 확인 했을 뿐이었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남았음을, 역경을, 고난을,
비극을 헤쳐. 결국엔 우리가 이렇게 남아 서로를 바라볼 수 있음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옅게 떨리는 아이린의 어깨를 잠시 바라보다가,
내 시선을 힐끔 피하는 아이린을 그대로 들어 품에 안아 들었다.
“에, 에반?”
“왜 그러십니까?”
“이 자세는...조금 부끄럽지 않나요. 지금 충분히 걸을 수 있”
“싫습니다.”
아이린의 얼굴이 붉다 못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남에게 보이기에 꽤 부끄러운 자세이긴 했지만.
어차피 밖에는 황태자와 테오라드 경이 전부 아니던가.
내 품속에 얼굴을 내민 채 애써 표정을 가리려 하는 그녀였지만,
새빨갛게 물든 귀 끝을 보며 나는 옅게 미소 지어 보였다.
내일이 온다. 이제는 조금 많이 달라질, 그런 미래와 더불어.
내일이란 단어가 이토록 가슴을 설레이게 만드는 단어였던가.
우리를 향해 비추는 따스한 햇살을 느끼면서, 그렇게 이 순간을 즐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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