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89화 (89/181)

〈 89화 〉 Crescendo (4)

* * *

툭, 가볍게 맞부딪힌 입술이 떨어지자 에반의 얼굴이 곧바로 붉게 물들었다.

지금...아니, 이 상황에?

배시시 웃는 아이린의 얼굴에 대고 무어라 할 수 없어 어색하게 웃은 에반은,

이윽고 헛기침을 내뱉으며 아이린을 조심스럽게 땅에 내려놓았다.

상관은 없는데, 오히려 좋긴 한데. 그래도 빌테인을 앞에 두고 이래도 되는 것일까.

“음...어, 굉장히...당황스럽군요.”

“이제 자주 할 거잖아요. 벌써부터 당황하면 어떡해요.”

자주 한다, 라. 에반은 조용히 웃어보였다.

생각해보면, 이 싸움이 끝난 뒤에는 꽤 많은 것들이 변할 터였다.

5대 가문의 구도, 제국의 전투력, 황태자의 입지...그런 걸 다 떠나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약혼의 파기가 아닐까.

대외적으로 아이린과 함께 나설 수 없었던,

그리고 관계를 명확하게 할 수 없었던 걸림돌이 사라진다는 사실에 괜스레 얼굴이 뜨거워지는 듯 했다.

허나, 에반은 아이린을 바라보던 시선을 떼며 조용히 뒤를 바라보았다.

빌테인의 시야를 차단하고는 있었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제 곧 있으면 이 빛이 사그라든다. 이 뒤의 얘기는, 빌테인을 마저 쓰러트린 뒤에 해야 하리라.

아이린 또한 그 점을 알고 있기에 에반에게 더 이상 무어라 하지 않았다.

다만 닿았던 입술을 슬쩍 매만지며, 평소에 잘 짓지 않았던 간드러지는 미소를 지어보였을 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더...해줄 수는 있었지만. 지금은, 나중을 기다려야 할 때이지 않은가.

에반이 떨어지고, 주변을 가리던 빛도 그와 함께 사라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 돌아온 건지 모르겠군.”

분명 심장을 꿰뚫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리 살아있단 말인가.

방금의 모습을 빌테인은 보지 못했다. 다가가면 몸을 불태우는 그 섬광,

전에 싸울 때와는 차원이 다른 그 마나의 밀도에 빌테인은 침음을 삼켰다.

제물로 사로잡았다고 생각한 아이린 유리스의 모습이...완벽하게 원래대로 치유되어 있었다.

에반 프리드 또한 멀쩡한 모습, 도대체 그 잠깐의 시간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빌테인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가."

에반은 후련하게 웃어보였다. 빌테인에게 죽는 것은 자신에게 많은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벽, 그 벽이 무엇이고 무엇에 미련을 두고 있는지 알게 되지 않았던가.

동생에 대한 미련, 그리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고 있던 것.

빛을 휘감아 아이린을 보호한 에반이 조용히 빌테인을 응시했다.

더 이상, 그에게 숨이 죄여올 만큼의 압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스터에 다다랐기 때문일까, 그의 마나와 움직임에서 빈틈이 조금씩 보이는 것만 같았다.

허리춤에서 검을 뽑은 에반이 손잡이만 덩그러니 남은 검을 바라보았다.

이름 모를 마법검, 단순히 제 마나에 반응하는 특이한 검이라 생각했건만,

마스터에 다다르니 비로소 이 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정확히는, 이 검이 담고 있는 본질이 보였다.

화르륵­

흑마법사가 담고 있는 사특한 기운에만 반응하는 것이 아닌,

그저 ‘악’이라 판단되는 모든 것을 베는 검. 그 먼 옛날, 알라르가 직접 들어 용을 죽였다는 용살검.

“...아스칼론.”

검의 형태가 이전과는 달랐다. 검신은 여전히 새하얀 순백의 색을 띄고 있었으나,

검의 손잡이, 그리고 코등이의 형태가 점차 달라지고 있었다.

검을 집어삼킬 듯 삐죽 튀어나온 이빨이 검신의 뿌리를 집어 삼킨 모습,

전체적으로 백색을 띄는 검이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주변의 그림자를 찢어발기고, 오로지 찬연한 빛으로 가득 채우는 검은 에반과는 또 다른 존재감을 주변에 뿌리고 있었다.

그 검을 본 빌테인이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스스로 그 뒷걸음질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뒷걸음질을 쳤다고? 고작 저 기사에게? 아니, 빌테인은 방금 떠오른 그 감정을 애써 무시했다.

까드드득, 이가 맞부딪혀 소리를 냈다. 자신이 쉽사리 처리했던 기사였다.

달라진 마나는 그가 마스터에 올랐음을 의미했지만...고작 그 뿐이었다.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자신 또한 마스터였으나,

흑마법으로 강화된 육체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건했다.

뿌드득, 빌테인의 몸이 서서히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괴이하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이나 커져버린 근육,

그 근육에 비하면 앙증맞아 보이는 자신의 애검을 부러트린 빌테인이 새로운 검을 뽑아들었다.

4년 전, 카심 백작에게 부탁하여 새로 만들어낸 검.

진혼을 본 떠 만든 듯 오묘한 빛을 띈 검이 허공에서 빛을 발했다

­화아아악! 아스칼론과 빌테인의 검이 만들어낸 빛이 서로 닿아 폭발했다.

“에반.”

“...괜찮습니다. 이번에는 정말로, 지지 않습니다.”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아이린을 향해 조용히 웃은 에반이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이린은 괜찮았다. 저 빛 안에 있다면, 그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만은 안전할 테니까.

스으으­ 폐로 향한 호흡이 전신으로 퍼졌다.

빠르게 흐르는 혈류가 근육을 파고들어, 이윽고 팽팽하게 당겨진 근육이 다시금 심장의 맥동을 촉진시켰다.

에반은 조심스럽게 심장 부근을 움켜쥐었다. 두근, 심장의 맥박이 느껴졌다.

익스퍼트일 때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으나, 마스터에 다다른 뒤 본능적으로 무언가가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단순히 달라진 마나의 순환 뿐이 아니라, 자신에게 담겨져 있는 용의 힘.

근원을 뒤튼다, 그 생각과 함께 심장의 마나가 서서히 에반의 이끌림에 따라 공명하기 시작했다.

우웅­

마력의 폭풍, 압축되어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만약 밖으로 꺼내진다면 이 주변을 순식간에 초토화시킬 만큼이나 강렬한 힘이 육체 속에서 요동쳤다.

용언, 원작 주인공인 스칼렛이 사용했던 힘. 에반은 조심스럽게 그 편린을 심장에 담았다.

쿠오오오­!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강대한 힘이 몸을 휘감았다.

마스터이더라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힘, 견뎌낼 수 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에반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렸다.

쿠구구궁­ 에반이 딛고 있는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용솟음치는 불꽃이 주변을 휘감아 어둠을 물리치고 있었다.

영역? 아니, 영역은 아직 펼치지도 않았다.

빌테인의 영역 속에서, 에반은 그 누구보다도 자유로웠다. 그 시전자인 빌테인보다도.

‘...이건, 아니, 달라.’

빌테인 또한 그 차이를 느꼈다. 자신의 영역 속에서도 아무런 무리 없이 움직이는 에반 프리드.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갑작스럽게 차이가 벌어졌다. 혹여 힘을 숨기고 있었단 말인가?

아니, 힘을 전부 사용하지 않은 것은 그 뿐만이 아니지 않은가. 빌테인은 검을 쥐었다.

흑마법으로 강화된 몸, 승산은 얼마든지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승리하는 것은 자신이었고, 저들은 모두...죽을 터였다.

“아무것도,달라지지 않는다.에반 프리드!”

빌테인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파고들어 온전히 사라지자,에반은 침착하게 주변을 검으로 그었다.

불꽃이 담겨진 검이 어둠을 찢어 발겨, 이윽고 드러난 선명한 공간 속에서 빌테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콰가가각! 에반의 검이 빌테인의 검과 맞닿았다.

찰나의 순간, 그 순간 드러난 것은 에반과 빌테인의 차이였다.

밀린다, 그것을 깨달은 빌테인이 이를 악물었다.

구오오오! 어둠 속에서 휘몰아치는 창날들이 쏟아져 나왔다.

에반은 그것을 구태여 피하려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피할 필요가 없었다.

몸에서 쏟아지는 섬광이 창날과 맞부딪혀 튕겨내고 있었다.

마치 의지를 지닌 무언가처럼, 빛의 정령들이 에반의 움직임을 보조함과 동시에 위험 요소를 배제 하고 있었다.

스르르­ 다시금 금색의 빛이 에반의 눈동자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완벽히 용과 동화된 몸, 강렬한 백염이 빌테인의 몸을 휘감았다.

“크아악!”

팔이 불꽃에 휘감긴 빌테인이 거리를 벌렸다.

화아악, 빌테인이 팔을 벌림과 동시에 어둠이 그 몸속에서 솟구쳐 에반을 향했다.

촤자자작, 거뭇한 격류가 주변을 휩쓸고, 곧이어 에반이 내뿜고 있는 빛을 덮쳤다.

허나 어둠은 갈라진다. 에반의 몸에서 일은 섬광이 어둠을 꿰뚫어 빌테인의 몸을 감싼 그림자를 찢었다.

연달아 쇄도하는 검격, 빌테인의 몸이 점차 괴상하게 부풀어올랐다.

강대해지는 힘, 시꺼멓게 변해버린 눈동자는 공허를 담고 있었다.

황혼, 보랏빛의 마나가 빌테인의 몸에서 이글거렸다.

이제는 보인다, 에반이 휘두르는 검의 궤도를 포착한 빌테인이 킬킬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길 수 있다.’

제물로 바칠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완전히 달라진 형세에 빌테인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멍청한 아델! 그 멍청한 녀석이 조금만 제대로 싸웠더라면 이렇게까지 몰리지 않았으리라.

새까맣게 타버린 팔을 본 빌테인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비틀린 입가에서 날카로운 이빨이 눈에 띄었다. 그는, 더 이상 사람이라 할 수 없는 형상을 띄고 있었다.

“...도대체.”

검을 휘두르면서, 에반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흑마법과 닿은 이들은 하나같이 저런 운명을 맞이하는 것일까.

침착함이 사라진 빌테인의 눈에선 더 이상 그 총명함이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광기와 분노에 휩쓸려, 제 앞에 있는 이를 죽일 생각만 담겨 있는 눈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용언이 만들어낸 마력의 보호막이 정령이 만들어낸 섬광과 합쳐졌다.

금빛을 내는 빛무리, 에반이 움직일 때마다 금색의 선이 허공에 그어졌다.

에반의 발이 미끄러지듯 땅을 스치며, 동시에 오른손에 쥐인 검이 휘둘러졌다.

까아앙, 아직 남아있는 망토 속에서 새하얀 불꽃이 일었다. 그 불꽃이 빌테인은 거슬렸다.

자신의 검이 읽히는 것 또한 거슬렸으나,

공격과 공격 사이에 이어져 자신을 불태우려 하는 불꽃이 심히 거슬릴 따름이었다.

그 불꽃은 어둠과 상성이었다. 흑마법을 담은 제 몸을 불살라 결국 모든 것을 꺼트린다.

빌테인은 이를 악물었다. 분명, 검으로는 자신이 우위에 있어야 했다.

영역을 펼치지 않은 싸움, 헌데 어찌하여 자신이 밀리고 있단 말인가?

검은 계속해서 교차하고 있었다.

상대의 행동을 예측하고, 다시금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여 휘둘러지는 검은 더 이상 싸움이라 할 수 없었다.

검이 허공을 그었다. 발이 맞부딪혀 꼬인 발걸음에 몸이 휘청거렸다.

오로지 서로의 공격을 막고, 피하는 지루한 공방. 허나 에반과 빌테인은 그 와중에 희열을 느꼈다.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목이 베여진다.

오로지 한 평생을 검과 살아온 로만 공작과의 싸움에서 동수를 이룬다는 것만으로도,

에반의 성장세는 그 누가 감히 짐작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섬뜩함.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차가운 감촉에 빌테인은 입술을 짓씹었다.

검에서 만큼은, 자신이 우위를 점해야 했다.

흑마법으로 끌어올린 육체의 힘, 그럼에도 비등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싸움이 자신에게 불리하다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에반은 조용히 빌테인의 검을 쫓았다. 검술? 기술의 완성도?

다 좋았지만, 이제 와서는 전부 의미 없는 말에 불과했다.

자신은 빌테인이 지닌 로만의 검술을 따라잡을 수 없다.

그걸 알고 있었기에, 오로지 검으로만 승부하려 하지 않았다.

마스터에 다다르면서 한 층 더 상승한 마나의 질, 밀도.

거기에 용혈로 날카로워진 감각, 신체의 능력. 그리고 다른 그 어떠한 것과도 비할 수 없는 육체.

검술에 대해 이해했기에 따라잡는 것이 아닌, 단지 이 감각으로 검의 궤적을 쫓을 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검의 선을, 허공을 수놓는 이 보랏빛 궤적을.

카아앙! 에반의 검이 다시금 빌테인의 검과 부딪혔다.

허공을 긋는 빈도가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건, 에반의 눈이 그 궤적을 쫓는 것에 익숙해졌음이리라.

화르륵, 불꽃이 에반의 몸을 휘감았다. 이 이상 길게 싸울 이유는 없었다.

속전, 그리고 속결.

에반의 몸이 한 층 가속하자, 그 움직임을 따르지 못한 빌테인의 가슴팍이 길게 베였다.

촤아악! 튀긴 피, 거뭇한 물결이 가슴팍에 치솟자 빌테인은 곧바로 에반에게 거리를 벌리며 뒤로 물러났다.

“하아...하아...”

밀린다. 하지만 그 이유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분명 심장을 꿰뚫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이 압도하지 않았던가.

빠른 검, 허나 전부 읽혔다. 마나의 밀도, 완벽하게 밀리고 있었다.

금색의 눈이 반짝일 때면, 그 마나에 압도당해 몸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남은 것이라면...빌테인은 이를 악물었다. 이 공작저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자신의 공간이자 영역.

역수로 쥔 검이 땅에 꽂혔다. 끓어오르는 용암처럼, 들끓는 그림자가 주변을 칠하고 있었다.

먹으로 적셔진 붓처럼 휘둘러져 허공에 획을 긋는다.

어둠으로 물들인 공간, 빛 한 점, 자그마한 광명조차 들이지 않는 암실.

쿠오오오­! 에반은 주변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시꺼멓게 물든 공간 속에서 빌테인의 기척이 읽히지 않았다.

비틀린 입꼬리, 에반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영역을...구태여 펼칠 필요가 있을까.

더 이상 불꽃은 타오르지 않았다. 허나 아이린은 괜찮으리라.

그것을 끝으로 상념을 지운 에반이 천천히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둠, 허나 눈은 어둠에 순응한다. 암순응한 눈이 서서히 주변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조금의 빛조차 들이지 않는 것이 이 영역이었지만, 에반은 그 어둠 속에서 아주 옅게 피어오른 빛을 찾았다.

정확히는, 빌테인 스스로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었기에.

촤아악, 휘둘러진 검 끝에 핏방울이 튀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가 베이는 감촉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허나 오감이 아닌 또 다른 감각이, 분명 ‘베였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보라색의 눈동자가 보였다...그는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이 어둠에서마저 암순응을 끝마친 에반의 눈엔 그 모든 것이 똑똑히 보일 따름이었다.

정순해진 마나, 한 단계 벽을 뛰어넘은 용혈이 빌테인의 존재를 포착하고 있었다.

“도망치지 마라.”

빌테인에 제게 멀어지는 것을 깨달은 에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뚝, 순간 빌테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자신이 도망친다고?

아니, 그저 이기기 위해서 새로운 수를 찾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도망친다니.빠드득, 이를 악문 빌테인이 몸을 돌렸다.

뒷걸음질 치는 것, 이기기 위한 방법이었으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제국의 검이자 황제의 혈통, 그리고 흑마법의 힘을 받은 자신이 어찌하여 도망친단 말인가.

팔에 괴이하리만치 튀어나온 핏줄이 찢어져 거뭇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우우웅­ 보랏빛의 마나가 한 곳에 모여, 이윽고 어둠에 강렬한 파문을 일게 만들었다.

에반을 향해 쏟아지는 검은 송곳이 이윽고 화염을 파고들었다.

허나...그 뿐이었다. 검은 송곳은 에반에게 닿지 않았다.

콰아앙! 어둠 속에서, 존재하지 않아야 할 한 줄기 섬광이 일었다.

빌테인의 눈이 커졌다. 에반의 몸을 휘감는 화염,

금색의 머리카락이 그 속에서 휘날리고 있었다. 쩌저저적, 검이 박힌 지면이 갈라지며 새하얀 빛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조금씩, 점차 넓어져 가는 균열이 마치 회로처럼 땅에 그려지고 있었다.

주변이 빛에 잠식된다, 그리고 떠오른 빛무리들이, 마치 별처럼 암흑 속에서 동그랗게 피어올랐다.

“에반, 프리드.”

빌테인이 낮게 읊조렸다. 모든 것이 망쳐졌다.

힘겹게 펼쳐진 영역마저도, 모든 그림자가 제 수족처럼 다뤄져야 할 이 영역마저도 빛에 침식당하고 있었다.

처음의 여유로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까맣게 물든 팔을 부여잡은 채, 젖은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휘날린 빌테인이 고함을 질렀다.

모든 계획이 꼬였다. 승산? 계획? 전부 다 필요 없지 않은가.

그저 저 앞에 있는 기사에게 승리를 쟁취하고 싶다고, 한때나마 검의 정점에 서있던 제 심장이 외치고 있었다.

빌테인의 몸에 둘러진 망토가 허공에 휘날렸다.

방패를 가른 검, 어쩌면 그 문장부터. 유리스와 척을 질 로만의 운명을 의미했을지도 모르리라.

제국의 검이자, 절멸의 장로로써. 빌테인은 조용히 검을 거머쥐었다.

영역이 남긴 힘을 모두 흡수한 지금, 빌테인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힘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저 앞에 있는 기사를 벨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하늘을 찔러대는 것만 같았다.

숙여진 어깨, 앞을 향해 최대한 빠르게 도약할 수 있는 자세, 뒤로 뻗어진 다리에서 종아리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구구국, 눌린 땅이 조금씩 부서지고 있었다.

완전히 부서져, 아예 구멍이 뚫릴 만큼 힘이 가해졌을 때.

파앙! 땅을 박찬 빌테인이 검을 앞으로 전진시켰다.

찌른다, 그리고 에반 프리드의 몸을 꿰뚫는다. 솟구치는 어둠이 빌테인의 몸을 휘감았다.

그는 하나의 검이요 창이었다. 오로지 찢고 벤다는 일념이 담긴 무아(無?)에서 보랏빛 황혼이 일렁였다.

그리고, 에반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도망? 방어? 아니, 지금 하고자 하는 것은 그저 저것을 베고자 한다는 일념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오만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저것을 벨 수 없을지도 모르리라.

허나 그것은 아주 희박한 확률일 뿐이었다. 몸을 휘감은 불꽃, 이 어둠을 꿰뚫고 새어나온 섬광.

찬연한 빛이 쏟아지는 하늘은, 동생과 함께 보던 밤하늘을 닮아 있었다.

­별이 아직도 외로워 보여?

"아니."

에반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빛이 에반의 몸을 휘감았다.

무언가를 베기 위해서는, 그리 화려한 동작이 필요하지 않았다.

조용히 숨을 내뱉은 에반의 한 쪽 발이 조용히 뒤를 향해 미끄러졌다.

앞을 바라보는 몸, 양손으로 거머쥔 검이 차츰 들려 머리 위로 뻗어졌다.

팽팽하게 조여진 근육, 오로지 단 한 합. 곧이어 행해질 공격을 위해 모든 마나가 몸에 스며들고 있었다.

산소 하나하나, 조금이라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쥐여 짜진 폐가 근육에 생기를 돌게 했다.

자신이 행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그저, 벨뿐이었다. 검을 휘둘러 벤다.

단순하다 못해 몇 개의 음절조차 소모시키지 않는 단어가 명시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명확하며 강력했다.

우웅, 심장이 떨렸다. 점차, 맥동이 줄어들었다.

생명이 꺼져가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초탈하여 집중하였기에,

그 ‘벤다’라는 행위에 에반의 존재가 동화되고 있었다.

스스로가 검이라면, 나 자신이 검이라면.

무언가를 베는 것에 화려한 검술이 필요할까?

구태여 땅을 수십 번 박차며, 몸을 여러 번 꼬아 상대의 허점을 노려야 할 그럴 필요가 있을까?

아니, 그럴 필요는 없었다. 휘두르고, 그렇기에 베어진다.

단지 두 개로만 이루어진 과정에서 추가되는 건 그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일 뿐이었다.

지이잉­ 에반의 검에 검의 형태를 이룬 빛이 일었다.

날카롭고, 찬란한 빛의 섬광. 에반은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딛었다.

발이 무거웠다. 쿠궁, 빛에 의해 일었던 균열에서 다시금 찬연한 백색의 염화가 일기 시작했다.

부서지는 땅의 편린이 하늘에 떠올랐다.

울리는 대지, 어둠에 물들어 타락했던 대지가 흔들려 파괴된다.

그렇기에, 동지(??).

스르르­ 에반의 검이 천천히 목표를 향해 그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한없이 느린 검의 궤적에 빌테인의 검이 에반의 몸을 금방이라도 꿰뚫을 것처럼 보였다.

허나 닿지 않았다. 느렸으나, 느리지 않았다.

선명하게 그어지는 빛의 궤적이 빌테인의 몸에 선을 그려냈다.

이윽고 땅에, 하늘에, 찬연한 별빛을 뿌려대는 밤의 어둠에.

갈라지는 하늘에서 여명이 일었다. 어둠이 뒤섞인 구름이 갈라지고,

그 틈새를 꿰뚫은 아침의 빛이 검 끝을 비추고 있었다.

새하얗게 물든 하늘, 그 사이로 스스로의 광명을 조금의 낭비 없이 흩뿌리는 태양.

깨진 하늘 사이에서 이는 선명한 빛은, 빌테인의 하늘이 부서지고 깨졌음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경천(??).

느려진 세상 속에서, 에반은 천천히 검을 내렸다.

스스로 만들어낸 궤적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호흡조차 하지 않고, 그 선을 따라 침착하게 검을 휘둘렀을 뿐이었다.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한 번의 휘두름일 뿐인데,

몸을 덮치는 피로감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정지한 세계 속에서 스스로 움직임을 되찾은 것은 오직 에반 하나였다.

일격, 일합. 하늘마저 갈라낸 검격이 비로소 그 선을 완벽히 그리는 것을 끝 마쳤을 때.

정지된 시간이­

다시금 흐르기 시작했다.

촤아악, 빌테인은 전진하던 검이 멈추었음을 깨달았다.

앞으로 향하던 몸이 급격하게 무너져 내린다.

새하얗게 물든 머릿속에서, 현재의 상황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잔인하리만치 참혹한 두 음절의 단어였기에,

빌테인은 멍하니 자신의 가슴팍에서 솟구치는 피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하늘을 향해 쏟아지는 거뭇한 피, 자신이 뿌려둔 그림자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새벽은 끝났다. 그 어떠한 빛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밤이 끝나고...아침이 찾아왔다.

시꺼먼 구름 사이에서 여유로이 빛을 뿜어내는 태양을 발견한 빌테인은 헛웃음을 흘렸다.

청색의 하늘, 그토록 보기 싫었던 새하얀 태양.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이리라.

빌테인 로만은, 패배했다.

하늘을 보던 빌테인이 이윽고 광소를 터트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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