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Crescendo (3)
* * *
에반이, 죽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아이린은 흐느끼던 것을 애써 억눌렀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에반을 끌어안아 주고 싶었지만, 차갑게 식은 몸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내며 조용히 앞을 바라보았다.
빌테인, 그가 에반을 죽였다는 사실에 이가 맞닿아 악물렸다.
허나, 그와 싸울 수는 없다. 아이린은 차분하게 생각했다.
에반이 제게 건네주었던 마나.
자신을 위해서...그리고 자신이 여기에서 빠져나가라며 준 마나가 아니던가.
그 배려에 다시금 눈물이 새어 나왔다. 이 마나라면 에반이 스스로 소생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는 용혈을 타고났으니까, 그런데도. 자신에게 에반은 마나를 주었다.
희생으로 만들어진 기회, 어둠이 자신을 옥죄는 것이 멈추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이린이 조용히 울음을 삼켰다.
허투로 사용할 수 없었다. 적어도, 모든 것이 끝난 뒤에 슬퍼하더라도 충분하리라.
“...전부 끝났군.”
아니,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빌테인의 중얼거림에 아이린은 그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에반은 죽었지만, 아직 에반의 마나가 제게 담겨져 있었다.
그의 시선을 뺏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품 속에 들린 단검을 떠올린 아이린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허나 이 시선이 드러나지 않게. 에반을 입술을 깨문 아이린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울어도 변하지 않는다. 에반 프리드는 죽었다. 아이린 유리스.”
“닥쳐.”
“울면 무엇이 변하는가? 보아라, 저리 널브러진 기사의 모습을. 결국...이렇게 된 것은 네 탓이다.”
네 탓, 표정을 애써 관리하는 아이린이었지만. 그 말이 유독 가슴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에반이 죽었다...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탓이라는 걸.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이곳에 홀로 올라와 저리 처절하게 싸운 것은, 자신을 이곳에서 꺼내기 위해서 아니었던가.
단 한 번도, 무언가에 무력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허나 지금 만큼은, 온 몸을 휘감는 무력감에 아이린은 그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에반...’
팔이 부러지는 것을 보았다. 살점이 뜯어져 피와 함께 흩날리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도, 에반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검을 휘두르며 계속해서 싸우려 했다.
마스터의 영역 속에서도 버티려한 것이 에반이 아니던가. 입 안에 비릿한 맛이 감돌았다.
찢어진 연한 살에서 끊임없이 피가 배어나와,
이윽고 입가에서 한줄기 피를 흘린 아이린이 다시금 빌테인을 바라보았다.
“에반 프리드를 제물로 바칠 생각은 없다.만약 바칠 거라면, 죽이지 않았겠지. 차라리 사지를 끊어, 네 앞에서 버둥거리는 모습을 보여주다 제물로 바쳤을 터다.”
스르릉
빌테인은 쓰러진 에반을 향해 잠시 시선을 두었다. 그는, 훌륭했다.
한 사람의 기사로써, 한때나마 제국을 위해 충성을 바쳤던 만큼.
그가 보여준 기개에 대해 옅게 감탄을 품을 정도였다. 허나...에반 프리드는 죽었다.
살아있는 것은 자신이었고, 그의 심장을 찌른 것 또한 자신이었다.
그에 대한 경의의 표현으로 에반 프리드를 제물로 바치는 것은 포기했으나,
그렇다고 제물을 바치는 것 자체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허리춤에서 뽑힌 자신의 애검, 발뭉을 꺼내들은 빌테인이 아이린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비록 에반 프리드 만큼은 아니더라도, 아이린 유리스 또한 훌륭한 제물이었다.
5대 가문이라는 희소성, 유리스라는 가문 자체가 품고 있는 특수한 힘.
그것을 감안한다면, 시간에 맞춰 계획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네가 제물이 되는 거다. 아이린 유리스.”
아이린은 답하지 않았다.
빌테인과의 간격을 가늠하면서, 그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흑마법사들이 계속해서 얘기하는 ‘계획’이 무엇인지,
구태여 에반을 이리로 끌어들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자신이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먼저였다.
아래에는 테오라드 경과 황태자가 있을 터였다.
빌테인이 다가오는 것을 본 아이린은, 이윽고 그가 조금 더 다가왔을 때 입술을 달싹였다.
“...빌테인 로만.”
가슴 속에서 사무치는 증오가 그를 향했다.
침착하게 행동해야 하는데, 그 가증스러운 보랏빛 눈동자를 볼 때면 속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
뜨거운 숨결이 입에서 새어나왔다. 당장 제 앞에 있는 그 목을 조르고 싶다.
그 심장에 칼을 찔러 넣어, 설령 자신이 죽을지라도 그를 죽이고 싶었다.
허나, 에반은 자신이 살아남기를 원했기에.
서걱, 어둠 속에서 빠져나온 아이린이 빌테인의 손목을 그었다.
품 속에 있는 단검으로 했던 불의의 기습에 빌테인은 반응하지 못했다.
어둠에서 어떻게 빠져나왔단 말인가. 상정조차 하지 못했던 가능성에 순간 눈이 크게 뜨였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다시 이는 불꽃. 화르륵, 아이린의 몸에서 새하얀 불꽃이 일었다.
에반이 건네준 마나, 그 전부를 끌어 올린 아이린이 빌테인에게 간극을 벌렸다.
이 높이에서 떨어진다면...분명 죽는다. 에반의 시체를 힐끗 본 아이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는 몰라도, 아래를 돌파하며 이 곳에서 빠져나간다는 선택지 말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타닥, 넓은 공동이었다. 그래서인지, 한참을 달려도 출구가 가까워지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아이린은 달렸다. 땅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그림자가 제게 향하더라도,
에반의 불꽃이 타오르는 검을 휘둘러 그것을 베어가며 앞으로 내달렸다.
숨이 차올랐다. 익스퍼트 초입에 다다랐지만,
느끼기만 하더라도 숨이 막혀오는 이 마나의 영역 속에서 정신을 차리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호흡만으로도 정신력이 소모된다, 에반의 불꽃과 함께 자신의 마나가 피어올랐다.
푸르고, 하얀 마나가 아이린의 몸을 감쌌다.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허나...이 불꽃마저 사그라들면, 다시 에반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아이린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출구를 향해 달리면서, 아이린은 머릿속에 스쳐가는 기억들과 마주했다.
에반을 처음 만났던 그날, 자신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던 한 호위 기사를.
이런저런 말을 걸며 제게 친근하게 굴려했던 기사를.
그 때 들었던, 괜찮냐는 한 마디가. 자신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주었는지 말해주어야 하는데.
아이린이 입술을 짓씹었다. 축제를 기억한다.
저 혼자 토라져 홀로 거닐었던. 제 뒤에서 따라오던 에반이 그럼에도 미소 지었음을 떠올린다.
가슴이 아팠다. 흐르는 눈물이 자꾸만 뺨을 적셔서, 앞이 보이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하아.”
봄에, 여름에, 가을에, 그리고 겨울에. 함께 했던 4년이 생생하리만치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었다.
자신의 책상 한 구석에 여전히 놓인 액자, 그 속에서 함께 미소 짓는 그림이 있지 않았던가.
언제까지고 그렇게 함께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데. 생각이 이어지지가 않았다.
자꾸만 벅차오르는 감정에, 숨마저 막혀 억지로나마 숨을 토해낼 따름이었다.
이것이 환상이라면, 조금이라도 손을 뻗으면 그에게 닿을 텐데.
손에 닿은 그의 몸이 차가울까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죽은 것이 사실임을 어찌 받아들인단 말인가.
제 입술에 닿았던 감촉이, 얽혔던 혀가, 맞닿았던 체온이 이토록 생생한데.
에반 프리드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음을, 아이린은 도저히 받아들이고 싶지가 않았다.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그런 ‘척’ 했을 뿐이었다.
여기서 무너진다면 정말로 무너지게 될까봐.
앞으로 남은 삶에서 에반이라는 기사가 없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은,
그 생각만으로도 지옥이나 다름없었기에.
점차 가빠져 오는 숨에 아이린은 제 가슴을 움켜쥐었다.
얼마나 뛰었을까, 출구는...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사실, 살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죽어버리면 에반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전해주지 못한 말이 너무도 많았다. 이제야 제 마음을 자각한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잠시라도 보지 못한다면,
저 홀로 그리워할 만큼이나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고.
맞닿은 손이 좋아서, 닿았던 입술이 좋아서.
안고 있으면, 전해져오는 그 체온이 좋아서 좋아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말을 전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이린을 너무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불꽃도, 살갗을 파고드는 창도, 검도, 심장을 영원토록 파고드는 화살 또한 없었지만.
지금 이 상황이 그저 지옥과도 같이 느껴졌다. 아릿한 고통이 심장을 죄여왔다.
이대로 포기한다면 에반을 볼 수 있을까. 실성한 듯, 허공을 보며 미소 짓던 아이린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영원히 순환하는 굴레 속에 갇힌 것처럼,
아무리 달려도 출구가 가까워지지 않았다. 이 공간을 뒤덮은 만연한 어둠,
발걸음을 멈춘 아이린이 천천히 단검을 거머쥐었다.
“...꽤 놀랐다.”
빌테인이 베인 손목을 슬쩍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순간에 기습을 노릴 줄이야.
그녀 본신에 있는 마나로는 불가능했을 터였다. 빌테인의 시선이 아이린을 감싸고 있는 백색의 불꽃으로 향했다.
저 마나가 아마 어둠을 걷어냈으리라.
에반 프리드,그 마지막 순간까지 아이린 유리스를 지킬 것이라 빌테인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스르륵, 어둠이 스며든 손목의 상처가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는 자신을 다치게 할 수 없었다. 한 번의 발악,
자신을 당황시키게 만들고 잠시의 여유를 만들어낼 수는 있었지만...그게 전부이리라.
천천히 걷는 빌테인이었으나, 아이린은 그 발걸음에서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다.
덜덜 떨리는 어깨를 부여잡은 아이린이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에반이 자신에게 맡긴 목숨이었다. 살으라며, 마지막 힘을 다해 자신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포기해라.”
“...포기 안 해.”
저는, 당신의 호위 기사입니다.
눈이 내리던 날에,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인 자신에게 그리 말해주던 에반이 떠오르는 것은 어째서일까.
계속 함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로만 토벌에 나선다고 할 때만 하더라도,
흐느끼던 자신을 품어줄 때만 하더라도...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린은 단검을 치켜들었다. 빌테인이 다가오면 찌를 기세로,
모든 감각을 끌어 올려 그의 움직임을 포착하려 애썼다. 에반마저 패퇴시킨 것이 빌테인이었다.
그런 적을 상대로 얼마나 시간을 끌 수 있을 가능성이 없을지도 몰랐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얌전히 죽을 생각은 없었다.
그 때 자신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그를 붙잡았더라면,
무언가 달라지는 것이 있었을까. 화르륵, 마지막으로 끌어올린 마나.
자신은 에반처럼 마나가 많지 않았다.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이지 않을까.
검을 뒤덮은 푸른 마나가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섞인 백염, 아이린은 그 불꽃을 보며 마음을 차분히 진정시켰다.
할 수 있다. 잠깐이면 된다. 아주 잠깐,
테오라드 경과 황태자가 이 쪽으로 진입할 때까지 시간을 끌면 될 터였다.
...과연,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단검을 든 채 빌테인을 본 아이린이 옅게 웃었다.
허탈했다. 모든 것이 끝에 다다랐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끝을 마주한 것은 자신이라서.
적막이 흐르는 공간, 빌테인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반이라면 쉽사리 쫓을 움직임이었다.
허나 아이린은 순간 놓친 빌테인의 움직임에 황급히 단검을 휘둘렀다.
서걱 순간 빌테인의 옷깃을 갈랐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탁, 아이린의 손목을 치자 단검이 하늘로 향했다.
아이린은 단검을 놓치자마자 곧바로 뒤를 향해 뛰었다.
이 이상 맞붙는다면 필히 패하리라.
판단은 빨랐고, 애꿎은 허공을 가른 검을 바라본 빌테인이 조용히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더 이상 도망치지는 못한다. 영역을 펼친 순간부터 이 공작저는 제 영역에 놓여있지 않던가.
평생토록 출구에 다다르지 못한다.
그 사실을 떠올리며, 빌테인은 검을 든 채 다시 아이린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왜 포기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빌테인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아래에 있는 이들에게 지원을 기다리는 것이겠지.
허나, 그들은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 가고일은 용이 아닌 이에게 죽지 않는다.
테오라드가 영역을 펼쳐 버텨봤자 단순히 버틸 수 있을 뿐, 기나긴 싸움에서 결국 승리하는 것은 자신일 터.
턱, 한참을 달리던 아이린의 발걸음이 벽 앞에 막혔다.
분명, 보이지 않는 벽이었건만.
입술을 짓씹은 아이린이 제게 다가오는 빌테인을 바라보았다.
다음 공격을 피해야 했다. 하지만 피한 다음에,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지?
어둡게 내려앉은 그림자 속에서 보랏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스으으, 숨을 들이쉰 아이린이 다가오는 절망을 향해 시선을 거두었다.
“얌전히 있었더라면...이리 험하게 대하진 않았을 텐데.”
구오오오 빌테인을 향해 그림자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심연의 구렁텅이처럼, 모든 빛들이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 어떠한 빛도 살아남지 못하는 그 공간,
빌테인의 영역에서 속박된 아이린의 몸이 서서히 침식되기 시작했다.
“시간을 끈다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결국 정해진 운명이다. 아이린 유리스.”
아이린의 눈동자가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몸을 좀먹는 어둠,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에 발버둥쳐보려 했지만. 그 어떤 것도...달라지지 않았다.
콰드득, 몸을 집어 삼키는 어둠에 아이린의 호흡이 점차 멎어가고 있었다.
죽는 것이 아닌, 영원토록 어둠에 속박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제물, 그 단어를 떠올린 아이린이 조용히 빌테인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이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에반에게 짐만 되어버린 자신이 이토록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빌테인에게 붙잡히지 않았더라면. 까드득, 아이린이 마지막으로 이를 악물었다.
파고드는 그림자가 점차 몸을 좀먹어 이윽고 얼굴을 완전히 집어삼킬 무렵,
빌테인은 검을 들어 다시 허리춤에 집어넣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계획 또한 성공적으로 마무리 될 터였고, 붉은 달이 뜨는 그 날에...제국이 멸망하는 한 연극의 막이 시작되리라.
칠흑 같은 어둠, 아이린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절망과 무력감에 젖어든 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흐릿해지는 의식 속, 아이린은 마지막으로 에반을 떠올렸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이제는 만날 수 있을까.
만난다면, 그에게 무어라 얘기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후회,
비통,
절망,
회한.
어둡고 탁한 감정이 뿌연 안개처럼 몸을 휘감았다.
눈을 감자 보이는 것은 무엇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기에,
아이린은 모든 것을 놓으려 힘을 풀었다. 옅어져가는 의식, 그리고 흐릿해져 가는 시야.
그런데 이 앞에서 보이는 빛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 순간, 아이린은 제 몸을 휘감던 어둠에 변화가 이는 것을 깨달았다.
화르륵, 아이린은 점차 어둠이 걷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포근하고, 따스한 불빛에 어둠이 밀랍처럼 녹아 내려가고 있었다.
불꽃, 그 어떠한 빛보다도 순백을 띄는 불꽃이 몸을 휘감았다.
남아있던 마나가 있었던가? 갑작스런 변화에 혼란을 느끼기도 잠시,
이윽고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아이린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아가씨.”
세상의 숲을 전부 담아 세공한 것만 같은 녹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하얀 불꽃에 둘러 쌓여,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한 기사의 얼굴이 보였다.
부드럽게 휜 입꼬리를 본 아이린이 손을 뻗었다.
환상? 환영? 아니, 어쩌면 죽어서 다시 보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뻗어진 손이 마침내 얼굴에 닿았을 때.
비로소, 제 앞에 있는 이가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에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에반이 빙그레 웃어보였다.
아이린의 손을 가볍게 쥐어, 제 가슴팍에 댄 채 심장의 고동을 느끼게 해주었다.
소생, 심상 세계에서 하나의 깨달음을 얻어 비로소 용혈을 완벽하게 각성할 수 있었다.
회전하는 하나의 마나가 강렬하게 마나를 내뿜었다.
주변을 휘감는 광휘, 빛의 정령이 뿜어내는 섬광이 빌테인의 시야를 가렸다.
"곁에 있으리라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약속, 지키러 왔습니다."
전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동생을 보는 와중에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눈물에 젖은 아이린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에반은 한 차례 쓰게 웃어 보였다.
또 자신 때문에 울지 않은가. 울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괜스레 피어오르는 죄책감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면서,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막상 이리 보니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에반.”
말문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어서. 아이린은 멍하니 에반의 얼굴을 매만졌다.
부드러운 감촉이, 늘 느끼던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제 허리를 감싼 채 안고 있는 에반이 살짝 볼을 붉혔을 때는,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웃음에 입꼬리가 휘어졌다.
살아있다. 그 사실이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서, 아이린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살아, 있었어요?”
“정확히는 살아난 겁니다. 심장이 찔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심장이 터지는 감촉, 그리 좋은 감촉은 아니었다.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고, 더 이상 그런 것을 느낄 상황 또한 만들지 않으리라.
화아악 에반의 등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렇게 계속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아직 빌테인이 남아있지 않던가. 모든 것의 해후는, 이 싸움이 끝난 뒤에 하는 것이 옳을 터였다.
이 빛이 남아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앞으로 기껏해야 수 초.
마나를 끌어 올린 에반이 다시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아직까지 살아남아주었음에 진심으로 감사할 따름이었다.
만약 눈을 떴을 때 아이린이 죽었더라면. 빌테인을 죽인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을까.
에반이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 그 뺨을 쓸어내리면서.
“...보고 싶었습니다.”
에반이 작게 중얼거렸다.
심상 속에 있으면서, 동생과 마주하는 와중에도 떠올린 생각은 오직 아이린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자신의 마나로 잘 버텨낼 수 있을까. 빠져나올 수 있을까. 자신이 없는데,
그녀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 허나 아이린은 훌륭하게 버텨내주었다.
젖어있는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린 에반이 부드럽게 미소 짓자,
아이린은 그 미소를 보곤 따라 옅게 웃어 보였다.
...당장이라도 끌어안아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지 않은가.
광휘 속에 파묻힌 에반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얼굴 아래에 드리운 그림자,
피어오르는 여명 속에서 에반은 웃고 있었다.
그 미소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 참 신기하지 않은가.
아이린은 조용히 에반의 심장 소리를 느꼈다.
부끄러운 자세였지만, 이제는 이런 것이 부끄럽지 않았다.
귓가에 들려오는 맥박 소리에, 잔잔하게 울려퍼지는 숨소리에 안도감이 생겨나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가 다시금 자신의 기사를 향했다.
한 번 잃었기에, 새삼스레 그의 존재감을 깨닫지 않았던가.
아이린은 조용히 웃었다. 제 허리를 감싸 안은 이에게 도저히 벗어날 자신이 들지를 않아서.
그를 다시금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워서.
쪽,
저를 멍하니 바라보는 자신의 기사에게, 조용히 입술을 맞추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