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87화 (87/181)

〈 87화 〉 Crescendo (2)

* * *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캄캄한 공간이었다.

무엇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는 암흑, 허나 흑마법사가 내뿜는 어둠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는 것은 어째서일까.

눈을 뜨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감은 것인지 조차 구분할 수 없는 어둠이었다.

분명 심장을 찔렸는데...왜 자신이 여기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에반은 앞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아마도 죽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럼 지금 보고 있는 것은 환상인가?

어쩌면 심장이 멎기 직전에 이런 환상을 보게 된 것일지도 모르리라.

에반은 조용히 앞을 향해 걸었다. 침묵, 고요, 정적. 자신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공간에서 처음 맞이한 것은.

우웅­

아주 희미한 빛이었다. 반딧불이처럼 어둠을 홀로 떠돌고 있는 빛,

에반은 홀린 듯 그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따스하고...그리운 느낌이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가슴 한 켠에서 잠들고 있던 기억이 떠오르는 듯한 느낌에 에반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분명 한계에 다다라 꽤 몸이 피로했던 것 같은데,

이 빛을 만지자 그런 피로가 전부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이건.”

한참동안 빛을 매만지길 잠시,

이윽고 빛이 에반의 손을 벗어나더니 마치 따라오라는 듯 몸을 이리저리 흔들기 시작했다.

에반은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빛을 따라, 구불구불한 길을 계속 걸어나갈 따름이었다.

빛이 지나갈 때마다 어두웠던 길 주변이 밝아지고 있었다.

푸른 잔디가 깔리고, 알록달록한 꽃이 피었다. 천천히 녹음으로 물드는 풍경에 따스한 바람 또한 불어왔다.

나비가 날고, 새가 울며 하늘을 노닐었다.

작은 언덕,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허한 하늘이었지만.

어느새 에반의 눈앞에 푸른 언덕이 보이기 시작했다.

...익숙한 곳이었다.

아이린과 함께 있던 곳이 아니라, 에반 프리드가 되기 전에.

자신이 아직 피아니스트이던 시절에 왔던 곳이 아니던가.

문득 밀려오는 향수에 에반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가끔, 머리를 식히고 있을 때면 이 곳에 오곤 했었다. 가장 좋아하는 곳이었고, 그렇기에 동생과 함께 오기도 했었다.

“아직...남아 있네.”

이 곳이 현실이 아님은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언덕 한 가운데에 서있는 나무를 본 에반이 옅게 미소 지어보였다.

불어오는 바람에 에반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녹색의 나뭇잎이 바람에 섞이고,

눈을 스친 나뭇잎에 에반은 다시금 눈을 질끈 감았다.

따끔거리는 탓에 눈물이 살짝 새어 나와 그것을 닦을 무렵에.

조금씩, 주변의 환경이 변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눈을 뜨자 보인 것은 다시 새카만 어둠이었다.

허나 다른 점이 있다면, 어둠 속에서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는 점이었다.

캄캄한 방, 전구 불빛 하나 없는 공간에서 사람 하나가 웅크려 앉아 있었다.

널부러진 술병, 하얀 벽에는 피가 튀어 갈색의 얼룩이 된지 오래였고,

남자는 파들거리는 손을 들어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에반은 쓰게 웃었다. 웅크려 앉은 남자는, 자신이었다.

동생을 잃고 홀로 자조했던 과거. 빛을 보기가 싫어 자신을 방 안에 가둔 채 스스로를 저주했던 과거.

그 때와 지금이 차이점을 꼽을 수 있을까. 괜스레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 하나...달라진 것이 없지 않은가.

아이린이 살아 있는지 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곁에 있으리라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결국 지키지 못하지 않았던가.

이번엔 다르게 만들 거라 다짐했다. 허나 다짐에 그쳤을 뿐이었다.

검을 쥐었지만 결국 놓쳤고, 지키고자 했지만 결국 지키지 못했다.

그런 것이 현실이라서. 에반은 눈앞에 보이는 과거를 애써 무시하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새로운 풍경이 보였다.

삐­

듣기 싫은 신호음에 에반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익숙한 소리, 초록색의 선이 삐죽한 선을 그리며 검은 화면 속에서 물결치고 있었다.

바이탈 사인을 나타내는 기계, 그리고 그 옆 침대에 누워있는 한 소녀를 본 에반이 입술을 짓씹었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기억이었다. 아니, 이건 환상이었다.

자신은 동생의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했으니까.

지금 보고 있는 풍경은...그저 환상에 불과할 터였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을 바라보는 새까만 눈동자를 본 에반이 슬피 웃었다.

왜 눈이 마주치는 것일까. 마치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처럼,

힘겹게 고개를 든 동생이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차라리 원망하기를 바랐다. 왜 자신의 곁에 없었냐면서.

어째서 자신을 신경 써주지 않았냐며 울부짖기를 바랐다.

그러면 조금 후련할까.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의미없는 자조였다. 조금의 원망조차 담기지 않은 선명한 미소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오빠.”

기억 속에 남아있던 목소리보다 조금 가늘었다.

조금은 지친 듯, 힘겹게 숨을 헐떡인 동생이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말라붙은 입술에 물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볼 수가 없어서, 에반은 고개를 숙였다.

빨리 이 환상이 사라지기를 바랐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정말로 무너질 까봐.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이 피어오르는 이 감정이 끝내 쏟아질까봐.

그렇게 숨을 삼켰을 때, 귓가에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상이 아니야.”

고개를 들자, 동생이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얼굴. 창백한 색을 띈 피부를 지닌 소녀가 어울리지 않게 화사하게 웃어 보이자,

에반은 그제야 소녀와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자신의 동생, 곁을 지켜주지 못했던. 소중했던. 이제는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사람을 바라보며.

에반은 어색하게 웃었다.

#

“뭐하고 지냈어?”

참 오랜만에 듣는 안부 인사였다.

이따금 오랫동안 해외를 순회하고 돌아올 때면, 집에서 본 동생이 이렇게 묻곤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제와 그런 소리를 들으니 조금 어색해서, 에반은 뺨을 긁적인 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말해도 못 믿을걸.”

뺨에는 검은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머리카락이리라.

동생이 자신을 어떻게 알아본 건지 궁금했는데.

아무래도, 지금 자신은 에반 프리드가 아닌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빙의하기 전, 피아니스트로 살아왔던 자신의 모습.

그 머리카락 털어내며 손바닥을 비우자, 그 모습을 불만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던 동생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궁금해. 평범한 일을 겪지는 않았을 거 아냐.”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네.”

“하나도 몰라. 오빠랑 못 본지 벌써 5년이잖아.”

5년이라. 에반은 참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 생각했다.

그런 시간동안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지금 겪고 있는 것이 평범하진 않았으니어쩌면 당연한 것이리라.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묻는 동생의 눈을 바라본 에반이 한 차례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얘기한 게 얼마만인지. 로페나의 뺨을 쓰다듬을 때처럼,

동생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린 에반이 입을 열었다.

“그냥, 한 사람을 모시고 있어.”

“보디가드 같은 거야? 모시다니?”

“비슷하지. 곁에 있으면서 그 사람을 지키는 거니까.”

“음, 어떤 분이야? 오빠가 모신다는 사람은.”

어떤 분이냐는 질문에 에반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아이린을 어떤 사람이라고 말해야 할까. 처음 만났을 때는 그냥 성격이 조금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과거를 알고 측은해하긴 했지만, 그래도 제게 쌀쌀맞게 구는 것은 맞지 않던가.

살짝 눈살을 찌뿌린 에반이 장난스레 입을 열었다.

“성격이 그리 좋지는 않은 것 같아.”

“엑, 힘들었겠네.”

“장난이야. 만약 나랑 안 맞는 사람이었으면 그만두고 나왔겠지.”

잠시 말을 멈춘 에반은,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린의 모습에 미묘한 감정이 피어오름을 깨달았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자신이 준 마나로 잘 빠져나온 것일까.

테오라드 경과 만나서, 다시 유리스로 돌아갔을까. 한편으론 크리스 경과 로페나가 생각나기도 했다.

아이린이 그곳에 있다는 건, 그 두 사람에게도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 아니던가.

하지만 돌아가고 싶어도...이제는 돌아갈 수 없었다.

그 생각을 떠올린 에반은 조용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동생이 곁에 있는데도, 자꾸만 아이린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동생과 할 얘기가 많았는데. 도무지 말이 나오지를 않아서,

그런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생을 보곤 이내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미안해, 잠깐 다른 생각 좀 하느라.”

“그래서, 성격 안 좋은 거 말고 다른 특징은 없어?”

“글쎄...그냥 가끔은 바보 같은 면도 있고 그렇지. 겉으로 보면 완전 완벽해 보이는데. 막상 조금 다가가면 금세 당황하고.”

아이린은 평소에 늘 짓는 무감한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다가올 때면 가끔 미소를 지어주고, 손을 잡으면 얼굴을 붉히고, 입술이 맞닿을 때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게 웃어주기도 했었다.

처음 보았을 때의 그 차가운 사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제 품에 안긴 채 부끄러워하던 사람.

“...한편으론, 누구보다도 힘들어 하는 사람이라서. 곁에 있어주고 싶은 사람이야.”

에반은 조용히 웃었다. 이제는 곁에 있을 수 없다.

그 사실에 가슴이 텅 빈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째서일까.

나름 후련하게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미약한 후회가 피어오르는 것을 억누른 에반이 다시금 동생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 여자야?”

살짝 차가워진 눈빛에 움찔거리자, 이윽고 동생이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줄 알았다며, 제 어깨를 두드리며 한참을 웃어대는 동생을 에반은 멍하니 쳐다볼 따름이었다.

“나는 오빠가 남자 좋아하는 줄 알았어. 항상 여자가 고백하는 것도 무시하고 피아노만 쳤잖아.”

“그럴 리가.”

“아무튼 다행이네. 좋아하는 사람도 생기고. 평생 혼자일 줄 알았는데 말이야.”

“어떻게 알았어? 내가 그 사람...좋아하는 거.”

그렇게 티가 났나, 괜스레 밀려드는 쑥스러움에 볼을 긁적이자 동생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입꼬리를 슬쩍 잡아당기며, 제 오빠의 표정을 따라하는 모습에 에반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사람 얘기할 때마다 입꼬리가 이렇게 헤벌쭉 해지는데, 어떻게 몰라. 내가 바보야?”

“...내가 그랬어?”

“막 눈웃음도 짓고, 나는 오빠 그런 표정 처음 짓는 거 처음 봤어.”

그럴 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아이린을 만나고 처음으로 품은 감정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자신이 그렇게 웃었다니. 입꼬리를 매만지던 에반은, 이어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거 맞아.”

볼 때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가슴이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괜스레 심장이 뛰어 이 소리가 들릴까 겁났고, 눈이 마주치면 황급히 피하기에 바빴다.

혹여 기분을 상하게 하진 않았을까.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 쓰고,

특별한 날이 올 때면 모아둔 돈을 꺼내들어 선물을 사기에 급급했다.

막상 표현은 자주 하지 않는데, 단지 시선이 마주치는 것에 행복을 느꼈다.

손이 맞닿아 전해지는 체온이 좋았고, 비가 올 때면 창문을 통해 같이 쏟아지는 비를 보는 것이 좋았다.

가랑비에 몸이 젖듯이, 자신이 아이린을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눈에 들어와서. 마음속에 피어난 감정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그렇게 좋아한다는 것을 자각했을 뿐이었다.

“...정확히는, 좋아했었지.”

에반은 다시금 쓰게 웃었다.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지 않은가.

지금 보는 이 환상이 언제 끝날지는 몰라도. 이 환상마저 끝난다면 제게 남은 것은 영원한 어둠이었다.

빛 한 점 새어들지 않는. 로만 공작이 제게 보여주었던 그 영역처럼.

툭.

상념이 흩어진 건, 제 볼을 두 손으로 잡은 동생의 손 때문이었다.

무언가에 화가 난 사람처럼, 태어나 처음 보는 표정을 지은 동생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볼을 꽉 잡은 채, 한참을 그렇게 자신을 쏘아보던 동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또, 그런 표정 짓는다.”

“...무슨 표정인데.”

“내가 죽었을 때도 그런 표정을 지었잖아. 그렇게 자기 탓 하지 말라고 했는데, 엄마한테 못 들었어?”

“......”

“어휴, 진짜. 또 바보처럼 자기 세계에 빠져서 이상한 짓 했겠지. 이래서 내가 오빠 두고 가기가 싫었는데.”

어휴, 한숨을 푹 내쉰 동생이 에반을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서 전부 보이지 않은가. 또 전부 자신의 탓이라며, 후회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그런 것이 싫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병에 걸려 죽은 것은 자신이었고,

알리지 않는 것도 자신이었는데. 왜 오빠가 슬퍼해야 한단 말인가.

툭, 뺨을 붙잡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오빠를 향해, 동생은 그렇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빠는, 행복했어? 그 사람하고 함께 있으면서, 행복했어?”

그 물음에, 에반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행복했냐고 묻는다면, 자신은 무어라 대답해야 하는 것일까. 고민이 이어졌다.

꼬리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 속에서 에반은 비로소 자신의 감정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분명...아쉬워하고 있었다. 조금 더 아이린과 함께 할 수 있었는데,

자신이 조금 더 강했더라면. 아이린을 구한 뒤에 할 말이 많았는데.

결국 말하지 못했음을, 마음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하지 못했음을.

그리고 아쉬워한다는 것을, 자신이 에반 프리드로 살면서 행복했다는 걸 의미한다는 걸.

에반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복도에 저 혼자 미끄러져 넘어지는 로페나가 있었다.

항상 너털웃음을 지은 채 가끔은 제게 호통을 치던 크리스 경이 있었고, 아이린이...있었다.

뺨에 흐르는 눈물을 에반은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그리곤 조금은 후련한 표정으로 웃어 보이며,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행복했나봐.”

분명, 행복했다. 함께 할 수 있음을.

이 시간이 조금이나마 더 오래 이어지기를.

로만 공작과 싸우면서도, 자신은 분명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렴풋이 깨닫는다.

삐이­

이 귓가를 울리는 바이탈 사인의 소리가, 사실은 동생의 것이 아님을.

주변의 풍경이 서서히 뒤바뀌고 있었다. 병원의 하얀 대리석이 아니라, 처음 보았던 푸른 들판이.

가운데에 솟아있는 나무가 보였다. 그 아래에 놓인 벤치에 앉은 동생이 다리를 흔들며,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활짝 웃은 미소가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활짝 웃은 동생이, 자신을 향해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 후회 같은 건 그만 해도 되잖아.”

옅게 웃었다. 자신의 오빠가 후회할 필요는 없었다.

아까 그 사람에 대해 얘기할 때, 오빠는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웃지 않았던가.

그러다가 표정이 어두워지긴 했지만, 검은 눈동자에서 읽힌 것은 분명 행복이었다.

“이제 조금은, 행복해도 되잖아. 오빠.”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도 좋지만, 조금 더 행복해하기를 바랐다.

자신을 탓하며 후회하지 말고, 지금 잡은 행복을 조금 더 추구하기를 바랐다.

우는 것보다 웃는 편이 훨씬 더 잘 어울렸으니까.

이제...얼마 남지 않았다.

스스로의 몸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끼며, 다시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창백하게 질렸던 얼굴에 천천히 색이 돌아오고 있지 않은가.

그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 짓기를 잠시, 다시금 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늘엔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둠으로 가득 찼던 하늘은 사라지고,

오로지 찬연한 별빛으로 물든 장막이 주변을 뒤덮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빛에 가려지고, 서로가 서로에 빛에 뒤덮이고.

눈이 부실 만큼이나 환한 별빛에 들판이 새하얗게 보여서. 에반은 조용히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았다.

스르르­

동생의 손가락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아니, 그 몸이 흩어져어느 샌가 저 별빛에 묻혀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에반은 그런 동생을 붙잡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활짝 웃는 동생이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는 붙잡지 않아도 된다고.

“아직도 별이 외로워 보여?”

“......”

흐르는 한줄기의 눈물이 별에 닿아 빛과 함께 부서졌다.

무어라 더 말하고 싶었는데, 자꾸만 목이 메여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별이...외롭다고 생각했다. 동생이 죽은 다음에, 홀로 방에 갇혀 하늘을 볼 때면.

저 캄캄한 하늘에 홀로 뜬 별이 고독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별이 싫었다.

아이린은 그 별이 좋았다고 말했다. 동생도, 별을 좋아했다.

하늘을 가득 메운 별을 볼 때면 그 별이 되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어느덧 벤치에서 사라진 동생의 흔적이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별이 되어서, 저 하늘에서 별들과 함께 반짝이고 있었다. 에반은 그걸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늘을 가득 채운 별에, 더 이상 칠흑 같은 어둠은 보이지 않았다.

별이 사라져도, 결국 사람의 눈에서 사라질 뿐이 아니던가.

저 하늘 어딘가에 떠있을 터였다. 다른 별과 함께 빛을 공유하며,

그렇게 다시 밤이 오면 찬란하게 빛을 발하리라.

시간이 흘렀다. 아래를 향해 흐르는 별을 바라보며,

그렇게 한참동안 하늘을 바라보던 에반은 서서히 목소리가 돌아옴을 느꼈다.

“...나는 행복해.수진아."

별을, 더 이상 외롭다고 생각하지 않아. 에반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귀를 울리던 신호음이 사라지고, 다시금 심장의 고동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끊어지지 않았다. 차갑게 식었다고 생각했던 몸은, 천천히 제 온도를 되찾고 있었다.

수진, 자신의 동생의 이름을 오랜만에 불러본 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었지만...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허나,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린이었다.

쩌적­ 하늘이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했다.

이상하리만치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수진이가 저 하늘에 스며들었음에도,

지금 느끼는 감정은 그저 아이린이 무사할까에 대한 걱정 뿐이었다.

검은색의 머리카락이 다시금 금색으로 물들며,

하늘을 바라보던 검은 눈동자 또한 짙은 녹색으로 변해갔다.

끝.

그런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제아무리 어두운 밤에도 결국 새벽이 찾아왔다.

네온사인에 가려져 별빛 하나 보이지 않는,

달조차 보이지 않던 그 어두운 그믐날에도 결국 빛이 스며들 따름이었다.

우웅­

찢어졌던 심장이 뛰며, 다시금 빛이 그 안에 스며들었다.

두근, 박동 소리와 함께 살아있음을 느낀다. 다시 만날, 이제는 다시 놓치지 않을 인연들을 떠올렸다.

후회, 이제 하지 않을 터였다. 질리도록 했기에. 그리고 동생이 그것을 원치 않았기에.

이 곳이 자신의 심상이란 것을 어렵지 않게 떠올린 에반이 조용히 마나를 끌어올렸다.

마나란, 세계의 의지였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뜻을 이루어주는 하나의 수단.

인간은 누구나 마나를 품고 태어난다. 자신이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것.

에반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단순했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지키고 싶을 뿐이었다.

누구도 다치지 않고, 누구도 슬퍼하지 않고.

더 이상 잃지 않기 위해서.

다시금 어둠을 걷어낸다. 별빛이 찬연했던 하늘이 점차 밝아지기 시작했다.

어둠이 서서히 백색에 물들어, 이윽고 저 끝에서 새하얀 광휘가 일렁였다.

여명, 새벽이 찾아온다. 그 어떤 별보다도 강렬한 빛을 머금은 별이 혼탁했던 하늘의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나머지 별들의 빛을 앗아갈 만큼이나 찬란한 빛에, 에반은 조용히 검을 움켜쥐었다.

심장을 감싸던 마나가 하나의 완벽한 고리를 만들어냈다. 주변의 공간이 차츰 무너지고 있었다.

새하얗게 빛으로 물든 공간, 어둠 한 점 없는, 오로지 찬연한 화염으로 가득 찬 영역.

유저는, 마나를 느낀다. 익스퍼트는, 마나를 다루어 수족처럼 휘두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스터는.

세상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일 수 있기에.

화르륵, 다시 불꽃이 일었다. 눈을 뜬 빛의 정령이 에반의 주위를 맴돌아 새하얀 섬광을 일으켰다.

무너지는 심상, 이제는 그 편린조차 남지 않아 스러지는 세상 속.

다시금 금빛으로 물든 눈동자가빛과 함께 일렁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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