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Crescendo (1)
* * *
“...이런, 벌써 눈을 떴군. 조금 조용히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낯설지 않은 목소리, 아이린은 머리를 울려대는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기억이...흐릿했다. 분명 집무실에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끊겨 무엇 하나 제대로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눈을 떴을 때, 아이린은 눈앞에 보이는 한 인영을 보곤 헛숨을 들이 삼켰다.
“당신은...”
로만 공작, 빌테인.
보랏빛의 눈동자를 보고 어렵지 않게 이름을 떠올린 아이린은,
그제야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지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몰려오는 어지러움에 시야가 흔들렸다. 머리가 핑 도는 듯한 기분에,
입술을 깨물은 아이린의 입가에 피가 흘렀다.
입고 있는 옷은 그대로였다. 몸에 손대지는 않은 것일까.
앞에 있는 이를 노려보자, 빌테인은 옅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 상황에 저런 눈을 할 줄이야. 허나 이제 전부 소용없었다.
자신의 아들은 죽은 듯 했지만...자신이 남아있었다.
지친 기사 한 명쯤이야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다.
다만 약간의 유흥, 생각을 정리한 빌테인이 입을 열었다.
“꽤 화가 난 것 같군. 안심해도 좋아, 나는 너를 건드릴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도대체 왜, 아니. 그보다 다른 사람들은”
“죽이지는 않았어. 흠, 왜냐고 묻는다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충분하겠나?”
빌테인은 허공에 묶여있는 아이린을 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자신을 가로막던 한 노기사가 떠오른 탓이었다. 목적은 아이린 유리스 하나이지 않던가.
구태여 죽일 필요는 없었다. 그저 조금 재워두었을 뿐.
유리스가 무너지는 것까지는 원치 않았다. 유리스는...아직 조금 버텨줄 필요가 있었다.
나중에 무너지는 것이 조금 더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아이린은 빌테인을 보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몸이 묶여 허공에 떠오른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구태여 상대를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는 건, 거짓이 아닐 터였다. 상대의 눈을 보고 무언가를 읽어내는 것에 능했기에,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쯤은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을 여기에 데려온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제물로...쓸 생각인가요.”
“반만 맞는 대답이라 하면 되겠군. 이 정도 대답해주었으면, 슬 눈치 챌 때도 되지 않았나. 내가 왜 너를 굳이 이곳까지 데려온 이유를.”
그 말에 아이린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로만 토벌에 앞장섰던, 자신의 호위 기사를. 그가 다른 이와 달리 특별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반만 맞는 대답이라 했던 것은, 자신이 아닌 에반을 제물로 사용할 것이란 말이 아니었던가.
순간 새하얗게 아이린의 표정이 질리자, 빌테인은 옅게 웃으며 허리춤에 걸린 검을 툭툭 건드렸다.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 여기로 그 기사가 향하고 있지. 어째서일까. 확률이 낮은 것은 그 또한 알고 있을 텐데. 구태여 성급하게 홀로 이곳을 향해 움직이는 이유가.”
“......”
아이린이 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입술을 깨물 수 있는 것밖에 없었다.
마나를 끌어올려 발버둥치려 했지만 몸을 옥죄이는 어둠이 그 마나를 앗아가고 있었다.
여유로운 표정을 지은 빌테인이 그 모습을 보곤 코웃음을 쳤다.
발버둥 쳐봤자 변하는 것은 없을 터였다. 구태여 아이린 유리스를 이 곳에 묶어둔 이유는,
자신이 에반 프리드를 죽이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아이린의 시선이 빌테인의 입가를 향했다.
소름끼치는 미소, 자신이 알고 있는 로만 공작은 어디에도 없었다.
보랏빛의 눈동자에 광기가 일었다.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것, 아이린은 그를 노려보는 척하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여기에 묶여 있을 수는 없었다.
만약 에반이 홀로 이곳에 올라온다면, 빌테인을 노려보던 아이린의 귓가에 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이 고요한 공간에 울리는 소리에, 빌테인이 그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둠으로 가득 메워진 상층부, 안개처럼 자욱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있었다.
화르륵, 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빛이 번쩍이고, 그와 동시에 새하얀 광휘를 휘감은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가씨.”
아이린과 시선이 마주친 에반이 옅게 웃어보였다.
피에 젖은 어깨가 시야에 들어온 아이린이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검은 망토가 피로 젖어, 입고 있던 하얀 제복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거친 호흡, 누가 보아도 꽤 지쳐 보이는 모습이었건만.
자신을 향해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이는 기사의 모습에 아이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자꾸만, 눈물이 새어나올 것만 같았다. 여기서 울면 안 되는데,
자신이 여기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가 걱정할 것이 분명했다.
자신을 구하러 왔음이 분명했다. 구태여 홀로 올 필요가 없음에도, 이렇게 혼자 올라온 것은.
에반이 자신이 여기에 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리라.
죄책감이 들었다. 조금 더 조심했더라면, 그가 이렇게 목숨을 걸 이유도...없을 터였다.
“괜찮습니다.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미소 지은 에반이 검을 뽑아 들며 그리 말하자, 아이린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에반의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자꾸만 피어오르는 안도감에, 입술을 짓씹은 아이린은 애써 울음을 삼킨 채 에반과 눈을 마주쳤다.
선명한 녹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도 화나지 않은, 오히려 무사한 것에 감사해하는 에반의 눈이 곱게 휘었다.
가슴이 아릿했다. 허나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아이린은 조용히 에반의 모습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이 싸움의 끝에, 그가 무사하기를 바라며.
#
스으으
...예상은 했지만, 로만 공작이 직접 내뿜는 위압감이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여태껏 보았던 그 어떤 어둠보다도 어두운 흑무, 그 속에서 커다란 눈이 보였다.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무언가’를 느낀 에반이 몸이 잘게 떨렸다.
그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살기, 온 몸을 할퀴어 대는 살기에 심장의 맥동이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에반 프리드...이렇게 만나는 것은 처음이군.”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여유로움, 에반은 그의 태도가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런 여유를 지닐 자격이 있었다.
마스터의 영역을 전개하지도 않았음에도 느껴지는 마나는, 어쩌면 이 공작저 전체가 그의 소유에 있는 것만 같았다.
마나를 끌어올려 그 기운을 애써 걷어냈지만, 그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날 죽이러 왔나.”
에반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길게 늘어트린 검을 쥐며 조용히 마나를 끌어올릴 뿐이었다.
어떻게 공격해야 할까, 급소를 노려 빠르게 끝내는 것이 가장 좋은 수겠지만.
그렇게 쉽게 급소를 타격할 수는 없을 터였다. 마나가 심장에서 흘러들어와, 이내 온 몸에 흐르기 시작했다.
근육이 부풀었다. 두근, 심장 맥동이 한계에 다다라 이윽고 주변의 공간이 느려지는 듯 했다.
좋은 감각이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오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빛의 정령으로 강화된 육체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었고, 설령 로만 공작이 마스터라 한들. 싸울 수 있었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화르륵, 섬광과 함께 어둠을 갈라낸 불꽃이 거칠게 불타올랐다.
말을 길게 나눌 생각은 없었다. 심장 부근에 손을 가져다 댄 에반이 조용히 그 맥동을 느꼈다.
승산,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할수록 불리한 것은 자신이었다.
상념을 지우며, 꽤 예전에 느꼈던 한 감각을 다시금 일깨웠다.
무아(無?), 에반은 테오라드 경과 싸울 때의 감각을 떠올렸다. 그때 자신이 하고자 했던 것.
검을 쥔다. 휘두른다. 그리고, 피한다.
이것으로 족했다.
“대화할 생각은 없는 것 같군.”
빌테인의 주변으로 어둠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에반은 곧바로 땅을 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콰앙! 길게 끌 생각은 없었다. 최대한 빠르게, 가장 좋은 것은 마스터의 영역을 보지 않는 것이었다.
부풀어 오른 근육은 폭발적인 힘을 만들게 해주었다.
빛으로 만들어진 사슬, 검을 휘두름과 동시에 빌테인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사슬에 움직임이 순간 둔해지자,
에반은 그를 놓치지 않고 검의 궤적을 계속해서 바꿔갔다.
질주하는 섬광이 어둠을 갈랐다. 로만 공작의 검은 테오라드 경과 달랐다.
테오라드 경의 검이 공간을 휘어잡는 검이라면,
로만 공작의 검은 무언가를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빠른 검이었다.
쾌(?), 그리고 속(?).
사슬이 깨짐과 동시에 다시 생성되어 빌테인의 몸을 휘감았지만, 빌테인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 듯 검을 휘둘렀다.
찰나,
그 짧은 순간에 무수히 많은 검의 공방이 오갔다.
목을 향해 찔러 들어오는 검을 막아낸 에반이 몸을 비틀어 팔을 당겼다.
카가각! 부딪힌 검면에서 불꽃이 튀기고, 동시에 다시금 휘둘러지는 검을 최대한 피하는 것에 집중할 따름이었다.
직격을 맞아서는 안됐다. 빠른 검이었지만, 한 번이라도 스친다면 지금 유지하는 약간의 우위마저 놓치게 될 수도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오로지 자신에게 피어오르는 불꽃에만 의지한 시야는 생각보다 좁았다.
시각보다는 청각에 의지한 채, 이 공간을 가로지르는 검의 소리에 집중했다.
‘생각보다...할 만해.’
아직 영역을 펼치지 않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 일련의 공방에서 우위를 점한 것은 에반이었다.
빛이 몸을 휘감았다. 속도가 더욱 빨라져, 이제는 잔상마저 남기는 몸놀림에 빌테인은 일순간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진 용혈. 분명 효과가 있다. 자신감을 얻은 에반이 한층 더 힘을 실었다.
묵직해진 검에 순간 빌테인의 몸이 밀리자, 곧바로 이어지는 공격의 빌테인의 옷깃이 살짝 잘려나갔다.
하지만, 더 많은 상처를 입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에반이었다.
베인 얼굴에서, 팔에서, 어깻죽지에서, 가슴팍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적셨다.
용혈은 상처를 어느 정도 치유했지만, 빛의 정령으로 강화된 육체는 어느덧 한계에 다다르고 있던 탓이었다.
이를 악문 에반이 허리를 틀었다. 콰앙! 한 번의 일격으로 밀려난 빌테인이 호흡을 고르자,
잠시 뒤로 물러난 에반이 천천히 빌테인의 안색을 살폈다.
‘하.’
빌테인의 안색은 평온했다. 일전의 공방에서 밀렸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호흡을 고르며 검을 매만지고 있었다. 시간을...길게 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격에 끝낼 힘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콱 막힌 상황에 에반은 답답함을 느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
고작해야 그와 다시금 검을 부딪히는 것이 전부였다.
화아악!
에반의 등에서 뽑아져 나온 빛의 날개가 펄럭였다.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 에반의 신형이 사라지자 빌테인은 조용히 검을 쥐었다.
가공할만한 속도였다. 허나, 그것뿐이었다. 속도만으로는 아무것도 자신에게 우위를 점할 수 없었다.
순수한 검술, 기교, 마나의 양, 밀도, 질. 조용히 웃은 빌테인이 검을 휘두르자, 그 검격에 휩쓸린 에반이 이를 악물었다.
“못 볼 거라 생각했나?”
“...닥쳐.”
입가에 흐른 피를 닦아낸 에반이 조소를 흘렸다.
정타를 맞지도 않았는데, 온 몸에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듯 뛰다 못해 조금씩 찢어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관절은 삐걱거리고, 내장은 파열되어 속에서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호흡이 거칠다. 허나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다시 금색으로 변한 눈이 아이린을 향했다.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죽는다면. 에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상상하고 싶진 않았지만, 아이린 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빼내야 했다.
“지쳐 보이는데, 검을 휘두를 수는 있겠나? 조금 쉴 시간을 주어도 괜찮은데 말이야.”
“후우.”
빌테인의 말을 무시한 에반이 옅게 숨을 내뱉었다.
조급해지는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천천히 빌테인을 바라보았다.
아직 ‘영역’은 펼쳐지지 않았다. 그 전에 승부를 끝낼 수 있다면 승산은 아직 남아있었다.
구우우우우 빌테인을 중심으로 모이는 어둠이 천천히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변화하는 마력, 동시에 에반이 땅을 박차고 앞으로 전진했다.
콰아앙, 어둠과 부딪힌 빛이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로 만들어진 분진 속으로 몸을 숨긴 에반이 이윽고 빌테인의 뒤에서 나타났다.
무아(無?), 순식간에 모든 상념을 지운 에반의 검이 허공에서 한 번 더 가속했다.
투화아악 어둠을 가르며 그어진 검이 빌테인의 팔뚝을 베어냈다.
동시에 뻗어나간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낸 빌테인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찬연한 빛을 내뿜는 금안, 그 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짜릿했다. 그 또한 한 경지에 다다랐다는 사실이 아니던가.
빌테인의 검이 푸른 마나를 머금자, 더욱더 빨라진 공방에 어둠이 제 디딜 곳을 잃은 채 방황하기 시작했다.
바람이 찢어진다, 어둠이 갈라지고, 이윽고 소리마저 쫓지 못할 검의 공방에 공기가 터져나갔다.
서걱!
에반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빛무리가 난잡한 궤적을 그려댔다.
자신을 향해 찔러대는 검을 피해내며, 동시에 빌테인을 향해 나아가는 검이 수없이 교차했다.
가가각, 검이 부딪히고, 시선이 맞닿는다. 단순히 검으로 그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공방이었다.
지금이 아닌 나중, 나중이 아닌 그보다 한 수 앞을 노린다.
한계에 다다른 감각은 서로의 수를 예측하다 못해 예지의 수준에 다다르게 만들었다.
교차하는 검, 그보다 한 수 앞을 바라본 에반이 거칠게 어깨를 틀어 검로를 바꾸었다.
빌테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단순히 검의 공방이 아닌,
세세한 근육의 움직임을 보며 그려내는 미래였다.
짜고 치는 연극처럼 맞닿는 검이 파공을 내뿜었다.
콰르릉! 이따금 맞부딪히는 마나가 파동을 내뿜어 공간을 뒤흔들고, 동시에 타오르는 화염이 어둠을 집어 삼켰다.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인정받으려 하고 있었다. 발이 얽힌다. 검이 얽힌다.
무념무상, 서로가 오직 검만을 생각하는 이 난투 속에서 찾는 것은 단 한 가지,
상대의 심장을 꿰뚫을 승리를 향한 수였다.
허나 점차 수세에 몰리는 것은 에반이었다. 거칠어진 호흡에 팔꿈치가 베여나갔다.
양손으로 잡고 있던 검을 다시 한 손으로 잡으며, 마나를 이용해 부풀린 근육을 통해 억지로나마 균형을 맞추었다.
부러진 팔뼈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허나 놓치지 않았다.
이를 악물며, 입가에서 새어나오는 피를 애써 무시한 채 그대로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여기서 지면 모든 것이 끝난다.
마지막 잔불마저 태워가는 불꽃은 더 없이 찬란한 광휘를 내뿜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제 몸 상태를 가늠한 에반이 입술을 짓씹었다.
기껏해야 앞으로 몇 합. 아이린의 시선이 닿는 것을 느낀 에반이 검을 고쳐 쥐었다.
쓰러질 수는 없었다. 아이린이 저기에 있었기에. 약속하지 않았던가.
위험에 처했을 때면, 자신이 아이린의 곁에 있을 것이라고.
곁에...있을 수 있을까. 순간 떠오른 의문에 에반은 웃음을 흘렸다.
아니, 어쩌면 그럴 수 없을지도 몰랐다. 허나 아직 움직일 수 있다면,
검을 쥘 손이 있다면, 뛸 수 있는 다리가 있다면. 아직 포기하기엔 일렀다.
호흡을 골랐다. 찢어진 심장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서서히 식어가는 몸에서 다시금 불꽃이 일었다.
아마도 마지막. 에반은 검을 놓지 않도록 손에 힘을 주었다.
“우습군. 아이린 유리스라는 여인이 네가 목숨을 걸 만큼이나 소중한 것인가.”
빌테인이 조소를 흘렸다. 자신 앞에 서있는 기사에겐 패색이 짙었다.
허나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모습에 약간의 경의를 느꼈다.
고고하고, 굳건하게 버티는 한 기사는 그야말로 야차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던가.
한때나마 황제에게 충성했던 만큼, 유리스의 이름에 어울리는 그 모습에 빌테인은 감탄을 흘렸다.
“소중하지.”
에반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아이린이 소중하냐고 묻는다면, 당연한 대답이었다.
우습다는 말에는...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후회하고 싶지 않았기에 이토록 몸부림을 칠뿐이었다.
“이렇게 싸워봤자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아이린 유리스라는 존재에 얽매여, 네가 의미 없는 희생을 할 뿐이다. 정녕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나?”
“후회?”
그 말에 에반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질리도록 해본 것이 후회였다.
하지 않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던가. 잃고 싶지 않았기에,
이번만큼은 제 손으로 지켜내기 위해서. 맥동하는 심장에 에반은 손을 얹었다.
카심 백작은 이 이상 무리한다면, 아마도 내가 죽을 거라 했지만...그게 무슨 상관일까.
화르륵, 심장을 태우는 불꽃에 섬광이 짙게 일었다.
빌테인은 그 불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불꽃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에반이 입술을 달싹였다.
“...악녀라도 좋아. 수많은 사람들이 거부하고, 그럼에도 애정을 갈구하는 사람이라도 좋아. 가끔은 외로워서, 저 홀로 우는 여린 사람이라도. 겉으로는 차가운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도. 결국엔 내가 맹세한 사람이니까. 내가 선택한 사람이니까.”
내가, 동정했고 슬퍼했던 사람이니까. 뒷말을 삼킨 에반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소설 속의 악녀를 동정했던 그 날 밤이 떠올랐다. 어쩌다가 이런 상황까지 왔을까.
처음에 이런 일을 겪었더라면 그저 도망쳤을 지도 몰랐다.
허나 이제는 그런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기엔 아이린 유리스라는 존재는 제게 너무도 소중한 존재가 되어버리지 않았던가.
“짊어지고 가는 거야. 이런 상황마저도, 설령 내가 죽어서 다시 볼 수 없더라도.”
화아악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일었다.
마지막 광명, 심장 속에 힘을 담은 에반이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아이린의 호위 기사니까.”
조금 아쉬울 지도 몰랐다. 자신이 죽으면 아이린이 무슨 표정을 지을까.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 같은 존재는 어서 잊어서...조금은 더 행복하게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턱밑까지 차오른 숨에 에반이 조용히 웃었다. 목이 메였다.
상상하고 싶지 않았는데.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것을 어떡할까.
누군가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반은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그 소리를 무시했다.
흐르는 눈물이 뺨을 적시고, 피와 섞여 붉게 물든 채 아래를 향해 떨어졌다.
아니, 땀일 터였다. 서임식을 기억한다. 당신을 지키겠노라 맹세했던, 그 날의 청명한 하늘을 기억한다.
...하늘은 밝지 않았다. 그때처럼 맑은 하늘도, 하늘을 뒤덮던 따사로운 햇살도 존재치 않았다.
오직 까만 음영으로 덧칠해진 하늘엔 별도 달도 없어서,
자신에게 타오르는 불빛만이 이 주변을 밝게 빛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삐걱거리는 몸을 움직인 에반이 천천히 땅을 밟았다.
빌테인의 눈이 밝게 빛났다. 보랏빛의 황혼이 넘실거렸다.
지옥을 향해 제 발로 걸어가는 꼴이 되었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로페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크리스 경은. 늘 마시던 홍차는 향긋했다.
다즐링은 없었지만, 어쩐지 그 향이 코에 맴도는 것 같았다...
촤라라락!
자신을 향해 뻗어온 검을 피한 에반이 차분한 시선으로 빌테인을 바라보았다.
종이 한 장 차이였다. 빌테인의 검은 빨랐고,
여전히 자신은 그 검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음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피할 수 있었다. 지금 만큼은 이 검과 맞닿을 수 있었다.
카가각! 검의 난무가 이어졌다. 서로의 목숨을 앗아가려는 행위가 지속됨에 어둠이 일순간 붉게 물들었다.
화아악! 어둠과 빛이 충돌했다. 검이 어둠을 가르고, 검이 빛을 찢는 형국이 이어졌다.
이 공간을 장악하는 참격에 서로의 행동이 제한되었다. 팔이 부러졌다.
부러진 팔을 마나로 지탱하여 다시 검을 붙잡았다. 갈비뼈가 부러져 폐를 파고 들었다.
호흡을 멈추었다. 남은 숨을 최대한의 힘으로 전환하여,
이윽고 창백해진 에반의 얼굴을 본 빌테인이 침음을 삼켰다.
‘...이렇게나 절박할 줄이야.’
무릎 뼈가 박살나 다리가 주저앉았지만, 에반은 남은 다리로 애써 균형을 유지한 채 검을 휘둘렀다.
배가 찢어져 내장이 조금 씩 새어나오고 있었다.
허나 키워둔 근육으로 내장이 흘러내리는 것을 멈춘 채 계속해서 움직였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에반은 이를 악물었다. 심장이 찢어져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입에서 왈칵 쏟아지는 핏물은 더 체내에 있는 모든 피를 쏟아낸 듯 보였다.
누군가가 울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을위해...울지 않아도 좋았다.
이 상황에 에반은 분노했다. 약해서, 닿지 않아서. 또 후회하게 될까 봐.
찢어져 허공에 흩날리는 자신의 살점을 보면서도 집중을 놓지 않았다.
부러진 팔이 덜렁거려 한 팔만이 남았을 때도, 에반은 검을 휘두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이어진 공방 속에 압도적인 열세에 몰렸음에도, 에반의 팔은 멈추지 않았다.
할 수 있다고.
에반은 그렇게 생각했다. 영역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 전에 죽인다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명백하게 자신이 불리했지만, 그렇다고 로만 공작에게 아예 피해를 입히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린의 몸에서 미약하게 마나가 일어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이린 만큼은...이곳에서 내보낼 수 있었다.
마지막 힘, 아직 태울 수 있는 마지막 잔불을 에반은 태우지 않았다.
이것을 태운다 한들 이길 수 있을까. 아니, 그것보다는 아이린을 위해 쓰는 것이 나을 터였다.
신기하게도, 몸이 이리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고통을 느꼈다면 진즉에 스러지지 않았을까.
콰아앙! 일격이 에반을 덮쳤다.
그나마 지탱하고 있던 팔마저 완전히 부러져, 검을 쥐지 못하게 된 에반이 허공을 날았다.
지면에 부딪히고, 몇 바퀴 굴러 나가떨어진 에반이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가...흐릿했다. 이제는 형체마저 잘 구분할 수가 없었다.
심장의 맥동이 점점 약해져서, 어쩐지 이대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을 수는 없었다. 부러진 팔에 하얀 불꽃이 스며들었다.
몸을 덮었던 불꽃은 이제 없었다.
조금은 회복이 된 팔로 검을 집어들은 에반이 휘청거리며 바닥에서 일어섰다.
넝마가 된 몸, 뼈가 튀어나오고, 뒤틀린 몸으로도 검을 쥔 기사의 모습을 빌테인은 조용히 바라보았다.
“너를...인정하마. 너는 내 적수다, 에반 프리드. 마스터가 된 이후로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으나, 이 세상에 오직 너만큼은 기사라 할 수 있겠지.”
“......”
“제물로 사용하지는 않겠다. 허나...살려둘 수는 없다.”
고오오오
빌테인의 심장을 중심으로 어둠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주변을 잠식한 흑무를 집어삼키는 듯한 그 모습을 에반은 멍하니 바라볼 따름이었다.
심장에 모여드는 마나가 보내는 존재감이란, 말로릭을 처음 보았을 때보다도 더 했다.
쿨럭, 피를 한차례 토해낸 에반이 조용히 검을 쥐었다.
무어라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들리지가 않았다.
터져버린 고막에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삐이이 하는 이명과 함께 점차 사그라드는 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심장 소리였다. 헛웃음을 흘린 에반은, 이윽고 검을 든 빌테인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영역.
오직 마스터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의 기술.
주변을 휘감은 어둠이 천천히 에반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움직임이 멎는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든 것이 멈춘 세상 속에서 빌테인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둠이 날개처럼 등에 펼쳐졌다.
에반의 몸에 둘러졌던 불꽃과는 비견될 수 없을 만큼이나 거대한 어둠이었다.
이 공작저를 집어 삼켜, 저 밑에 있는 대지마저 집어 삼키는 어둠에 별빛이 스러졌다.
솟아오르는 어둠의 칼날, 마치 지휘자처럼. 손을 뻗은 빌테인의 움직임에 따라 어둠이 이리저리 휘날렸다.
에반의 몸은 어둠에 둘러쌓인지 오래였다.
완전히 집어 삼켜져, 이제는 다리와 팔이 어둠에 묶여 가슴팍과 몸만이 겨우 드러날 따름이었다.
이제는 생기를 거의 잃은 녹색의 눈이 빌테인에게 향했다.
그럼에도 꺼지지 않은 투지. 어둠은 빛과 상성이었지만,
그 말은 어둠이 빛을 집어 삼킬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카앙! 순간 검을 휘둘렀지만, 빌테인의 검은 에반에게 막혔다.
저도 모르게 휘둘러진 검에 빌테인의 눈에 이채가 일었다.
이 와중에도 검을 휘두르는가. 허나 에반의 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팔을 휘감은 어둠을 뜯어내면서, 동시에 팔을 지탱하던 신경마저 완전히 끊어졌다.
...만약 에반 프리드가 마스터였다면, 자신이 이길 수 있었을까.
고작 익스퍼트가 마스터의 영역을 꺼내게 만들었다.
에반에게 베인 몸 구석구석이 아려왔다.
어둠과 용의 마나는 한없이 상성이었기에, 이 상처는 영원토록 남아 흉터가 될 터였다.
이제는 움직임을 완전히 멈춘 에반을 빌테인은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런 상처를 제게 남겼던 기사는.
이제 석상처럼, 완전히 공간을 잠식한 어둠 속에서 한 표적이 되었을 뿐이었다.
푸욱, 에반의 가슴팍을 살짝 뚫은 검에서 피가 흘렀다.
이대로 조금만 더 찌르면, 심장이 꿰뚫려 죽으리라.
에반의 시선이 빌테인을 향했다. 보랏빛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어쩐지 자신을 바라보는 빌테인이 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착각인가? 아니,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검을 휘둘러 찌를 수 있지 않을까.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팔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를 악문 채 팔을 움직이려 해도, 완전히 신경이 끊어진 팔은 더 이상 움직여주지 않았다.
“이런...”
빌테인은 에반의 뜻을 알아차리곤 작게 조소를 흘렸다.
아직까지도, 이 기사는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이 이상 조롱하고 싶지 않았다.
지이잉, 검에 마나가 흐르고. 이윽고 더욱 파고든 검이 에반의 심장을 끝내 꿰뚫었다.
푸욱
완전한 파열음, 동시에 걷어지는 어둠에 에반은 자신의 몸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몸이 무너진다. 털썩, 쓰러진 몸이 바닥과 닿았다.
제 몸에서 흐른 피 위로 쓰러져서, 잔뜩 몸을 적신 피의 질척함이 느껴졌다.
아직...더 싸울 수 있었다. 손가락을 움직이려 했는데,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에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이린의 목소리인데. 대답할 수가 없었다.
피가 새어나오는 목구멍에선 더 이상 소리가 새어나오지 않았다. 빌테인과 눈이 마주쳤다.
왜 그가 저리 높은 곳에 있는 걸까. 그 사이 키가 크기라도 한 걸까.
아니...에반은 그제야 제 몸 상태를 깨달았다.
쓰러졌구나. 텅 빈 가슴에서 공허함을 느꼈다. 심장이 뚫렸구나.
“쿨럭.”
입에서 왈칵거리며 피가 쏟아져 나왔다. 자꾸만...생각이 끊어진다.
아이린을 지켜야 하는데...아이린이 지금 어떤 상태였는지 잘 생각이 나질 않았다.
몸에서 미약한 마나가 남아있었다. 심장을 잘하면 재생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심장을 복구하는 데에 사용하면. 그 다음은? 입꼬리가 작게 비틀렸다.
아주 조금, 끊어지는 숨과 함께 에반이 손이 움직였다.
허공을 움켜쥔 에반의 손이 아이린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미약한 마나, 자신의 모든 것을 쥐어짜낸 마나가 아이린에게 향하고.
파캉!
아이린의 몸을 옥죄던 어둠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이린은 에반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곤 입술을 짓씹었다.
그저 볼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을 저주하고 싶었다. 저렇게 쓰러져 있는데,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이 저렇게 누워 있는데.
심장이 꿰뚫린 에반을 바라보면서도,
제게 에반의 마나가 향했음을 깨닫곤 눈물을 터트렸다.
“일, 어나...세요. 에반. 제발...제발.”
한참을 그렇게 소리쳤지만, 에반은 허공을 바라본 채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차갑게 식어간다. 찢어진 입술에서 피가 새어나왔다. 아이린은 한참을 흐느꼈다.
허나, 닿지 않는다. 그것만큼 절망적인 사실이 없었다.
‘아이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아이린의 것임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허나 움직일 수가 없어서, 에반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지막 마나는 아이린에게 보냈다.
빌테인을 일순간 당황시키기에 충분한 마나였다.
아이린 또한 비록 초입이었으나 익스퍼트이긴 했으니,
어쩌면 테오라드 경과 합류해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두근.
마지막 박동이었다. 치켜뜬 눈 사이로 보이는 것은 새까만 어둠이었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아이린과 보았던...밤하늘이 생각났다.
별이 외로워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외로이 스러지는 것은 자신이라니. 참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숨을 쉴 힘마저 남아있지 않았기에,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에반은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닥칠 비극을...자신은 막아낼 수 없었던 걸까. 결국, 자신은 실패했다.
그 아릿한 현실에서, 그렇게 에반의 의식이 끊어졌다.
차갑게 식어버린 몸을 바라보는 빌테인의 눈 또한 차갑게 식어 내렸다.
피로 흥건하게 젖은 에반의 몸을 조용히 망토로 덮은 빌테인은,
이윽고 바닥에 주저앉은 채 오열하고 있는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은, 이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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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게, 그리고 잔잔하게.
어쩌면 우울하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선율이 그렇게 허공에 울려 퍼진다.
Diminuendo(디미누엔도), 다른 말로 Decrescendo(데크레센도).
허나 연주는 끝나지 않았기에, 선율은 변화를 맞이한다.
사라지듯이, 허나 사라지지 않은 음이 불꽃처럼 지펴진다.
오선지를 가로지르는 음악이 다시금 어둠 속에 환희를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연주한다. 그 어느 때보다 격변하는 선율을.
우리는 노래한다. 그 어느 때보다 격렬히 기적을 바라는 누군가의 염원을.
Eloim Essaim, Eloim Essaim. 이 내가 갈구하며 호소할지니.
두근.
어쩌면 꺼졌을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이 미약한 박동과 함께,
선율은 변화를 거듭한다.
다시,
Crescendo(크레센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