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Diminuendo (5)
* * *
로만이란, 검을 숭상하는 가문이었다. 아델은 그 사실을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었다.
검을 숭상하는 가문, 그런 가문에서 장자로 태어난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은 오직 하나 뿐이란 것을.
검을 휘둘렀다. 어린 나이에 뼈가 부러지기를 몇 차례,
손이 까져 피가 흐르고, 더 이상 움직이지도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검을 휘둘렀다.
‘재능이 있구나.’
자기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어린 마음에 얼마나 기뻤는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칭찬 받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다.
미친 듯이, 한계에 다다른다면 그 한계마저 넘어설 각오로 검을 휘두르는 것은 일상이 되었고.
어느덧 자신은 로만의 차기 검이 되어 있었다.
‘에반 프리드라는 기사가 이번에 익스퍼트가 되었다죠?’
‘황태자 전하보다도 빠르다던데, 정말 마스터가 새로 나오는 건 아닐지 모르겠네요.’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 익스퍼트가 된 기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땐, 그러려니 하는 마음에 흘려들었다.
자신 만큼 노력하진 않을 테니까. 자신처럼 노력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
아델은 웃었다.
앞에 서있는, 찬란한 휘광을 내뿜는 한 기사를 바라보며. 예전의 기억을 떠올린 채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무리 해도 결국 닿지 않았다.
자신이 발걸음을 내딛으면, 다른 이들은 이미 저 너머를 뛰어 가고 있었다.
평생을 이렇게 살 바에는, 그냥 다 놓아 버리자고 생각했다.
트롤에게 맞아 떨어졌을 때. 자신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던 그 시선을 기억했다.
자신도 할 수 있었는데, 어찌하여 그런 기사가 또 나타나 자신의 앞길을 방해한단 말인가.
두근
차갑게 식어있던 심장이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도저히 살아있는 사람이라 볼 수 없을 만큼 느릿한 맥박이었지만, 아델은 아무렇지 않게 검을 쥐어 들었다.
그림자를 받아들인 날, 자신은 이미 한 번 죽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피가 흐르지 않기에, 더 이상 심장이 뛰지 않기에. 더욱 강해질 수 있었다.
거뭇한 마나가 새어나와 주변을 안개처럼 뒤덮기 시작했다.
입술을 짓씹었지만, 피는 나오지 않았다. 새까만 물이 입에서 흘러나와 몸에 흘렀다.
“흐으...”
흐느끼듯 숨을 들이 마신 아델이 조용히 웃었다.
목이 뒤로 꺾이며, 목의 살이 찢어져 뼈가 튀어나왔음에도 아프지 않았다.
...기분 좋지 않은가. 이제는 자신의 위에 있던 이들조차, 자신을 무시할 수 없을 터였다.
에반의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아델은 에반이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 아니, 저 위에 있을 아이린 유리스 때문이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콰아앙! 순식간에 신형이 사라진 아델이 에반을 향해 다가갔다.
부딪힌 검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에반의 눈에 순간 당황이 서렸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 아무래도 자신이 알던 아델과는 전혀 다르다고 상정하는 것이 나을 성 싶었다.
촤라락, 옆으로 넘겨진 망토 사이에서 백색의 검이 흘러나왔다.
정령의 힘을 받아 다시금 찬연한 빛을 뿜어내는 검이 아델의 가슴팍을 향했다.
‘...이상해.’
어쩌면 이 공격으로 끝날지도 몰랐다. 하지만 에반은 미약한 불안감을 느꼈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아델 로만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하지 않던가.
심장을 찌른다고 한들 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순간, 에반은 섬뜩한 감각을 느꼈다.
목을 찔러드는 감각, 곧바로 몸을 비틀며 손목을 틀자, 목을 스쳐가는 검에 피가 주륵 흘렀다.
반응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예상하지 못했다는 편이 정확하리라.
뒤로 물러선 에반이 아델을 바라보았다. 기이하게 뒤틀린 팔이 디귿자로 꺾여 있었다.
그럼에도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델은...이제 인간이라 칭하기 힘든 모습을 하고 있었다.
꾸욱, 검을 쥔 에반이 자세를 고쳐잡았다. 공격의 방향을 예상하는 것은 힘들었다.
그렇다면, 순전히 감각에 맡기는 것이 옳을 터였다.
화르륵! 타오른 불꽃이 에반의 몸을 다시금 휘감았다.
그와 동시에 다시금 쏟아지는 섬광, 빛의 정령은 신체 능력을 훨씬 더 상승시켜 주었다.
이전이라면 할 수 없었겠지만, 지금이라면 가능했다.
“후우.”
숨을 한차례 내뱉으며, 다시금 땅을 박찬 에반이 검을 전진시켰다.
시선 속에는 아델이 아닌 거뭇한 안개처럼 깔린 마나만이 가득 차 있었다.
아델 본연의 검은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았다.
허나 거슬리는 것은 저 마나, 흑마법사가 다루는 마나였으나 그것을 기사가 다루기 시작하자 꽤 까다롭지 않은가.
에반의 검이 공중을 갈랐다. 순간 고개를 숙인 아델의 칼이 에반의 어깨를 스쳐지나갔다.
화르륵, 금색의 불길이 에반의 몸을 휘감고 다시금 에반이 이를 악문 채 허리를 비틀었다.
크게 숙여진 몸, 그리고 아래에서 위로 사선을 그리며 나아가는 검,
콰앙! 검이 부딪힘과 동시에 에반은 공격을 이어나갔다.
튕겨나간 검을 붙잡은 채 손목을 비틀어 그대로 앞을 향해 찔러 넣었다.
푸욱
찔러넣는 순간, 아델의 입꼬리가 비틀어지는 것을 본 에반이 빠르게 검을 뽑아내었다.
피가 튀지 않았다. 깔끔하게 빠져나온 검에 아무 것도 묻지 않은 것을 본 에반이 아델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자신이 처음 만난 아델 로만은 지금과 인상이 꽤 달랐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처럼 눈에 광기를 품고 있지는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베였던 어깨가 아릿했다.
아델이라는 사람을 싫어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 하던 것은 아니었다.
흑마법사가 되지 않았더라면, 아이린의 약혼자인 것을 제외하곤 꽤 괜찮지 않았던가.
무릎 관절이 뒤틀려 다리가 안쪽으로 굽어버린 아델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도무지 무어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령의 힘에 대해서는...서서히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폭발적인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아마도, 저 망령을 단 번에 죽일 수 있을 파괴력을 낼 수 있지 않을까.
타앗, 에반이 다시금 바닥을 딛고 앞으로 나아갔다. 아델이 조용히 검을 들었다.
자신의 몸을 두른 흑무, 에반은 여태껏 그걸 잘 파훼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자신이 아직 흑무를 진정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순간 아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즐겁지 않은가.
늘 자신의 비교 대상이었던 그가 이토록 고전하는 것이. 어깨의 상처가 보였다. 이번에는, 아예 저 팔을 끊어 놓으리라.
팔을 끊고, 다리를 잘라 몸뚱아리만 남은 것을 끌고 아이린 유리스에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대가 그토록 아끼던 기사는 이제 없다고,
그리고 숨만 남은 그 몸뚱아리를 제물로 바쳐...붉은 달을 다시금 볼 것이었다.
계획에 차질은 없었고 자신은 로만의 아델이었다. 아직까지는.
콰앙! 검이 맞부딪힘과 동시에 아델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이를 악물고 버팀에도 뒤로 밀려나는 이 힘에 아델은 조용히 웃었다.
대등하다? 아니, 아직도 자신은 한참 부족했다. 이렇게나 망가졌는데,
이렇게나 노력했는데도. 몸이 밀리고 있지 않은가! 이를 악물었다.
온 힘을 다해서, 흑무를 움직여 에반의 등을 공격했다.
에반은 몸을 살짝 틀어 그 공격을 피했다. 구태여 과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빛의 정령이 준 힘은 어둠과 상극이었다. 비록 용혈이 지닌 정화만큼은 아니었지만,
흑무가 내뿜는 질척한 어둠을 어느 정도 막아주고 있었다.
촤르르르르!
에반의 비어있는 손에서 빛으로 만들어진 사슬이 흘러나왔다.
본능적으로 사용법을 깨달았기에 쓸 수 있었지만,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잠깐, 움직임을 막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사슬은 스스로 의지를 지닌 채 아델의 몸을 휘감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사슬에 아델의 팔이 묶여지자, 에반은 그대로 심장의 박동을 끌어올렸다.
두근,
섬광이 몸을 휘감았다. 타오르는 백염이 빛과 닿아 더욱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흑무는 더 이상 제게 닿지 않았다. 흩어지는 어둠은 이내 천장까지 몰렸고, 찬연한 광휘 속에서 검은 망토가 펄럭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드러나는 순백의 검. 타악, 에반이 땅을 딛었다. 그리고.
동시에 아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델의 눈썹이 잘게 떨렸다. 놓쳤다. 자신이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였지만,
곧이어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허나 보이지 않아서, 아델은 몸을 휘감은 사슬을 부수며 검을 휘둘렀다.
우웅 흑무가 아델의 몸을 휘감았다. 순간이나마 에반을 놓쳤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흑무를 집어삼키면 몸에 무리가 가긴 하지만...지금은 그런 게 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심장의 고동 소리가 멈추었다. 완전히 생기를 잃은 상태였으나,
아델은 오히려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이라면, 에반 프리드를 느낄 수 있을 터. 허나 눈을 떴을 때.
‘아?’
아델은, 자신이 여전히 에반의 신형을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푸욱, 등을 꿰뚫은 칼날이 배에 튀어나온 걸 멍하니 본 아델이 고개를 비틀었다.
이 정도 상처는 괜찮았다. 어차피 전부 재생이 되니까. 허나, 어째선지 재생이 되지 않았다.
포착할 수 없는 공격에 상처가 계속 늘어나면서도, 어째선지 치유가 되지 않았다.
‘빛.’
그제야 아델은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주변을 휘감은 한 빛무리가 그려내는 선을.
부드럽게 휘어지는 선이 움직일 때마다 몸에 상처가 늘어나고 있었다.
닿지 않는다. 그것이 사실이었지만, 그걸 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질 것만 같아 두려움이 일었다.
“나는...!”
아직 지지 않았다. 이길 수 있다. 이를 악물은 아델이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어둠을 두른 검이 빛을 찢었다. 몸에 상처가 늘어나고,
거의 끊어진 팔은 검을 쥐지 못한 채 어깨에서 시계추처럼 흔들릴 따름이었다.
인정받고 싶었다. 자신의 아버지에게,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고 싶었다.
황태자든, 에반 프리드든 다른 이와 비교 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아델 로만이라 불리고 싶을 뿐이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잖습니까...!”
이렇게 태어난 게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 노력했고, 닿지 않았을 뿐이었다.
닿기 위해서 이런 방법을 택한 건데, 어째서 자신이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
가슴이 아릿했다. 커다란 구멍이 나서가 아니라, 텅 빈 가슴에 참을 수 없는 공허함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했는데도 밀린다고, 자신의 모습을 망가트리면서 흑마법을 받아들였다.
화르륵, 백염이 일수록 아델은 점차 조급해지는 것을 느꼈다.
에반의 몸이 빛으로 휘감아져 다시금 가속했다. 투쾅! 이전과는 달리 훨씬 더 묵직한 검의 무게.
에반은 냉정하게 생각했다. 이미 아델은 끝났다고. 허나 두 눈에서 절박함이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서걱, 잘려나간 아델의 팔이 허공에 흩어지자.
아델은 그 팔을 멍하니 보며 입을 작게 벌렸다. 환상통이 느껴지는,
한 때 팔이 있었던 자리에 검이 널부러져 있었다. 아델은 무릎을 꿇어 입으로 검을 집어 들었다. 아직, 아직 끝나지 않았
푸욱.
등을 찌른 검이 땅을 파고 들자, 아델은 갑작스레 느껴진 격통에 입으로 물고 있던 검을 놓쳤다.
감각이 느껴지는 이유. 자신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소리가 아니던가.
아직 더 할 수 있었다. 팔은 없지만, 흑무를 다룬다면 더 싸울 수 있었다.
그런데...몸이 움직이지가 않았다. 마음은 더 싸울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빌어먹을 몸뚱이가 움직여주지 않았다.
“...흐흐.”
쿵, 쿵. 땅에 머리를 박은 아델이 실성한 것처럼 웃기 시작하자, 에반은 조용히 그런 아델을 바라보았다.
괜스레 착잡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째서일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엔, 미약한 경의가 섞여있었다.
아델 로만이라는 사람을 처음 봤을 때도 그런 것을 느꼈지 않았던가.
여전히 기분 나쁜 보랏빛 눈동자였다. 바닥에서 꿈틀거리던 아델은,
에반과 시선을 마주치자 웃는 것을 멈춘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에반 경. 저는 어땠습니까?”
“......”
“베르뎅 산에서...당신의 검을 보았을 때 저는 희열을 느꼈습니다.언젠가는 당신처럼 되겠다고...그렇게 다짐했는데. 이렇게 보게 되는군요.”
목소리는, 그날 베르뎅 산에서 들었던 목소리와 다르지 않았다.
호의를 품고 있는, 자신에 대한 경의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에 에반은 조용히 아델을 내려다 보았다.
그때의 청록색 머리카락은 조금도 남지 않았다.
아델의 몸을 휘감았던 흑무가 육체를 조금씩 삼켜나가고 있었다.
아마도, 곧 있으면 아델 로만은 흑무에 집어삼켜져 사라지리라.
“동정하시는 겁니까.”
그 물음에 에반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동정? 아니, 자신은 흑마법사 따위에게 동정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한때 그의 모습을 보았고. 소설 속의 그를 알았기에.
이렇게 몰락한 모습에 괜스레 미묘한 감정을 느낄 뿐이었다.
소설 속 내용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아이린을 버리고 저 홀로 살길을 찾으려 했던 아델 로만은...이제 사라질 터였다.
아델의 등에서 검을 뽑은 에반은 조용히 아델을 지나쳤다.
더 이상 말을 섞어줄 생각은 없었다.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도 그렇고, 아이린이 아직 위에 있었다.
그렇게 지나치려던 찰나에, 귓가에 아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조금은, 물기 섞인 목소리였다. 눈물을 잃은 그의 육체였지만, 아델은 흐린 시선으로 등 돌린 에반을 바라보았다.
“그게 답니다. 에반 경.”
몸이 흩어진다. 그걸 느낀 아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지막에 느끼는 감정은 후회도, 비통도, 회한도, 슬픔도 아닌.
그저 후련할 뿐이라, 스러지는 입가에 남긴 것은 한 줄기 미소였다.
고요, 다시금 정적만이 남은 공간에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아델 로만이 한 때 여기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검 한 자루만이 덩그러니 남았을 뿐.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에반은, 이윽고 다시 위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델 로만, 이제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존재를 애써 기억에서 지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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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으으
숨을 들이쉰 에반이 천천히 위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한 층만 더 계단을 밟는다면, 곧 로만 공작과 만날 수 있을 터였다.
파들거리는 손가락이 눈에 보였다. 조금은긴장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처음 만나는 적, 어쩌면 자신에게 승산이 없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나아간다. 설령 목숨을 저버릴지언정,
이 이상 후회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다짐을 떠올렸다.
화르륵
심장에서 미약한 불꽃이 일었다. 정령의 힘이 그 불꽃에 얽혀 순백의 마나가 새하얗게 빛을 발했다.
어두웠던 공작저가 새하얀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빛을 보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조금씩 진정시켰다.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정령의 힘을 완전히 받아들이기도 했고, 아델과 싸우면서 시간을 지체한 것도 아니었다.
잠시 눈을 질끈 감은 에반은, 이내 옅게 숨을 내뱉으며 앞으로 향했다.
주륵, 손끝에서 맺힌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델에게 당한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를 본 에반이 쓰게 웃어 보였다.
어째선지, 몸에 있는 상처가 치유되는 속도가 더뎌진 것만 같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