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 Diminuendo (4)
* * *
“...꽤 빠르군.”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눈에 띄는 빛이 있었다. 그 빛을 보며, 빌테인은 낮게 읊조렸다.
저들이 여기에 온다면, 아마 의식 자체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에반 프리드를 홀로 데려올 필요가 있었다.
의식에 이용하기 위해, 그리고 황태자와 테오라드를 에반 프리드에게 떨어트리기 위해서.
구태여 셋과 함께 싸울 필요가 있는가. 승산은 충분했으나,
언제나 이기는 싸움만을 하는 것이 로만의 지론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말에 빌테인은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어떻게 하겠냐고 묻는다면, 지금 이 상황에 다양한 수를 둘 수는 없지 않겠는가.
위험했고...실로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전혀 그렇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들은 자신이 마스터임을 모른다.
설령 마스터임을 알고 있더라도, 자신이 지닌 영역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하지 않던가.
유일한 변수라면 에반 프리드겠지만...그를 홀로 오게 하는 방법은 이미 준비해두지 않았던가.
황실이 자신이 흑마법사와 관련 있다는 것을 생각보다 빠르게 알게 된 것에 대해서는 조금 놀라던 차였다.
이렇게 자신 있게 황태자가 나섰다는 걸 보면 물증 또한 있다는 얘기가 아니던가.
이렇게 된 이상, 둘 수 있는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의식을 그대로 진행시키며, 동시에 의식을 완성시킬 제물까지 얻을 수 있는 수.
“...유리스가 비었겠군.”
빌테인이 중얼거리자, 그의 앞에 도열된 그림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반 프리드는 알고 있을까, 자신의 역린이 위험에 처해 있단 것을.
꽤 유쾌한 감상에, 빌테인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웃어 보였다.
새벽녘, 이제는 태양 대신 붉은 달이 떠오르리라.
빌테인의 눈이 조용히 감겼다. 얼마 남지 않았다. 모든 것의 절멸이. 300년의 위업이.
#
테오라드의 영역이란, 스스로의 장점을 더욱 부각시키는 것에 있었다.
푸른 마나로 뒤덮인 공간, 그 안에서 휘둘러지는 검은 공간을 장악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공간을 휘두르고, 찢고, 더 나아가 찢은 틈을 이용하여 도약 또한 가능하지 않던가.
괜히 자신이 황실 기사단장이 된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듯,
테오라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가벼운 몸놀림을 보이고 있었다.
‘저번 싸움이 꽤 도움이 되었어.’
흑마법사를 하나 베어내는 와중, 테오라드는 고개를 돌려 저 멀리서 싸우고 있는 에반을 슬쩍 바라보았다.
지난 번 싸웠던 대련, 더 이상 성장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에게 베이는 순간 미묘한 감각을 느꼈다.
분명 에반보다도 더 많은 마나를 활용했건만, 정작 먼저 베인 것은 자신이었다.
검술도 검술이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감각이 자신보다 월등하다는 의미이리라.
아쉽게도 감각이란 것은 타고나는 것이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성장하기가 힘들었다.
그렇기에 힘을 쏟은 것이 이미 지닌 것을 다듬는 것.
자신의 검은 느렸다. 어릴 적부터 그것이 단점이었고,
그렇기에 느린 검을 빠르게 만들기 위해 꽤 많은 노력을 했다.
허나 결국엔 마스터에 다다르지 못했다.
어중간한 익스퍼트 수준에서 20년, 그렇게 한참을 머물다 깨달은 것이 있었다면.
그 느린 검 자체가 자신의 장점이라는 점이었다. 느리다. 허나 느리지 않았다.
역설적이었지만, 테오라드의 검은 그것을 현실로 보여주고 있었다.
언뜻 보면 검으로 충분히 방어할 수 있고, 또한 회피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허나 직접 마주하는 상대는 그럴 엄두조차를 떠올리지 못한다.
검이 지나가는 자리의 공간이 뒤틀리기에, 움직일 수 있는 공간 자체를 제안하는 검.
피할 수 없고, 그렇다고 방어조차 불가능한 검이 자신의 검이었다.
“후우!”
콰직, 땅을 밟은 테오라드가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소모되는 체력은 상상이상이었다.
날카로워진 감각은 나쁘게 말하자면 예민해졌다는 소리였다.
평소보다 배가 넘는 정보량을 받아들이는 감각에 몸이 차츰 무거워지고 있었다.
허나 그만큼의 성과는 있었으니,
자신의 옆에 베어진 얼추 백여 명에 달하는 흑마법사를 보자 가슴이 조금 편해지는 듯 했다.
하늘을 바라보자 보이는 건 구름이 조금 짙어진 하늘이었다. 아니, 저런 것을 구름이라 할 수 있을까.
공작저를 뒤덮다 못해 아예 그 형체를 사라지게 만든 거뭇한 구름은 분명 흑무일 터였다.
그 안에서 자신의 감각은 통하지 않았다. 마나도, 알량한 검술도. 평소에 발휘하는 만큼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흑무로군요.”
에반이 중얼거리자, 테오라드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흑무, 아마도 돌파할 수단은 지금 한 가지 뿐이었다.
자신의 옆에 있는 기사가 지닌 용혈은 정화의 성질을 지니지 않던가.
어쩌면...자신과 전하는 저 쪽으로 갈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에 에반을 바라본 테오라드였지만, 에반은 의외로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뚫을 수는 없습니다. 흑무를 완전히 제거한다는 건, 제가 용이 아닌 이상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에반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흑무, 지난 번 말로릭을 제거하며 지워본 기억은 있었지만.
저 공작저를 두른 흑무는 자신이 알던 것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농도였다.
아마 저걸 지우려면, 저 공작저 전체를 자신의 마나로 감싸야 했다.
마스터가 아닌 지금은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아마도 진입을 위해서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아니면 자신만 진입한다던가.
홀로 진입했을 때의 승산을 얼마로 잡아야 할까.
목숨을 건다면 모를까, 지금 상황에서 목숨을 걸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을 기다리는 아이린이 있었다.
로만 토벌로 절멸이 완전히 끝나는 것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가문 또한 문제가 많지 않던가.
자조어린 미소를 지은 에반이 천천히 마나를 끌어올렸다.
남은 마나는...아직 충분했다. 체력도 널널했고, 몸에 상처도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고전했을 흑마법사들은 이제 잔챙이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만큼 자신은 성장했고, 잘만 하면 로만 공작도 무리 없이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꼭대기.
마치 첨탑처럼 솟아오른 공작저의 꼭대기는 달을 찌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달을 찔러 그 빛을 잃게 만들 생각일까. 이제는 완전히 흑무에 뒤덮인 하늘은 더 이상 빛을 비추지 않았다.
희미하게 그 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달빛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타오르는 백염에 주변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대충 다 처리한 것 같은데, 이제 진입만 남은 건가?”
카이셀은 제 몸에 붙은 살점을 떼어내며 눈살을 찌푸렸다.
테오라드나 에반의 상태가 어떤지는 몰라도, 자신은 지금 꽤 지친 상태였다.
방해가 되고 싶진 않았으나, 이대로 간다면. 부정적인 생각은 그리 품고 싶지 않았다.
허나 빌어먹을 이 몸뚱이가 원망스러웠다.
여기서 무리를 한다면 테오라드 경이 얘기하리라. 더 이상 무리하셔서는 안됩니다.
무리? 아니, 이건 무리가 아니었다. 제국의 황제라면, 에반젤리움의 광영을 타고난 이라면.
흑마법사를 향해 칼을 내밀 마땅한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빌테인을 직접 벨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허나, 도움이 되고 싶었다.
황태자나 다른 무언가를 떠나서, 목숨을 걸고 나선 두 기사의 뒷바라지 정도는 자신이 맡고 싶었다.
속에서 비릿한 향이 올라오는 듯 했다. 조금...아직 조금 더 움직일 수 있었다.
고작해야 흑마법사 몇 십 명을 벤 게 전부가 아니던가.
에반이 잡아냈던 말로릭까지는 아니어도, 지금까지 잡은 만큼은 잡을 수 있었다.
한숨을 내뱉고, 평소처럼 웃자 그제야 테오라드의 시선이 카이셀에게 닿았다.
“괜찮으십니까?”
“물론, 아주 괜찮지.”
카이셀이 살짝 웃자, 그런 카이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테오라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에반은 계속 공작저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굳게 닫힌 성문, 안에서 나오던 흑마법사들은 이미 전부 쓰러지지 않았던가.
남은 것은 저 안에 남은 이들 뿐일 텐데. 솔직히 어떻게 진입해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질 않았다.
화르륵, 흑무와 닿은 백염이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잠깐 정도의 틈은 만들 수 있었지만, 그걸로 3명이 전부 진입하기에는 무리이지 않을까.
아예 문쪽의 흑무를 완전히 걷어내야 했다.
다만 걸리는 건, 저 문을 여는 순간 나올 것들이었다.
이렇게 흑마법사를 죽였는데도 공작저 내부에서는 이렇다 할 공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델 로만도, 그렇다고 로만 공작이 직접 나서는 것 또한 아니었다.
불길함이 커져 갔다. 이렇게 조용히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주변을 둘러보던 에반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품속에 두었던 브로치를 꺼내들었다.
아이린에게 선물했던 사파이어 목걸이처럼,
여전히 영롱하게 빛나는 푸른색의 브로치는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입맛이 썼다. 이유 모를 불안감은 여전했다.
지금까지는 괜찮았지만, 이제 저 공작저로 진입한 이후가 시작이었다.
그 이후엔...지금은 알 수 없었다. 어떻게든 부딪혀 봐야 하지 않을까.
카심 백작이 제게 준 것은 여전히 자신에게 있었다.
최후의 수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을 사용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순간, 에반의 손에 있던 브로치의 색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영롱한 색을 띄던 것이 그 색을 잃어 회색이 되었고, 이윽고 완전히 부서진 브로치가 가루가 되어 휘날렸다.
에반의 얼굴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순간 불꽃이 치솟아, 에반의 머리에서 생각이 빠르게 회전했다.
아이린에게 무슨 이상이 생겼다는 반응이 분명했다. 허나 어째서? 위치가 파악되지 않았다.
빠르게 주변을 휘감은 마나가 주변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주변이 아닌, 점차 넓게 퍼지는 마나는 유리스 공작령까지 닿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마나 끝에 닿은 어둠. 에반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하.”
그토록 걱정했던 일이 벌어졌음에 심장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생각하기도 싫은 현실이었으나, 이미 벌어졌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다만 다행인 점은, 이 브로치 자체가 그녀에게 덮친 위험을 막아주었으리란 점이었다.
아직까지는 괜찮다. 다만, 지금 하는 이 토벌을 이어갈 수는 없지 않을까.
“테오라드 경, 아무래도 아가씨에게”
툭.
유리스로 향하기 위해 입을 연 에반이었으나,
갑작스레 하늘에서 떨어진 무언가에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 그것도 여태껏 아무런 반응조차 보이지 않던 공작저에서 떨어진 무언가를 바라본 에반의 눈가가 잘게 떨렸다.
익숙한 물건이었다. 금색의 줄이었고, 중앙에는 깨진 사파이어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한 여인의 목에 걸려 있던 것이었고, 그 사람은.
“...아이린.”
에반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뱉어지는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환상? 환영? 차라리 그 편이 나을 터였다.
지금 바닥에 떨어진, 이 목걸이가 자신이 아는 것이라면.
도대체 무어라 말을 내뱉어야 할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음에도, 에반의 눈앞에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은 에반이 목걸이를 주워들었다.
...익숙한 목걸이였다.
자신이 새겨준 마법의 흔적이 남아있는, 아이린의 이니셜이 새겨진 목걸이는...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 상황을 믿고 싶지가 않아서,
저 빌어먹을 흑마법사들이 결국 아이린을 건드렸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가 않아서.
화르륵, 심장에서 피어오른 불꽃이 날개처럼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짓씹은 입술에서 피가 새어나왔다. 목걸이를 쥔 손이 하얗게 물들고,
주변을 감싼 불꽃이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주변을 불태우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가 새벽의 찬 공기를 잠식했다. 타오르는 불길에 흑마법사들의 시체가 불타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공간 자체가 불길로 뒤덮여, 호흡마저 힘들어지고 있다는 걸 테오라드는 느낄 수 있었다.
“......테오라드 경.”
내뱉어지는 목소리가 달랐다. 테오라드는 에반에게 다가가려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를 배려하기 위해서, 아니. 단지 두려움을 느꼈을 뿐이었다.
마스터인 자신이 에반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우스웠지만, 에반의 눈에서 흐르는 귀기는 그 무엇보다도 차가웠다.
잘 버려진 칼처럼 날카로운 살기가 주변을 뒤덮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길은 그의 분노였다.
백염은 흑무에 사라지지 않았다. 흑무를 집어삼키며,
이윽고 문이 있는 부분의 안개를 기어코 걷어낼 정도였다.
에반은 공작저의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미약하게...아이린의 마나가 느껴지고 있었다.
흑무에 가려져 있음에도, 그녀의 숨소리가 선명하게 귓가에 들리고 있었다. 아직 살아있다.
그리고 저 공작저의 꼭대기에 있다. 보랏빛의 황혼이 저 그늘 아래에 아른 거렸다.
그림자들이 괴물처럼 꿈틀거리고, 빛을 집어삼킨 시선이 제게 향했다. 빌테인, 로만 공작.
에반은 그 존재와 시선이 맞닿는 순간 깨달았다. 그가 자신을 부르고 있음을.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위험하네. 사정은 짐작하고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갈 겁니다. 말리셔도, 말리신다면 베고 지나가겠습니다.”
에반은 조용히 검을 들었다. 순백의 빛을 뿌리던 검은 더 이상 반짝이지 않았다.
주변을 뒤덮은 어둠에 빛이 사라져, 그저 하얀 색을 띄고 있을 뿐이었다.
에반은 조용히 어둠이 걷힌 공작저의 문을 바라보았다.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웃고 싶지 않았는데,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비틀린 입가에서 피가 새어나왔다. 강하게 씹은 탓에 만신창이가 된 입에서 피가 흘렀다.
허나 그것보다도 아픈 것은 가슴이었다. 심장이 아릿했다. 텅 빈 가슴에 정적이 흘렀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에게 무어라 소리치는 테오라드 경의 말도,
자신을 바라보는 황태자의 말도...들리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걸어야 할 때가 있다면, 그건 지금이었다.
셋이서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렇다고 이 자리를 피할 수는 없었다.
자신 혼자서라도, 아이린에게 간다.
에반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게 식어있었다.
카이셀은 에반을 건드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아군임에도, 그가 내뿜는 살기에 몸이 저릿했다.
테오라드 또한 그것은 마찬가지라, 그저 에반을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에반, 아무리 그래도!”
“전하. 지금은 그를 막을 수 없습니다.”
테오라드는 자신이 모시는 이를 막아섰다. 가장 막고 싶은 것은 자신이었지만,
지금의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막았다간 오히려 이 앞에서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적은 저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 멀리, 공작저를 감싸던 석상들이 조용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노란 안광을 지닌 괴물들이 눈을 뜨고, 귀를 찢어발길 듯한 괴성이 소용돌이쳤다.
가고일, 그 존재의 이름을 깨달은 테오라드가 다시 검을 쥐었다.
“...지금은, 그를 믿어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가능성, 낮을 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단신으로 빌테인을 잡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걸어볼 수밖에 없었다. 마스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지금에, 그가 마스터에 다다른다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랐다. 용혈이란 그런 것이었다.
기적을 불러오는 존재. 건국 신화에 담긴 이야기를 떠올린 테오라드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다시 한 번 그 기적이 벌어지기를 바라며, 검을 쥔 손을 앞을 향해 뻗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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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몸을 감쌌다.
어둠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 상처가 남았으나, 이내 황금색의 불길에 뒤덮여 천천히 치유되기 시작했다.
아프지 않았다. 텅 빈 가슴은 더 이상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에반은 공허한 시선을 허공에 던졌다. 아무도 없는, 촛불조차 없는 복도는 고요했다. 아이린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돌아오라며 울던, 제 품에 안겨 안녕을 바라주던, 한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살아있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리고 저 위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건, 자신을 능욕하거나...아마도 자신이 그들의 계획에 필요해서이리라.
어쩌면 제물로 자신을 바치는 것일지도 몰랐다.
로페나는, 크리스 경은? 에반의 머릿속에 수많은 이들이 스쳐지나갔다.
무엇이 호위란 말인가. 결국 소중한 이 하나 지키지 못한 자신이었다. 또, 그렇게 후회한다.
그녀의 말대로 토벌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아이린을 위해서라는 알량한 핑계로 이렇게 나오지 않았더라면.
“빌어먹을.”
의미 없는 자조였다. 결국 이렇게 되지 않았던가.
자신이 할 일은 이렇게 되어버린 현실을 바로잡는 것이었고, 궁극적으로 아이린을 구하는 것이었다.
눈을 감았다. 서늘한 바람 사이에서 혈향이 맡아졌다. 쓸데없는 생각들이 떠올랐다.
아직, 아이린은 괜찮았다. 아이린과 이어져있기에 알 수 있었다.
직접 볼 수는 없더라도, 아이린은 다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자신 때문이었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자신이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동생처럼, 그렇게 모두를 잃을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이번엔 달랐다. 이번만큼은 달라야 했다. 생기를 잃었던 에반의 눈에 다시금 빛이 일었다.
검을 쥐었다. 검을 쥐며 했던 맹세를 떠올렸다.
화르륵, 타오르는 불길이 주변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림자에 물든 공간이 차츰 형상을 되찾기 시작했다.
무너진 계단,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시체가 되어버린 공작저 내부에, 한 남자가 있었다.
아무도 오지 않을 넓은 거실에 저 홀로 앉아 있는 남자.
익숙한 마나였고, 그렇기에 에반은 그 이름을 금세 떠올릴 수 있었다.
“아델.”
아이린의 약혼자...에반의 눈살이 작게 찌푸려졌다. 이제는 아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자신을 적대할 것이란 사실이었다.
처음 볼 때 보았던 보랏빛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반짝거렸다.
그리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힘. 에반은 조용히 침음을 삼켰다.
예상했던 것보다 아델이 지닌 힘은 강대했다. 어쩌면, 시간이 여기에 지체될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귓가에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반 경이 아닙니까...이런, 제가 이런 귀한 손님을 먼저 알아보지 못했군요.”
“......”
아델 로만은 더 이상 이전의 모습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창백한 피부에 광대뼈가 살을 찢고 드러나 있었다.
그가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유가 이런 것일까.
에반이 그를 조용히 바라보자, 아델은 킬킬거리며 허리를 굽힌 채 웃었다.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사냥제에서 보았던, 그 고귀하던 기사는 이제 없었다.
에반은 그 사실을 깨달았고, 천천히 망설임을 지우기 시작했다.
아델은 한참을 웃었다. 어쩌면 웃다가 숨이 멎을 만큼이나.
꺽꺽거리며 검은 무언가를 입에서 뱉어낸 아델은, 허리춤에 들린 기다란 장검을 들며 자랑스럽게 외쳤다.
가느다란 팔이 허공에서 흐느적거렸다. 그를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는 괴물이었다.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진 몸은 기이하게 뒤틀렸고,
더 이상 눈에서 총명함을 찾을 수 없었다.
“흐...우습지 않습니까. 로만의 차기 검인 제가! 이러고 있다는 게 말입니다! 에반 경, 제게 검을 한 수 가르쳐 주신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여기에 그렇게 서계신 겁니까.”
“닥쳐.”
에반은 조용히 읊조렸다. 길게 말을 섞어줄 생각은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아이린이었고, 아델 로만에게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광인처럼 중얼거리는 모습에 에반의 눈이 작게 찌푸려졌다.
여기를 빠르게 지나갈 방법. 이어지던 생각이 무언가를 떠올렸을 때,
옅게 웃은 에반은 조심스럽게 제 심장 부근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카심 백작이 주었던 것, 그건 이전에 빛의 정령이 깃들었다고 하는 열매를 정제한 수정이었다.
오로지 용혈을 지닌 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각성제,
자신에게 그걸 건네주었던 카심 백작은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적당히 사용하는 것은 괜찮네. 하지만...그 힘을 너무 오래 사용했다간 정말 죽을 수도 있네. 정령의 힘이란 그리 애용할 것이 되지 못하니 말이야.
그 말에 걱정하지 말라며 대답했었다.
만약 그것을 사용할 상황이 온다면, 분명 목숨을 걸고 싸울 가치가 있을 상황이라 생각했으니까.
작은 수정을 움켜쥔 에반이 그 손을 심장에 가져다 대었다.
이전에 느꼈던 통증, 마나와 빛의 정령이 결합하여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라 했던가.
타오르는 불꽃에 섬광이 더해졌다. 찬연한 빛 아래에,
그와 비견될 만큼이나 화려한 백염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불꽃과 함께 위로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몸을 휘감은 빛, 그리고 백염. 심장이 찢어지는 것만 같은 고통에 피를 왈칵 뱉어내면서도,
에반은 검을 든 채 앞으로 나아갔다. 무어라 중얼거리는 아델 로만의 존재에 짜증을 느꼈다.
자신은 급했다. 이런 곳에서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아이린을 구하고 싶었다.
화르륵, 가슴께를 움켜쥐었던 에반의 손이 떨어지고. 금빛의 눈이 아델에게 향했다.
“비켜.”
조용히, 검을 치켜든 에반의 손이 아델의 목을 향했다.
"약속, 지켜야 하니까."
당신이 어디에 있든, 가장 먼저 곁으로 향하겠다는 그 약속을.
에반은 결코 허투로 내뱉은 적이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