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 Diminuendo (3)
* * *
로만 공작령을 두른 검각, 그 가장 날카롭고 뾰족한 정상에 선 마법사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별 아래에, 하얀 안개가 낀 공작령은 그저 고요할 따름이었다.
잠시 뒤면 일어날 것들을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우웅 아제스트는 심장의 서클이 공명함을 느꼈다.
얼마 남지 않았다. 모든 것의 시작이자, 어쩌면 모든 것의 끝이 될 토벌전의 시작이.
“나는 빌테인을 이기지 못하겠지.”
대마법사이자, 현자라는 칭호로 불리는 자신이었지만.
빌테인을 이기는 것은 아마도 힘들 거란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자신에게 맞는 역할이 있었고, 적어도 이 토벌전에서...
자신이 주연이 되기는 힘들 터였다.
에반 프리드, 마스터인 테오라드와 황태자 전하보다도 그 이름이 먼저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 기사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여기까지 다다르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에 아제스트가 피식 웃었다.
고작해야 스무 살의 기사가 지닌 존재감은 생각보다도 컸다.
이 토벌전에서 빌테인을 유일하게 잡을 수 있는 건 오직 그 뿐이리라.
별이 구름에 가려져 완벽한 어둠이 찾아온다.
조금 꺼림칙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여기서 토벌을 실패한다면 어떻게 될 지를 상상해보면...
“그냥 죽는 게 낫겠군.”
우웅 심장에 새겨진 8개의 서클이 미친듯이 열을 발하기 시작했다.
고위 마법, 오로지 단 한 번의 대마법을 위해 모든 마나가 서클을 향해 흐르기 시작했다.
마나란, 곧 세상의 의지. 그 의지를 가장 잘 다루는 것이 마법사였고,
그 마법사 사이에서 정점에 오른 한 대마법사가 하늘을 향해 오망성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쑤리사즈(thurisaz).”
원시의 힘, 하늘을 찢어 발기고 대지를 파괴하는 원초적인 힘.
쿠구궁, 하늘이 떨리기 시작했다. 찬연한 별들이 그 현상을 깨닫고 스스로의 빛을 숨기기 시작했다.
달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오로지 하늘 아래 떠오른, 새로운 광원 아래에 몸을 숨길 따름이었다.
달과 함께 떠오른 하나의 별, 곧 이 대지를 강타할 별.
“메테오.”
아제스트의 손이 가볍게 허공을 휘젓자, 이윽고 하늘을 가린 거대한 돌이 지상을 향해 낙하하기 시작했다.
로만 공작을 두른 방어막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주변으로 그 여파가 퍼지지 않게 깔아두긴 했지만,
애초에 그리 버텨줄 거라 생각하진 않았으니까. 다시금 새겨진 룬문자에 운석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오로지 흑마법의 기운을 지닌 자만 타격하는 마법, 이것으로 강대한 이들이 죽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지금은 아래에 있는 아군을 믿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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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은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긴장? 솔직히 말하자면, 이상하리만치 가슴이 평온했다.
오늘이 그야말로 최고의 상태라고 해도 좋을 만큼이나.
자신이 떠날 때 웃으며 보내주던 아이린의 얼굴이, 그리고 살짝 울먹이던 로페나의 얼굴이,
진지한 표정으로 조언해주던 크리스 경의 얼굴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공작을 보지는 못했으나, 그는 에반에게 망토 하나를 건네주었다. 유리스의 문장이 크게 새겨진 검은색 망토를.
“왔나. 아제스트 경이 곧 공격을 시작할 걸세.”
하늘에 구름이 드리웠다. 그리고 그 하늘을 뒤덮은 룬문자가 새겨진 오망성.
보기만 하더라도 숨이 턱 막힐 정도의 마나가 느껴져서, 에반은 괜스레 느껴지는 안도감에 씨익 웃었다.
자신들이 상대할 흑마법사는 그리 많지 않을 터였다.
대마법사란 그런 존재였고, 저 마법에도 죽지 않는 녀석들만 조금 상대하게 되리라.
테오라드는 그런 에반을 보며 옅게 웃었다.
긴장할 법도 하건만, 평온한 표정의 그 어린 기사는 검을 매만지며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빌테인 로만, 이제는 더 이상 그를 로만 경이라 부르지 않기로 다짐한 테오라드가 높게 솟아오른 건물 하나를 바라보았다.
제국의 검, 황제의 혈통을 타고난 그들이 어째서...흑마법사와 손을 잡은 것일까.
자신의 친우‘였던’ 빌테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부터 꽤 친분이 있었지만,
황실 기사단장으로써 이런 걸 그저 두고 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천천히 한숨을 내뱉으며, 허리춤에 들린 검을 쥔 채 자신이 모시는 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전하, 조금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보이나? 빌어먹을, 솔직히 말하지. 당장이라도 여기서 뛰쳐나가고 싶네.”
그렇게 말한 카이셀은, 이윽고 헛웃음을 터트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근데 그럴 수는 없지. 시조 황제처럼 용을 베지는 못하더라도, 그에 준하는 업적 한 번은 세워보고 싶네. 내가 여기서 도망가면, 제국이 로만에게 도망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겠지. 나는...당당한 황제가 될 거야. 좋은 황제는 못 되더라도 말이야.”
“좋은 황제가 되실 겁니다.”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을 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테오라드는 카이셀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걱정이 많았지만, 요즘 들어 태도가 많이 변한 황태자의 모습은 그야말로 좋은 황제가 되기에 충분해 보였다.
아마도 에반이라는 기사를 만나 의욕이란 것이 생긴 탓이리라.
하지만, 그가 좋은 황제가 되려면 여기서 로만을 잡아야 했다.
마스터는 고유의 영역을 지닌다.
그리 쓸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최대한 빠르게 사용할 생각이었다.
빌테인과 싸운답시고 아껴두었다간 괜히 체력 소모만 심해질 터.
천천히 마나를 끌어 올림과 동시에, 드디어 공작령을 타격하는 거대한 운석 세례를 마주하였다.
저 돌이 공작령을 뒤집어 놓는 순간 시작이었다. 제국의 5대 공작가 중 하나를 토벌하는, 로만 토벌전의 시작이.
스으으
에반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카심 백작이 제게 준 것은 아끼겠지만,
본신의 힘을 전부 사용하기에 충분한 싸움터였다.
만약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가 괜히 다친다면, 로만 공작과의 싸움에서 어떤 변수로 작용할 지 알 수 없었다.
두근, 단순히 마나를 일깨울 때와는 차원이 다른 고양감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심장이 터질듯이 맥동한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마나가 이윽고 불꽃처럼 타올라, 찬란한 백염이 어둠 속에서 이글거렸다.
용은, 지배에 능했다. 용은, 사특한 기운을 몰아내는 정화에 능했다.
하여 백염은 어둠을 몰아낸다. 그리고 빛을 지배하며, 그것을 수족처럼 휘두른다.
그리고 에반은 그 용혈을 각성했기에.
별과 달마저 가려진 그 칠흑 속에서, 황금색 눈동자가 광휘를 흩뿌렸다.
“준비는 다 된 것 같군.”
테오라드가 말하자, 에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촤르르, 검에서 뽑혀난 새하얀 검신이 빛을 발했다.
마법검이라 해도 특별한 것은 딱히 없었으나, 단지 절대로 부러지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아무리 휘둘러도 부러지지 않는 검은, 모든 힘을 온전히 받아준다는 소리였으니까.
땅을 밟은 에반이 가장 높이 솟아오른 건물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이미 저들도 이 토벌이 시작되었음을 인지하고 있으리라.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그 모든 것을 동이 트기 전에 끝내야 하는 것만은 확실했다.
황태자와 테오라드의 몸에 각기 푸른 마나가 사자의 갈기처럼 둘러졌다.
그와 동시에 튀어나가는 신형, 저 멀리서 느껴지는 어둠에 테오라드가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많이 남은 것 같군.”
“...그렇습니까.”
에반의 눈이 차갑게 식어내렸다. 카이셀은 그 시선을 보며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같은 편이었지만, 에반이 절제하고 있는 분노는 그 어떤 한기보다도 차갑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흑마법사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 스스로 품고 있는 각오. 카이셀을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양옆에 있는 두 사람과 한참 실력이 모자란 것이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방해가 되고 싶진 않았다.
“상부의 명이다! 침입자를 처단하라!”
촤라락 자신을 향해 뻗어온 검은 창날을 피해낸 카이셀이 사선으로 검을 그었다.
푸른 마나가 실린 검은 불타오르는 염구를 갈라냈다.
살짝 튀는 피, 상처가 얕음을 확인한 카이셀이 발을 빠르게 움직였다.
한 걸음, 앞으로 파고들어간 순간에 마법에 노출 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을 피해낼 자신이 있었다.
감각이 날카롭게 벼려진 느낌이었다.
자신을 향해 팔을 겨눈 흑마법사의 팔을 베어내면서,
동시에 몸을 틀어 옆에 선 흑마법사 마저 벤 카이셀이 옅게 웃었다.
꽤 괜찮지 않은가. 컨디션이 괜찮았다. 흑마법사 둘을 순식간에 베어냈으니,
어쩌면 다른 둘보다 좋은 성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고개를 돌린 카이셀이 이내 헛웃음을 터트렸다.
구름을 가르는 백색의 섬광은, 자신이 흉내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젠장. 한참 멀었군.”
입이 거칠어졌다는 소리를 최근에 들었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지금은, 그저 한 명의 흑마법사라도 더 베어내는 것이 좋을 터였다.
옆에서 베어지는 수많은 흑마법사들을 본 카이셀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과 다른 세상에 있는 두 명을 보는 심정이란,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하.”
유독 자신에게만 몰려드는 흑마법사를 본 에반이 작게 혀를 찼다.
마나의 색부터가 유독 눈에 띄긴 했지만, 그렇다한들 이런 수는 너무한 것 아닌가.
얼추 30명, 수를 확인한 에반이 마나를 끌어올렸다. 최대한 빠르게 돌파할 생각이었다.
이런 것에서 시간을 소모했다간, 로만 공작과의 싸움에서 어떻게 될지 예상할 수 없었다.
일 대 다수의 싸움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친절하게 한 번에 하나의 공격만 오지는 않았다.
효율적으로, 모든 공격이 제게 향하는 순간 조금도 닿지 않는 그 지점을 찾아야 했다.
에반이 하늘을 슬쩍 바라보았다. 위에서 부터 꽂히는 공격이 둘, 양 옆에서 얼추 열 개,아래에서 셋 정도.
몸을 뒤로 빼기보다는, 한 방향을 돌파하는 것이 나아보였다.
푸확! 망토가 걷어지며 튀어나온 검이 검은 색의 검과 부딪혔다.
자신의 등허리를 박살내려는 거대한 손을 가르며,
제 발을 찌르려는 창날을 밟은 채 그대로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시켰다.
가가각, 검과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빠르게 회전시키며 동시에 불꽃이 타오르자,
에반을 향해 쏟아졌던 불꽃이 거기에 휘말려 사라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공격해!”
한 흑마법사가 다급히 외쳤지만, 에반은 한차례 숨을 크게 들이 마시며 다시 땅을 밟았다.
수십 개의 창이 솟아오르는 와중에도 멀쩡한 땅을 밟음에 누군가가 탄식을 흘렸다.
허나 그것이 차이였다. 설령 수십이, 이것보다 더 많은 수백이 에반에 달려든다 한들 닿을 수 없었다.
격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미 몇 단계의 차이였고, 에반은 이 흑마법사들에게 공격을 허용해줄 생각이 없었다.
땅에서 솟아오른 창을 붙잡은 에반이 흑마법사들을 향해 창마저 내지르기 시작하자,
흑마법사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채 하나둘 땅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누가봐도 위험해보이는 마나의 탄막이 자신을 향해 쏟아졌지만,
에반은 여유롭게 칼을 돌려 그것들을 튕겨내었다.
이 정도로는 자신에게 상처 입힐 수 없었다. 예전이면 모를까,
지금의 자신은 고작 몇십 명의 흑마법사 정도는 수월하게 상대할 수 있지 않은가.
입꼬리가 비틀렸다. 확실하게 승산을 느낀 에반이 조금 더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사선, 수직으로 그어진 검이 턱을 베어냈다. 마법을 영창 할 입을 베고, 손목을 잘라냈다.
바닥과 하늘에서 솟아나는 마법은 이미 신경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다.
오감은 이미 훌륭하게 그 공격의 규칙을 파악한 뒤였고,
혼란스럽게 얽힌 공격의 폭풍 속에서 에반은 저 혼자 고요할 따름이었다.
화르륵, 시간이 지날수록 불꽃은 더욱 거세게 불타올랐다.
밤은 더 이상 어둡지 않았고, 찬연한 빛은 주변을 메우고 있었다.
두근, 심장이 맥동하는 감각에 에반은 희열을 느꼈다. 어쩌면 잘 끝날 지도 몰랐다.
이 기세를 유지한다면,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감각을 그대로 로만 공작과 싸울 때가지 이어갈 수 있다면.
‘...일단 집중하자.’
잡념은 좋지 않았다. 괜히 들떴다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할 수도 있었다.
지금은 그저 이 전투의 선율에 몸을 담굴 때였다. 선율이라, 꽤 괜찮은 표현 아닌가.
만족스럽게 미소 지은 에반이 그대로 걸음을 내딛자,
땅바닥에 주저앉은 한 흑마법사가 땅에 손을 짚은 채 다급히 뒤를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나, 나는 아무것도 안했소!”
“...그래, 그렇겠지.”
흑마법사 리차드의 심장이 미칠 듯이 뛰기 시작했다. 얼굴은 새하얗게 질리고,
긴장한 탓에 눈에 있는 모든 실핏줄이 터져 눈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조용히 대답하는 에반의 표정은 그리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검을 들고 있었고,
그 금색의 눈은 자신을 응시한 채. 그렇게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처음에 서른 명이서 달려들 때만 하더라도 질 것이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유명한 기사라 한들 어찌 홀로 서른 명을 상대한단 말인가.
의식을 실패하게 만들고 말로릭마저 죽였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저 과장된 소문일 거라 생각했다.
일당백이란 말은, 정말 비유적인 표현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서른 명에 달하는 이들을 순식간에 베어낸 그를 보자 도무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뒷걸음질 치며, 죽어 쓰러진 이들의 시체를 밟아가며 두 손을 모은 채 비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땅에 머리를 박아 머리에 피가 흘렀다. 바닥에 있는 돌이 이마를 찢어,
흥건하게 흐른 피가 거뭇한 땅을 붉게 적시고 있었다.
“제, 제발 살려주십쇼. 제발. 저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제압 커억...!”
목이 꿰뚫린 리차드가 내뱉은 것은 참으로 구차한 단말마였다.
에반은, 애초에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앞에 흑마법사가 있다면 자신은 검을 휘둘러야 했다.
이름 모를 흑마법사가 쓰러지는 것을 힐끔 바라본 에반은 이내 시선을 돌렸다.
아직 흑마법사는 한참 남아있었고, 고작 이런 잔챙이에 신경 쓸 시간 따위는 없었기에.
에반은 다시 저 멀리 솟아오른 건물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주변에 보이는 풍경은 공작령이라 보기 힘들었다. 몰래 마법사들로 하여금 영지민들을 대피시키긴 했지만,
메테오의 여파는 공작저가 있는 이 시가지 전체를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기에 충분할 따름이었다.
실로 가공할만한 위력, 그로 인해 많은 흑마법사들이 죽긴 했지만...가장 중요한 녀석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에반은 지난 번 로만 공작과 눈이 마주쳤을 때를 떠올렸다.
그가 자신을 어떤 생각과 함께 쳐다본 것일지는 몰라도, 그가 지닌 힘은 시선만으로도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여태껏 만난 이들과는 궤가 다르다.
자신이 방금 죽인 흑마법사들과 차이가 나는 것처럼, 단순히 시선만으로도 몸을 저릿하게 만든 그의 힘이란.
테오라드 경이 지닌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패도적이다. 자신의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분쇄하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지녔으며, 또한 어둡고 탁한 힘이었다.
...승산이 얼마나 될까. 마스터가 각자 영역을 지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테오라드 경의 영역과는 달리 로만 공작의 영역은 여태껏 그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어떻게 상대해야할지도, 파훼법도 알지 못하는 이 상태에서 승산을 얼마나 점쳐야 하는 것일까.
자신이 마스터였다면 조금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잠시 자조 섞인 미소를 지은 에반이 저 멀리,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푸른빛이 일렁이는 것을 보곤 입을 작게 벌렸다.
하늘에 커튼처럼 걸린 푸른빛이 부드럽게 물결치고 있었다.
별보다도 찬란한, 은하수보다 부드러운 그 빛무리에 흑마법사들이 스러지고 있었다.
아마도 테오라드 경의 영역, 분명 꽤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도 어깨가 들썩거릴 만큼이나 거대한 힘이었다.
아무래도 처음에 힘을 꽤 쏟으려 하는 것이 아닐까.
에반은 그 모습을 보며 살짝 고개를 까딱였다. 조금 불안한 마음이 걷어지는 듯 했다.
공작저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걸 떠올리며,
에반은 저 멀리서 숨을 헐떡이는 황태자를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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