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Diminuendo (2)
* * *
하늘을 그리워하던 물들이 새하얀 운집을 생성할 때면,
사람들은 하늘에 떠오른 양떼와도 같은 것을 구름이라 불렀다.
오늘은 늑대라도 나타난 것일까.
날카로운 바람과 함께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조용히 내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올렸다.
추적이는 빗줄기가 분위기를 어둡게 만들었다.
어쩌면, 분위기가 어두워지는 것은 예고된 일일지도 몰랐다.
이제는 바로 내일이 되어버린 로만 토벌전에, 공작저에는 묘한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으니까.
로페나가 나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이전처럼 이상한 생각을 하며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눈에 걱정만을 가득 담은 터라 나 또한 괜스레 기분이 이상해질 따름이었다.
솔직히 말할까. 이상하게 조금도 긴장이 되지 않았다.
내일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도 늘 보던 풍경이 펼쳐질 것 같은 기분이라 해야 할까.
편안한 몸, 편안한 마음. 공기를 적시는 비를 멍하니 보면서, 따끈한 차에서 올라오는 수증기에 입술을 적셨다.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하기도 했다.
내일이 지나면 무슨 광경이 펼쳐있을 지는 몰라도, 조금은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내일 모레가 이렇게 어렵게 다가오는 단어인지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것 같았다.
사실 여태껏 흑마법사와 싸우며 크게 두려워하거나 떨어본 적은 없었는데...
내일 있을 싸움은 그런 궤를 살짝 벗어난 느낌이었다.
흑마법으로 강화된 마스터라.
테오라드경은 필패다. 같은 마스터라한들, 흑마법으로 강화된 그와 맞서 싸워 이길 가능성은 전무했다.
그나마 용혈을 각성한 내게 가능성이 있지만, 그래도 단독으로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싸운다면 황태자, 나, 테오라드 경 이렇게 셋이서 같이 싸워야하지 않을까.
그렇게 싸워도 이길 가능성을 높게 점치기는 힘들었다.
만약 말로릭 같은 게 하나라도 더 있으면, 누가 순식간에 죽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지 않은가.
투둑
떨어지는 빗물이 창문에 부딪혀 소리를 낸다.
적막이 흐르는 방안의 침묵을 깨는 그 소리에 아이린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어쩐지, 오늘은 내게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아이린이었다.
...아이린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도 알고 있고, 묘하게 내게 의존하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런 내가 항상 다쳐서 오는 것도, 이번에는 다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걸 걱정하는 것도 이해했다.
다만, 이건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먼저 치지 않으면 당하는 건 이쪽이 아니던가.
그녀의 호위 기사임에도, 나는 내일 그녀의 호위로 있을 수 없었다.
툭툭, 탁자를 작게 두드리자 아이린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무언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입술이 살짝 벌어지다가도,
다시 다물리며 우물거리는 모습에 작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에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평소와 다를 바가 없진 않았다. 아이린에게는 로만 공작이 마스터인 것을 알리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로만 공작과 마주할 상황이 온다면 무조건 셋이서 맞서기로 약속을 해둔 상태였다.
테오라드 경 또한 로만 공작이 마스터인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만약에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아니, 이런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생각해보면 긴장을 안 하는 게 아니라 애써 무시하고 있던 것이었다.
찻잔을 들고 있는 손이 잘게 떨렸다. 로페나가 나를 보며 한숨을 내쉰 이유는, 아마도 이런 이유겠지.
“이번에 로만 토벌이 끝나면, 꽤 바빠질 것 같습니다. 5대 가문이 4대 가문으로 줄어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말을 꺼내자, 잠시 나를 응시하던 아이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만 토벌, 사실 흑마법사 토벌이라는 명목으로 단순하게 끝날 일은 아니었다.
제국의 주축이었던 5대 가문 중 하나의 자리가 천 년 만에 비는 것이었고, 제국의 전력 중 3할 이상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물론 흑마법사와 연관되지 않은 기사들은 황실 기사단이나 유리스로 편입되겠지만,
황제의 입장에선 유리스가 5대 가문에서도 유독 성장하는 것을 그리 원치 않으리라.
황태자의 말로는, 이번에 아제스트 경이 우리를 도울 거라 했다.
마법사의 특성상 대인전보다는 약한 흑마법사들을 사살하고 공간을 장악하는 위주로 하겠지만.
확실히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꽤 든든한 지원이지 않은가.
8서클 대마법사인 그가 우리를 돕는다면 생각보다 체력 소모를 훨씬 줄일 수 있을 터였다.
어쩌면 다치는 일이 없을 수도 있고. 허나 그럴 가능성은 꽤 낮을 터였다.
다치는 것은 상정하는 것이 좋으리라.
“...아마도, 이번 일이 끝나면 황궁에 들릴 일이 많아질 거예요. 그대는 수훈자로 참석해야 할 거고, 우리는 이전과 다른 위상을 가지게 되겠죠.”
그렇게 말한 아이린은, 이윽고 옅게 숨을 내뱉으며 다시금 입술을 달싹였다.
“그대가 돌아온다면, 말이죠.”
침묵이 흐른다. 그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은 나의,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는 아이린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단지 돌아온다는 네 마디 음절의 단어를 내뱉으면 되는 것을, 그게 무얼 그리 어려운 거냐 생각했었는데.
막상 이런 상황이 되니 쉽사리 말할 수가 없었다.
“...무사히 돌아온다고는 못 할 것 같습니다.”
지난 번, 황태자의 탄신연에서도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말한다면 분명 거짓말이었다.
무사히 돌아올 확률? 없지는 않겠으나, 불가능에 가까웠다. 말로릭과 싸웠을 때 만큼 다칠 것이 분명했다.
그 때처럼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차마 죽을 수도 있다는 말 만큼은 할 수가 없어서.
한 차례 쓰게 웃으며, 아이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어쩐지 턱밑까지 가득 찬 숨에 그저 입을 다물 뿐이었다.
아이린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늘 반짝였던 푸른 눈동자에 슬픔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나에 대한 걱정, 어쩌면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해했다.
나 또한 그랬고, 그녀의 입장이라면 분명 그랬을 테니까.
“...가지 않으면, 안 되겠죠.”
“네.”
당신을 위해서 라고 답한다면, 혹여 아이린이 이상하게 받아들일까 쉬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혹시 자신을 탓할까봐, 만약에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스스로를 탓할까봐. 옅게 웃었다.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웃으면서 아이린과 눈을 마주쳤다.
내가 떨리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아이린이 더욱 걱정하리라.
“괜찮을 겁니다. 항상 그렇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분위기가 축 처질 필요는 없는데,
새벽이면 시작되는 토벌에 앞서 이런 분위기에 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조금, 아무렇지 않게 평소 같은 분위기를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런 분위기면 꼭 내가 죽으러 가는 것 같지 않은가.
잠시 뺨을 긁적이며 바닥을 쳐다보다가, 같이 있는 로페나의 존재를 깨닫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로페나, 잠깐 나가있어.”
“네? 저요?”
“그래, 아가씨하고 할 말이 있으니까.”
우리 관계를 알고 있는 로페나라면 이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잘 알 거라 생각했고,
로페나는 그런 날 물끄러미 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문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가기 직전 덧붙이길,
“오늘은 주변에 사람 많이 없을 거예요. 음...그렇다구요.”
아무래도 우리 관계에 대해 꽤나 많이 오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나중에 풀면 될 것이다. 내일, 내일 모레, 나중에, 미래에. 얼마나 좋은 단어란 말인가.
내게 남은 미약한 불안감을 털어내며, 나는 아이린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고개를 숙인 채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하는 모습이 처량해보였다.
어쩌면, 그녀의 뒤에 있는 창밖으로 비가 내리는 것이 보여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가씨.”
욕심일 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게 웃어주었으면 했다.
이렇게 울적한 분위기에서, 우울한 표정을 지은 아이린을 보고 떠났다간 꽤 찝찝하지 않겠는가.
부드럽게 아이린을 불렀지만, 아이린은 내가 부름에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여전히 어딘가를 응시하면서, 꼭 내게 어떤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입을 열지 않을 뿐이었다.
“아가씨.”
그녀가 내게 바라는 말은 아마도 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안타깝지만, 그렇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까지 하고 싶진 않았건만,
부드럽게 휘었던 입꼬리가 수평을 그렸다. 아이린을 바라보던 눈에 차가움이 깃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고집을 부린다 한들,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나도 아이린도, 이제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렇게 내게 가지 말라며 고집을 부릴 것이 아니라,
그저 조심히 다녀오라는 한 마디를 나는 더 원하고 있었다.
“아이린.”
책상에 놓인 아이린의 손을 붙잡았다.
조금은 거칠게, 다른 손으로 아이린의 어깨를 움켜쥐자, 그제야 고개를 돌린 아이린이 나를 째려보았다.
차가웠다. 어쩌면 그 눈에 한기가 깃들어 얼어붙었다는 생각이 들 만큼이나.
허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대로 시선을 피해 이대로 대화를 파한다면, 무엇 하나 변하는 것이 없을 테니까.
“...그거 알아요? 에반이 제게 하는 행동이 꽤나 건방지다는 걸요.”
“압니다.”
“나는 유리스의 소가주고, 그대는 단지 호위 기사일 뿐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내 어깨를 붙잡고 있는 것이 옳은 행동이라 생각하나요?”
붙잡고 있는 아이린이 손목을 비틀었다. 내가 잡고 있는 것을 놓으려는 듯,
꽤 힘을 준 그녀가 나를 쏘아보았지만. 나는 조용히 아이린의 어깨를 쥔 채 입을 열었다.
“옳은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
아이린이 그런 나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더니, 이윽고 내 손을 탁 쳐내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대가 흑마법사를 몇 명 처리하든 결국 내 호위 기사일 뿐이에요.이렇게 행동한다고, 고작 입 몇 번 맞추었다고 그대가 내게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해도...되는 게 아니에요. 에반, 그대가 말했죠. 항상 다쳐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그런데 항상!”
탁자를 내리친 아이린이 입술을 짓씹었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고,
아이린은 자기 어깨에 있는 내 손마저 쳐낸 뒤 말을 이어갔다.
“항상, 다쳐서 오잖아요. 그 흑마법사가 도대체 뭔데요? 그런 거 얼마든지 있어도 상관없잖아요. 나는, 상관없어요. 그런 흑마법사인지 절멸인지 이 제국에 몇 명이 있든 상관없어요 난. 에반, 제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나요? 나는 그런 흑마법사한테 제국이 망하든 말든 아무 상관없단 말이에요. 이제는....그래요, 이제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린은, 이윽고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흐느꼈다.
“그대가...더 소중하단 말이에요.
아이린의 어깨가 떨렸다. 손으로 가렸음에도, 손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책을 적시고, 바닥을 적시고. 분명 비는 밖에 내리고 있는데도, 그녀에게 비가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거뭇한 구름이 주변을 가득 메워, 그 한 가운데 비에 젖은 채 서있는 것만 같아서.
나는 조용히 아이린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괜찮을 거라고? 이번에도 이전처럼 모든 것이 잘 해결 될 거라고?
아이린과 나 사이에는, 미묘하게 마음이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 또한 느끼는 것이리라. 이번 토벌은, 이전과는 한참 다르다는 것을.
아이린의 얼굴은 손으로 가려져 있었다.
눈물로 젖은 손으로,그렇게 얼굴을 닦는 아이린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 치워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는 건 그리 어울리시지 않는다고.”
비록 내가 그녀를 울린 꼴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이렇게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붉게 물든 눈 아래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눈물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닦아내며, 안심하라는 듯 옅게 웃어 보였다.
“저는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이번에 테오라드 경도 함께고, 아제스트 경도 함께할 겁니다. 예전에 다쳤던 것은 저 홀로 나섰기에 그런 것이 아닙니까. 저는, 아가씨가 가장 걱정이 됩니다.”
아직 울음을 멈추지 못한 아이린은 대답할 수 없으니, 나는 눈물을 마저 닦아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혹시 제가 곁에 없는 것이 두려운 거라면,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이린의 목에 걸린 파란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사실 아이린에게 알리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는 일부러 마법으로 단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추적 마법이 걸려 있었다.
만약 아이린이 사라진다면, 그녀의 위치를 내가 알아볼 수 있도록.
만약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터였다.
혹시 아이린이 그런 걸 걱정하고 있다면, 그녀가 안심할 수 있도록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런 상황이 올 때면, 누구보다도 먼저 제가 아가씨에게 향할 테니까요. 아시지 않습니까. 본 드래곤도 제게 죽었습니다. 용도 제게 죽었는데, 고작해야 검 좀 잘 쓴다는 기사에게 크게 다치기나 하겠습니까?”
농담조로 툭, 아무렇지 않게 툭.
천천히 풀려가는 아이린의 표정을 바라보면서 나는 입을 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고백한다면, 글쎄. 다 끝나고 하더라도 늦지 않을 터였다.
사실 고백에 관해서는 꽤 많이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분위기에서 하면 좋을지, 사실 로만에 대한 모든 문제가 끝난 뒤의 일이겠지만.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하며 미래를 그리곤 했다.
“당신의 기사는,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눈이 오는 날에, 나는 아이린에게 약속했다. 늘 당신의 호위 기사로 남아 있겠다고.
그 약속을 어기고 싶지 않았다. 겨울이었고, 지금은 여름이었다.
아직 아이린과 함께 할 겨울은 수십 번이고 남아있지 않던가. 아까보다는 조금 후련하게 웃을 수 있었다.
이제는 울음을 그친 채 붉어진 눈으로 응시하는 아이린을 끌어안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니 아이린,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웃어 주시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떠나는 제가 당신이 우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기를 바라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사과의 의미로, 키스라도 해주시던가요.”
살짝 입술을 두드리자, 아이린이 웃음을 터트리며 내 가슴팍을 손으로 짚었다.
지금 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으니, 이내 옅게 웃으며 살짝 몸을 떨어트리자.
그런 나를 아이린이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농담이었습니다."
"나는 진심으로...받아들였는데요."
“지금 했다간, 아마 토벌에 늦을 지도 모릅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래 할 생각이었길래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평생 잊지 못할 만큼 길게요. 어쩌면...호흡이 멎을 만큼이나.”
그렇게 하면 아이린이 내게 인사를 해주지 못할 만큼 정신을 못 차리겠지만...
뭐, 지금은 나중에 즐거움으로 남겨둘 생각이었다.
멋지게 돌아와서, 그런 것을 하는 것이 조금 더 의미 있지 않겠는가.
내게 천천히 떨어진 아이린이 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과는 달리 조금은 편해진 얼굴이 보여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꿍한 채로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런 아이린의 손을 살짝 잡아당겨 부드럽게 매만지다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어둠이 가라앉은 밖에선 더 이상 비가 내리지 않았다.
맑게 갠 하늘엔 구름 하나 없었고, 초승달보다도 가늘게 뜬 달이 희미하게 빛을 낼 따름이었다.
새벽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지금은 가슴이 그리 답답하지 않았다.
저 맑게 갠 하늘처럼, 오늘 일도 잘 되지 않겠는가.
새벽이 다가온다.
어쩌면, 모든 것이 뒤바뀔 수도 있는 새벽이.
불어온 바람을 타고 생겨난 구름이 별을 가려 잠시 어두워졌지만,
그럼에도 별은 그 사이에서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 전부 잘 될 터였다.
어둡게 물든 이 하늘에서도, 저 찬연하게 빛나는 별처럼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으리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