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오랜 날, 오랜 밤 (2)
* * *
우리 아가씨가 참 많이 달라진 듯 했다.
예전 같았으면 눈만 마주쳐도 얼굴을 붉혔는데,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솔직히 많이 당황했다. 두 번째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질 지도 몰랐고,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빨랐으니까. 처음에도 솔직히 내가 주도했다고 보긴 힘들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그녀에게 당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지금 내 심정을 설명하자면.
...솔직히 많이 당황했다. 태어나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마 처음이란 생각이 들 만큼이나.
내가 아이린에게 당할 줄이야. 언제까지 내게 놀림만 당할 거라 생각했던 아이린의 변화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
얼굴을 쓸어내린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아직까지 생생한 감촉에 얼굴은 여전히 뜨거울 따름이었다.
눈을 마주치기가 쉽지 않았다. 평소에 그녀를 놀리던 업보를 이제야 돌려받은 것일까.
그대로 한숨을 내뱉으며, 다시 고개를 들어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당황스럽군요.”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노리신 겁니까?"
"다음에도 또 해줄까요?"
옅게 미소 짓는 모습에 헛웃음을 흘린다. 아까까지만 해도 싸늘한 시선이었건만,
완전히 다른 사람을 보는 듯 변해버린 모습이 퍽 자연스러웠다.
아마도 내가 당황하는 것을 노리고 있던 것일까. 눈에서 언뜻 비치는 기쁨을 그녀는 감출 노력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의기양양한 아이린의 모습이라, 이런 것도 몇 번 볼 일이 없을테니...한 번 즈음은 그냥 넘어가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아이린의 행동에 꽤 당황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런 일로 계속 부끄러워 할 생각은 없었다.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감정을 추스린 뒤, 다시 그녀의 책상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 책상 위에 놓인 익숙한 문장이었다.
카심 백작령에서 보았던 문장. 망치가 모루를 때리는 그 문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아이린이 고개를 까딱이며 대꾸했다.
“카심 백작에게 편지가 왔어요. 아티팩트가 완성되었다네요.”
“이제 딱 한 달이 되었으니, 시간은 정확히 맞췄군요.”
“...그런데, 사용법은 따로 적혀 있지 않아요. 아티팩트가 동봉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아무래도, 직접 가서 받아와야 할 것 같아요.”
“그러십니까.”
같이 가자는 말이었기에,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제는 이 여유롭던 일상도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로만, 로만이라. 쉽지는 않을 터였다.
어쩌면 여태껏 싸우던 것 중에 가장 크게 다칠 지도 모르지.
다만, 아이린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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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카심 백작령까지 가는데 구태여 마차를 타고 갈 필요까진 없었다.
카심 백작이 황도에 와있기도 했고, 황도라면 게이트를 이용하면 됐으니까.
황태자는 내게 꽤나 우호적이라, 나라면 거리낌 없이 게이트 이용을 허가해주었다.
다시 만난 카심 백작은 꽤나 핼쑥해 보였다. 도대체 한 달 동안 무슨 일이 있던 건지,
그 자그마한 체구에 가득 차있던 근육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그는 빈약한 노움처럼도 보였다.
“후우, 아무래도 이런 모습을 보여 드려서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 친구는 저보고 노움 같다고 얘기하더군요. 빌어먹을.”
“...고생이 많네요.”
남에겐 쉽사리 걱정하는 말을 하지 않는 아이린마저 그리 말했을 정도니,
그의 몰골은 누가 보더라도 꽤나 심각한 것이 아닐까.
한참동안 노움에 대해 비판을 쏟아내던 그는, 이내 헐떡이던 숨을 바로잡으며 자세를 고쳤다.
“음, 아무래도 노움을 워낙 싫어하는지라.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노움은...어쨌든 골칫덩어리이긴 하니까요.”
드워프와 노움 간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땅 속에 굴을 파서 사는 지하 종족인 드워프, 그리고 그 땅의 기운을 받아 탄생한 노움.
대장장이를 주업으로 삼는 드워프와 기계공학을 주업으로 삼는 노움이 사이가 좋은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그렇게 카심 백작의 푸념이 멈추고, 이윽고 그는 품속에서 우리가 기다리던 아티팩트를 꺼내들었다.
무언가 굉장히 화려할 거라 생각했건만, 의외로 그가 꺼낸 것은 수수한 손거울이었다.
“손거울?”
아이린이 묻자, 카심 백작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거울 맞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누구나 하나 즈음 가지고 다닐 만한 그런 거울이죠.”
“겉으로 보기에 그렇다는 건, 이게 아티팩트라는 소리군요.”
“오로지 흑마법의 기운을 지닌 자만을 분간할 수 있는 아티팩트입니다.”
흑마법의 기운을 지닌 자만을 분간할 수 있는 것이라,
그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 거리다가. 이윽고 떠오른 생각에 입꼬리를 비틀었다.
카심 백작이 아니었다면 그런 점을 이용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흑마법사들은 하나 같이 그림자나 어둠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빛을 차단하고, 그렇기에 쉽사리 그들의 모습을 포착하기가 힘들죠. 마나를 제대로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들을 육안으로 분간하는 것조차 꽤나 힘든 일일겁니다.”
“확실히.”
내가 중얼거리자, 고개를 끄덕인 카심 백작이 말을 이어갔다.
그의 말대로, 흑마법사의 특성은 분명 어둠이었다. 빛과 상극,
내가 다루는 마나와 상극인 것처럼 흑마법은 빛과 완전히 대척점에 서있는 마법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그들은 빛의 혜택을 누릴 수 없다는 말이었다.
“거울이란 빛으로 반사된 형상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도구입니다. 그러니, 빛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흑마법사들은 거울에 제 모습을 볼 수 없는 거죠.”
“...하지만, 그런 거라면 흑마법사들이 이렇게 활개를 칠 리가 없지 않나요?”
그 말이 옳았으나, 흑마법사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 또한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지 않는 것은 잘 알고 있었고,
아마도 저 아티팩트는...흑마법사들이 평소에 자신들에게 걸고 있는 마법을 파훼하는 것이리라.
“흑마법사들의 모습은 거울에도 잘 비칩니다. 물론 그들이 걸고 있는 마법 덕분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모습이 비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죠.”
“...물.”
물에는 비치지 않는 것을 내가 떠올리자, 카심 백작이 거울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손으로 건드릴 때마다 물이 찰랑거리듯 파문을 일으키는 거울,
이런 것을 기술로 재현할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건만.
아무래도 드워프에서 야장이라는 칭호는 내가 상상하던 것보다 더욱 위대한 것일지도 몰랐다.
“휴대도 가능합니다. 단순히 여기에 비추기만 한다면, 그 사람이 흑마법과 관련된 사람인지 알 수 있지요. 평소에는 얼어 있지만, 열기를 받으면 녹아 제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럼 이걸 증거로 이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거울에 비친 흑마법사는 스스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모습을 담은 채 지니고 있다면, 얼어붙은 거울 속에 그대로 모습이 남아 있겠죠.”
품속에 넣고 있으면 자연스레 체온에 녹지 않을까.
손거울을 자연스럽게 꺼내 그를 비출 상황은 조금 생각해봐야겠지만,
이제 오랜 숙원이 이루어질 날이 머지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만, 그와 관련된 사람은 여태껏 아델 한 사람과 마주쳤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처음 볼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서로 싸우게 될 사이가 될 줄은 몰랐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던 혐오감은 아마 그가 흑마법사였기 때문일까.
아마도 이번에 로만 토벌을 시작하게 되면 그와 분명 검을 맞대게 될 터였다.
원작에선 로만을 토벌하는 일 따위 존재하지 않았건만,
도대체 아이린이 죽은 뒤에 원작은 어떻게 흘러간 것일까.
그 뒤의 내용은 나도 알지 못했다. 아이린이 죽는 부분까지만 읽고 그만두었으니까.
여자주인공이야 황태자와 잘 살았겠지만, 과연 절멸을 잘 처리했을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일었다.
만약 로만이 소설과 다르지 않다면, 아이린이 죽은 뒤에도 로만은 흑마법사와 내통했다는 소리가 아니던가.
일단 지금에 집중하자. 그런 생각을 하며 아이린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를 바라본 카심 백작이 헛기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호위 기사와 할 말이 있는데, 허락해주실 수 있습니까? 프리드와 관련된 일인지라, 그와 단둘이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난데없이 프리드라니, 허나 그의 눈빛이 꽤나 진지해서. 나는 아이린을 바라보며 옅게 미소 지어보였다.
“잠시면 됩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알았어요. 근처에 있을 테니, 얘기가 끝나면 찾아오도록 해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지만, 그녀도 어쩔 수 없는지 조용히 물러났다.
허나 내 집중은 온전히 카심 백작이 내뱉은 말에 쏠려 있었다.
프리드, 최근 들어 내 신경을 묘하게 건드리는 단어이지 않던가.
지난번 흑마법사 토벌에서 베르만이 떨어트렸던 인장은, 분명 프리드의 인장이었다.
내가 전에 받았던 편지에 찍힌 인장과 같으니 확실하겠지.
그리고 그 편지의 내용 또한 확인해보았으나...편지에서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뿐이었다.
그 편지 속에 새겨져 있는 단어가 용언이라는 것.
왜 내 안부를 묻는 편지 사이에 용언이 섞여있는 것일까.
여러 의문이 떠올랐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로만이었다.
다만, 로만을 처리한 뒤에는 아마 프리드에 대해 알아볼 필요는 충분하리라.
아이린이 사라지고, 적막이 내려앉은 가운데 카심 백작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기라도 하듯, 반짝이는 눈동자가 가늘게 휘었다.
“용혈을 각성했다더군.”
“...그건 또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내가 그 사실을 알린 것은 기껏해야 아제스트 뿐인데, 어찌 그가 그런 것을 알고 있을까.
내가 그를 쏘아보자, 이내 손사래를 친 카심 백작이 입을 열었다.
“내가 뒷조사를 할 사람으로 보이는가? 그저 아제스트 경에게 들었을 뿐이네. 자네에게 용혈에 대해 처음 알려준 것은 나이니, 어쩌다보니 그에게 듣게 되었지. 아티팩트를 만드는 데에 큰 도움을 받았으니까 말이야.”
“아제스트 경이 말입니까?”
그가 아티팩트 제작을 도울 줄은 몰랐는데. 하기야, 이 제국에서 가장 마법에 조예가 깊은 것이 그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흑마법사를 증오하는 것도 있고.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카심 백작이 껄껄 대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이걸 사용하게 된다면...그 다음은 로만과 전면전이겠군. 준비는 하고 있나?”
“테오라드 경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로만 공작과 싸우게 된다면...적어도 버틸 수는 있어야 하니까요.”
“꽤나 힘들겠군. 황실 기사단이 도움을 준다고는 하지만, 흑마법사는 단지 기사의 수준만으로 싸움을 판가름할 수 없을 테니 말이야.”
그 부분은 나 또한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흑마법사는 단순히 숫자가 많다고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흑마법사가 제 아무리 한 명일지라도, 어중간한 실력자들이 수만 믿고 덤볐다간 그대로 조종당하기 딱 좋았으니까.
내가 말로릭 토벌전에서 많은 수를 상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직접 말하긴 부끄럽지만 그들 모두 나 홀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거기서 유리스의 기사들을 데리고 갔다면,
오히려 역으로 조종당하는 기사들까지 합세하여 역으로 내가 위험했겠지.
용혈을 거기서 각성했더라도 지금 이렇게 멀쩡히 있진 못했을 터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로만 토벌전은 여러 위험 요소가 즐비했다.
로만의 흑마법사가 얼마나 존재하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들 중 몇 명이 섞여있다면 모를까,
만약 로만 전부가 흑마법사라면...아마도 말로릭 토벌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힘든 싸움이 될 수도 있었다.
어쩌면 로만가에 소속된 모든 가신들이 흑마법사일 수도 있고.
만약 그렇다면 테오라드 경이 나선다는 가정 하에도 승산을 잡기가 힘들었다.
내가 마스터였다면 조금 편했겠지만, 아쉽게도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았으니까.
“황태자도 고민이 많아 보이더군. 로만을 토벌한다는 것은 단순히 흑마법사를 토벌한다고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니까. 제국을 지키는 3개의 기사단 중 하나를 제 손으로 적출해야 하니, 황제도 골머리를 썩이고 있고.”
“이해합니다. 로만은 아무래도 5대 가문의 한 축이자 시조의 혈족이니까요.”
“그리고, 설령 황실의 힘을 빌린다한들 토벌전이 성공할 가능성이 낮은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지.”
가능성이 낮다. 그 말엔 부정할 수 없었다. 허나 내가 신경 쓰이는 점은 카심 백작의 말투였다.
단지 가능성이 낮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닌, 전혀 가망성이 없다는 듯 말하는 것이 꽤나 거슬리지 않은가.
마치 내게 경고하는 것처럼,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 눈빛을 마주했다.
“걸리는 것이 있기라도 한 겁니까?”
“...테오라드 경이 흑마법사 토벌 전에서 힘을 쓰긴 어려울 걸세.”
“그럴 리가요. 그는 마스터가 아닙니까.”
“자네라면 모를까, 일반적인 마스터는 흑마법사에게 힘을 쓰기 힘들지. 그 흑마법사가 마스터라면 더더욱.”
순간 떠오르는 이름은 로만 공작이었다.
흑마법사이면서 동시에 마스터에 다다른 자라면, 역시 그 말고는 가능성이 없었으니까.
내가 눈을 크게 뜨자, 눈살을 찌푸린 그가 입을 열었다.
“이전에, 로만 공작과 만난 적이 있었네. 로만에 대한 얘기를 듣기 전이었지.”
“로만 공작과 말입니까?”
“기술 계약이나 그런 게 아닌, 그저 그의 개인적인 부탁이었네. 검을 한 자루 만들어 달라. 지금으로부터 4년 전 즈음의 일이었지.”
카심 백작의 회상을 들을 수록 내 얼굴의 수심은 깊어질 따름이었다.
그가 가진 애검 '발뭉'과 격이 다른 검이라니.
구태여 기존의 검보다 더욱 단단한 검을 찾는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기존의 경지를 뛰어 넘었다는 것.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마스터에 근접한 것과 마스터인 것은 그 차원이 달랐기에.
여태껏 생각했던 그의 수준에 대해 아예 다시 상정해야 했다.
허나 그렇다한들 토벌을 하지 않는다면.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었다. 이대로 로만을 냅뒀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지금이 아니라면, 어쩌면 다시는 로만을 건드릴 수 없지 않을까.
"...저밖에 없다는 말이군요."
마스터인 테오라드 경조차 흑마법사를 상대할 때 애로사항을 가진다.
그런 그가 마스터를 맞상대할 수 있을까. 아니, 그가 로만 공작에게 압도당할 확률이 더욱 컸다.
로만 공작과의 승산만을 따진다면, 오히려 내가 더 클 터.
"아주 위험하네. 어쩌면 황실 기사단 전부가 나서도 토벌에 실패할 지도 모르네. 그럼에도 할 생각인가?"
"그 생각에 변함은 없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답했다. 흑마법사 토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아이린이 악녀로써 처형당하는 미래, 이제 더 이상 그릴 수 없을 만큼이나 아이린은 변했다.
설령 원작 주인공이 다시 나타난다한들 그녀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으리라.
허나 절멸이란 존재는 단지 관망할 수 없는 존재였다.
내게 검이 들린 이상, 내 검은 흑마법사를 베어야만 했다.
공작에게 저주를 건 이유, 그리고 계속해서 유리스에 흑마법사가 나타나는 이유.
그리고, 애초에 아이린이 처형당한 이유 또한 흑마법사와 얽혀 반역을 의심 받았기 때문이 아니던가.
절멸이란 존재가 아이린을 주시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진심인 것 같군. 자네가 모시는 공녀 때문인가?"
진심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애초에 나라는 존재부터가 그랬다.
에반 프리드라는 이름을 지닌 채 살아간 그 순간부터, 아이린을 살리겠다고 마음을 먹은 그 순간부터.
"아가씨의 호위 기사이지 않습니까."
그 말에 나를 멍하니 쳐다보던 카심 백작은, 이윽고 크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에 이채가 일고, 이내 나를 빤히 바라본 그가 입가를 매만지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자네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네."
방금 전까지 내게 경고를 보내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묘한 자신감까지 품은 그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갑자기 이렇게 태도가 달라진 이유가 무엇일까.
허나 이내 그가 품 속에서 꺼내든 무언가를 보곤, 그가 꺼낸 것에 작게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 * *